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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11
영향력 있는 리더
유명한 기독교 작가 캔 가이어가 쓴 '고통의 은혜'라는 좋은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런 재미있는 말이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사계절이 있다. 우리가 만일 욕심을 좀 부려 여든 살까지 산다고 한다면 인생의 각 계절은 약 이십 년이 된다. 그러면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봄이 우리 인생의 첫 이십 년이고 겨울이 마지막 이십 년이라면 지금 당신과 나는 어느 계절에 서있는 것일까?'
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욕심을 좀 부려서 우리가 인생을 팔십 산다면 이십 년마다 한 계절이 다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하는 이십 세까지를 봄이라고 친다면 또 마지막 팔십 세까지를 겨울로 친다면 둘 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여름과 가을일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계절의 어느 계절입니까?
아마 여기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한창 여름을 지나가시든지, 가을을 맞이했든지, 가을이 농후하게 무르익었든지, 아주 가끔은 겨울이 막 닥쳐왔든지 아마 그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리처드셀처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낙엽이 지는 시월이 되면 숲을 더 깊이 볼 수 있다.'
늙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을이 되면 '아, 내 인생이 다 가는구나.'싶지만 그러나 정말 인생 속에서 좋은 열매를 많이 거둔다면 인생의 깊이와 넓이와 폭을 좀 많이 경험하고 산다면 가을이 되어서 나뭇잎이 떨어지면 오히려 숲을 더 깊이 볼 수 있는 계기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또 한가지 하프타임이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중년까지는 성공을 집착하는 삶을 산다. 그렇지만 중년이후에는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맞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자신의 삶을 유추해 보십시오. 나의 계절은 어느 계절쯤 되겠습니까? 또 나의 삶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공입니까? 가치 있는 삶입니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인생의 질문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드디어 과업을 성취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이런 아름다운 스토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과업을 성취했습니다.
본문 1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수 23: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지금 여호수아는 겨울을 맞이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겨울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은 초라하지만은 않습니다. 아마 숲에 비유한다면 나머지는 다 떨어져 버렸지만 여름에는 볼 수 없었던 그 숲의 깊은 부분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런 현장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는 과업을 다 성취했습니다.
여러분, 과업이 무엇입니까? 완수해야될 큰 사명 이것을 과업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 속에 하나님께서 완수하도록 명하신 가장 큰 사명, 이것을 과업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지금 여호수아는 그 과업을 거의 마무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인생도 마무리 하지만 자신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모든 과업들을 거의 마무리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 오랜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가나안의 모든 대적들을 몰아내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이 위대한 역사를 감당해 왔습니다. 이제 그 과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 한 다음에 그 과업을 자신의 동역자들과 자신의 다음세대에게 계승하는 그런 장면들이 23장과 24장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그 과업을 이룰 뿐 아니라 그 과업을 자신의 다음세대에게 이양하는 이런 멋지고 감격스러운 장면을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위대한 사명입니다. 목숨을 걸만한 사명입니다. 어쩌면 목숨 그 이상의 중요한 가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베소서 6장 20절에 보면 이런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엡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보면 '이 일을 위하여'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일 때문에 자신이 사슬에 매였다는 말입니다. 즉 그 과업 때문에 자신이 사슬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과업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사명, 전 세계에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해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이 거룩한 비전을 하나님이 그의 가슴에 심어주셨는데 이것을 완수하는 그의 사명을 그는 과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일을 완수하기까지 자기는 사슬에 매이는 것도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것이 그의 고백 속에 잘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장면들을 성경에서 수없이 목격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2장을 보게되면 바울이 하나님이 주신 과업에 대해서 얼마만큼 거룩한 열정과 비전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3차여행을 거의 마쳐갈 무렵에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그는 체포가 됩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 약 2년동안 구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총독이 벨릭스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괜히 이 사람을 재판해 보았자 유익이 없겠다 싶으니까 그냥 그를 방치해둔 것입니다. 2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런 다음 베스도라는 새로운 총독이 부임을 해 왔습니다. 베스도는 부임하자 마자 산적해 있는 이 모든 소송들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합니다.
