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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지난 '난카이 트로프 대지진' 이후 벌써 316년이 지났다는 '무서운 사실' / 9/18(월) / 현대 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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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30년 이내에 높은 확률로 발생이 예측되고 있는 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 과연 그 실태는 어떤 것일까. 그 거대한 재해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발생하고 어떤 피해를 가져올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 미래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방재·위기 관리 어드바이저 야마무라 타케히코 씨에게 해설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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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서기에 쓰여진 지진
과거를 되돌아보면 고사기와 함께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역사책인 '일본서기'에는 지진에 대한 기술이 여럿 보인다. 이들 기술 중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지진기술로 알려진 것은 일본서기 인교(允恭)천황 5년 7월 14일 항에 기록된 '5년 가을 7월 병자삭, 기축, 지진'. 서기로 고치면 416년 8월 23일이 된다. 당시에는 지진이라고 쓰고 나잇후루라고 읽었다. '나이다'는 대지를 나타내고 '흔들다' 즉 흔들리다의 의미로, 읽는 방법은 달라도 대지가 떨리는 지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인교(允恭)의 지진에 대해 규모나 피해 정도 등은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피해 상황을 기록한 것은 스이코(推古) 7년 4월 27일, 서기 599년 5월 28일에 일어난 야마토 지진. '건물이 모조리 무너져 사방에 영을 내리고 지진 위를 제사지낸다'고 적혀 있다. 당시 사람들은 지진을 신에 의해 야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단지 이 지진도 야마토의 나라에서 심대 피해가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어도, 그 이상 규모나 피해의 상세 기술은 없다.
◎ 하쿠호우(白鳳) 시대의 난카이 트로프 거대 지진
시대가 흘러 40대 천황인 텐무천황(재위:673년 3월~) 686년 10월 1일)의 시대가 되면 여러 나라에서 중앙으로 정보가 모이기 쉬워진다. 중앙집권·율령국가의 기초가 마련되어 각지에서 일어난 분쟁과 재해 등의 정보가 신속하게 야마토 조정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기(日本書記·고사기) 편찬에 착수한 것도 이 시대라고 한다.
일본 서기 텐무천황 13년 10월 14일에 하쿠호우 지진의 기술이 있다.
「壬辰(みずのえたつのひ)に、人定(いのとき)に逮(およ)んで、大きに地震(なゐ)ふる。国挙(こぞ)りて男女(おのこめのこ)叫び唱(よば)ひて不知東西(まど)ひぬ。則(すなわ)ち山崩れ河涌く。諸国(くにぐに)の郡(こおり)の官舎(つかさやかず)、及び百姓(おおみたから)の倉屋(くら)、寺塔(てら)神社(やしろ)、破壊(やぶ)れし類(たぐい)、勝(あげ)て数(かぞ)ふべからず。是に由(よ)りて、人民(おおみたから)及び六畜(むくさのけもの)、多(さは)に死傷(そこな)はる。時に伊予湯泉(いよのゆ)、没(うも)れて出でず。土左国の田菀(たはたけ)五十余万頃(いそうよろずあまりしろ)、没(うも)れて海と為(な)る。古老(おいひと)の曰(い)はく、『是(かく)の如(ごと)く地動(なゐふ)ること、未だ曾(むかし)より有らず』といふ」
이것이 상세하게 기록된 가장 오래된 대지진이라고 한다. 기록에 남을 난카이 트로프 지진으로 추정되는 하쿠호우(白鳳) 지진이다.
현대역으로 하면
「684년 10월 14일, 밤 10시경 대지진이 있었다. 온 나라의 모두가 고함을 지르며 도망쳤다. 산은 무너지고 강은 넘쳤다. 여러 나라 군의 관사와 주택, 창고, 사찰이 파괴된 것은 수없이 많았고 사람도 다수 사망해 가축 피해도 많았다. 이요(에히메현)의 도고온천의 물이 나오지 않게 되어 도사노쿠니에서는 논밭 50여만경(약 천정보, 약 12평방킬로미터)이 묻혀 바다가 되었다. 고로는 이런 지진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날 저녁 북소리가 동방에서 들렸다. 이즈노시마(이즈오시마) 서쪽과 북쪽 두 면이 저절로 3백여 장 펼쳐져 하나의 섬이 생겼다. 북소리처럼 들린 것은 신이 이 섬을 만드시는 울림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토사 국사가 말하기를 "높은 파도가 밀려와 바닷물이 솟아올라 조세를 운반하는 배가 많이 유실됐다"고 보고했다.」
높은 파도가 밀려오고 바닷물이 솟아오르며 배가 다수 유실될 정도의 큰 쓰나미가 몰려왔다고 한다. 개중에는 해저 융기나 분화를 연상시키는 기술도 있어 지진(지각변동)×큰쓰나미×분화라는 복합 대재앙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어쨌든 극심함과 피해 범위 등을 감안할 때 하쿠호우(白鳳) 지진은 하쿠호우(白鳳)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으로 여겨진다.
