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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고전읽기] 발췌문입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서설
〔영어판(1892년)〕
이 작은 저술은 본래 더 큰 책의 일부이다. 1875년경에 베를린 대학의 사강사 E. 뒤링 박사는 자신이 사회주의로 개종했음을 갑작스럽고도 꽤나 떠들썩하게 공표하면서, 독일의 공중들에게 상세한 사회주의 이론뿐만 아니라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완벽한 실천적 계획까지 선사하였다. 그가 자신의 선행자들을 두들겨 팬 것은 물론이다; 누구보다도 맑스에게는 자신의 분노를 대접째 퍼부으면서 경의를 표했다.
이러한 일은, 독일 사회주의당의 두 분파−아이제나하 파와 라쌀레파−가 막 융합을 완수함으로써 역량을 크게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이러한 역량 전체를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사용할 수도 있게 되었을 무렵에 일어났다. 독일 사회주의당은 급속하게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을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기 위한 첫째 조건은 새로 획득된 통일이 위협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뒤링 박사는 공공연히 자기 개인 주위에 하나의 종파를, 즉 장래의 분리된 당의 핵심을 형성하기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좋든 싫든 우리에게 던져진 결투의 장갑을 받아들여 격전을 끝까지 치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해도 확실히 지루한 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독일 사람들에겐 놀랄 만큼 지독한 철저함이 있는데, 이를 근본적 심오함이라고 말하든 심오한 근본성이라고 말하든 아무래(405)도 좋다.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새로운 교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발표하려 한다면, 그는 먼저 일체를 포괄하는 체계로 그것을 완성해야 한다. 그는, 논리학의 첫 번째 원리뿐만 아니라 우주의 근본 법칙까지도 종국적으로는 모든 것에 왕관을 씌우는 이 새로 발견된 이론을 이끌어 내는 것만을 목적으로 영원에서부터 존재했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뒤링 박사는 이 점에서 이러한 국민적 표준에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정신 철학, 도덕 철학, 자연 철학, 역사 철학 따위의 조금도 모자라지 않은 완벽한 ‘철학 체계’ ;완벽한 ‘정치 경제학 및 사회주의 체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치 경제학의 비판적 역사’−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묵직한 두꺼운 8절판 책 세 권, 이전의 모든 철학자들 및 경제 학자들 전부와 특히 맑스에 맞서 출동된 논증의 세 군단−사실상 완벽한 ‘과학 변혁’의 시도−이러한 것이 내가 조준해야 할 것들이었다. 나는 가능한 모든 대상들을 다루어야 했다 ;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복본위제에 이르기까지 ; 물질과 운동의 영원성에서 도덕 관념의 일시적 본성에 이르기까지 ; 다윈의 자연 선택에서 미래 사회의 청소년 교육에 이르기까지. 어쨌든 나의 논적의 체계적 광대함은, 맑스와 내가 이 매우 다양한 주제들에 대하여 가졌던 견해를 그에게 대항하여 이전보다 훨씬 연관성 있는 형식으로 개진할 기회를 내게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그렇지 않았다면 달갑지 않았을 이 과제를 내가 떠맡게 된 주요한 이유였다.
나의 답변은 처음에는 사회주의당의 중앙 기관지였던 라이프찌히의 『전진』에 연재 논문들로 발표되었고, 나중에는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이라는 책으로 발표되었는데, 이 책의 제2판은 1886년에 쮜리히에서 나왔다.
나의 친구이며 현재 릴 출신의 프랑스 하원 의원인 뽈 라파르그의 요청으로 나는 이 책의 세 장을 소책자로 편집하였는데, 그는 이것을 번역하여 1880년에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프랑스 어 대본에 의거하여 폴란드 어판과 에스빠냐 어판이 기획되었다. 1883년에는 우리 독일 친구들이 이 소책자를 원어로 발간했다. 그 이래로 독일어 대본에 기초하여 이딸리아 어, 러시아 어, 덴마크 어, 네덜란드 어 및 루마니아 어 번역판이 출판되었다. 그리하여 이 작은 저술은 본(406) 영어판까지 합하여 열 개의 언어로 보급되어 있다. 내가 알기로는 어떤 다른 사회주의 저작도, 1848년의 우리의 『공산주의당 선언』이나 맑스의 『자본론』까지도, 그렇게 여러 번 번역된 적은 없었다. 독일에서 이 저술은 4판을 거듭하면서 발행 총부수가 대략 20,000 부에 이르게 되었다.
