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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강에 서면
동짓달 힘 빠진 해가
구슬 석 섬을 뿌려 두고 갔다
물 꼬리 길게 끌며 가고 있는 배
그대 가슴에 저런 물길 하나 만들어
가서 안기고 싶다
봄날은 간다
이렇듯 흐린 날엔 누가
문 앞에 와서
내 이름을 불러 주면 좋겠다
보고 싶다고 꽃나무 아래라고
술 마시다가
목소리 보내오면 좋겠다
난리 난 듯 온 천지가 꽃이라도
아직은 니가 더 이쁘다고
거짓말도 해 주면 좋겠다
옛날 편지
바람이 참 좋습니다
어리고 유순한 연둣빛을 막 벗고
초록으로 몸 바꾸는
나뭇잎들이 참 좋은 때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우리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라고
당신이 물었을 때
바람에 나무이파리 흔들리는 소리라는 내 말에
그 바람에 옷자락 날리며
나 서 있는 언덕을 찾아오마고
그게 당신 사랑이라고
어깨를 감싸 안으며 좋아하느냐는 그 말에
왜 그땐 가만히 있었을까요
살짝 올려다보며 웃었을 때
눈 내리깔며 고개 흔들던 때, 그때
그 대답 같이 간 걸 당신 혹 알았을까요
잎들이 저리 고운데, 다시 오월인데
발아래 뿌리가 내리도록 기다리고 선 나를
아주 잊으신 건 아닌지요
이파리들 살랑대며 부르는 저 소릴
영 못 들으시는 건 아닌지요, 당신은
첫눈
늦은 밤에 걸려 오는 전화는 서럽다
술기 묻은 어눌한 목소리
잘 있었나? 날아오면
어질러진 술병, 변변찮은 안주가 놓인
쓸쓸한 방도 같이 와서
가슴이 콱 막히는데
연분홍 치마 나 함 해 봐라 조르다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그 담은 가사를 몰라서 몬 하겠다, 음음음”
언제나 노래는 거기서 끝이 나고
“니는 행복하나?
나는 사는 기 재미가 하나도 엄따”
착 가라앉은 음성
드러내지 못한 속내를
이 깊은 겨울밤
그는 찾아와 전하고 가는데
보고도 싶고 안고도 싶고
안겨서 실컷 울고도 싶은
뒤늦은 내 맘
잔인한 이 길, 꿈길 말고는 길이 없다
휘날리는 연분홍 치맛자락
세상 어디에, 어디다가 풀어 놓아야
그가 보고 와 줄까
천지가 눈으로 덮인 이런 밤에
먼 길 떠나신 뒤에
가신 지 한 해가 넘었습니다
언덕 옆을
차를 타고 지나치며 저기쯤이었겠다
걸어가던 자리를 짚어 본 저도
그곳을 안 가 본 지가 한 해에 가깝습니다
말로도 손짓으로도 안 되어 나오던 속마음을
떠나신 늦은 밤 빨래를 개키면서
눈물 뚝뚝 떨어뜨리며 풀었습니다
잊지야 않으셨겠지요
색종이 접듯 곱게
가슴에 저를 담아 가신다고 하셨으니
엉킨 실타래 같은 인연을 좇다 지쳐서
오리오리 조각내
바람 부는 산등성이에 제가 날린 줄은 모르시고
그 조각 하나 옷섶에 붙어 와서
이리 내 맘이 아플 줄도 모르시고
오래오래 두고 보겠다고
주머니 살짝 누르시며 웃으시던
바보 같은 당신
집 보는 집
조립식으로 앉혀
아이 키만 한 담을 시늉으로 둘렀는데
개 한 마리
앞발을 걸치고
가고 오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다
어르면 꼬리까지 흔드는
저걸 믿고
주인은
문 다 열어 두고 어디 갔다
가 볼 만한 물가
제각각 이름 다른 세 강이 만나 하나가 되어 흐른다는 삼강三江 나루에 백 년 묵은 주막이 있습니다
주모는 거기서 오십 년을 살았다 하고 뒤뜰 회화나무는 이백 살이 넘는다고 쓰여 있습니다
주사위같이 되똑한 그 집을 한다하는 똑똑한 이들이 찾아와서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책까지 냈습니다
손님을 접대하기에 가장 능률적인 동선으로 설계된 집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감탄하였지만 과연 몇이나 부엌을 들여다보며 그 생각을 했을는지요
벽에는 독사진이 얌전스레 올라앉아 있습니다
싫다는데도 누가 와서 억지로 찍은 것이라고 보리누름 한창일 때 찾아온 여자에게 할머니는 말하십니다
텃밭도 둘러보고 부엌도 보고 뱅뱅 돌며 저는 평생 안 늙을 것처럼 눈이 반짝이는 봄날 무논처럼 싱싱한 여자를 지켜보면서 몇 십 년 전 젊은 날을 생각하시는지 그냥 웃으시는 그이
사내와 새끼에게 치여서 짜증이 자글자글한 이맛전을 보며 힘들거들랑 둑 위에 올라가 한나절 물이 흘러가는 거나 한 번 보겠느냐고 가다가 막히면 산을 타 넘지 않고 휘감고 흘러가는 것을 갈라진 두 물이 다시 만나는 것을 한 번 알아보겠느냐고 가만가만 웃음으로 일러 주십니다
그런 할머니를 보며 사람도 오래되면 깊은 물처럼 될 수도 있구나 알면서 여자는 제 발밑에 든든한 뿌리 하나 생겨나서 또 돌아옵니다
세상에 따로 만나 같이 가는 것이 어디 물뿐이겠느냐고 느껴서 말이지요.
