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두루미 날다
순천만은 철새 도래지인데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갈대들만 가볍게 몸 비비며 서 있다
고요한 둘레길을 걷다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는데
서쪽 하늘로 기우는 해가 마침표를 붉게 찍는다
순간, 푸르륵 푸르륵
여기저기서 새들 한꺼번에 깃 치는 소리 들린다
누가 무슨 신호를 보냈는지
갈대밭에서 숨 고르던 수천 마리의 흑두루미 떼가
오후 다섯 시를 끌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발목이 간지러운 갈대들이 잎을 뾰족이 세우고 휘청거린다
저 새들, 어느 행성에서 날아온 누구일까
오래 봉했던 입이 한꺼번에 열린 듯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공중의 합창이 웅장하다
새까맣게 하늘을 덮은 군무가 시작된다
제 색에 취한 노을이 서천에 점묘화를 그린다
새들은 해 지는 쪽으로 날다가 돌아서 길게 원형을 만들 다가 화르르
건너편 논바닥에 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른다
머리 위에서 회오리가 인다
이곳의 저녁은 새 떼에 포위되었다
갈대들은 방죽에 서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새들은 제가 걸어온 길을 지우고 서서히 하루를 지운다
길이 없어진 길 위에서 나는 넋 놓고 그들을 바라본다
저 새들 지금 저 붉은 눈동자로 무얼 주시하고 있는지
긴 다리를 뻗어 이 저녁을 떠메고 어디론가 날아갈 태세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높이 더 멀리 날아가 까마득한 점이 되는 새들
목을 길게 빼고 커다란 날개를 휘저어
저무는 하늘 끝까지 날아갈 듯하다
문득, 겨드랑이가 간지럽다
―류인채, 『흑두루미 날다』, 천년의시작,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