그러다가 바울을 재판하면서 아그립바 2세라는 왕을 부릅니다. 이 사람은 헤롯의 손자입니다. 그 사람과 더불어서 이 바울을 재판합니다. 큰 공회당에 바울을 데려다 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사람을 재판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22장 이후에 잘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최후의 변론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자신에게 주어진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무엇을 말 할 것인가?
그는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그는 고백을 합니다.
자신이 과거에 기독교를 대적했던 사람이었다는 것, 그래서 모든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다는 것,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 주셨다는 것, 십자가의 구속을 그가 경험한 다음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치 않을 수 없는 그런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그는 담담하게 진술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얼마나 역사적인 진실인가에 대해서 그는 변증하기 시작합니다.
"베스도 총독각하여, 당신은 이 모든 진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시여, 당신은 이 모든 진실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도전합니다. 그때 베스도가 그의 입을 막습니다.
"바울아, 너의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그러자 이제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도전합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고 계신다는 것을 내가 압니다. 이 일은 어느 한 곳에서 생겨난 일이 아닙니다. 이일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아그립바 2세 왕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바울아,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그랬더니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말이 많든 적든 내가 사슬에 매인 것 외에는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바울의 자부심입니다.
여러분, 지금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2년 동안이나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사슬에 묶여서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들 앞에 끌려 나왔습니다. 그들의 말 한마디면 자신은 풀려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가슴에 심겨진 하나님의 비전을 그들에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가슴에 담은 이 위대한 비전은 가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목숨을 내 걸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 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자기를 보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 이후에 자신에게 그 모든 사명을 계승시키고 이스라엘 민족과 더불어 이 모든 과업을 이루기까지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이 위대한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전부를 하나님께 내어놓는 희생의 삶을 그는 감당해 왔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의 삶은 과업을 성취하기 위한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히브리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모세의 시종이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모세가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됩니다.
정말 별별일 없고 초라한 사람이지만 두려운 가슴으로 하나님의 명령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다. 너는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와 함께 했던 것처럼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
하나님의 명령을 가슴에 담고 자신의 초라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과업을 향해서 철저하게 자신의 전 생애를 위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과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생애 속에서 과업을 이루는 리더가 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사항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과업을 향한 삶의 가치입니다. 성공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이 가치가 있는가? 상대적인 것에 대해서 삶의 모든 열정을 불사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에 대해서 자신의 삶의 포커스를 맞추고 거기에 집중 추구하는 삶, 이것이 삶의 성패가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민수기 13장에서 모세에게 파송을 받습니다. 물론 혼자만이 아니라 나머지 동료들과 함께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40일 동안에 가나안땅을 정탐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12명의 정탐꾼들이 동일한 삶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조적인 삶의 스타일이 드러납니다.
두 가지 삶의 스타일이 드러납니다.
그 중에 첫 번째 삶의 스타일은 부정적인 리더 스타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감정주도형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또 감정지향형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목적보다는 감정에 치우치고 목적보다는 환경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 없이 모든 환경을 바라보는 삶의 가치관입니다.
여러분, 인생 속에 문제가 왜 존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문제를 하나님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통해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수많은 위험과 시험 앞에 그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도 비슷합니다.
