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일 목요일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교회는 성탄 다음 사십 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주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여기에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으셨다. 이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맞이하는 이 축성 생활의 날에 수도 성소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축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한편 한국 교회는 ‘Vita Consecrata’를 ‘축성 생활’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봉헌 생활의 날’명칭을 ‘축성 생활의 날’로 바꾸었다(주교회의 상임위원회 2019년 12월 2일).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2023년 축성생활의 날 담화
+하느님은 온 우주 삼라만상을 통하여 찬미 받으소서!
경애하는 이 땅의 모든 축성 생활자 여러분! 세상사람들은 우리를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올해는 어디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살면 좋을까요? 몇 년전 미국 하버드 대학의 교수 한 분이 훌륭한 미래의 삶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친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인데도 친절이 부족해서 서로가 경쟁만 하고, 나라끼리는 전쟁을, 공동체는 이기주의로 분열되어가고 사회는 조화가 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절한 사람만이 미래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갈 수 있으며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 컬럼비아 의대 정신 의학 교수인 켈리 하딩 박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가 건강 문제의 본질이며 사람은 지지받지 못하고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번아웃(burnout-심신이 완전 지친 상태)이 된다고 합니다.
좋은 의사보다 좋은 상사가 건강에 더 중요하며 나쁜 상사를 만난 사람이 심장병 등으로 갑자기 사망할 확률이 3~6배나 훨씬 높다고 합니다. 가족끼리 서로 매일 포옹만 해도 감기 걸릴 위험이 32%나 낮아지고 친절한 사람이 키운 식물이나 동물이 병에 훨씬 적게 걸린다고 합니다. 위안을 주는 모든 손길은 생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친구가 어깨를 토닥여주는 행위부터 포옹, 악수, 미용사의 헤어 손질까지도 병에 걸릴 확률을 낮춰준다고 합니다.
더욱이 부모가 다정하게 아이들의 눈을 깊게 바라보고 애정을 담아 웃고 누워서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을 하며 가끔 아이를 온몸으로 힘 있게 안아주면 설사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게 태어났거나 후천적 유전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해도 그것을 극복하고 아이는 다른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만 이런 변화를 하겠습니까?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장발장도 친절한 성직자 한 분에 의해서 인생이 완전 바뀌었잖아요?
친절은 이렇게 병도 낫게 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주위는 과연 어떠한가요? 잠시만 돌아보면 얼마나 차갑고 불친절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지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자녀들의 병문안을 기다리다가 아무도 오지 않자 이사를 간 딸에게 전화를 걸어 주소를 물었더니 “아버지! 이사간 주소를 아시면 찾아 오시려고 하시죠? 가르쳐 드릴수가 없어요” 하고 딱 전화를 끊더라는 겁니다. 얼마나 서러운지 할아버지가 대성 통곡을 하셨다고 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이렇게 불친절한데 물질적으로만 잘 살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모님에게는 자식을 보는 ‘낙’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또 한 번은 도시에 있는 불교 포교원을 외국 손님들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4층 건물인데 각 층마다 불자들이 편하게 드러누워있기도 하고 모니터로 스님의 법문을 듣기고 하고 담소를 나누고 음식을 먹는 등 모두가 나름 힐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큰 스님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신도들을 만나러 나오니까 신자들이 모두 모여들어 사진을 찍고 야단법석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저는 그때 ‘불교에서도 성직자 대접이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뒤에 이 이야기를 스님들과 아주 친하게 지내시는 원로 수녀님 한 분께 말하였더니 그것은 성직자 대접이 아니고 신도들이 스님들을 아버지처럼 정말 편하게 생각하고 좋아서 그렇게 따르는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천주교 신부님들과 수도자들은 너무 까칠해서 사람들이 가까이 가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꼭 고쳐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도 그렇게 따뜻하질 않습니다. 여러 수도회의 젊은이들이 양성 기간 중에 탁발체험을 하는 시간이 있는데 이때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청하면 절이 제일 후하게 해주고 다음은 개신교회,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아예 쫓겨나기가 일쑤라고 합니다.
늘 하느님의 사랑을 외치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는 교회가 이러면 이상하죠! 사회가 차갑다면 우리 축성생활자들이 따뜻하게 덥혀야 합니다. 우리 축성생활자들은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라도 종교의 유무에 관계없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하느님의 사랑만 전해줍니다. 그 사랑은 바로 우리의 친절로서 전해집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따뜻한 말로 친절하게 인사할 수 있고 병이나 외로움에 지친 분들에게 진심어린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있습니다. 아주 높은 분들이나 돈이 많은 분들께도 서슴없이 다가가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줄 자선금을 청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봉쇄수도원의 수도자라면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친절한 기도를 열심히 바칠 수 있습니다.
