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로 형님 있잖습니까” 윤필용·이후락 술자리 최후 (53)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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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8기 출신인 윤필용은 박정희 대통령 사람이었다. 박 대통령은 5사단장 시절(1954년) 윤필용을 처음 만나 군수참모로 썼다. 이후 7사단장,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그를 데리고 다녔다. 윤필용은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은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기용했다.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민정(民政) 이양 뒤 윤필용은 군으로 돌아가 육군방첩부대장(65년)을 거쳐 맹호부대장으로 월남에 다녀왔다. 그리고 70년 수도경비사령관(소장) 자리에 올랐다. 서울을 포함해 수도권을 방위하는 수도경비사령부는 핵심 권력기관 중 하나였다. 당시 4대 권력기관으로 흔히 중앙정보부, 청와대 경호실, 군 보안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를 꼽았다.
1968년 10월 주월 맹호부대(수도사단) 사단장에 임명된 윤필용 소장(왼쪽)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출국 인사를 하고 있다. 가운데는 김계원 육군참모총장과 조상호 비서관. 윤필용은 72년 10월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각하의 후계자는 형님”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무너지게 된다. 사진 국가기록원
수경사령관에 오른 윤필용은 박 대통령의 총애를 믿고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 군의 주요 보직과 장성급 인사까지 관여하면서 ‘참모총장 대리’ 역할을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중장·대장급 군 선배 상당수가 설날이면 윤필용의 집에 세배를 다녀갈 지경이었다. 윤필용의 수경사가 있는 곳을 가리켜 ‘필동(筆洞) 육군본부’라 칭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 현대사 소사전: 수도경비사령부
1961년 6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해 창설된 군사령부. 창설 당시 수도방위사령부였던 이름이 63년 12월 수도경비사령부로 개칭됐다. 68년 1·21 사태 이후 대침투작전 임무가 추가됐다. 84년 군단급 부대인 현재의 수도방위사령부로 확장됐다. 수경사 30대대(그 후 30경비단)는 경복궁에 주둔한 청와대 근위부대로, 장교들의 출세 코스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중령 시절 30대대장을 지냈다. 30경비단은 79년 12·12 사태 때 신군부 세력의 모의·지휘 장소로 이용됐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96년 30경비단은 33경비단에 통폐합돼 제1경비단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윤필용은 나와 육사 동기지만 그와 대화를 주고받은 기억이 없다. 가까이 지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도 나는 비서실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박정희 의장과 이야기했다. 나는 그에 대해 ‘미구(未久)에 스스로 자리를 잃을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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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더중앙플러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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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는 강자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강자를 활용할 수는 있다. 한국과 월남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공산주의와 싸웠다. 세월이 흘러 월남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한국은 세계사의 주역이 됐다. 두 나라의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 월남은 미국에 의존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렸지만 한국은 미국을 활용해 자신을 키워 갔다. 미국은 허약한 나라에서 철수했으나 스스로를 돕는 나라에선 철수하지 않았다. 강자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이 대체로 이렇다.
1961년 7월 24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수원 공군기지를 방문해 F-86 세이버 제트 전투기에 올라타 포즈를 취했다. F-86 세이버는 6·25전쟁 때 미 공군이 사용했으며 북한 미그기를 상대로 큰 공을 세웠다.
일명 쌕쌕이로 불렸다. 한국 공군은 이 기종을 전쟁 뒤 도입했다. 미국은 한국군의 전력이 강해지면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신예 전투기 공급을 꺼리기도 했다. 사진 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