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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헤브 스쿨오브아트 미술유학 디자인유학 교육기관에서 독일 산업디자인을 얘기하다!
현재 한국의 많은 학생들이 유럽의 예술강국 독일 미술유학 디자인유학에 대해 많은 궁금증이 있어 르-헤브 유학전문 교육에서 독일 의 디자인 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제품디자인이 처음 출현했던 때를 보면 여러 국가를 비교해보아도 제품이 시장에 나타나는 방식이 문화적이었을 뿐 아니라, 특별한 경제적 중요성을 띠었음을 보여줍니다. 1851년 런던에서 처음 세계 산업대박람회가 개최된 이후, 영국에서는 단순한 역사적 장식을 배제한 개혁과 사상을 기반으로 윌리엄 모리스 등 미술/공예운동과 같은 산업디자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실용적이고 기술 지향적인 디자인 개발 및 디자이너의 훈련과 교육은 특히 아티스트를 위한 교육 제도의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고트프리드 셈퍼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즉 훌륭한 사례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은 여러 전시회를 개최토록 하였으며 (1867년 이후 종종 공예학교와 연계하여 미술관 및 공예관이 독일의 여러 도시에 설립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운동과 연대하여 1900년경에는 기존의 역사주의에서 의식적으로 방향을 달리한 아르데꼬 양식이 새롭게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양식은 '펜'과 '유겐트' 등과 같은 잡지에 의해 급속하고도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르데꼬는 많은 옹호자들의 전폭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대량생산 산업에 계속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표준화와 전형화에 반대하고 나선 생활미학
그 당시에는 통합된 전체 개념으로서의 예술적인 디자인이 생활의 모든 부분을 보다 세련되게 만들 수 있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활 미학의 전형화와 표준화에 반발심을 느낀 몇몇 예술가들은 예술에 있어 개성이 산업사회의 요구 사항들, 즉 표준화와 전형화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혹은 제품디자인이라 불리우는 프로덕트를 위한 체계적인 디자인 개발은 베를린에 위치한 전기회사 중 하나인 AEG의 피터 베렌스 작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술의 어드바이저로서 그는 이미 현재의 의미로 디자이너 역할까지 맡아, 프로덕트와 광고디자인, 심지어는 공장의 건축 설계에도 가담하였습니다. 다시말해서 그는 오늘날 C.I. 출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입니다.
1907년 뮌헨의 아티스트, 건축가, 공업 디자이너들로 이루어지 D.W.B(독일 공예가 연맹)가 설립돼, 아트와 산업이 양대 공동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아트, 산업과 기술의 상호 협력을 통해 보다 세련된 프로덕트를 생산하려는 D.W.B.의 목표는 이외에도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을 예술의 한 분야로 정착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 이러한 노력은 국민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연결되었으며 이는 곧 생활용품, 가구, 작업장의 시설, 수송 시스템, 개인 빌딩과 도시 전체의 건축으로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중 생활의 품격과 기호를 앙양시키려는 시도는 교육적인 배려와 후원, 그리고 굿 디자인 및 유능한 디자이너들의 교육 등으로 많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D.W.B.가 굿 디자인을 채택, 문화적 효과를 거둔 대표적인 실례는 하겐에 폴크방 뮤지엄을 설립한 칼 에른스트 오스트하우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또 한델 및 게베르베 소재 독일 미술관도 설립하였고, 피터 베렌스, 발터 그로피우스, 브루노 타우트, 엔리 반 데 벨데를 비롯한 그 시대의 정상급 디자이너, 아티스트, 건축가들과 함께 문화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결정체 역할을 한 독일 미술 디자인 학교 교육
앞서 말한 피터 베렌스, 발터 그로피우스, 헤르만 무더지우스, 리하르트 리어머슈미트, 브루노 타우트, 헨리 반 데 벨데와 같은 디자이너들의 실용적이고 논리적인 특성의 우수한 작품 다음으로 가장 꾸준하고 결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준 것은 바로 미술 디자인 학교 교육이었습니다. 현존하는 미술 및 공예 학교 '에센 조형대학'과는 별도로, '19년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이마르에 세운 바우하우스가 바로 그 실례입니다.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에 끼친 바우하우스이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먼저 제품 디자이너들을 위해 처음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제품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미학원리를 개발하여 창조과정에 대한 책무를 다 하였습니다. 