감정 지향적인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거룩한 반응을 갖고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그 거룩한 목적 앞에 내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내가 어떻게 열정으로 예배할 것인가? 내가 어떻게 주님의 공동체를 섬길 것인가? 내가 어떻게 세상을 섬겨서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나갈 것인가? 이런 목적보다는 감정적인 면에 치우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목적은 희석되어 버리고 가치는 상실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예전에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포트로드레일이라는 곳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마이웨미쪽에 있는 학교인데 거기서 공부를 하다가 한번 주말에 여행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공부하는 목사님들하고 키웨스트라는 곳을 갔습니다. 헤밍웨이가 오랫동안 저작활동을 벌였던 장소가 키웨스트인데 거기서 쿠바가 멀리 보입니다. 무려 5시간을 차를 타고 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큰 웨곤을 하나 빌렸습니다. 15인승 웨곤을 하나 빌렸는데 이 차가 보통 불편한 차가 아닙니다. 운전석 옆자리만 빼놓고 나머지는 전부 머리 받침도 없는 차입니다. 키 큰 사람이 앉으면 어깨가 아플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타고 계속 식사하러 다니고 했는데 제가 꾀를 좀 내었습니다. 거기에 몇 분의 어른 목사님이 계시니까 운전석 옆자리는 못 앉고 그 뒷자리가 조금 넓었습니다. 제가 롱다리 아닙니까? 키 큰 사람의 비애가 있습니다. 비행기를 탈 때 혹은 작은 차를 탈 때 그 때 키 큰 것이 그렇게 나쁩니다
.
그래서 좀 편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 왕복 10시간이니까 꾀를 내어서 제일 먼저 가서 차를 좀 닦았습니다. 꾀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키를 열고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제 잠바와 카메라를 놓았습니다. 그 자리를 찜 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밖에서 어른들이 다 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 분이 안나오셔서 그분을 모셔왔는데 와보니까 제 잠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보니까 맨 뒤에다 집어던져 놓았는데 의자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떨어져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5시간 동안 눈에 뵈는 것은 그 사람의 뒤통수였습니다. 키웨스트까지 가는 그 길이 굉장히 멋진 길입니다.
산호초 위에 다리를 놓고 그 햇빛에 비치는 반짝이는 바닷 물결 위로 계속 달려가는데 얼마나 멋진지 모릅니다. 밑에서는 날치들이 막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하나도 못 보았습니다. 뒤통수만 봤습니다. 속으로 막 미운 것입니다. 당연히 그분은 계속 그 자리에 앉았으니까 '내 자리야.' 하고 앉았을 텐데 제가 보는 것은 뒤통수였습니다.
이것이 감정지향형입니다.
목적을 상실해서 정말 거기에 왜 간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좋은 풍광, 평생에 한번 볼까말까한 풍광은 별로 기억이 안 나고 보이는 것은 뒤통수였습니다. 이것이 감정지향적인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말 주님을 예배해야 한다. 나를 부르신 거룩한 목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무시해 버리고 감정대로 인생을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거나 감정 때문에 결국은 공동체 생활을 포기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 사람들은 과업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과업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이 많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긍정적인 리더의 자화상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업지향형의 사람들입니다. 감정도 있습니다. 갈등도 있습니다. 문제도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목적 앞에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명령을 따라서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사는 것입니다. 왜 보이는 것이 없겠습니까?
왜 문제가 없겠습니까?
왜 갈등이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거기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정신을 빼앗길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더 추구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업지향형입니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라는 좋은 책이 요새 나왔습니다. 앤서니 라빈스 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거기에 보면 중요한 화두가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자기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할지를 잘 알고 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뭐가 중요한지를 다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 인생이 참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것을 해야 한다.' 라는 것은 많이 알고 있는데 문제는 그 일을 향해서 도전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 많이 쓰는 말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거기까지에는 우리의 삶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추구하고 실천하는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서 주신 과업을 향해서 자신의 삶을 일관성 있게 살아온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정복은 실현되게 되었습니다. 자기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그 하나님의 영향력을 이 가나안 땅에 파급해 나가는 그런 삶을 그는 완성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그의 가슴에는 하나님이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그는 하나님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민수기 14장 8절부터 9절까지 보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가나안 정탐을 마친 다음에 안 된다는 사람들, 못 들어간다는 사람들에게 외친 고백입니다.