부록 「마르크」는 독일 사회주의당 내에 독일 토지 소유의 역사와 발전에 관한 몇 가지 기초적 지식을 보급할 의도로 집필된 것이다. 이것은, 이미 이 당의 영향력이 도시의 모든 노동자 층에까지 대략 미치게 되었으며 농촌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획득이 중요하게 되었을 때에 더욱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부록을 번역에 포함시킨 이유는, 모든 게르만 종족들에 공통적인 토지 보유의 본원적 형태와 그것의 쇠퇴의 역사가 영국에서는 독일에서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원본을 그대로 두었으며 따라서 최근에 막심 꼬발레브스끼가 제출한 가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 가설에 따르면 경지와 초지는 마르크 성원들에게 분할되기에 앞서 여러 세대를 포괄하는 커다란 가부장적인 가족 공동체에 의해 공동 계정으로 경작되고 있었으며(이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남슬라브의 자드루가가 실례이다), 분할은 나중에 공동체가 너무 커져서 공동 경영이 어렵게 되었을 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꼬발레프스끼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은 것 같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이용되고 있는 경제학적 표현들은, 그것들이 새로운 것인 한에서 맑스의 『자본』의 영어판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들과 일치한다. 우리는, 대상들이 생산자들의 사용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교환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도 생산되는, 즉 사용 가치로서가 아니라 상품으로서 생산되는 경제적 국면을 “상품 생산”이라고 지칭한다. 이러한 국면은 교환을 위한 생산이 처음으로 시작되었을 때부터 현재의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 이러한 국면은 자본주의적 생산 아래에서, 즉 생산 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을 제외한 일체의 생산 수단을 빼앗긴 사람들인 노동자들을 임금을 대가로 고용하는, 그리하여 생산물 판매 가격 가운데 입체금을 초과하는 여분을 챙겨 넣는 조건 아래에서 비로소 완전하게 발전하게 된다. 우리는 중세 이래의 공업 생산의 역사를 다음의 세 시기로 구분한(409)다 : 1. 수공업. 몇몇 직인들과 도제들을 거느린 소규모 수공업 장인. 여기에서는 각각의 노동자가 완성품을 제작한다 ; 2. 매뉴팩처. 여기에서는 더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큰 작업장에 모여 분업의 원리에 따라 완성품을 제작하고, 각각의 노동자는 부분 작업만을 행하며, 그리하여 생산물은 모든 사람들이 손을 차례로 거친 후에야 완성된다 ; 3. 현대적 공업. 여기에서는 생산물이 동력으로 움직이는 기계에 의해 제작되며, 노동자의 활동은 기계 장치의 작업을 감독하고 바로잡는 데 국한된다.
나는 이 소책자의 내용이 영국의 공중들 가운데 상당한 부분에게 모욕을 줄 것임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 대륙인들이 영국의 ‘덕망 있는 사람들’, 곧 영국의 속물들의 선입관을 조금이라도 고려했다면, 사정은 우리에게 이렇게 불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저술은 우리가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옹호하고 있는데, 이 유물론이라는 단어는 영국의 꽤 많은 독자들의 귀에 몹시 거슬릴 것이다. ‘불가지론’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유물론은−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칠 세기부터의 모든 현대 유물론의 본래 고향은 바로−영국이다.
“유물론은 타고난 대영 제국의 아들이다. 이미 대영 제국의 스콜라 학자 던즈 스코터스는 ‘물질은 사유할 수 없을까’라고 자문했다.
이러한 기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는 신의 전능함을 자신의 도피처로 삼았다. 즉 그는 신학 자체로 하여금 유물론을 설교하도록 강요했다. 더군다나 그는 유명론자였다. 유명론은 영국의 유물론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주요한 요소로서 나타나며, 일반적으로 유물론의 최초의 표현이다.