또한 미술 디자인 학교 내의 공방을 통하여 램프, 가구와 같은 새로운 디자인 및 견본을 제작하면서 산업계와의 공동 노력을 충실히 수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기이에는 정치적, 사회적 활동이 디자인 동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더우기 '33년부터 '45년까지 국가 사회주의 기간 중에는 많은 수의 유능한 디자이너들이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야 했거나 작품 활동을 중단해야 했고, 아주 극소수만이 제한된 범위내에서 직업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45년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국가 재건 사업이 한창일 때는 높아진 솝 성향과의 결합으로 제품생산은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품디자인은 주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제품을 문화적 거울로서 보고 굿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고분분투하였으며, 또한 국가 경제의 한 요소로서 그 기능이 강조되어 '53년 연방 정부에 의해 설립된 조형 위원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미아 시이거에 의해 수년간 이끌어져 오고 있는 동 위원회는 독일 제품에 굿 디자인상을 제정, 디자인 관련 단체간에 디자인을 강조하고 독일 국내외의 독일 제품이 성공할 수 있도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53년 이 시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울름 조형 대학(HfG)의 설립입니다. 울름 조형 대학은 바우하우스를 계승, 계속해서 모든 디자인 영역에 새로운 방법론, 위치, 목표를 개발하고, 그 효율성의 정도와 범위를 증진시켜 나갔습니다. 새로운 민주사회에 기여하는 산업 제품의 디자인은 형식적 기능적인 면, 즉 사물의 모럴이라는 법칙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울름의 특징은 다방면에 걸친 연구조사와 개발 프로젝트 뿐만 아니라 교수-학습의 공동 형태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68년에 정치적 압력으로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울름의 영향력은 오늘날 우리 생활의 일부분으로 많고도 다양한 디자인 제품 형태를 이룬채 남아있습니다. 울름 졸업생들 또한 디자이너로 성공하여 스튜디오를 갖고 있으며, 세계 도처의 단과대학과 종합대학의 교수요원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감성과 합리성
60년대와 70년대에 디자인의 목적과 효과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의 범위가 증가하였습니다. 한편에서는 마이크로 전자공학이나 컴퓨터 프로세스와 같은 주요 기술 개발이 첨가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환경을 위한 제품 생산의 기피에 다른 문제들이 제기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그 직업의 중요성과 디자이너들이 스스로를 보는 태도가 변하였습니다. 오늘날 독일 디자인을 한번 관찰해보면 다음과 같은 경향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기능주의 디자인에 대해 자주 거론되는 매우 단편적이고 비판적 논의 때문에 결국 하위 문화적 아이디어들을 통합함은 물론 예술적 대상으로 하는 방향으로 재료를 사용하여 감각적인 양식을 우선케하는 디자인으로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둘째, 표현적 특성이 차용되거나 양식화되고 기술화된 형태에 치우쳤습니다. 셋째, CAM에서 CIM까지 일체의 방법론을 도입한 컴퓨터를 활용하여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최대로 극대화시키려는 경향입니다. 넷째, 최선의 목적과 유용성을 지닌 제품 개발을 지향하고 기본적인 의도를 충족시키려는 경향입니다. 이것은 독일 디자인의 전형적인 특성이며 어떤 의미에서 바우하우스 및 울름 학교의 사상이 발전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나열한 사항들은 변화할 가능성이 충분한 것들입니다. 오늘날 모든 디자인은 일반적으로 계속 발전하는 기술을 활용하여 보다 나은 삶의 가치를 제공해 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를 위한 교육은 3개의 종합대학과 5개의 미술대학 그리고 7개의 단과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후 더 많은 예술학교들이 각 지방자치주에 설립되었습니다. 이런 미술 디자인 학교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 생태학을 포함한 다른 모든 차원에 대한 책임과 사회 도덕적 태도는 독일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줄기이며, 이 점이 바로 독일 디자인을 성공으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여기까지 독일의 산업디자인 발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독일은 모든 교육 과정이 무상 교육 체재입니다. 그래서 독일로 미술유학 디자인유학을 가고자 하는학생들은 인터네셔널 학생들이라해도 누구나 무상교육 대상이 됩니다.
한국 학생들이 미술유학 디자인유학을 준비할 때 프랑스와 독일의 무상 교육 시스템을 안다면 많은 학생들이 큰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해외로 미술유학 디자인유학을 고민하는 학생들은 유럽 유학을 생각해 보는 것도 저렴하게 유학을 갈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입니다.
르-헤브 스쿨오브아트 미술 디자인유학 교육에서 독일의 역사 History of Germany를 얘기하다!
오늘은 독일 시각디자인유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 르-헤브에서 독일 히스토리를 간단히 언급 하려고 합니다.
독일은 총면적 약 35만 6천 평방킬로미터에 총인구 대략 7천9백만인 독일은 1871년 여러 작은 연방국이 하나의 제국으로 탄생하였고 세계 1차 대전 후에는 연방적 국가가 되었습니다. 1933년부터 '45년까지 아돌프 히틀러가 내각을 구성하여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실패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됨에 따라 1990년까지 독일은 서독(FRG)과 동독(GDR)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통일이 되면서 통일 독일은 동독의 다섯 개 연방 주를 새로 추가하는 선에서 서독의 기본법(헌법)을 고수, 독일 연방 공화국이라는 종전의 이름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독일의 수도도 역시 서독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정했습니다. 서독은 서방세계의 점령하에 1949년에 설립되어 1955년 이래로 소위 기본법이라는 헌법체제하에 하나의 독립국으로서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 헌법에 따르면 독일연방공화국은 의회 민주주의를 갖춘 입헌 국가입니다.
