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열에
시달리며 Raymond Carver를 읽는다. 그는 50이 되던 해에 죽었다. 그 (짧다면) 짧은 생은 글 속에 이미 투명하다. 그는 아이(들)을 향한 애증으로 평생을 앓았던 것 같다. 애들만 아니었다면 알코올중독도 없었을 거라는 말처럼 무책임하고도 솔직한 술회가 또 어디 있을까.
그가
처음으로 돈에 대한 걱정 없이 글쓰기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에게 거액의 자금을 수여한 단체는
‘장편소설 계획서 1부를 제출할 것’을 요구사항으로 제시해 온다. 그 제안을 받고 그는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겠노라고 했다. 그는 화장실에 들어가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로 술을 끊었다고 한다.
Carver를 읽는 일은, 화장실에 들어가 홀로 소리 없이 흐느끼고 나온 그의 흐트러진 매무새와 충혈된 안구를 모른 채 해주는 무덤덤함으로서의
독자됨을 요구한다. 나는 무심하게 그를 읽는다. 그가 칸막이
객실로, 새벽 열차 역으로, 황량한 교외의 풀밭으로, 푹 꺼진 소파 위로, 싸구려 모텔 수영장으로, 병원 대합실로, 변기 뒤에 술병이 숨겨진 다락방으로 향할 때, 나는 무심히 그의 걸음을 따라 걷는다. 나는 그를 지켜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역시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나와 그 사이의 이 침묵을, 아니, ‘소리없음’을 은은히 감상한다.
Appreciation이라는 영국 말보다 더 적절하게 이 상황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음미하며, 그것이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Carver의 ‘소리없음’ 혹은 무뚝뚝함에 동참한다.
한
사람의 체온이 두 사람의 것으로 변모하며 외려 더 식어버리는 과정을, 외로운 이의 체취에 더 외로운 누군가의 체취가
더해져 숨이 막혀오는 순간을, Carver는 내 곁에 심드렁히 던지고 사라진다. 나는 한 사람의 것일 때보다 더 민감해진 체온과 한 사람의 것보다 더 미묘해진 체취 앞에 남겨진 채, 그것들이 남겨놓은 흔적을, 어떤 상징도 될 수 없을 그 물질들의 메아리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 본다.
사람이라는 일,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는 일, ‘오, 하느님!’이라고 작게 외쳐보는 일, 그리고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화장실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일들 앞에서 나는 잠시 감상적으로 변할 것만 같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가 홀로 소리 없이 흐느끼고 나온 나의 흐트러진 매무새와 충혈된 안구를 모른 채 하며, 나는 다시, Carver에게로 돌아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니, 정말, 아무 일도 없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