(민 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 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다른 정탐꾼들의 가슴에는 여호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현실만 존재했습니다. 감정만 존재했습니다. 감정이 그들의 삶을 이끌어 가버렸습니다. 하나님 없이 현실을 보니까 그 현실은 전부다 자신을 망가뜨리고 자신을 짓밟는 현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향한 추구함으로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이 그의 가슴에 새겨진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 땅은 그들의 밥이었습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가 젊었을 때만은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적어도 오십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지금 그의 가슴은 어떻습니까?
3절 말씀 읽겠습니다.
(수 2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
3절의 고백을 보면 그의 고백 속에 나타나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 수십 년 전에 심겨졌던 그 가슴의 하나님이 여전히 그의 가슴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증폭되었습니다.
5절 말씀 보십시오.
(수 23:5)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으사 너희 목전에서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8절 말씀 보십시오.
(수 23:8)“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것 같이 하라
(수 23:9) 대저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 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수 23:10)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삿3:31, 삿15:15
(수 23:11)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나오는 고백마다 항상 핵심적인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가슴속에 존재합니다. 존재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증폭되었습니다. 더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그의 나이 40세 때 뿐 아니라 지금 수십 년 지난 다음에도 여전히 그의 가슴에는 그 열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탁월함 아니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어떠십니까?
과거에 날 인도하신 하나님, 지금도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으로도 인도하실 하나님일텐데 우리의 가슴속에는 그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득심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습니까?
내가 젊어서 믿은 그 하나님, 내가 여름철에 믿은 그 하나님, 가을철을 통과하고 겨울철이 다 되도록 과연 그 하나님은 내 가슴속에서 어떤 영향력과 어떤 감격과 확신으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여호수아의 탁월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젊은 날에 만났던 그 하나님을 일생동안 자기 속에서 더 증폭시키고 그 하나님을 통해서 인생을 다시금 다시금 확인하며 하나님을 통해서 삶의 전체를 그분에게 위탁하는 삶을 지금껏 살아왔다는 사실입니다.
한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젊어서의 열정을 늙어서까지 계속 증폭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지금의 내 열정과 지금의 내 감격이 칠십, 팔십 되도록 계속해서 여전히 내 안에서 타오르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비록 육체의 온기는 식을지라도 내 영혼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더 뜨거워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많이 주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더 많이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년이후의 삶을 바로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전에 '중년이후에' 라는 좋은 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위해서 지금부터 준비해야 되겠다. 왜냐하면 노인들을 보면서 가끔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부터 준비할 것이다. 구차해지지 않도록, 초라해지지 않도록.'맞는 이야기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6절 말씀 읽습니다.
(수 23:6)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말씀 앞에 더 다가서는 삶에 대해서 여호수아는 고백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말씀은 과거 자신이 가나안 정복을 실현해 나갈 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수아 1장 7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대로 다시 한번 되풀이됩니다.
(수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하는 약속을 이미 주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수십 년 인생을 살고 난 다음에 자신의 동역자들과 자신의 후대들에게 그 말씀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크게 힘써 재미있는 것은 거기에 '크게 힘써'라는 말이 첨가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힘써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정녕 너희와 함께 하셔서 위대한 과업을 더 이루게 하실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온 삶을 통해서 이 말씀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다음 세대에게 이 말씀을 위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순종한 말씀을 자식들에게 계승시키려고 노력하십시오.
이성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범을 통해서 그것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난 이후에 얼마만큼 일생동안에 내가 주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 앞에 순복하고 주님을 온전히 추구하는 삶을 살았는가? 정말 내 자녀들에게 그 말씀을 전하면서 경험하도록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세상 떠난 다음에 성경책만을 달랑 남겨놓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내가 어떻게 실천하고 이 말씀을 어떻게 추구하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현장들을 그들의 가슴에 심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자기 후대들에게 내가 일생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하게 순복하는 삶을 살았는데 이제 너희는 더욱더 힘써서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이다. 그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 말씀 보겠습니다.