영국 유물론의 진정한 원조는 베이컨이다. 자연 과학은 그에게 진정한 과학으로 여겨지며, 감각적인 물리학은 자연 과학의 가장 주된 부분으로 여겨진다. 아낙사고라스가 자신의 동질소와 함께, 그리고 데모크리트가 자신의 원자들과 함께 빈번히 그의 전거들이 된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감각은 그릇됨이 없으며 모든 인식의 원천이다. 과학은 경험 과학이며, 과학의 요체는 합리적 방법을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에 적용하는 데에 있다. 귀(410)납, 분석, 비교, 관찰, 실험 등이 합리적 방법의 주요 조건들이다. 물질의 타고난 속성들 가운데서 운동이 최초의, 그리고 가장 주요한 속성인바, 단지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운동으로서 그러할 뿐만 아니라 물질의 충동, 생기, 긴장력으로서, 물질의 번민−야콥 뵈메의 표현을 사용하자면−으로서도 훨씬 더 그러하다. 물질의 원시적 형태들은 살아 있는, 개별화 작용을 하는, 물질에 내재하는, 특유의 차이들을 생산하는 본질력들이다. 〔*저자주-번민: “번민Qual”이라는 것은 철학적 언어 유희이다. 번민은 문자 그대로는 모종의 행위를 추동하는 고통을 의미한다; 동시에 신비주의자 뵈메는 이 독일어 단어에 라틴 어 qualitas(속성)의 의미를 약간 가미하고 있다; 그의 “번민”은 외부로부터 가해진 고통과는 달리 사물의 자발적 발전−이 번민에 내맡겨진 관련이나 인물−에서 형성되고 또 역으로 이 발전을 촉신시키게 작용하는 활동화의 원리이다.〕
최초의 창조자인 베이컨에 있어서, 유물론은 아직 소박한 방식으로나마 하나의 전면적 발전의 맹아를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다. 물질은 시적이고 감각적인 광채를 내면서 인간 전체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다. 이에 반해 그의 잠언적인 교의 자체는 아직 신학적인 자가당착들로 가득 차 있다.
이후의 발전 속에서 일면적으로 된다. 홉스는 베이컨의 유물론을 체계화한 인물이다. 감성은 꽃다움을 잃어버리고, 기하학자의 추상적 감성이 된다. 형이하학적 운동은 기계적 혹은 수학적 운동에 희생으로 바쳐진다 ; 기하학의 주요 과학으로 선언된다. 유물론은 인간에게 적대적이게 된다.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살 없이 앙상한 정신을 자기 자신의 영역 안에서 극복할 수 있기 위해서, 유물론은 스스로 자신의 육체에 매질을 가하여 고행자가 되어야 한다. 유물론은 지성적 존재로 등장하지만, 그 지성의 가차 없는 귀결들을 전개한다.
홉스가 베이컨으로부터 출발해서 논증하는 바대로 감성이 인간에게 모든 인식을 제공한다면, 직관, 사상, 표상 등등은 많든 적든 그 감각적 형태를 벗어 버린 물체 세계의 환상들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은 이 환상들에 명(411)칭을 붙일 수 있을 뿐이다. 한 명칭이 여러 환상들에 적용될 수 있다. 더욱이 이 명칭들의 명칭들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든 이념들이 그 본원을 감각 세계에서 찾도록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단어는 한 단어 이상이라고 주장하고 표상된 항상 개별적인 존재 이외에 또한 보편적인 존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일 것이다. 비물체적 실체라고 하는 것은 차라리 비물체적 물체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모순이다. 물체, 존재,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제적 관념이다. 사유하는 물질로부터 사상을 분리할 수 없다. 물질은 모든 변화들의 주체이다. 무한하다는 단어는 끝없이 추가되는 우리의 정신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하다. 물질적인 것만이 지각 가능하고 인지 가능하므로, 사람들은 신의 실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 자신의 실존만이 확실하다. 인간의 열정 하나 하나는 처음과 끝이 있는 역학적 운동이다. 충동의 목적은 선이다. 인간은 자연과 동일한 법칙에 복종하고 있다. 힘과 자유는 동일하다.
홉스는 베이컨을 체계화하였지만, 감각 세계로부터 나오는 인식 및 관념의 복원이라는 베이컨의 근본 원리를 더 면밀하게 정초하지는 못했다.
로크는 인간 지성의 본원에 관한 시론에서 베이컨과 홉스의 원리를 정초하였다.