깊은 밤 술 한잔
동짓달 스무사흗날 산 아래 외딴집, 외롭고 고적하게 늙은 남자가 술을 마신다
마주 놓인 술잔, 하나는 젊고 하나는 늙고
짚단같이 싸고 앉아 고구마만 먹고 있는 건 나이 든 여자
젊은 여자는 귤을 벗기고 육포를 찢고 사이사이에 호호호 웃음 섞어 말꼬리를 부지런히 따라가며 제법 예쁘다
혼자 사는 옆집 남자가 해서 보낸 무생채를 푸른 접시에 담아 상 가운데에 놓고
남자는 조니워카 골드 라벨 뚜껑을 열고 술을 따르고 다시 뚜껑을 닫고 반듯하게 병을 놓고 잔 받침도 똑바로 놓고 담뱃갑과 불티나 라이터도 가지런히 놓고 몇 번이고 지치지도 않고 고쳐 놓고 또 고쳐 놓고 고쳐 놓는다
김아중의 ‘마리아’가 흐르고 배호도 나오고 두서없이 섞이는 노래로 모자라는가 보이지 않는 저쪽 방엔 텔레비전 혼자 왕왕거리며 사람을 부르는데
저 넓은 밭에서 겨우 고구마 반 자루를 건졌네, 멧돼지를 배부르게 하였으니 내 행위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고 남자는 말하고
그놈들은 이제 무얼 먹고 사나, 도대체
이 바람 찬 밤에 새끼 데리고 어디 밭둑을 헤집고 있을 어미가 생각나 여자는 울고 싶다
밤은 깊었는데 돌아가기도 너무 늦었는데 조바심하는 걸 부러 모른 척 구석구석 불 밝히며 붙잡는 남자는
바닥이 없는 깊은 우물 같기도 하고 너무 높은 데 있어 까마득히 먼 큰 새 같기도 하고 별도 없는 하늘 아래옷만 살아서 펄럭이고 온몸은 바람 속에서 또 애처로워
여름내 여러 짐승을 배부르게 하였으니 한세상 죄 많은 이를 위해 울어 주었으니 별이라도 한 무더기 쏟아져 저 허전한 속을 채워 주면 안 되는가
남자 만나 애 낳고 그렇게 저렇게 그냥 늙은 여자는 감당도 알음도 어려운 남자의 눈물을 나누어 받아 들고 난처하다 다시 보면 남자의 어깨에 얹힌 서러움은 또 그대로여서 자꾸 난처하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하여 더더구나 난처하다
새벽바람 찬 마당 끝내 없을 것 같던 헤어짐이 비로소 오고 망설이며 떼 놓는 걸음 돌아가는 자갈길 불빛 비치는 곳마다 마른 풀 와삭거리며 깨어나 가지 마라 가지 마라 붙드는데
문득 산 밑에서 터지는 고함 소리
날 새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 외로움에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저희가 무얼 어쩌라구요
대체 어쩌라구요
다시 가지런히 술잔도 챙기고 술병도 반듯하게 놓고 두고 온 저희 마음도 반듯하게 바로 놓으시고 술이나 더 드시지요, 그럴밖에 무어 다른 할 일이 있으실는지
지옥 같은 나날, 살아서 이 고통 다 겪어야 죽을 수도 있는 거야 스스로 달래며 고개고개 넘어온 저희에게 더는 짐 지우지 말으시구요 그냥 술이나 한잔, 낫게 한잔 더 드시는 건 어떨는지요, 당신
꿈, 한여름 밤의
계신 곳이 어디쯤인지 일러나 주시지요
무리 지어 앉은 저 여럿 가운데 누가 당신인지
짐작도 못 하겠는데 마음의 눈으로 보라니요
바람 불면 가는 바람의, 가는 바람의 뒤꼭지까지 잡고
바람보다 더 흔들리는 마음의 눈으로 찾으라니요
저마다 부르는 저 많은 들꽃 틈에서
자꾸만 강바람에 묻어 오는 당신 목소리
“날 찾아와, 날 찾아와.”
