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산길과 바닷길을 휘돌아 걷는다. 익숙함과 안락함을 버리고 거칠고 낯선 길을 한없이 걸었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제주도가 왜 좋은지 왜 아름다운지를 알게 된다. 대자연이 기묘하게 빚어놓은 풍광 앞에 서면 그 순간만은 달고 왔던 세상 시름을 다 내려놓는다.
돌도 절리로 서 있으니 멋지고 아름답다. 파란 하늘과 끝 모를 에메랄드빛 바다와 어우러지니 돌기둥도 매력을 발한다. 바람이 밀고 오는 파도 소리도 경쾌하게 들린다. 해풍이 몰아칠수록 파도가 거칠어질수록, 이보다 더한 풍경이 있을까 싶다. 웅장하고 장대하다. 마치 정교하게 깎아 다듬어 세워놓은 듯 육각형 돌기둥이 겹겹이 우뚝우뚝 솟았다. 높은 절벽으로 펼쳐진 풍광에 천혜의 위대함과 절묘함을 동시에 느낀다. 제주 첫 여행에서 마주했던 ‘대포 주상절리’다.
풍경을 만나기 전 마치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설렘에 가슴이 먼저 쿵쿵거렸다. 하필 그날따라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흥건하게 젖은 나무 계단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여기서 미끄러진다면 천 길 벼랑 아래 바닷속이다. 갈지 자 나무 계단을 한참 내려가서야 보게 된 주상절리다. 환상적인 풍광에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광활한 바다를 마주한 채 비를 맞고 선 검은 절리가 더 신기하고 기묘하다. 수직 육각형 돌기둥들이 서귀포 중문 해안을 따라 일정하게 촘촘하게 서 있다. 눈 아래로는 마치 육각형 타일을 깔아놓은 것처럼 거북 등 모양의 절리도 볼 수 있다. 아무리 솜씨 좋은 조각가라도 빚어낼 수 없는 자연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조형 작품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웅장함에 온몸이 전율이 느껴진다.
‘25만 년 전 분화구에서 분출한 용암이 흘러 냉각될 때 육각형 형태로 형성되었다’는 입구 안내표지의 설명이다. 하지만 나는 왠지 과학적인 설명은 믿어지지 않는다. 어느 솜씨 좋은 석공들의 예리한 조각칼로도 이처럼 섬세하고 정교하게 빚어낼 수는 없었을 게다. 차라리 신이 만든 거대한 조형물이라면 믿음이 갈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느 바다신의 주술로 만들어 놓은 신의 궁전으로 심증이 가니 말이다. 또는 변덕스러운 신의 장난질로 여겨진다. 심심하고 무료했던 신은 용암을 뿜어 지옥 불바다를 만들었다가 다시 아름다운 천국 비경을 만들어 놓은 듯하다. 풍광 앞에서 별별 상상을 하게 된다.
탁 트인 푸른 바다. 파도는 끝없이 밀려와 부딪치기를 반복한다.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물 가루가 되어도 밀려오기를 멈추지를 않는다. 때론 잔잔하게 다가와서 어루만지고, 때론 현란한 춤사위로 유혹하며 끌어안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집채 같은 파도로 밀려와 더 세고 거칠게 부딪치는 지독한 파도의 절리 사랑이다. 하지만 무심한 모습 그대로 변함없는 돌기둥이다.
이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저런 사내가 있다면 여자의 전부를 걸어도 좋으리라. 되돌아보면 내 모든 것이라 여겼던 바위 같은 그런 사랑 하나 있었건만, 잠깐 꾼 꿈처럼, 사람의 생이란 백 년을 버텨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무쇠처럼 강하게 여겼던 가정의 기둥도. 한순간 힘을 잃고 무너져 버렸다. 그도 변함없이 지켜주는 돌기둥이었다면 지금쯤 가슴 아픈 그리움을 안고 살고 있지 않았을 텐데. 광활한 푸른 바다와 조화롭게 서 있는 주상절리다. 얼마를 살아내면 저 모습으로 서 있을까. 얼마를 견뎌내야 이별의 슬픔도 담담해질까. 주상절리는 몇십만 년 전 형성된 모습 그대로 영원한 세월을 지켜내고 있다. 아프게 살아온 삶들도 흘러가면 대포 주상절리처럼 절묘하고 아름다운 풍광처럼 내 살아낸 흔적들도 그렇게 남겨지려나.
자연의 역사를 보았다. 새삼 경애함을 느꼈다. 처음 보게 된 그때부터였다. 서귀포 대포 주상절리를 마음에 품고 사는 나만의 짝사랑이 시작이었다. 제주 올레 코스를 완주하고 남는 시간이 주어지면 그리운 임 만나러 가듯 일부러 찾아가는 곳이다. 주상절리는 계절과 날씨에 따라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파도가 솟구칠 때마다 더 기막힌 풍광을 펼쳐낸다. 몇 번이나 보고 또 봐도 감동과 탄성이 저절로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그래도 돌아설 때는 아쉬운 마음에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멈추고 되돌아보게 된다.
흰 파도와 파란 하늘, 검은 돌기둥 위로 무성한 초록 숲이 조화로운 풍경을 만든다. 어느 유명하다는 색채의 화가라도 대자연이 만들어내는 색감을 흉내 낼 수 있을까. 거친 바람이 쉴 새 없이 파도를 일으켜 세운다. 파도가 밀려오는 힘에 따라 돌기둥을 때릴 때의 소리는 다르다. 높고 낮은 울림이 리듬이 되어 웅장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어느 음악가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최고의 환상곡이다. 조형 예술작품으로 여겨진다. 거대하고, 아름답고, 찬란하다.
마음이 저절로 겸손해진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두 무릎이라도 꿇고 싶다. 억겁의 세월로 견뎌낸 주상절리를 바라보니 인간의 한 생은 한낱 부질없는 짧은 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질게 살아낸 내 삶도 잠깐 스쳐 가는 바람처럼 허무하고 속절없다. 떠난 이를 원망했던 마음도,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의 집착도 놓으라 한다. 가볍고 자유롭게 남은 생을 살라 한다.
첫댓글 최 작가님의 수필을 읽고 나니 과거에 매달려 굳어있던 저의 마음이 스르르 녹아 흐를 것 같습니다.
마치 서정시 한 편을 읽은 것 같습니다. 그리도 지치게 하던 무더위도 이제 제 갈 길을 재촉하고 있는가 봅니다.
아침에 창을 여니 바람 냄새가 가을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글 많이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