◎ 지진은 한번에 끝나지 않을 경우
그 하쿠호우(白鳳)지진 이후 1339년 동안 난카이 트로프에서는 주요 대규모 지진이 13차례 발생했다. 단순 계산하면 평균 103년에 한 번꼴로 난카이 트로프 지진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그 13회 중 8회(약 60%)는 토카이 지진 등의 뒤를 이어 난카이지진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에이쵸(토카이) 지진 2년 2개월 후에 코우와(난카이) 지진, 쇼헤이(토카이) 지진 같은 날이나 이틀 후에 쇼헤이(난카이) 지진, 안세이(토카이) 지진 다음날에 안세이(난카이) 지진, 쇼와(토난카이) 지진 2년 후에 쇼와(난카이)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 (1-(4) 도표 참조).
이에 따라 토카이 지진 등 고유지진이 일어나면 같은 난카이 트로프를 따라 난카이 지진 등 다른 고유지진을 연동 또는 유발해 온 것으로 보인다. 즉 난카이 트로프에서 일어나는 지진에 따라 한 번에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다만 최초 지진부터 다음 유발 또는 연동 지진까지의 시간차에는 폭이 있어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한편 1854년 안세이 토카이 지진 이후 169년 동안 그 고유 영역에서 토카이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사이 안세이 토카이 지진 90년 후 쇼와 토난카이 지진(1944년)이, 92년 후 쇼와 난카이 지진(1946년)이 발생했다. 토카이지진 169년에 걸친 침묵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토카이 지진이 촉발시켜 다른 지진을 유발시키거나 난카이 트로프 전체에서 거대 지진이 연동돼 일으킬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다.
◎ 대지진×오쓰나미×분화
과거 난카이 트로프 지진에서는 하나의 지진이 다음 지진을 연쇄적으로 유발해 왔을 뿐만 아니라 난카이 트로프 전체가 동시 또는 짧은 시간 차이로 연동되어 어긋나기도 했다. 1707년 호에이 지진은 난카이 트로프 전체가 동시 또는 근소한 시간차로 움직였던 에도시대 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유지진의 대부분은 하나당 M7.9~8.5의 에너지인데 반해 호에이지진은 M8,6~9.3의 초거대지진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전 초거대지진(호에이지진)으로부터 이미 316년간 난카이 트로프 전체에서는 움직이지 않은 것이 되어 다음 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은 이미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과거 난카이 트로프 지진에서 공통적인 것은 일본 서기의 하쿠호우 지진 기재에도 나와 있듯이, 큰 흔들림 뒤에 큰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희생자의 상당수가 쓰나미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호에이 지진은 토카이도 앞바다에서 난카이도 앞바다의 넓은 범위를 진원으로 한 난카이 트로프 전역의 판간 단층이 파괴된 일본 최대급 초거대지진으로 추정되며, 상정되고 있는 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의 피해 상정을 볼 때 최악의 경우 호에이 지진의 내후라고도 불리는 대참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 호에이 지진 49일 후에는 후지산이 호에이의 대분화를 일으켜 에도(江戸)에도 강재가 있었다. 다음 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 발생 시 후지산이 연동돼 분화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최악의 복합재해에 대한 준비도 필요하다.
◎ 역사에서 배우다
미에현 이세시 이세신궁・소토노미야 경내에 있던 '고라칸(子良館)'에서 근무하는 역대 신관들이 당번제로 계승한(1661년~1812년) 일기가 있다. 그 '외궁자량관일기'에서 현대 의역으로 호에이 지진을 살펴본다.
「호에이 4년 정해(丁亥) 10월 4일 임오의 미상각」은 서기로 하면 1707년 10월 28일 14시 전 기내, 토카이도 및 난카이도 여러 나라가 심한 흔들림이 덮친다. 이 지진의 유감 범위는 매우 광대하여 가옥 궤도의 격진 범위는 약 200리(약 790킬로미터)에 이르며, 에미시(蝦夷)를 제외한 일본 전역에서 오기칠도에 걸쳐 크게 흔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피해범위는 현재 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 진도 분포도(1-(5) 그림 참조)에 겹치는 것으로 보인다.