그러시지 말고 그냥 슬쩍 내 방에 오시면
새는 날엔 당신을 찾겠건마는
이슬에 젖지 않은 몸이 당신인 줄을 알겠건마는
이승과 저승 사이가 그리도 다른지
하필이면 그래, 꽃으로 다시 오시다니요
서라벌 억새
너는 가고 나는 남아서
한 오라기 바람에도 허리가 꺾였다
또 온다고 날갯짓하며 떠나가지만
그때까지 내가 남아 있을 줄 넌들 믿고 떠나랴
앉았던 자리 품었던 둥지
곳곳을 더듬어 헤매며
누워라 쓰러져라 바람은 보채는데
잊지 못할 그리운 자태 산기슭 돌아올 것 같아
죽는 일도 잊고 천 년을 또 이러고 있어야만 될 것 같다
나중에 나아중에
나중에, 나아중에
나는 이성민이하고 결혼할 거다
바보야, 결혼은 여자하고 하는 거야
그래야 남자아기도 낳고
여자아기도 낳지
그러는 성민이는 누구랑 결혼할 건데?
―엄마!
마흔다섯의 일기 중에서
한 시 오 분에 돌아오는 아이를 맞으러
밤마다 거리로 나갔다
마감 뉴스에서
상큼한 여자 아나운서가
“이제는 완연한 봄입니다” 했지만
빈 거리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고층 아파트 꼭대기, 삐익삐익 돌아가는 환풍기
어디 이보다 더 먼먼 어느 별에서
나 같은 어미가 보내는 하소연 같아
가슴 미어지는데
다섯 시간 반을 집에 있으려 돌아오는 아이를
기다리는 것밖에 아무 할 일이 없는
이런 세상이 또 어디에 있나
가로등도 꺼지고 집들도 다 어두운데
홀로 깨어 있는 커피 자판기 곁으로
아이들은 유령처럼 와서 동전을 떨어뜨리고
이 시간에 또 커피를 마셔야 할 만큼
공부가 남아 있느냐
여위어 지친 어깨를 누르는 새벽 찬 기운
졸다가 내린 아이의 손을 잡으며
눈물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능함에
어미는 뼈가 저렸다
할 수만 있다면, 너희를 위해서라면
우리가 누구를 죽이는 일인들 못하겠느냐
날마다 시들어 가는 열아홉의
가엾은 내 새끼야
산다는 것
원고 내라고 편지가 왔다
여기저기 끄적거린 종이들을 늘어놓고
조각 맞추기를 하는데
소포 왔다고 찾아가라고 관리실에서
인터폰이 오고, 내일이 모이는 날이니 잊지 말라고
낮 한 시라고 어머니회에서 전화 오고 생각해 보니
세탁소에 가서 남편 양복도 찾아 와야겠고
나간 김에 시장도 봐야 하고 아, 김치도 떨어졌고
깁다 만 헌옷처럼 실밥 툭툭 불거진 생각들을
휙 밀어 던져 놓고
밥하고 시장보고 소포도 찾고 옷도 챙겨 걸어놓고
바람처럼 돌아온 식구들
제자리로 들고 설거지도 끝났는데
느낌이고 무엇이고 다 달아나 버린
깨진 바가지 같은 머릿속
어질러도 되는, 맘껏 늘어놓아도 되는
내 방이 있어야 되겠다고 이를 악문다
이게 그래도 시인의 하루였다면
누가 본다면 참 웃을 일이 아니겠냐고
푸념하듯 써나가다 보니 지금은 새벽 한 시
도둑질하듯 그럭저럭 글 하나를 또 건졌고
새는 날에는
팩스라는 걸 이용해서 출판사엘 보내는
대단한 일도 할 것이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에도 차츰 익숙해지리라
이별다방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말자
어금니 꽉 문
시퍼런 하나가 가고
오려 붙인 듯 꼼짝 않고 있는
또 다른 하나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말자고, 살아서는?