홉스가 베이컨의 유물론의 유신론적 선입관을 절멸시킨 것처럼, 콜린스, 코워드, 하틀리, 프리스틀리 등등은 로크의 감각주의의 최후의 신학적 한계들을 절멸시켰다. 이신론은 적어도 유물론자들에게 있어서는, 종교로부터 이탈하는 편리하고 안이한 방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처럼 칼 맑스는 현대 유물론의 본원이 영국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날 영국인들이 맑스가 자신들의 선조들에게 표한 이런 찬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우리로서는 유감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컨, 홉스, 로크가 프랑스 유물론자들의 저 빛나는 학파의 아버지들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바, 이 학파는 독일인들과 영국인들이 프랑스 인들을 상대로 육지와 바다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십팔(412)세기를 특별히 프랑스의 세기로 만들었다 ; 더군다나 이 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저 프랑스 혁명 훨씬 이전에 이미 그렇게 했으며, 독일과 영국의 우리 국외자들은 이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이식하려고 아직도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이 점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금세기 중엽에 영국에 거주하게 된 교육받은 외국인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국의 ‘덕망 있는’ 중간 계급의 종교적 위선과 우매함−그렇게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이었다. 우리는 당시 모두 유물론자들이거나 어쨌든 상당히 앞선 자유 사상가들이었다 ; 우리에게는, 영국의 거의 모든 교육받은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불가능한 기적을 믿는다는 것, 버클랜드나 만텔과 같은 지질학자들조차 단지 모세의 창세기에 나오는 신화와 지나치게 모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들 과학의 사실들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 종교적 문제들에 관해 자기들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가 있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당시 흔히 말하듯이 ‘불결한 무리들’에게, 곧 노동자들, 특히 오언주의적 사회주의자들에게 가야만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이래로 영국은 ‘문명화’ 되었다. 1851년의 박람회는 영국의 섬나라다운 배타성에 조종을 울렸다. 영국은 음식, 풍습, 표상에 있어 점차 국제화되었고, 그리하여 나는 대륙의 다른 관습들이 영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영국의 특정한 풍습들도 대륙에서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점점 바라게 되었다. 어쨌든 다음은 확실하다 ; (1851년 이전에는 귀족에게만 알려져 있던) 샐러드 기름의 보급은 종교적 문제들에 대한 대륙의 회의주의의 치명적 보급을 수반했다 ; 게다가 불가지론은, 아직 영국 국교회만큼 훌륭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덕망에 있어서는 침례교와 거의 같은 단계에까지 서게 되었으며, 어쨌든 구세군보다는 높은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이처럼 무신앙이 퍼져 나가는 것을 진심으로 유감스러워하며 저주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새로 만들어진 관념들이 외국산이 아니라, 다른 많은 일용품들처럼 Made in Germany, 즉 독일제 상표를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옛날 영국산임을 알게 되고, 이백년 전 그들 영국의 선조들은 오늘날 그들의 후손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음을(414) 알게 된다면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불가지론이, 수줍어하는 유물론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불가지론자들의 자연관은 철저히 유물론적이다. 자연계 전체는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외부로부터의 어떤 작용도 절대로 배제한다. 그러나 불가지론자는 덧붙이기를,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 저편에 어떤 최고의 본질이 실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유보는, 위대한 천문학자 라쁠라스의 『천체 역학』에는 왜 창조주에 대한 언급조차 없는가하는 나뽈레옹의 질문에 라쁠라스가 다음과 같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을 때라면 가치를 가졌을는지도 모른다 ; 내게는 그런 가설은 필요 없습니다Je n’avais pas besoin de cette hypothèse. 그러나 오늘날 삼라만상에 대한 우리의 발전된 사상에는 어떤 창조주나 통치자를 위한 공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럼에도 사람들이 현존 세계 전체에서 배제된 어떤 최고의 본질을 가정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도 모순인 데다가, 내 생각으로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감정에 이유 없이 모욕을 주는 셈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불가지론자는 우리의 모든 지식이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에 근거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덧붙여 말한다.