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내용이 많이 길지만 꼭 끝까지 읽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이준효 원로목사의 월요 목양칼럼 ◇
주후 2022년 7월 11일
♧ 요단강과 성화의 관계 ♧
안방에서 텔레비젼을 시청하다가 아니면 영화를 관람하다가, 아니면 운전 중이나 길을 걷는 중에, 혹은 잠을 자든지 누구를 기다리든지 간에 순간순간, 문득문득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기도 하고 어떤 묘한 불안에 휩싸이게도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불쑥 고개를 내밀고 찾아 오는 전혀 반갑지 않은 손님, 바로 "죽음"이라는 불청객이다. 나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것으로만 여겨왔던 죽음, 나와는 전혀 상관 없을 것으로만 알고 천 년 혹은 만 년이나 살것처럼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직면하는 죽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찾아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죽음이다.
그러나 너나 나나 우리나 그 누구에게도 성역을 불허하며 말없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죽음이다. 어떤 나그네가 마음이 급한 나머지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오롯이 밤하늘의 별빛에 의존한 채 걷고 있었다. 인적이 없는 곳이라 가까운 마을이 눈에 들어오기를 기대하며 전혀 초행길임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주변을 조심스레 살펴보니 자신이 걷고 있는 길 양쪽이 낭떠러지로 여겨질 정도로 어둡고 깊었다. 마침 저 멀리 맞은 편에는 옹기종기 불빛들이 반딧불 모양을 하고 있어 이내 마을을 찾았음을 직감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고 약간의 긴장을 풀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돌뿌리에 신발이 걸리면서 한쪽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는데 필사적으로 손에 잡히는 뭔가를 움켜쥐었다. 다행히 튼튼한 나무 뿌리를 잡게된 것이다. 그 뿌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는 "사람 살려!"라고 목이 쉬도록 외치고 또 외치고 수없이 외쳤지만 인적 없는 밤중이라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얼마동안을 그렇게 소리쳤을까. 체중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디고 버틸 수 없는 두 팔은 맥없이 나무뿌리를 놓고 말았다. "아~! 이렇게 내가 죽는구나!",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천사가 손을 받쳐준 것 같은 느낌이 온 몸을 휘감았다. 아직 살아 있다는 느낌에 팔을 뻗혀 발밑을 드듬어 보니 그곳은 땅 바닥이었다.
이상해서 손을 위로 뻗어 더듬거려 보니 자신의 키 높이 부분에서 자신이 바둥바둥 매달려 "사람 살려!"라고 외쳤던 나무 뿌리가 잡히는게 아닌가! 어쩌면 이것이 우리 인생들의 형편이 아닌가 싶다. 세상은 죽음을 최악의 불행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금생에서 내생으로 가는 관문으로 이야기 한다.
물론 죽음은 하나님께 범죄한 인생에게 가해진 형벌로서 최악의 저주가 맞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언약이라는 복음을 주어 죽음 너머에 있는 영생을 소망하게 하셨다. 이 소망의 그림을 역사의 현장에 입체적으로 그려 준 것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 사건이다.
애굽은 세상을, 홍해는 세례를, 광야는 지상 교회와 성화 과정을, 요단강은 죽음과 성화의 완성을,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한다. 그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광야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애굽의 바로 편에서는 애굽인들에게 내린 열 가지 재앙 곧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었으나 이스라엘 편에서는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비롯된 큰 구원이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에게 있어 애굽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애굽과 광야를 비견했을 때, 애굽의 현실적 풍요가 척박한 광야의 현실보다 월등했지만, 애굽을 동경하여 돌아간다거나 광야에 머물며 애굽행의 기회를 선망한다면 그가 누구든 젖과 꿀이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광야를 극복하고 요단강을 건너는 자만이 가나안의 약속이 쟁취된다. 따라서 홍해를 건너는 것도 광야를 극복하는 것도 요단강을 건너는 것도 순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영도자 모세를 따라 나선 자들의 몫이다. 여기서 죽음을 상징한 요단강은 오롯이 성도들의 죽음을 상징하지 불신자들의 죽음은 해당되지 않는다.