그럼 죽어서는 되나, 괜찮나?
귀신이 돼서 오면
그때 넌 날 알아볼 수 있을까?
귀신같이 찾아온다고 말은 그렇게들 해
그렇지만 어디 숨었는지, 찾을 순 있을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잖아
혹 재수 좋게 널 찾았다고 해
좋아라 안기는 날
바람인 줄 지나치면, 모른 척하면
그땐 어떡하지?
죽기 전엔 널 찾지 말라고, 만나러 오면 안 된다고 했지?
죽을 만큼 보고 싶으면, 못 견디겠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고 가
살아서 만나지 말자 했으니 죽는 수밖에 없겠다
그거 말고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질 않아
온몸에 불이 다 꺼진 것 같고
숨소리만 빼고 다 죽었는지도 모르겠어
근데
너 정말 살아서는 나 다시 안 만날 거야?
진짜 나 없이도
십 년이 다섯 번 여섯 번 지나도 잘 살 자신 있냐고?
찻잔은 오래전에 김 올리기를 멈추었는데
눈물조차 없는 고요 속에
비바람 눈보라가 한참 일고 있는 중이다
허물
사방에 꽃씨 터지던 날
저 살던 곳 문밖을 나서 딴 세상을 알기 전까진
앉은 곳이 진흙 수렁이든 가시밭이든 그럭저럭 견딜 만해
오십 년 아니 백 년이라도
한 금씩 지워가며 살다가도 갈 수 있어, 하다가
한 번 사랑 그 언저리에 닿아
살이 데이는 지경을 알아 버릴라치면
다른 이가 고통이고 지옥 같다고 해도 꿈쩍 않던
그 단단한 껍데기 산지사방 터져 달아나 버려서
숲이건 길이건 아무 곳으로나
그러면서 정작 제 가고 싶던 곳, 보고 싶은 곳으로는 못 가고
깊은 산 어디만치 떨어져서는
죽죽 뻗은 잘난 나무 둥치 틀어 안고
어디서 기다릴 거라 여겼더니 여기 계셨어요
안아 보고 둘러보고 쓰다듬다가
그 아득한 꼭대기를 올라가 보자 미쳐 버리는 걸 누구라 알까
살아 있는 동안 거기 다다를 수나 있을 건가
제 몸이 남아나기나 할라나 걱정도 없이
작은 몸 연한 살에 물집 잡히고 피멍이 들면
제 몸을 적신 눈물로 그 흙 씻고 깨끗한 죄도 씻고
어리고 어리석은 맘으로 먼먼 길을 나서는
작은 무당벌레, 아니면 어느 애벌레를 혹 당신 아시는지
사랑이라고 노래, 노래 부르며
행복하게 온몸이 찢겨 세상에서 사라지는 걸 혹 짐작이나 하셨는지
어디 나무 아래 마른 날개옷 있거든
사랑이 이렇게도 남는구나 혹 생각은 해 보셨는지
누구도 아닌 당신에게 8
비 개인 뒤 맑은 하늘을 이고
초여름 거리를 걸어갑니다
나뭇잎 그림자마저 초록으로 내리는
싱싱한 한낮
다투어 피던 꽃들도 지고
이파리들이 크느라
세상이 온통 푸르름으로 넘쳐나는
그 바다를 헤쳐 나가는 발밑에서
조용히 울고 있는
얼굴이 하나 있습니다
봄바람이 불 때만
꽃피울 것을 허락받고도
여직도
시든 꽃잎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던
거리거리에서 울고 있는
붉은 내 마음입니다
사랑이여, 내 허전한 사랑이여
한 번도
힘주어 안거나
안겨 본 일이 없는데
그에게서 오는 편지는
늘 저릿한 아픔이다
문을 열면
잊었다가 새삼 눈에 들어오는
마당 가 꽃 진 나무 같은
가깝지도 뜨겁지도 않은
오래되어 그저 귀에 익은 그 목소리를
구절구절 펴 나가노라면
왜 언제나 서러웠는지
죽기 살기로 매달렸던 사랑
절절 끓던 그 시절이
이제는 생각도 안 나는
늙은 나무 같은 이 나이에
그저 한 십 년
벽에 붙은 그림처럼
눈 들어 바라보기만 하며 흘러갔다 한들
그게 이유일 수는 없는 터
꼭 알맞은 바람처럼
왜
그 안부는 내게 울음을 싣고 오는지
펴기도 전에 나는
눈물부터 꺼내 드는지
모르겠다
