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
1929년에 태어나서 나치의 독일 하에 자라난 하버마스(Jurgen Habermas)는 후기 비판이론을 이론적으로 종합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그는 1971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슈타른베르그에 있는 막스 프랑크 연구소에서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그는 비판이론이라는 틀을 과감히 벗어나서 과학론, 해석학, 언어철학 등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대가답게 해결해 나간다. 그의 관심은 광범위하다. 그의 목표는 외관상 상충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방법적 접근들을 조리있게 통합할 수 있는 체계를 사회과학에 제공하는 것이다.
(1) 변증법적 과학론
후기 현대철학을 특징짓는 사건 중의 하나는 바로 ?실증주의 논쟁?이다. 아도르노와 포퍼간에 1961년에 일어난 이 논쟁은 큰 파문을 일으켰고, 그 후에 이들의 제자인 하버마스와 알베르트 사이에 일어난 비판이론과 분석적 이론간의 방법론적 논쟁은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정신과학을 자연과학과 구분하여 이해의 학으로 규정한 딜타이의 입장은 하버마스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진다.
하버마스는 논리실증주의에 근거한 포퍼와 비판적 합리주의의 자연과학에 토대한 알베르트의 통일과학적 방법론에 대해 날카로운 공격을 한다. 하버마스는 사회과학의 방법을 해석학적 방법으로 규정하면서 과학주의에 대항한다. 하버마스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분석적·경험적 방법에 변증법을 대치하고 개별적 사회현상과 전체로서의 사회사이의 변증법적 중재를 강조한다.
그는 전체로서의 사회의 선이해가 부분적 사회현상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분석적·경험적 방법은 역사적 사실이나 자연현상 혹은 사회현상을 동일한 법칙하에서 다룬다. 이에 반해 하버마스는 사회현상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학문 이전의 보편적 경험의 토대로 돌아가서 해석되어야함을 강조한다.
또한 하버마스는 과학과 실천의 분리를 주도하는 분석적·경험적 방법에 대해서도 대항한다. 어떤 과학이론이든지간에 이미 모종의 가치판단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인식과 가치사이의 변증법적 중재과정은 기본적인 틀이다.
특히 사회과학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사이의 변증법적 상호관계는 근본범주로서 기능한다. 하버마스는 그의 변증법을 해석학의 방법 절차와 연결시킨다. 인식객체에 대해 인식주체는 이미 무엇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해석학적 순환에 의해 사회과학에 대한 해석학적 이해의 필연성이 요청된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해석학에 대해 살핀 바 있지만, 하버마스의 이론은 비판이론에서 따로 다루기 위해 남겨 두었던 것이다.
하버마스는 1965년 정교수 취임강연인 ?인식과 관심?에서 실증주의에 대해 더욱 목소리를 높여 대항한다. 실증주의적인 과학론은 인식주체의 관심이나 사회관련성을 무시하고 가치중립성을 주장하지만, 사실상 자연과학도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술지배의 관심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모든 인식을 주도하는 관심을 3가지로 구분한다. 경험적·분석적 과학은 기술적인 관심을 융합하고, 역사적-해석학적 과학은 실천적 관심을 그리고 비판적으로 방향을 취하는 과학은 해방적 관심을 융합한다.
첫번째가 실증주의의 태도이고 두번째가 정신과학이론인 해석학의 태도이라면, 셋째는 인간을 모든 강압으로부터 해방하고 인간적인 삶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비판적 사회과학의 태도이다.
하버마스는 1968년에 같은 제목으로 출판한 ?인식과 관심?이란 저서에서 이 주제를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 특히 헤겔, 맑스, 딜타이, 프로이드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통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경험적·분석적 방법의 한계를 해석학적 접근으로 극복하기 위해 딜타이의 해석학을 맑스적인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특히 가다머의 해석학을 비판이론적 관점에서 받아 들인다. 하버마스와 가다머는 근본적인 점에서는 같은 견해를 보이지만, 특히 전통의 본질에 과한 견해는 의견을 달리한다. 이 양자가 이해는 전통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된 의견을 보이지만, 가다머가 언어적 전통이 모든 비판에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의 권위를 비판할 어떤 통로도 인정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하버마스가 비판한다. 이것은 의도된 의미와 드러난 의미사이에 모순이 생기더라도 의도된 의미가 주어진 전통의 체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가진다.