1707년 10월 28일 13시 45분경 토카이도 앞바다에서 난카이도 앞바다를 진원 지역으로 추정 M8.6~9.3의 호에이 지진이 발생하였다. 최대 진도는 현재 진도계로 치면 진도 7로 알려져 태평양 연안에 큰 쓰나미가 몰려 고치현 도사쿠레에서 최대 약 25.7m의 쓰나미로 추정되고 있다. 호에이 지진의 피해는 토카이도와 이세만·기이반도·시코쿠가 가장 크고, 토카이도의 숙소역 중 하나인 후쿠로이(현재의 시즈오카현 후쿠로이시)는 마을이 전파(참고로 후쿠로이슈쿠는 안세이지진 때도 전소)되었다. 특히 쓰나미 피해가 극심해 호에이 지진 희생자 대부분이 쓰나미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망자는 5천명~2만명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추정 약 2800만 명으로 유추하면, 현재의 인구로 보면 약 2만 2500명~9만 명에 필적하는 피해이다.
호에이 지진 때 지진의 영향으로 도고온천(에히메현 마쓰야마시 도고유노초)에서는 145일 동안이나 탕이 멈췄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진으로 도고온천의 탕이 멈춘 것은 그 1033년 전 발생한 하쿠호우 지진(684년) 때 일본서기의 '때에 이요유이즈미(伊湯湯), 잠겨 나오지 않는다'는 기재와도 일치한다. 하쿠호우 지진과 호에이 지진으로 도후온천탕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은 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에서는 지각변동이 같은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는 되풀이한다. 과거 지진으로 지반이 침하되거나 액상화가 일어난 장소에서도 경계가 필요하다.
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의 피해 상정(액상화)에서는 아이치현 나고야시, 미에현 욧카이치시·쓰시, 와카야마시, 오사카부 사카이시·오사카시, 도쿠시마시가 '액상화의 가능성이 크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과거에 액상화가 있었던 장소인지 아닌지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액상화 현상은 같은 장소에서 반복되는 것이 특징. 기업이라면 피해 상정이나 해저드 맵에 의해 입지 리스크 평가를 재확인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경험으로 배우고, 현명한 자는 역사에서 배운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경험명언) 난카이 트로프 대지진 대책은 재해사 등도 참고해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각도로 전개 예측하고 현대 사회 상황과 과학적 지견을 도입한 준비와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한층 더 이어지는<「최대 34미터의 해일」「동일본 대지진의 14.5배의 희생자」…「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의 「경악의 피해 상정」에서는, 한신·아와지 대지진, 동일본 대지진과의 비교로부터 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에 대해 이야기한다.
야마무라타케히코(방재시스템연구소) 소장)
https://news.yahoo.co.jp/articles/06ec61911e381ee07fe77372d9426ae67dfb41a0?page=1
じつは前回の「南海トラフ巨大地震」から、すでに316年が経過しているという「恐るべき事実」
9/18(月) 7:03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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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後30年以内に高い確率で発生が予測されている「南海トラフ巨大地震」。果たしてその実態はいかなるものなのだろうか。その巨大な災害はどのようなメカニズムで発生し、どのような被害をもたらすのだろうか。そして、われわれはその未来にどう備えればよいのか。防災・危機管理アドバイザーの山村武彦氏に解説してもら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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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書紀に書かれた地震
