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묵상:
사울의 딸 미갈의 관점에서 본문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미갈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딸로 태어났지만, 일평생 불행한 삶을 살았다.
1)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미갈을 다윗과 정략적으로 결혼하도록 했다.
사울은 다윗이 미갈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다윗에게 블레셋 사람의 양피 백개를 가져 오라고 했다.
그 이유는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이기 위해서였다.
미갈이 당시 영웅이었던 다윗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순수한 사랑으로 인한 결혼도 아니었고 양가의 축복을 받는 결혼도 아니었던 것이었다.
미갈의 입장에서는 아버지 사울의 시기심으로 인해 이용당한 결혼이었던 것이다.
2) 결혼 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미갈은 다윗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사자들을 다윗의 신혼집에 보내어 밤새 지키다가 아침에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그 밤에 미갈은 다윗을 창에 달아내려서 도망하게 했고,
다윗이 도망갈 시간을 확보해 주기 위해, 다윗의 침상에 우상을 놓고 그가 병들었다고 속였다.
미갈의 입장에서는 아버지 사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편 다윗과 이별해야 했고, 거짓말까지 해야 했던 것이다.
3) 다윗이 도피생활을 하자, 사울은 미갈을 발디(엘)에게 억지로 재혼하도록 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사울이 그의 딸 다윗의 아내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 주었더라"
"사울이 ~ 주었더라"
미갈이 무슨 물건인가?
하지만, 사울은 미갈을 억지로 재혼시킨 것이었다.
4) 다윗이 도피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다윗은 미갈을 다시 아내로 데리고 왔다.
다윗은 사울로부터의 오랜 도피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미갈을 다시 아내로 데리고 왔다.
어찌 보면 좋은 일 같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이야기이다.
다윗의 도피 생활을 약 10년으로 보고, 유다의 왕으로 지낸 기간을 7년 6개월로 본다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미갈을 다시 데리고 온 시점은 헤어진 후 약 15~20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미갈이 발디(엘)과 결혼 생활을 한 지는
최소한 10~15년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결혼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다윗은 미갈을 억지로 발디(엘)에게서 데리고 온 것이었다.
성경은 이 부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미갈)을 빼앗아 오매"
"그의 남편(발디엘)이 그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다윗이 미갈을 발디엘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었다.
미갈과 발디엘의 금슬은 좋았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발디엘이 차마 미갈을 보낼 수 없어서 울면서 그녀를 따라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1) 다윗에게 다시 끌려오다시피한, 당시 미갈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버지 사울과 오라버니(혹은 남동생) 요나단은 전장에서 이미 전사했다.
발디엘과 새로운 가정을 꾸려 지난 10~15년간 서로 사랑하며 잘 살고 있었는데, 그 가정을 억지로 떠나야 했다.
다윗에게 다시 와 보니, 다윗에게는 이미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이 있었고, 다윗은 수많은 처첩들도 두고 있었다.
2) 그렇다면, 다윗은 왜 미갈을 발디엘에게서 빼앗아 자기 옆에 두려고 했을까?
다윗은 사울의 집안에서 두 사람을 데리고 온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데리고 온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요나단과의 약조가 있었고, 그 약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므비보셋을 보살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미갈은 왜 데리고 왔을까?
여기에 의문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다윗은 미갈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
미갈이 아니었으면, 사울에게 이미 죽임을 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발디엘과 새로운 가정을 꾸려서 잘 살고 있던 미갈을 데리고 오는 것이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미갈을 데리고 온 것은 아닐까?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다윗의 왕궁에 살게 한 이유도 정치적인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본문 23절,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느니라" 이 본문도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미갈은 다윗의 처음 아내였고,
사울로부터 죽을 위기의 순간에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은 미갈에 대한 애정이나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오자, 기뻐서 춤을 추고 즐거워했다.
그런데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입고 있던 에봇이 아래로 흘러내렸던 것 같다.
나중에 다윗이 모든 행사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 미갈이 다윗에게 한 마디 했다.
20절,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20절,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두 가지 생각이 든다.
1) 미갈은 왜 이렇게 가시돋힌 말을 했을까? 조금 유하게 말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부분은 조금 후에 살펴 보자)
2) 말투가 아니라 내용만 본다면, 아내가 남편에게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담임목사가 예배를 드리다가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춤을 추게 되었다.
그러다가 바지가 흘러내려 속옷이 대중들에게 다 보이게 되었다.
예배를 다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 아내인 사모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께 전심을 다해서 예배드리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바지가 흘러 내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예배드리는 것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른 성도들, 특히 여자 성도들도 다 보고 있잖아요. 이것을 보고 시험에 드는 성도들도 있을 거에요."
다윗이 미갈의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는가?
21절,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만약 다윗이 여기까지만 말을 했으면, 자신에게도 미갈에게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이 말 뒤에 한 마디를 더 했다.
아주 고약한 말이었다. 천천히 읽어 보라.
21절,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21절,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이것이 미갈에게 할 소리인가?
다윗이 성경에서 유명한 인물이라고,
그가 한 말이 모두 맞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은 되었을지는 몰라도,
가정에서는 완전히 실패한 아버지자 남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미갈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아버지 사울과 오라버니(혹은 남동생) 요나단을 전장에서 모두 잃었다.
발디엘과 새롭게 꾸린 가정에서 강압에 의해서 나오게 되었다.
와보니 다윗에게는 수많은 아내와 첩이 있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다윗이 지금 기뻐 뛰노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미갈의 아버지와 집안을 버리셨기 때문이란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던 다윗이 미갈을 데리고 온 후,
그녀를 어떻게 대우했을까?
안 봐도 비디오다.
왜 미갈의 입에서 가시돋힌 말이 나왔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대목이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축복된 장면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 가정 안에서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막 대했는지, 그리고 그 여인이 얼마나 고통하며 아파하는지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남편과 아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우리는 혹시 집은 내팽개치고 바깥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
한 나라를 세우기 이전에 저희에게 주신 가정을 먼저 바로 세울 수 있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큰 일을 하기 이전에 작은 일에 신경을 쓰는 자가 되게 하시고,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신중하게 할 줄 아는 자가 되게 하시며,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을 넘어뜨리고 죽이는 도구가 아니라 세우고 살리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