그러므로 하버마스는 가다머가 말하는 전통이 만약 거짓된 합의의 산물이라면, 그 자체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대상임을 강조한다.
버마스는 전통의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가다머와는 달리 권위는 끓임없이 이성에 의해 파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버마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상호소통적 과정 속에 구체화되어 있고 전통 속에 왜곡되고 은폐되어 있는 권력관계들을 드러내는 데 해방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순수하게 해석학적인 접근만으로는 이 이데올로기의 해체가 가능하지 않다. 하버마스는 보다 충분한 대안을 찾는다. 그는 일차적으로 맑스를 통해 실증주의와 해석학을 통합하는 비판이론을 형성하려고 한다.
경험적·분석적 방법이 현실을 기술적 지배의 관심에서 다루고, 해석학이 사회적 행위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상호주관적 지평을 확립하려는 실천적 관심이 주도한다. 그러나 이 양자는 한계를 가진다. 이 양자는 다같이 자기반성적 계기를 결여한다. 그러므로 하버마스는 일차적으로 맑스로부터 이 반성적 계기를 찾지만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판정한다. 그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기원을 탐구할 수 있는 틀로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끌어들인다. 프로이드의 이론은 맑스가 간파하지 못한 구조를 제시한다. 사회제도는 의사소통을 왜곡하는 틀이며 문화전통은 무의식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이 맑스에게는 충분히 감지되지 못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정신분석학은 방법적 자기반성을 구체화하는 학문의 유일하고 명백한 예이다. 정신분석학은 비판적 사회이론의 구성을 위한 중요한 지침들과 반성적 과학의 논리를 제공해 준다. 정신분석학의 분석절차는 경험·분석학의 설명과 해석학의 이해의 절차를 통합하는 과정이다. 피분석자에 대한 분석은 인과적 설명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매개된 상호소통적 이해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이런 관점에서 프로이드가 사용했던 과정과 방법들을 ‘심층해석학’으로 부른다.
(2) 의사소통이론
현대의 고도산업사회가 철저하게 관리되어 있는 사회라면,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의 영역은 점차 축소되어 간다. 하버마스의 후기 사상의 주제는 이 축소된 공공성(Offentlichkeit)의 영역을 개방함으로써 이상적인 대화상황이 가능하게 되는 지평을 마련하는 것이다. 후기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인간소외의 문제를 극복하고 여론이 지배하는 열린사회를 지향해 간다.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권력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대중의 탈정치화를 막고 거침없는 의사소통으로 충만된 공공성의 영역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버마스는 1971년 ?의사소통능력의 이론을 위한 서론?과 1976년 ?보편적 화용론?에서 이런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다룬다. 의사소통능력이론의 과제는 대화의 참여자가 이상적인 언어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따라야할 규칙체계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상호주관적 제조건을 탐구한다. 이런 조건이 없으면 이상적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왜곡되기 쉽다.
그는 이상적 대화가 가능하기 위한 규칙을 4가지로 말한다.
첫째, 서로가 알아 들을 수 있게 표현한다. 둘째, 참된 명제를 전달해야 한다. 셋째, 진실되게 표현해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올바르게 표현해야 한다. 하버마스는 이상적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여러 조건들을 밝히고 이들을 재구성하는 분야를 ?보편적 화용론?(Universalpragmatik)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정상적인 대화상황 하에서만 정당화된 합의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담론(Diskurs)을 통한 합의로서의 진리설은 사회이론의 인식론적 근간이 되었다.
이 보편적 화용론은 촘스키(N. Chomsky)의 언어학과 오스틴(Austin)이나 서얼(Searl)의 언어행위이론에 토대를 둔다. 보편적 화용론은 일반적으로 언어적 상황의 하부구조(언어술에 있어서 문장을 사용하는 규칙들)에 관심을 갖는다. 이 하부구조는 모든 문장이 언술됨을 통해 함축되어 있는 ‘실재와의 관련성’을 검토함으로써 드러낼 수 있다. 특히 오스틴이 주장하는 언어의 행위수행적(illocutionary)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하버마스는 언어행위이론을 모델로 하여 자신의 의사소통능력이론을 형성해 간다.
모든 언술은 화자와 청자가 상호 작용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즉 청자는 화자에 의해 의도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 자유로운 언어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규칙들을 재구성하는 것이 보편적 화용론의 과제이다. 특히 서얼이 자유로운 언어행위를 위해 든 4가지의 유형은 위에서 든 하버마스의 4가지 규칙으로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