한 발 다가올 줄 모르고
당신은 왜
그냥 그 자리서 그렇게 기다리고만 섰는지도
수취인 불명
시리고 푸르러서
그냥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그런 하늘을 이고
저는 지금 걸어가고 있습니다
막 몸이 바뀌는 나무들의
누릇한 푸른 잎 사이로
바람이 참 좋은 오후입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난밤 알뜰히 더듬었던 당신 눈 코 입
지금 보니
손안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네요
힘주어 안았던 당신 몸이
깍지를 낄 만큼이었던지
팔이 모자랐던지 그냥 캄캄해요
보고 돌아온 지 몇 천 년이 지난 것 같기도 하고
어제인 듯도 싶고
목소리도 몸도 아득하여
나는 그만 길 위에서 울고 싶은데
잊은 것은 아니나 잃어버린 당신
만나서 자지러지던 그때가, 그대가
이리도 아득하다니요
내 걸어가는 길 끝에서
혹 가을을 만나거든 꼭 전해 들으세요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전하는 내 이 말을
꽃 피고 새 우는 봄날
흐드러지게 핀 홍매화 아래서
깔깔거리고 있는데
—저 새 나오도록 사진 좀 찍어 주소
돌아다보니 낯선 사내 하나 섰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셔터를 누르는데
그만 날아가는 직박구리
—새 날아갔는데요?
—개안심더 기양 찍어 주소
여자 셋이 아무리 아양을 떨어도
끝내 표정을 바꾸지 않던
그는
왜 하필 새를 담아 달라 했는지
그리운 사람
다시 오기라도 한 듯
새 날아간 하늘만 하염없이 보고 섰던
매화꽃 붉은 그늘에 눈이 붉던
봄날
낯선 그 남자
다시 살구꽃 피다
사랑이 왔다
눈이 없어, 스물둘
복사꽃 위에 앉는다는 게
내게로 잘못 왔다
좋으면서 떨리고
같이 온 이별
저만치 등 돌리고 선 게 보이는 눈 밝은 나이
올 때처럼 가벼이 너 가버리면
지워야 할 흔적
생각만으로도 겁이 나는데
잠자리 날개 같은 니 등에 올라타기엔
내가 너무 무겁다는 생각해 보긴 한 거니?
내 사랑은 눈이 있는데
넌, 그 눈 감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경주 남산에 봄 오면
황사 경계경보 내린 날
표지판 따라가다 길 잃고
앞산도 뒷산도 누런 산등성이에서
넋 놓고 앉아 있어 보면
할리데이비슨 세워 둔
밥집 마당
번쩍거리는 그놈을 침 흘리며 보고 또 보며
남자 허리 꽉 끌어안고 달려 볼 일이
이제는 영 없구나
터덜터덜 돌아서 볼라치면
산에 진달래
파딱파딱 점점이 붉어 오는 때
어느 젊은 죽음
재 올리는 법당 옆을 지나 보면
가는 일이
그리 대단하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네, 저절로 알아지고
새잎 돋는 나무 쳐다보며
지나간 봄은 참 아득하고
남은 봄도 아득하구나, 눈물 핑 돌 때
봄날에
봄날에 꽃 필 때 혼자 산에 가면
꽃그늘 아래서 술 한잔 마셔 보면
사랑도 목숨도
벌벌 떨며 붙들어도
저 산 너머 간다는 거 알아지고
가 버린 사람 그리워지면
바위 속 부처님
잘생긴 이마나 만져 보리라
봄에는, 봄날에는
개꿈
빈 접시를 보며
어쩔까 하고 있는데
—이것 좀 더 주시오, 맛나네
다시 온 깻잎 장아찌를 내려다보며
같잖게 목이 메인다
한 서너 달
상 차려 같이 살아 봤으면 좋겠네
세월 때가 묻어
아무 데 아무 때나 불쑥 드러나는
낯 두꺼운 속내
스스로도 민망한
낯익은 남자와의 어쩌다 마주한 밥상
물 흐르듯 그렇게
물이라고 쓰면
바닥에 복福자가 쓰인 사기대접