(수 23:8)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것 같이 하라”
여기서 '친근하게 한다'는 말의 의미가 뭔 줄 아십니까? '더욱더 깊게 연합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더 깊게 연합된 관계를 '친근하다'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하나님을 더 경험하고 하나님과 더 연합된 것 이상으로 하나님과 친근해진 삶을 살아라.' 이것이 그의 갈망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안 되는 관계입니다.
'모든 인생의 사소한 것조차도 주님께 위탁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정말 내 인생 속에 친히 동행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라.' 여호수아의 부탁입니다. 이것은 능동적인 삶에 대한 부분입니다.
또 한 가지는 소극적인 삶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거부할 것에 대해서.12절 말씀 읽습니다.
(수 23:12)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여기서 '친근히'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세상을 향해서 연합하는 것, 하나님과 등져있는 모든 현실과 타협해버리는 것을 '친근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하던지 세상을 친근히 하던지.
여호수아는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해라. 그리고 더욱더 하나님을 친근히 하라.' 하나님 없이 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모세를 통해서 경험했던 이야기들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얼마큼 동행했는지 하나님이 친히 그에게 만난바되어 주시고 친구처럼 해주지 않았습니까? 마치 친구가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모세와 더불어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 경험을 여호수아는 마음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세처럼 친근히 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먼 분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친근하는 것입니다. 친근히 할 때 마음이 열립니다.
여러분, 제가 성격이 굉장히 좀 소심한 사람입니다. 등치만 크지 내성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다가서지가 쉽지가 않습니다. 이것을 깨뜨리려고 굉장히 많이 애를 씁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먼저 친근하게 다가오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못 가지고 있는 부분을 그분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통해서 정말 하나님은 친근한 분이시다. 정말 하나님은 나와 가까운 분이시다 라는 것을 너무나 많이 경험합니다.
우리가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참 중요합니다. 우리 한국적인 사고방식은 하나님을 굉장히 어렵게 생각합니다. 멀리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교적인 성향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유교적인 성향에서는 아버지는 항상 좀 멀고 높습니다. 어른은 항상 거리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따뜻하지 않습니까? 굉장히 친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데이빗 씨멘즈가 쓴 책 가운데 보면 그런 내용들이 참 많이 나타납니다. 아버지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감정들을 많이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해서 너무 거리감이 있거나 아버지가 너무 폭력적인 그런 자녀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낄 위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녀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나중에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까지 잘못 고착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모세를 통해서 그런 친근한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나와 늘 동행하시고 내 고백을 들으시고 내 모든 탄식, 내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당신은 어떻습니까?
마지막 11절 말씀 읽습니다.
(수 23:11) “ 그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날마다 더욱더 이것이 그의 간곡한 부탁이었습니다.
제가 김종원 목사님의 글을 참 좋아하는데 '예수--' 책을 보면 그런 고백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분의 예수 사랑은 굉장히 독특해서 뭔가 색깔이 묻어날 것 같습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내가 걸었던 길들이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했다는 것을 내가 앉았던 자리들이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내가 무덤에 묻힌 다음에 그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정말 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가 눈을 감기 전에 나의 사랑하는 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얘들아,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해라. 더욱 더."'그분의 고백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마쳤는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산 삶은 아름다운 결과를 도출해 낸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을 평가하는 이야기인데 다윗을 가리켜 이 세대에 하나님의 목적을 쫓았던 사람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대에 하나님의 과업을 쫓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의 평가가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의 아들 솔로몬의 평가는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옵니다. 열왕기상 11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가 아비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아버지는 정말 하나님의 과업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평가하시기를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쫓았다는 평가를 하고 있고 당신의 마음에 합당하셨다는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솔로몬은 달랐습니다.
나의 무덤에는 어떤 글귀가 새겨지기를 원하십니까? 다윗입니까? 솔로몬입니까?
아마 솔로몬의 글귀가 새겨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입니다.
저도 다윗의 글귀가 새겨지기를 원합니다.