불신자는 애굽에서 모세의 지도를 거부했고 홍해를 건너지 않았던 애굽인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신자들의 몫은 애굽 곧 세상 뿐이다. 이는 가나안을 향해 광야를 통과할 진군하는 이스라엘을 가능케 하신 것이 애굽에 내린 열 번째 재앙에서 구원의 길을 연 어린양의 희생과 피 때문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인이든 애굽인이든 반드시 믿고 순종했어야 구원 받을 수 있었던 복음이었다. 이 대목에서 세례 요한이 주목했던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진정한 세례 곧 성령의 세례 또한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의 부르심도 마찬가지다.
예표나 그림자나 모형은 딱 거기까지기에 불완전하다. 구약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예표론적 존재들 모두 불완전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를 예표했던 이스라엘도 불완전했다. 하나님 나라를 예표했던 모든 사건이나 존재들 모두 불완전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이나 오늘의 지상 교회는 성화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 1~2)이라고 했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의 신분 상에서의 성화(외적)를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라고 선언한 후 하나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부여받은 성도의 도덕적, 영적 변화에 대하여 "너희의 거룩함(성화)"에서 성화(내적)의 개념을 내포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울의 이 두 성화 개념에 다리를 놓았다. 이 모두 구원 서정의 진행형이다.
곧 이스라엘의 애굽 탈출을 성도라는 외적 신분과 관련하여 세상, 즉 죄악 세력으로부터의 분리 개념과 하나님께 대한 신령한 예배와 봉사에 합당하도록 준비시킴으로써(광야 생활) 거룩하게 하시는 내적 변화가 그것이다(히 2:11). 따라서 바울이나 히브리서 저자의 죽음은 성화의 끝이라는 점을 암시 한다.
요단강 역시 예표론적으로 불완전한 것이 사실이다. 요단강 도하 사건 이전의 족장들이나 모세와 아론 같은 직전의 신앙 세계의 선조들은 요단강 도하 사건과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건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구약 성도들이 메시아를 대망한 것처럼 약속의 가나안을 대망했다는 점을 꼭 기억하자.
그렇다. 오늘 그대나 우리 기독자들의 요단강은 바울이나 히브리 저자가 밝힌 거룩한 백성으로 성별된 신분적 변화 곧 성화의 이신칭의 개념과 그리스도를 본 받은 도덕적. 영적 변화의 내적 실제인 거룩하게 됨의 성화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을 때의 몫이다. 그러기에 성도의 죽음은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성화의 완성이요 거룩한 욕망(고후 5:8)이다.
덧붙여 '칭의 구원'이니 '성화 구원'이니 등 구원의 서정을 분리하는 개념은 성경에도 그 어떤 신학에도 없다. 구원의 서정을 정의할 때, 삼위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리스도의 구원 성취를 준거한 성령의 구원 적용 공작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선택) 된 자들을, 소명, 중생, 회개, 신앙,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의 아홉 단계의 공작으로 구원의 주제는 하나다.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성부가 성자에게 준 백성은 구원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요 6:39). 다만 성자의 대속 완성과 성령의 적용 사역이 역사의 현장에서 실현되되 구원받을 이방인의 수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다 돌아올 때까지(롬 11:25) 곧 역사적 종말의 때까지 복음을 통한 부르심이 지속되는 과정을 설명한 것 뿐이다.
왜들 믿음과 성화를 다른 구원으로 보려 할까? 바울이 이신칭의 교리를 체계화시킨 것은 당시 유대주의 자들이 율법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거세게 도전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변증하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임을 하박국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합 2:4) 천명한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여하심에 감동된 사도의 순종이었다.
이신칭의(以信稱義)는 구약에 나타나는 법궤를 덮은 속죄소(레16:2, 시은좌 혹은 은혜의 자리)의 비밀을 설명한 것이다. 법궤 안에 있는 두 돌판은 십계명으로 온 율법을 대표한다. 곧 율법 하에 있는 모든 인간은 정죄를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속죄소가 법궤를 덮어 정죄 받은 죄를 덮어 주었다. 여기서 속죄소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의 가리어짐을 입은 것이다(롬 4:7). 곧 성부께서는 속죄소 혹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의로 여겨 주신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아직도 앞으로도 여전히 죄인이다. 결코 의인일 수 없다. 그런데 속죄소가 예표했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조건 하나로 의인으로 불려 주신 것이다. 믿는가? 이제 논쟁은 그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