過去を振り返ると、古事記と並び伝存する日本最古の歴史書である「日本書紀」には、地震の記述が複数みられる。それらの記述の中で、日本最古の地震記述といわれるのは、日本書紀の允恭(いんぎょう)天皇5年7月14日の項に記されている「五年秋七月丙子朔、己丑、地震」。西暦に直すと416年8月23日になる。当時は「地震」と書いて「なゐふる」と読んだ。「なゐ」は大地を表し「ふる」つまり振れる(揺れる)の意味で、読み方は異なっても大地が震える地震(じしん)を表している。
しかし、この允恭の地震について規模や被害程度などは何も記されていない。被害の模様を記したものは、推古7年4月27日、西暦599年5月28日に起きた大和の地震。「建物がことごとく倒壊し、四方に令(のりごと)して、地震の上を祭(いの)らしむ」と書かれている。当時の人々は地震(なゐふる)を、神によって引き起こされたものと考えていたようだ。ただこの地震も大和の国で甚大被害があったことが記述されていても、それ以上規模や被害の詳細記述はない。
白鳳時代の南海トラフ巨大地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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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が進み、40代天皇の天武天皇(在位:673年3月~ 686年10月1日)の御代になると、諸国から中央へと情報が集まりやすくなっていく。中央集権・律令国家の基礎が築かれ、各地で起きた紛争や災害などの情報が、速やかに大和の朝廷に届くようになった。記紀(日本書紀・古事記)編纂に着手したのもこの時代といわれる。
日本書紀の天武天皇13年10月14日に白鳳地震の記述がある。「壬辰(みずのえたつのひ)に、人定(いのとき)に逮(およ)んで、大きに地震(なゐ)ふる。国挙(こぞ)りて男女(おのこめのこ)叫び唱(よば)ひて不知東西(まど)ひぬ。則(すなわ)ち山崩れ河涌く。諸国(くにぐに)の郡(こおり)の官舎(つかさやかず)、及び百姓(おおみたから)の倉屋(くら)、寺塔(てら)神社(やしろ)、破壊(やぶ)れし類(たぐい)、勝(あげ)て数(かぞ)ふべからず。是に由(よ)りて、人民(おおみたから)及び六畜(むくさのけもの)、多(さは)に死傷(そこな)はる。時に伊予湯泉(いよのゆ)、没(うも)れて出でず。土左国の田菀(たはたけ)五十余万頃(いそうよろずあまりしろ)、没(うも)れて海と為(な)る。古老(おいひと)の曰(い)はく、『是(かく)の如(ごと)く地動(なゐふ)ること、未だ曾(むかし)より有らず』といふ」と。これが詳細に記録された最古の大地震といわれる。記録に残る南海トラフ地震と推定される白鳳地震である。
現代訳にすると「684年10月14日、夜10時ごろ大地震があった。国中のみんな叫び合い逃げ惑った。山は崩れ、川は溢れた。諸国の郡の官舎や住宅、倉庫、社寺の破壊されたものは数知れず、人も多数死亡し家畜の被害も多かった。伊予(いよ・愛媛県)の道後(どうご)温泉の湯が出なくなり、土佐の国では田畑五十余万頃(約千町歩・約12平方キロメートル)が埋まって(沈下して)海となった。古老は『このような地震はかつて無かったことだ』と云った。
さらに、「この夕、鼓(つづみ)の鳴るような音が東方で聞こえた。『伊豆の島(伊豆大島)の西と北の二面がひとりでに三百丈あまり広がり、一つの島が出来た。鼓の音のように聞こえたのは、神がこの島をお造りになる響きだったのだ』と云う人があった。土佐の国司(こくし)が言うことには『高波が押し寄せ、海水が湧き返り、調税を運ぶ船がたくさん流失した』と報告した」と続く。
高波が押し寄せ、海水が湧き返り、船が多数流失するほどの大津波が押し寄せたとある。中には海底隆起か噴火を思わせるような記述もあり、地震(地殻変動)×大津波×噴火という複合大災害だ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推測もある。いずれにしても、激甚さや被害範囲などを勘案すると、白鳳地震は「白鳳南海トラフ巨大地震」と考えられる。
地震は一度で終わらない場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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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白鳳地震からの1339年間に、南海トラフでは主な大規模地震が13回発生している。単純計算すれば平均103年に1回の割合で南海トラフ地震が発生していることになる。その13回のうちの8回(約60%)は、東海地震などの後に南海地震が連続して起きている。たとえば永長(東海)地震の2年2か月後に康和(南海)地震、正平(東海)地震の同日か2日後に正平(南海)地震、安政(東海)地震の翌日に安政(南海)地震、昭和(東南海)地震の2年後に昭和(南海)地震が発生している(1-(4) 図参照)。
このことから東海地震などの固有地震が起きると、同じ南海トラフ沿いの南海地震などの別の固有地震を連動又は誘発してきたものとみられている。つまり、南海トラフで起きる地震によっては、一度で終わらない可能性もあるということ。ただ、最初の地震から次の誘発又は連動地震までの時間差には幅があり、必ずしも一様ではない。