반 너머 담긴 물이 생각나고
햇살에 비쳐 먼지 자잘한 그 위에
진달래꽃 한 가지 걸쳐진 그림도 생각나고
물이라고 쓰면
문경 대승사
검푸른 숲 생각나고 그 아래를 흐르는
서늘한 물줄기 떠오르고
스스로 폭 넓어져
먼 아랫동네 모래바리 어디쯤 이르를 때
돌이고 바위고 다릿발이고
가릴 것 없이 안고 타넘고 미끄러지며
부끄럼 없이 좍좍 내달리는
힘찬 그 물도 생각나고
물이라고 쓰면
잠자듯 조용한 강
그 밑을 갔다 왔다 하는 고기들 떠오르고
물위를 차고 나는 물총새
이쁜 깃도 생각나고
아니 그보다
메말라 턱턱 갈라지는 내 몸을
한 방울 눈물로 다 적실 수 있는
당신 사랑도 이젠 알아지고
묶지도 가두지도 붙들지도 못해
그냥 달아나는
바람 같은 당신 맘도 훨씬 잘 보이고
섬, 당신
그리운 당신
바다가 보이는 언덕이에요
같이 오고 싶었는데
팔짱 끼고 파고들며 쳐다보고도 싶었고
숨차 하는 당신께
몰래 감춰 온 사탕도 드리고 싶었고
깔깔대며 장난치고 싶었고
싶었고, 싶었고 하고 싶은 거
너무 많아 셀 수도 없었는데
혼자 앉아 물만 보고 있어요
올라오다 주워 든 도토리 한 알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마주하고 한나절
한 일이란
내 안에 너무 깊이 깃들어서
나와 같아져 버린 당신,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고
바람을 바꿔 들이는 문이고
사람을 막아 주던 울타리이던 당신을
무딘 칼로 한 꺼풀 한 꺼풀 벗겨 내느라
손도 눈도 지친 하루였답니다
그렇게 너덜너덜 서투르게 뜯어낸 당신을
칭칭 동여맬 내 밧줄은
눈물과 서러움과 원망과 미움을 뒤섞어 짠 것이어서
끊어지지도 삭지도 않고
움직일수록 당신을 더 옥죄일 테지요
당신은
비바람 맞고 눈보라에 시달리며
천년 또 천년을 서 있어야 할 거예요
한기에 몸 떨며 당신이 들어설 때
겉옷을 마련해 두고 기다리던
그 많은 밤 내 눈물이
비로 내려 춥고 목마르면
혹 당신 속속들이 뉘우치며 날 생각할는지도
그러면
스르륵 이 밧줄 풀려
당신 이 산을 휘적휘적 걸어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아마도 아마도 당신 그리 못할 테지만
그런 일 없을 거지만
그래도 당신 만약 배에 오르거든
허리춤에 감기는 바람
물밑에 일렁이는 바다풀, 그거 나라고 알아주세요
버리고 떠나가서
천년도 짧다 기다리고 선, 나라고 알아주세요, 부디
이리 찬란한 세상, 눈에 드는 모두가 놀라워도
당신 이마 몇 오라기 머리카락
웃으면 보이던 이빨 고른 잇속이 잊혀지질 않네요
미안해요
더 참지 못하고 더 기다리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아서
아니 너무 사랑이 깊어서 바닥이 없었던
어리고 어리석던 내가요
이제 갈게요, 그리운 당신
잘 사세요, 부디, 아프지도 말고
귀가
보안등 아랠 지나
그림자를 줄였다 키웠다 해 가며
그가 돌아온다
이 풍진 세상을 목 놓아 부르며
동네 개들을 다 깨우면서
그가 온다
새끼들
배 곯리지 않으려 손 비비고
술 따르며 허허거리던 그가
발로 쓸며 오는 길바닥에
덜 탄 연탄재 위에 전봇대 밑에
그 아니라도 제 몸이 고달픈 풍진 세상은
먼저 나동그라지고
희망도 절망도 벌써 아닌 웬수 같은 마누라는
길에 널브러진 그림자 붙들어 안고
대장부의 기개도 주워 대문 잠그며
나도 마누라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운다
세상만사를 아직 그는 다 잊지 않아서
안방이 잠들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울면서
