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오도송(悟道頌)
春有百花秋有月춘유백화추유월 平仄仄平平仄仄
夏有凉風冬有雪하유량풍동유설 仄仄平平平仄仄
若無閑事掛心頭막무한사괘심두 仄平平仄仄平平
便是人間好時節편시인간호시절 平仄平仄仄仄仄
무문혜개선사<無門慧開禪師>
봄에는 온갖 꽃이 피고,
가을에는 밝은 달이 뜨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하얀 눈이 온다면,
만약 부질없는 일에 마음 두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바라는 살기 좋은 시절이네,
이게송은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오도송(悟道頌)이다. 압운(押韻)은 월(月)은 입성(入聲) 운목(韻目)이고, 설(雪) 절(節)은 입성(入聲) 설통(屑統) 운족(韻族)이다. 칠언절구(七言絶句) 기승전결(起承轉結) 평측(平仄)도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으로 보면 맞지 않다. 무문혜개선사(無門慧開禪師)는 중국 남송(南宋) 때 고승(高僧)이다. 선사는 제자들에게 근기(根機) 개성(個性)에 맞게 화두(話頭)를 주어서 참선수행(參禪修行)하게 하였다. 48칙(則) 화두(話頭)를 엮어서 수행지침서(修行指針書)로 지도한 것이 무문관(無門關) 어록(語錄)이다. 오도송(悟道頌) 전구(轉句)에서도 말했듯이 수행자가 쓸데없은 일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절이라고 하였다. 굳건한 도심(道心)으로 치열하게 살면 반드시 오도의 순간이 온다는 말씀이다. 혜개선사(慧開禪師)는 옛 공안(公案) 48칙을 설법한 것을 혜개 선사 제자 종소(宗紹)가 엮는 것이고, 혜개선사(慧開禪師)는 무문관(無門關)을 통해서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체계화(體系化)시켰다. 무문관(無門關)은 선종(禪宗)의 입문서(入門書)다. 혜개선사도 수좌(首座) 때는 각처 선지식(善知識)을 참방(參榜) 했다. 처음에는 천용광(天龍曠)에게 출가해 가르침을 받았고, 이후 양기파(楊岐派) 강소성(江蘇省) 만수사(萬壽寺) 월림 사관(月林師觀)의 제자가 되었다. 사관(師觀)은 혜개에게 무자화두(無字 話頭)를 참구(參究)하라고 하였다. 혜개는 스승 문하에서 무자(無字)를 6년간 참구(參究) 하면서 ‘만약 수면(睡眠)에 빠지면 내 몸을 태워버리리라’라고 맹세(盟誓)하고 참선(參禪)했다. 혜개는 수면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선방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찧어 가며 정진하였다. 이렇게 혜개(慧開) 선사(禪師)는 치열(熾熱)하게 정진중(精進中)에 점심 공양을 알리는 북소리를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게 된다. 그때 읊은 게송이다. 쨍쨍한 해 마른하늘 둥둥 우레소리, 대지의 온갖 생령(生靈)들이 화들짝 눈을 뜨네, 삼라만상이 모두 머리 숙이니, 수미산이 벌떡 일어나서 춤을 추는구나! <靑天白日一聲雷 大地群生眼豁開 萬家森羅齊稽首 須彌勃跳舞三臺> 수행자가 일대사(一大事)를 마친 오도(悟道)의 소리다.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話頭)로 육년간(六年間) 벌겋게 당금질 풀무질, 하다가 점심 공양 알리는 북소리에 마음이 활짝 열렸다. 고성오도(鼓聲悟道)의 순간(瞬間)이다. 북소리에 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 견명성(見明星) 오도(悟道)와 같다. 깨달은 순간(瞬間)이다. 북소리 샛별에 집착하면 그것도 천착(舛錯)이다.
요즘 화두(話頭) 참선(參禪)을 문제 제기(問題提起)하는 사람들이 있다. 화두(話頭)가 문제(問題)가 아니라, 문제(問題)를 제기(提起)한 그 수행자(修行者)가 문제다. 화두(話頭)는 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목에 가시가 걸리듯이 딱 걸려 꽂혀야 한다.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이 “꽉 맺혀야 한다. 화두 따로 생각 따로면 헛수고다. 초점이 맞춰지지 않으면 화두 공부는 허사다. 화두는 들지 않아도 들어지고, 의심하지 않아도 의심이 되야 한다. 불거자거 불의자의<不擧自擧, 不疑自疑>가 핵심(核心)포인트다. 혜개선사(慧開禪師)같이 치열하게 수행정진(修行精進)하지 않으면 백년(百年) 허송세월(虛送歲月)이다. 화두(話頭)는 수행(修行) 방편(方便)을 학인(學人)에게 제시(提示)하는 선사(禪師)들의 관문(關門)이다. 그래서 선을 공부하려면 조사사 세워놓은 관문을 뚫어야 한다.<參禪須透祖師關>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禪師)도 무자관문(無字關門)을 투과(透過)한 것이다.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話頭) 선화(禪話)는 이렇다. 어느 학인이 조주선사에게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선사가 말하기를 없다(無). 고 했다. < 趙州和尙因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부처님께서는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선사(趙州禪師)는 왜? 없다고 했는가? 가, 의문(疑問) 의심(疑心)이다. 조주무자화두(趙州無字話頭) 기원(起源)이다. 화두(話頭)는 내 문제 내 내면(內面) 당면문제(當面問題)로 꽂쳐야 된다. 어정쩡쩡이 들어서는 허송세월이다. 앉으나 서나 가나오나 오매불망(寤寐不忘) 화두(話頭)로 의단독로(疑團獨露)가 되어야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禪師)마냥 대오각성(大悟覺醒)할 수가 있다. 미적지근한 신심(信心) 갖고는 백년허송(百年虛送)이다. 대장간 쇠 다루듯이 두들겨 잡 탈은 다 떨어져야 진금(眞金)이 된다. 육신 속에 펄펄 끓고 있는 욕망 덩어리로는 언감생심(焉敢生心) 입도 뻥끗 말라. 무문관(無門關) 1칙(則)도 조주무자(趙州無字)다. 혜개선사(慧開禪師)의 체증(體證)의 소리다. 머리로 이해하는 해오(解悟)가 아니라, 몸소 갈고 닦아 안으로 얻어진 자내증(自內證)의 법문(法門)이다. 그래서 활구법문(活句法門)이다. 위의 오도송(悟道頌)이 혜개선사(慧開禪師)의 깨친 소리다. 오늘은 남송 때 고승이었던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을 당시(唐詩) 평측운목(平仄韻目)으로 반추(反芻) 해보았다.
여여법당 화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