평생동안 하나님의 과업을 추구했던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라는 그런 평가를 저는 얻고 싶습니다.
정말 저의 후손들이 '우리 아빠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사신 분이야.' 그렇게 평가하기를 저는 원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저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그런 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윗과 같은 묘비명이 내 인생 마지막 순간에 새겨지고 그것이 하나님께 검증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나님을 평생동안에 그의 과업을 추구하는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과업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지 아니하면 그런 평가를 받는 다는 것은 한낱 망상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묘비명을 원하면서도 솔로몬 같은 삶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모습들이 참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이런 묘비명, 이런 하나님의 평가를 받고 싶으면서도 여전히 솔로몬처럼 세상 적이고 세상을 탐닉하는 삶을 살아버리는 그런 연약한 지체가 참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한번 점검해보십시오.
지금 어느 계절에 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만의 계절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늦여름 아니면 이른 가을, 농후하게 익은 가을, 초겨울 그 정도 우리가 와 있을 것입니다. 인생을 그만큼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과업이 있다고 느끼고 계십니까?
그 과업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명을 내걸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일생동안 추구할 거룩한 사명인데 그것은 목사와 선교사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 안에 어떤 특정한 사람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대한 좋은 해답이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게 되면 성부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예정하시고 우리를 작정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십자가에 내어 놓으셔서 우리를 위한 그 모든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이 시대에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인격을 열어주시고 그 구속의 역사를 내게 믿게 하셔서 동일하게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끔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만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을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끔 하기 위해서.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슴에 담을 뿐 아니라 이제는 내가 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 가정과 세상 속에 그리스도 복음을 증거하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겠다. 일생동안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하고 우리 인생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과업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평가받는 삶을 살아야되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목사만이 아닙니다. 선교사만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이제 점점 시간은 갈 것이고 우리 인생 가을이 오면 낙엽은 다 떨어지고 열매를 드러내게 될 것이고 숲은 더 깊이 드러나게 될텐데 그때 나의 신앙은 어떻게 검증될 것 같습니까?
여호수아의 고백은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나는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인가? 나는 어떤 영향력을 우리 가정에 드러낼 것인가? 나는 어떤 영향력을 우리 다음 대에 드러낼 것인가? 이것은 여호수아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질문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이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이 현장이 내게 주어진다면 이 고백이 바로 나의 고백일 수 있도록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젊었을 때 부름 받아서 일생동안 하나님을 추구한 삶을 살았다. 그래도 적어도 과업이라는 것을 내 가슴에 담고 살았다. 내가 주님을 그렇게 예배했다. 그렇게 주님을 섬겼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려고 나름대로 삶을 살았다. 내가 이렇게 삶을 살았던 것을 너희는 기억하고 이 말씀을 따라 순종하라. 그리고 너희는 기억해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라. 너희는 기억해라. 이 에미 아비가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을. 너희와 너희자손에게 드러내라. 얼마나 멋집니까? 그런 현장에 우리가 서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의 계절을 나름대로 점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점점 세월이 지나다 보면 우리에게 가을이 찾아올 것이고 모든 잎은 다 떨어지겠지만 열매는 드러날 것이고 나중에는 열매도 다 떨어지겠지만 숲은 더 깊어지는 느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인생 광야 지나가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 놀라운 사랑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동일한 과업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배에 대한 거룩한 과업들, 공동체를 섬기는 과업들, 우리 가정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이 과업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과업 앞에 어떻게 지금까지 응답해 왔습니까?
일생동안 정말 하나님을 추구하고 과업을 완수하는 삶일 뿐 아니라 내가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그 삶을 통해서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그렇게 말씀 앞에 다가설 것을 요청하는 신앙이기를 원합니다. 인생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검증하는 그런 모습으로 서기를 원합니다. 여호수아처럼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렇게 담대히 고백하고 요구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의 모습을 갖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제 성공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을 추구할 때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바른 신앙과 바른 과업과 바른 열정으로 충만히 채워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