온 도시를 헤집고 다녔다
남의 눈이 따가워
그래도 짙은 선글라스 하나 걸치고
—립스틱 짙게 바르고
내일이면 잊으리, 잊으리
바라만 보아도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던
생각만 해도 하늘이 내게로 내려오고
꽃비가 쏟아지던
나의 사랑아, 나의 사람아
—내일이면 잊으리, 꼭 잊으리
매끄럽고 감칠맛 나던 이별사
발 흔들며
아이처럼 무심히 들으며
언젠가 그때가, 그때가 왔구나
떠나는 너는 잊어라
남은 내 맘엔 무엇이 남을까
—사랑이란 길지가 않더라
길지 않더라
걸어가노라면
사방 수천 군데서 다가오고 떠오르는
너의 얼굴, 나팔꽃 같은 웃음
두 주먹 쥐고
그래도 걸어가고 있는 내 안에 내리는
여름 비, 여름 소나기
—속절없는 사랑아, 사람아
마지막 선물처럼 잊어 줄 수 있다면
나는 좋겠다 정말 좋겠다
엄마, 엄마아
저물면 어김없이 돌아온다는
변함없는 나날이
내일도 모레도 언제나 있으리라 믿었기에
나가는 뒤통수에다 대고
뭐라고 구시렁거렸던 아침
그 아침이 다시는 오지 않을 줄
그때는 몰랐다
지쳐 땀 냄새 풍기며 돌아오는 니가
얼마나 복된 선물인 줄 모르고
무심히 받아들이던 나날
눈에 뜨이는 대로 나무라던 사소한,
참 사소한 그 잘못들이
이제는 다 괜찮은데, 괜찮은데
뼈까지 저린 물속
숨이 멎도록 날 불렀을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엄마는
날마다 몸이 떨리고 아프다
죄짓 듯 잠깐 눈 붙이는 사이
열 손가락마다 피를 흘리며 너는 찾아오는데
죽지 못해 받은 밥
밥알 하나하나가 나비가 되어
너를 안고 오면 좋겠구나, 에미는 운다
죄 많은 하루가 저물면
너를 만나는 날이 또 하루 당겨지고
꽃 피던 세월도 가고 이제는 여름인데
아직 차가운 물속
이제는 날개 달고
훨훨 날아오르면 안 되겠니
니 몸 만져라도 보게
멀쩡한 낯짝을 하고 뻔뻔한 저 바다
울음도 삼켜 버리는 저 잔인한 것을
다 마셔 그냥 죽여 버리고 싶다, 에미는
보고 싶은 내 아가
이제는 어디로 가야 너를 만나나
빈자貧者 일기
보증금 칠백만 원의 반지하 셋방을 떠나던 밤
늦도록 야간작업을 끝내고
속눈썹 쳐들 기운도 없는 마누라와 짐을 싼다
헤어져 흐물거리는 비키니 장 속에선
잊어 버렸던 미제 파카 볼펜도 나오고
삼단 서랍장 뒤에서는 백동전 몇 닢도 나왔다
형광등 줄을 기둥 삼아
느긋하게 집을 지은 거미가
배 갈라놓은 생선 같은 살림살이를
심상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무릎이 영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내 단벌 양복
옆에 나란히 걸린
지퍼가 튿어져 핀으로 꽂아 놓은 아내의 바지가
떠나가는 우리를 본다
창 앞에 서면
땅이 눈앞에 오고 고개를 비껴야 겨우 보이던 하늘
오늘은 별스레 별도 총총하고 어디서
버러지 우는 소리도 좋게 나는데
사 놓고 한 번 풀어 보지 않은 장롱 위
세신 금딱지 삼중 바닥 냄비
아내는 내일 새집에 가면 두부 넣고
돼지고기찌개를 끓일 것이라며
자는 아이에게 입을 맞추고
그 눈가에 문득 보이는 칼자국 같은 주름
피곤해서 죽을 기운도 없다던 아내는
보따리가 늘어 갈수록 부풀어 커져서
지상의 두 칸 방으로 날아가 버리고
자꾸 더워 오는 눈을 감추려
나는 천천히 금복주 뚜껑을 땄다
첫댓글 엄마, 엄마아 신청합니다.
가 볼 만한 물가
신청합니다.
'섬, 당신' 신청합니다.
시의 길이 때문에 낭송은 자신이 없구요. 낭독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