제주도를 뚜벅이로 여행할 때 편하게 여행지들을 다니는 방법 중 하나가 관광지 순환 노선인 810, 820번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각각 제주도 동부와 서부 중산간 지역의 관광지들과 오름들을 연결한다. 하지만 거창한 이름과는 다르게 이용객이 극도로 적어 도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기도 하다. 이 노선을 여러번 이용하는 동안 막차 시간에 환승 정류장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십수 명 탔던 걸 제외하면 이용객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거나 혼자서 버스를 전세 낸 것처럼 타고 다닌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동이 편리한 것은 기본이고, 차내가 쾌적하고 가이드가 장소에 대해 소개를 해 주기 때문에 일정에만 적합하다면 이용하기 쏠쏠한 노선이다. 세 오름을 다녀온 다음날, 동부를 도는 810번 노선을 타고 가 본 적 없는 장소들을 찾았다.
거문오름
첫 번째는 거문오름이다. 제주도의 오름은 당연하게도 거의 대부분 입장료가 없고 그냥 오를 수 있지만, 거문오름은 좀 특별하다. 숲이 우거져 검게 보여서 지금과 같은 이름이 붙여진 거문오름은 제주도의 오름 중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거문오름이 분화하면서 나온 용암이 북동쪽 해안가까지 흘러내려가며 화산 지형과 용암 동굴을 만들어냈는데, 그 지질학적 가치가 크다. 매년 국제트레킹대회도 열리는 오름이다. 거문오름은 세계자연유산센터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데, 810번 버스가 바로 앞에 정차해 접근성이 좋다. 거문오름을 등반하려면 예약을 해야 하는데, 당일에는 불가하며 탐방을 희망하는 전 달의 1일부터 바로 전날까지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해야 한다. 예약제인 만큼 가이드 투어로 진행된다.
센터에 들어가 방문증을 받고 잠깐 기다린 후에 탐방 시간에 맞춰 가이드를 따라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름의 시작은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빽빽한 숲길이다. 많은 사람이 찾는 만큼 흙 길이나 야자 매트가 아닌 데크길이 깔려져 걷기 편했다. 정상 인근 전망대에 오르자 깊고 넓은 분화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문오름은 말굽형 분석구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 안에 숲이 울창하고 또 다른 봉우리들이 솟아 있어 그동안 봤던 오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거문오름은 정상을 거쳐 돌아오는 길이 1.8km인 짧은 코스가 있고, 주변까지 탐방하는 5.5km와 10km 코스가 있다.
정상에서 내려온 이후엔 자유롭게 다니는 시간이 주어졌고, 반환점에서 다시 센터로 돌아가는 기본 경로로 걸었다. 초겨울 거문오름에는 아직 흐드러지게 억새가 피어 있어 발걸음이 자꾸 멈췄다. 탐방객들은 빈 공간에서 억새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센터로 돌아가는 길까지 억새는 거대한 군락으로 존재했다. 거문오름에서 이 정도로 풍성한 억새를 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억새철이면 항상 탐방객들로 붐비는 산굼부리나 새별오름보다 한적해 아름드리 핀 억새를 즐기기에 제격이었다.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 내부에는 전시실도 마련되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선인동 마을
다음으로 찾은 곳은 선인동 마을이다. 여행객들이 보통 찾는 장소는 아니지만, 노선에 떡하니 표기되어 있으니 호기심이 생겼다. 선흘리에 있는 선인동 마을은 제주도의 웬만한 작은 마을보다도 더 작게 느껴졌다. 버스에서 내리자 시골 규모에는 어울려 보이진 않는 거대한 카페가 눈 앞에 보였다. 오메기떡과 음료를 파는 곳이다. 오메기떡 한 개와 한라봉 음료 한 잔을 시켜 허기를 채우고 흐린내생태공원으로 향했다.
흐린내생태공원은 선인동 마을 안에 있는 작은 공원이다. 제주의 독특한 지형 형태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빌레(평평한 암반)이 있고, 습지도 형성되어 있는 공원은 어느 거대한 공원의 축소판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작았는데, 가볍게 산책하기에 좋았다. 근처에서 식사를 한다면 식후에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소화도 시킬 겸 제주의 정취를 즐기기에 적절해 보였다.
동백동산
하루종일 날이 짖궂더니 기어코 비가 한 차례 쏟아졌다. 서둘러 정자로 몸을 피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잠시 쉬었다. 다행히 비는 금방 그쳤다. 빗물에 촉촉히 젖은 숲에서만 느낄 수 있는 운치가 있다. 마침 다음으로 찾은 장소가 동백동산이었다.
선인동 마을과 같은 선흘리에 있는 동백동산은 말 그대로 동백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동백이 피는 한겨울에 찾는다면 빨갛게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겠지만, 그 때가 아니어도 탐방하고 산책하기에 손색이 없는 숲이다. 곶자왈은 용암이 쪼개지면서 형성된 지형이기 때문에 연못이 만들어지기 어려운데, 동백동산에는 용암이 식는 과정에서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판 형태로 남아 물이 고여 연못이 만들어진 독특한 지형이 있다. 또한 다양한 수생식물과 곤충, 양서류 등이 서식해 그 생태적 우수성을 인정받아 람사르 습지로 지정이 되었다. 동백동산은 동백동산 습지센터에서 시작해 숲길 3.5km를 걷고, 서쪽 입구로 나와 마을을 잠깐 거친 뒤 짧은 숲길을 걷고 센터로 돌아오는 총 길이 5km에 달하는 제법 긴 숲길이다. 동백동산은 정말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 곳이었다. 원시림을 보는 것 같은 숲의 풍경과 잡음 없이 깨끗하게 들려오는 새소리는 걷는 내내 편안함과 행복함을 선사해 주었다. 새소리가 점점 멀어질 땐 아쉬움도 점점 커졌다. 동백동산은 깊은 숲이다 보니, 4.3 당시 주민들이 피신해서 지내던 동굴도 남아 있다. 제주도의 많은 숲이 그렇듯이 동백동산도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곳이다.
숲을 음미하듯 천천히 걷다 보니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마지막 마을부터 이어지는 구간은 땅이 울퉁불퉁한 곶자왈이라도 다리와 허리에 무리가 갈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걸어 나왔다. 다행히 타려고 했던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 숲길은 마지막보단 초반에 이어지는 구간이 더 좋아서 아쉬움은 남지 않았다. 제주에 또 간다면, 다시 찾고 싶은 장소 중 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