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3] 이봉운(李鳳雲) - 축복 3. 3년 제주도 피난생활 - 1
1 서대문 교회의 교인이 백여 명이 되었을 때 6.25가 일어나게 되어 지방에 있던 장남 장녀네를 제외한 6명이 남으로 남으로 걸어서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미선 교부에서 재부(在整) 기독교인들을 제주도로 피난시키는 첫 LST편으로 천여 명 중에 끼어 1951년 3월 20일에 모슬포에 상륙했다. 이때 내 나이는 46세였고 부인은 47세, 2남 수경은 18세, 3남 무경은 10세, 2녀 문경은 13세, 3녀 현경은 4세였다.
2 상륙은 했으나 낯익은 사람 하나 없고, 난민들은 목자 없는 양 떼같이 죽 끓듯 하였다. 이리저리 사방을 돌다가 뜻밖에 산석, 광옥 2세대와 고향 교인 2세대를 만나니 천국에서 만나는 듯했다. 5세대가 일행이 되어 말로만 듣던 제주도로 와서 산하를 즐기며, 전쟁의 고비를 넘긴 즐거움에 취하며 한가로이 걸었다.
3 40여 리를 걸어 서호리에 당도했을 때는 어둠이 깔리고 눈보라가 휘몰아쳤으며 몸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모르게 그 부락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4세대는 부락으로 들어가고 우리 2명은 눈보라를 맞으며 막연히 서 있었고, 모두 나만 쳐다보고 섰다. 인적도 없는 낯선 곳을 1km를 더 가서 해촌인 법환리에 들어가니 캄캄한 밤이었다.
4 지서에서 입주 수속을 하는데 고향 청년 신도 조(普)씨가 지서 주임임을 알았고 서호리는 식수가 없어 이 부락에 와서 길어다 먹는다는 것을 알았다. 모두 잘 되었다고 기뻐하였으나 하나님의 더 크고 좋은 경륜이 계셨던 것은 몰랐었다. 그것은 이요한씨와의 만남이었다.
5 제주에는 교회당이 별로 없으나 다행히도 이 부락에는 10여 평 정도의 장로교회가 있어 주일이면 400여 피난민이 몰려든다. 그러면 흡사 서울 남대문 도깨비시장을 방불케 하였다. 그러나 할 일 없는 피난민은 주일이면 여전히 법석인다.
6 어느 주일 예배 시간에 “피난민 중에 이단이 섞여 왔으니 주의들 하라” 한다. 이단이라는 자는 바로 우리 옆집 청년인데 이단으로 몰려 사람들이 마주 서지도 않았다. 빨갱이에게 놀란 나는 이단이라기보다 가장한 빨갱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관찰하니 성경에는 붉은 선이 무수히 쳐져 있고, 기도할 때는 눈을 뜨고 있었다.
7 나는 자꾸 가장한 간첩으로만 생각되어 조 주임에게 신고하겠다고 부인에게 말하니 알아보지도 않고 경솔히 하지 말라 한다. 내가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이 선생에게 무고한 고생을 시킬 뻔했고 내 신앙의 길도 막혔을 것이다.
8 피난민의 양곡 배급은 서귀포에서 했는데, 배급 날이면 온 동네가 모두 산보 겸 다녀온다. 한 번은 부인이 교회에 다녀와서, 이 선생은 믿음이 좋은 청년 같고 성경 해석도 오묘하니 한 번 만나 보라고 한다. 나는 선입관이 있어 그 말이 들리지도 않았고 몇 번 찾아온 것을 반기지도 않았다.
9 그 후 어느 날 내가 홀로 배급을 타러 가다가 우연히 이 선생을 만나 걸으며 이야기를 했다. 차츰 신앙 토론을 시작했는데 생각나는 것은 “신앙은 형식을 떠나 실천 신앙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10 참다운 신앙을 볼 수 없는 지금 세상에 그 말이 옳다 생각했고 올 때도 동행하며 토론하였다. “지금도 계시를 받을 수 있느냐” 물으니 자신 있게 “있다”고 대답한다.
11 계시는 구약에나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였으나 귀가 번쩍 뜨이며 저 사람은 계시를 받았는가 보다, 나도 그래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솟았다. 그 후로는 마주 앉은 집이고 해서 자주 만났다.
12 남의 눈을 피해 나무하러 가는 척하고 산에 올라 토론을 하였다. 갈수록 재미가 있고 사이가 가까워졌다. 점차 피난민의 눈이 무섭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의 신앙을 두둔하게 되었다. 어느 날은 “메시아가 온다” “재림은 인간으로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 때문에 이단으로 몰렸구나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