一方で、1854年の安政東海地震以降169年間、その固有領域で東海地震が発生していない。その間に、安政東海地震の90年後に昭和東南海地震(1944年)が、92年後には昭和南海地震(1946年)が発生している。東海地震の169年間に及ぶ沈黙はいったい何を意味するのか、今後、東海地震が引き金となって、他の地震が誘発させたり、南海トラフ全体で巨大地震が連動して引き起こす可能性も否定できない。
大地震×大津波×噴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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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去の南海トラフ地震では、一つの地震が次の地震を連鎖的に誘発してきただけでなく、南海トラフ全体が同時又は短い時間差で連動してずれ動いたこともある。1707年の宝永地震は、南海トラフ全体が同時又はわずかな時間差で動いた「江戸時代の南海トラフ巨大地震」と推定されている。固有地震の多くは一つあたりM7.9~8.5のエネルギーであるのに対し、宝永地震はM8,6~9.3の超巨大地震だったと推定されている。となると、前回の超巨大地震(宝永地震)からすでに316年間、南海トラフ全体では動いていないことになり、次の南海トラフ巨大地震はすでにカウントダウンが始まっているとする説もある。
過去の南海トラフ地震で共通しているのは、日本書紀の白鳳地震の記載にもあったように、大揺れの後に大津波が押し寄せることである。そして、犠牲者の多くが津波によるとされている。中でも宝永地震は東海道沖から南海道沖の広い範囲を震源とした南海トラフ全域のプレート間断層が破壊された日本最大級の超巨大地震と推定され、想定されている南海トラフ巨大地震の被害想定を見ると、最悪の場合は宝永地震の再来ともいわれる大惨事になる可能性がある。その宝永地震の49日後には富士山が宝永の大噴火を起こし江戸にも降灰があった。次の南海トラフ巨大地震発生時に富士山が連動して噴火しないという保証はない。最悪の複合災害への準備も必要になる。
歴史に学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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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重県伊勢市の伊勢神宮・外宮境内にあった「子良館(こらかん)」に勤務する歴代の神官たちが当番制で書き継いだ(1661年~1812年)日記がある。その「外宮子良館日記(げくうこらかんにっき)」から、現代意訳で宝永地震を見てみる。「宝永四年丁亥十月四日壬午の未上刻」は、西暦にすると1707年10月28日14時前、畿内、東海道および南海道諸国が激しい揺れに襲われる。この地震の有感範囲は非常に広大で、家屋潰倒の激震範囲は約200里(約790キロメートル)にも及び、蝦夷を除く日本国中、五畿七道に亘って大揺れとなった」と記されている。被害の範囲は現在の南海トラフ巨大地震震度分布図(1-(5) 図参照)に重なるようにも思われる。
1707年10月28日13時45分頃、東海道沖から南海道沖を震源域として、推定M8.6~9.3の宝永地震が発生した。最大震度は現在の震度階でいうと震度7とされ、太平洋沿岸に大津波が押し寄せ高知県土佐久礼で最大約25.7メートルの津波高と推定されている。宝永地震の被害は東海道と伊勢湾・紀伊半島・四国が最も大きく、東海道の宿駅の一つ袋井(現在の静岡県袋井市)は町が全壊(ちなみに袋井宿は安政地震の折も全焼)している。特に津波被害が甚大で「宝永地震」の犠牲者の大部分が津波によるものと推定されている。死者は5千人~2万人と言われている。当時の日本の人口が推定約2800万人として類推すると、現在の人口からすると約2万2500人~9万人に匹敵するような被害である。
宝永地震の時、地震の影響で道後温泉(愛媛県松山市道後湯之町)では145日間も湯が止まったという記録が残っている。地震で道後温泉の湯が止まったのは、その1033年前に発生した白鳳地震(684年)時の日本書紀の「時に伊予湯泉(いよのゆ)、没(うも)れて出でず」という記載とも一致する。白鳳地震と宝永地震で道後温泉の湯に異常をきたしたということは、南海トラフ巨大地震では地殻変動が同じ場所で繰り返し起きることを示している。歴史は繰り返す。過去の地震で地盤が沈下したり、液状化が起きた場所でも警戒が必要になる。
南海トラフ巨大地震の被害想定(液状化)では、愛知県名古屋市、三重県四日市市・津市、和歌山市、大阪府堺市・大阪市、徳島市などが「液状化の可能性が大」とされている。こうした地域では過去に液状化があった場所かどうか確認しておく必要がある。液状化現象は同じ場所で繰り返されることが特徴。企業であれば、被害想定やハザードマップにより立地リスクアセスメントの再確認をすべきである。
「愚者は経験に学び、賢者は歴史に学ぶ」(オットー・フォン・ビスマルク)。南海トラフ巨大地震対策は、災害史なども参考にしてその後に何が起きるか多角的に展開予測し、現代の社会状況や科学的知見を取り入れた準備と対策が求められている。
さらに続きとなる<「最大34メートルの津波」「東日本大震災の14.5倍の犠牲者」…「南海トラフ巨大地震」の「驚愕の被害想定」>では、阪神・淡路大震災、東日本大震災との比較から南海トラフ巨大地震について語る。
山村 武彦(防災システム研究所 所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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