마침내는 서 베를린을 포함하여 11개의 연방국들로 구성되었으며 약 6천만(1989년 통계)의 인구를 가진 248,000 연방 킬로미터의 면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독은 소련의 점령하에 1949년에 설립되어 농업혁명, 상. 공업국 유화, 막스-레닌주의 도입으로 인한 교육개혁, 반대 세력 숙청이라는 과정을 통해 1955년부터 하나의 독립국가로서 사회주의 국가로 부상했습니다.
일찍이 1945년에 세워졌던 철의 장막 서쪽으로 피난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1961년 월 13일 베를린장벽이 건립됨으로써 저지당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동독이 사회주의 국가로의 기초를 굳건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면적은 약 108,000 평방킬로미터 인구는 1천6백만입니다. 1989년 11월 동독의 시민들이 베를린장벽을 강제로 허물로 자유선거를 함으로써 통일 독일은 16개의 연방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새로운 정치 상황, 양국의 상이한 생활환경 그리고 서로 다른 조직 체계 그리고 처음 1945년 이래로 발전되어온 계급제도로 인해 특히 동독 입장에서는 전보다 훨씬 많은 경제적, 심리적 적응이라는 문제들이 야기되었습니다. 독일은 철강산업, 자동차, 전자산업, 전기, 화학산업, 기타 서비스산업의 주요지사들을 가진 매우 산업화된 국가입니다. 유럽공동체라는 네트워크 내에서 독일이 식량생산 증가에 기여했던 것은 이제 더 이상 독일 국내적 과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가적 보조금과 함께 공급 문제를 충당하고 있는 농산물 공동시장이 유럽공동체의 주역을 담당해오고 있습니다.
르-헤브 스쿨오브아트 미술 디자인유학 교육에서 독일 시각디자인을 얘기하다!
시각디자인은 커뮤니케이션 산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부상해왔습니다. 따라서 그래픽 디자이너의 사회적 위치는 주관적인 예술적 생산 이상의 작업의 결과를 추구하는 경제적 의미를 담당하는 단계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발전을 가져온 주요 계기는 20년대와 30년대의 데사우 및 바이마르 시절의 바우하우스와 2차 대전 이후의 울름 조형대학과 같은 역사적인 교육기관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일상용품의 시각적 디자인도 환경디자인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다른 여러 디자인 대학들도 이러한 맥락화에 시각디자인을 더욱 활성화시켰으며, 차세대 디자이너들이 더 나은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준비와 자격들을 갖출 수 있도록 최신의 발전된 전자 기술을 활용토록 하였습니다. 독일에서는 디자이너와 디자인 단체들이 시각디자인을 새로운 문화적 차원으로 이끌어가고 있으며, 그들의 작업 결과가 인정받을 만큼 전문성을 갖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만일 교육 기관들의 수준 높은 교육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고도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독일의 통일 이후 디자인계는 신선한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하나의 유럽 국가로 통일된다는 것은 어떤 발전적 면모를 보여주는 것인 만큼 새로운 과업과 새로운 도전을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유럽 대륙에 일찍부터 출현했던 몇몇 특수한 디자인 단체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국제그래픽 협회(AGI)와 같은 국제단체는 그 중요성이 회원 각자의 독자성에 있으며, 디자인의 대중화 및 세계 여러 나라의 상이한 시장에의 적응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국제 그래픽 협회(AGI) 단체야말로 아시아에 새로운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유럽에서 변화하고 있는 상황을 조정해가야만 합니다. 또한 21세기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모든 직업 간의 결속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AGI 독일 회원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리의 생활 문화를 이루고 있는 환경디자인과 그것의 공헌 가능성을 부추기고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비주얼커뮤니케이션은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경제적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할지라도 사회의 문화적 표현이 중요시되고 있는 지역에서는 비주얼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나 영향력은 단순한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매체 산업과 다른 문화기관들은 정보 홍보를 위해 심미적으로 정확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활용하도록 하는데 그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미래에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은 기본적인 인간 환경을 더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독일의 간단한 히스토리와 시각디자인의 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마칩니다. 독일로 미술유학 디자인유학을 생각하고 있는 학생들은 독일의 역사적 배경과 독일의 시각디자인의 시작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미술유학, 디자인유학, 제품디자인유학, 시각디자인유학, 건축유학을 준비하시는데 참고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