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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구시 기도시간에 / 행 3:1∼10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우리는 외국교회들의 많은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의 파송과 교회, 학교, 병원, 고아원을 세우고 식량원조 등등. 그리고 세계 3위의 선교사 파송 국가가 되어진 지금도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교회들의 여러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실시되고 있는 세미나들 가운데 아마 60% 이상은 미국 등지의 교회에서 실시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신학서적이 번역되었고, 신학교의 거의 모든 교수들이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분들입니다. 목사님들 가운데도 해외 신학교에서 공부한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어쩌면 복음의 빚을 가장 많이 진 나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감사한 게 하나 있습니다. 수입만 되고 있는 게 아니라 한국교회의 뜨거운 기도가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두 기둥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에 있어서는 외국교회의 도움을 많이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한국교회를 따라올 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기도원을 본따서 기도원이 세워지고, 우리의 새벽기도회를 본따서 외국교회에도 새벽기도회를 실시하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왜 우리가 기도를 수출하는 교회가 되었습니까?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 수가 몇 개입니까? 5만입니까? 그중에 아마 75%이상이 매일 새벽기도(저녁기도) 할 것입니다. 아마 50% 이상이 금요기도회 모임을 가질 것입니다(혹 다른 요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에 불이 붙지 않겠습니까? '행'을 살피면서 저는 초대교회와 우리 한국교회가 너무나도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특히 기도에 전심전력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한국교회도 초대교회처럼 될 소망이 있다는 것이고,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향우회 모임, 계 모임, 동창회 모임, 취미 생활하는데 모이기를 힘쓰지 말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역사가 120명에게 임했습니다. 그들은 뛰쳐나가서 외쳤습니다. 그러자 단 하루만에 믿는 자가 3000이나 더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모여서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모임 속엔 사도의 가르침이 있었고 교제가 있었고 떡을 뗌이 있었고 하나님께 찬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놀랄만한 사건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약 40세)이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치료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갔다가 이루어졌습니다. 곧 기도와 모이기에 힘 쓴 결과입니다.
1절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오후 3시(제 구시)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전에서 만나 주십니다. 집에서 기도할 수 있고, 집에서 하나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성전에 오르지 않았다면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성전은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기로 약속되어진 장소입니다. 그러기에 성전에 자주 와야 합니다. 자주 모여야 합니다. 기적은 기도를 통해서 많이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도 나타나고, 찬양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봉사하다가 기적을 체험한 사람도 많습니다. 평소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십시오. 평소에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면 필요할 때 기적이 나타납니다. 예배드리러 오는 시간에, 성경 공부하러 오는 시간에, 교회 청소하러 오는 시간에, 작정기도하러 오는 시간에, 새벽기도 하러 오는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기적을 체험함을 믿습니다.
2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성전 문 앞에 있었습니다. 왜 성전을 찾았습니까? 구걸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을 찾았고 못 걷게 된 이도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한쪽은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였고, 한쪽은 구걸하기 위해서, 돈 몇 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이 성전 찾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돈 몇 푼의 물질 축복이나 받기 위해서입니까?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왜 신앙생활 하십니까? 왜 예배드리러 오십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못 걷게 된 이 앞을 지나가자 손을 내밀고 구걸을 합니다. 구걸하는 그에게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6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에겐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줄 수 없었습니다. 대신 그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주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이것이 있다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나를 너무나 자랑합니다. 돈, 지식, 명예와 배경,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내 안에 내가 있어선 안 됩니다. 내 안에 내가 있다면 나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갈 2:20절의 바울의 고백을 아십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미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나를 자랑하나요? 우리 교회들을 살피고 우리 믿는 자들을 살펴보십시오.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도 괜찮은 것들만 추구합니다. 진짜 자랑해야 할 것은 자랑하지 않고, 천국에서 아무 소용없는 것들만 자랑합니다.