친절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젊고 건강하고 나이 들고 병듦과 상관없이 언제나 주님의 힘으로 모두에게 친절할 수 있습니다. 2023년 올해 하느님의 친절을 모두에게 마음껏 선물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리며 이 땅의 모든 친절하신 주교님들께 강복을 청합니다.
2023년 2월 2일 축성생활의 날에 한국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30028?gb=K1200 ]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14-18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축일2월 2일 성 고르넬리오 (Cornelius)
신분 : 백부장, 베드로의 제자, 주교 활동 연도 : +1세기 같은 이름 :고르넬리우스, 꼬르넬리오, 꼬르넬리우스, 코르넬리오, 코르넬리우스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Caesarea) 주재 로마군 보병대의 백인대장이던 성 코르넬리우스(또는 고르넬리오)는 하느님께서 신비로운 영상 가운데 당신 천사를 통해 요빠에 있던 사도 베드로(Petrus)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오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사도 베드로를 모셔왔고, 그로부터 자신은 물론 온 집안사람들 모두 세례를 받았다(사도 10,1-48). 그때부터 성 코르넬리우스는 사도 베드로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성 코르넬리우스는 카이사레아의 첫 주교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
축일2월 2일 성녀 요안나 드 레토낙 (Jane de Lestonnac)
신분 : 과부, 설립자 활동 연도 : 1556-1640년 같은 이름 : 레토냑,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성녀 요안나 드 레토낙(Joanna de Lestonnac)은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에서 저명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인문주의 철학자였던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의 조카이다. 당시 프랑스는 국가의 분열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분열을 가져온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혼란을 겪고 있었다. 성녀 요안나의 어머니는 칼뱅주의(Calvinism)에 빠져 그 누구의 권고도 듣지 않았다. 다행히도 성녀 요안나는 아버지와 삼촌 덕분에 자기 종교로 이끌고자 했던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성녀 요안나는 17살에 가스통 드 몽페랑(Gaston de Montferrant)과 결혼하여 여덟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그녀는 1597년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41살에 과부가 되었고 네 아이도 어려서 잃었다. 그녀는 나머지 네 자녀가 모두 자라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돌보았다. 그녀의 두 딸인 마르타(Martha)와 막달레나(Magdalena)는 보르도에 있는 수도원에서 서원을 했고 아들 프란치스코(Franciscus)는 결혼을 했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막내딸을 아들에게 맡기고 성녀 요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온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1603년 툴루즈(Toulouse)의 개혁 시토회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은 그녀의 건강을 해쳤고 그녀는 서원을 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툴루즈 수도원에서 지냈던 마지막 밤에 성녀 요안나는 하느님의 특별한 비추임을 체험하였다. 그것은 설립자로서의 소명과 마리아 영성에 대한 직관이었다.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려는 그녀의 계획은 몇 년에 걸쳐 조금씩 윤곽이 드러났다. 즉 청소년 교육이라는 과제와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에도 마음을 써야 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정리되었다.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젊은 소녀들을 모아 라 모드(La Mothe)에 있는 자신의 땅에서 2년 동안 준비의 시간을 가졌고, 보르도에 극심한 역병이 발생했을 때 용감하게 시민들을 간호하였다. 그러던 중 1605년에 새로 부임한 예수회의 요한 드 보르드(Joannes de Bordes) 신부와 라이문두스(Raymundus) 신부를 비롯한 몇 명의 사제들이 영적으로 그녀의 헌신을 알아보고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되었다.
당시 보르도에서는 특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이 큰 문제였다. 대부분 칼뱅주의에 빠진 여교사들이 소녀들의 교육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예수회가 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것처럼 가톨릭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던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맡아줄 여성 수도회의 설립이 절실하던 때였다. 요한 신부와 성녀 요안나는 이런 점에서 서로 뜻을 같이 하고 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곧바로 수도회 설립 작업에 들어갔다. 1606년 3월 6일 성녀 요안나는 요한 신부의 도움으로 보르도의 대주교를 설득하여 특별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을 직접적인 사도직으로 하는 여성 수도회인 마리아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1607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1610년 마침내 보르도에 마리아회의 첫 번째 수녀원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수도회의 사도직을 실현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소녀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한때 그녀는 다른 수녀들의 음모에 휘말려 희생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모진 시련을 인내로써 극복하였다. 1640년 2월 2일 96세의 일기로 선종하여 보르도에 묻힌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프랑스 전역뿐만 아니라 에스파냐를 비롯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녀는 190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9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고르넬리오 (Cornelius) 형제들과 요안나 드 레토낙 (Jane de Lestonnac)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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