우리 갈보리교회가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가요? 여러분들이 전도 대상자들에게 우리 교회를 소개할 때 무엇을 자랑하나요? 어떤 교회는 몇 천평, 몇 백평 성전 건축했다고 자랑합니다. 교역자 수가 많음을 자랑하고 교인 수가 많음을 자랑합니다. 선교비 지출 많고 구제비 지출 많다고 자랑합니다. 헌금이 많이 나온다고 자랑합니다. 지식수준이 높은 것도 자랑합니다. 생활 수준이 높은 것도 자랑합니다. 젊은 층이 많은 것도 자랑입니다.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개척교회, 임대교회는 부끄러운 것입니까? 몇 명, 몇 십명 앉혀 놓고 예배드리는 게 부끄러움인가요? 헌금 적게 나오는 게 부끄러운 일인가요? 나이드신 분들만 많다고 해서 그게 기죽을 일인가요? 이런 자세는 못 걷게 된 이의 자세입니다. 못 걷게 된 이는 오로지 돈밖에 몰랐습니다. 돈보다 더 귀하고 귀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선 알지도 못했고, 모시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들이 헌금 자랑하고 건물 자랑한다면 못 걷게 된 이와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못 걷게 된 이의 관심사하고 똑같은 게 아닌가요? 그러면서 어떻게 교회라고 할 수가 있나요? 교회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자의 자랑은 미모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남자의 자랑은 돈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그러면 그분을 자랑하고 그분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가요? 그렇다면 우리 갈보리교회엔 예수님이 계신다고, 예수님이 살아계신다고 자랑하십시오. 이보다 더 큰 자랑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값어치 있는 자랑은 없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나에게, 또 우리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우리는 최고의 교회요 최고의 사람입니다. 믿습니까? 우리 갈보리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 땅에서 우리 갈보리교회보다 더 귀한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큰 자랑이 어디 있습니까? 불신 세상을 향하여 값어치 있는 것을 줍시다. 돈은 세상이 더 많습니다. 좋은 건물도 세상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귀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일만 제대로 하면 오늘 우리들의 교회도 초대교회처럼 칭송받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없이 교회가 세워지고, 어떻게 예수님 없이 예수님 믿는 자가 될 수 있나요? 예수님을 주시기 바랍니다. 주고 주고, 또 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는 것과 돈을 주는 것 중 못 걷게 된 이에게 어느 것이 더 큰 축복입니까? 돈은 한 끼의 양식을 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여러분 그래도 돈없는 게 부끄러움인가요?
구걸하는 못 걷게 된 이에게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합니다(6절). 돈은 잠깐 문제를 해결하지만 예수님 만나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됩니다. 가장 큰 축복을 누립니다. 못 걷게 된 이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였기에 40여 년 동안 걸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니 걷겠다는 소망도 없고, 걷는 기쁨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걷는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걷는 것은 그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이지만, 또한 가장 큰 불가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걷는다는 가능성은 0%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니 근본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베드로는 강력하게 명령합니다. 베드로가 특별히 기도한 게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 이름으로 강하게 명령했을 뿐입니다. 강하게 명령했다는 것은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이요 자신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이론적으로는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의심하면서 기도하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기적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이 기도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니 무슨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어떤 성도 한 분(훗날 기도원원장이 됨)이 집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충만히 받았습니다. 집회에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서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데 차 안에서 못 걷게 된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은혜도 받았겠다 그 아이를 붙잡고 한참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 일어서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묵묵부답입니다. 얼마나 창피했던지 그 다음 정류장에서 쏜살같이 내려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내 안에 예수가 계신데 왜 능력이 안 나타납니까? 베드로가 모신 예수님과 내가 모신 예수님이 차이가 있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믿음 차이입니다. 내가 하는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믿음을 99%가 아닌 100%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온전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7절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이것은 분명히 일어선다는 베드로의 확신을 볼 수 있고, 동시에 베드로가 도와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권능은 그리스도의 권능이지만 도움의 손은 베드로의 손입니다. 힘들고 지친 이웃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으로 치료하고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일어서도록 돕는 손길이 되어야 합니다. 병들어 오랫동안 누워 있는 사람을 일으키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혼자 일어선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옆에서 누군가가 붙잡아 주고 거들어 준다면 쉽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맡기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다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신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도와야 합니다. 치료되도록, 일어서도록, 부축하고, 기도해 주고, 나누고, 그럴 때 일어서고 회복됩니다.
여러분이 힘들 때 제가 곁에 서서 일어서도록 손을 붙잡겠습니다. 제가 힘들 때 여러분이 제 곁에 서서 손을 붙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또 여러분 서로가 서로를 붙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가든 우리의 인생에 주님께서 끝까지 동행해 주십니다. 그러나 나와 주님만 동행하는게 아니고 내 곁에 다른 친구들이 함께 동행해 준다면 얼마나 즐거운 여행이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예수 안에서 한 형제라는 게 무엇이고, 한 가족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한 공동체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저 일주일에 한두 번 함께 예배드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이기에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축복도 함께 해야 합니다.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돕고, 서로를 사랑하고, 적은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고,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옆에서 일어서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이웃이 보입니까? 여러분이 한쪽 손만 잡아 준다 해도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는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손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잡았습니다. 각각 모세의 한쪽 손을 잡아 줬을 뿐인데 그 결과는 이스라엘의 대승리였습니다.
서로를 도웁시다. 누군가 나를 도울 때는 일어서야 합니다. 내가 끝까지 일어서지 않으려고 하면 일어설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수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도움받고 있고, 특히 성령 하나님께서 돕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일어설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안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일어서십시오. 일어서도록 몸부림치십시오. 설교를 듣고만 끝낸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도행전을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초대교회처럼 '행'을 이루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못 걷게 된 이에겐 믿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치료해 주셨습니다. 본래 주님은 믿음을 보시고 믿음대로 이루어주십니다. 그래서 먼저 믿음을 키워 주시고 나서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간혹 믿음이 없을지라도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안된다고 생각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못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8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뛰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완벽하게 치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베드로가 치료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믿는 자가 날마다 더하니라' 믿습니까? 이런 모든 일이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성전에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이 바로 문제 해결과 기적의 시간이 됨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