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사물들에 대한 올바른 모상을 우리의 감각이 우리에게 주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아가서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알려 준다 : 그가 사물들이나 그것들의 속성들에 대해 말한다면, 그는 실제로는 어떤 확실한 것도 알 수 없는 이 사물들과 그것들의 속성들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감각 위에 만들어 낸 인상들만을 염두에 두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파악 방식은 단순한 논증이라는 방법에 의해서는 타파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논증하기 전에 먼저 행동했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Im Anfang war die Tat.” 그리고 인간의 영악함이 곤란을 발명해 내기 훨씬 전에 인간의 행위가 이미 그러한 곤란을 해결하였다. 푸딩에 대한 증명은 그것을 먹는 데 있다The proof of the pudding is in the eating. 우리가 이러한 사물들에서(414) 지각하게 되는 속성들에 따라 그 사물들을 직접 사용하게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감각적 지각의 올바름 여부를 정확히 시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각이 올바르지 않다면, 그런 사물들의 사용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판단도 올바르지 않게 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사용해 보려는 우리의 시도도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면, 즉 그 사물이 그것에 대한 우리의 표상에 상응한다는 것과 그것이 우리가 이용하고자 했던 바를 제공한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사물과 그것의 속성들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현실과 일치한다는 것에 대한 적극적 증명이 된다. 반대로 우리가 헛발을 디뎠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 원인을 발견하는 데에는 대개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 우리는, 우리의 시도가 기초하고 있는 지각이 그 자체로 불완전하고 피상적이었거나 그렇디 않으면 다른 지각들의 결과와 사태의 성질상 옳지 않은 방식으로 연결되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바르게 도야하여 사용하는 한, 그리고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사용되는 지각들에 의해 설정되는 한계들 내부에서 우리의 행동 방식이 유지되는 한, 우리는 우리의 지각이 지각되는 사물의 대상적 본성과 일치한다는 증거를 우리의 행동의 결과가 제공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과학적으로 통제되는 우리의 감각적 지각이 외부 세계에 대해 그 본성상 현실과 어긋나는 표상을 우리의 두뇌 속에 산출한다거나 또는 외부 세계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감각적 지각 사이에 본유적인 양립 불가능성이 존재한다거나 하는 결론을 우리가 내리게 되는 경우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업었다.
그런데 그때 신칸트주의적 불가지론자가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 그래, 우리는 아마도 어떤 사물의 속성들을 올바르게 지각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어떤 감각 과정이나 사유 과정을 통해서도 사물 자체는 파악할 수 없을 거야. 이 물 자체는 우리의 인식 저편에 있지. 이에 대해서는 헤겔이 이미 오래 전에 이렇게 답변했다 : 당신이 어떤 사물의 모든 속성들을 인식하고(415) 있다면, 당신은 그 물 자체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남는 것은 위에서 말한 사물이 우리의 외부에 실존한다는 사실뿐이며, 그리고 당신의 감각이 당신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주자마자 당신은 이 사물에 남아 있는 마지막을, 즉 칸트의 저 유명한 인식 불가능한 물 자체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대답에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의 시대에는 자연의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매우 단편적이었기 때문에, 그것들 배후에 있는 어떤 특수하고 불가사의한 물 자체를 추측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파악 불가능한 사물들은 그 이래로 과학의 거대한 진보로 말미암아 차례로 파악되고 분석되었으며, 더욱이 재생산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을 인식 불가능한 것이라고 부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우리 세기 전반기의 화학에 있어 유기적 실체는 그러한 불가사의한 사물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유기적 과정의 도움 없이도 화학적 원소들로부터 하나하나 조립해 낼 수 있다. 현대의 화학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어떤 물체라도 그 화학적 구성이 알려지자마자 원소들로 합성해 낼 수 있다. 현재 우리는 최고의 유기적 실체, 즉 이른바 단백체蛋白體의 구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는 거리가 멀다 ;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인식을 획득하여 그 도움을 받아 인공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몇 세기가 흐른 후에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우리가 그런 경지에까지 도달한다면 그때 우리는 유기적 생명도 생산하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생명이라는 것은 최하등 형태에서 최고등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만 단백체의 정상적 현존 방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불가지론자는 이러한 형식적 유보를 단 후에는, 자기의 근본으로 돌아가 철저히 완고한 유물론자로서 말하고 행동한다. 그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 우리가 아는 한에서 물질과 운동 또는 오늘날 말하듯 이 에너지는 창조될 수도 절멸될 수도 없지만, 이 두 가지가 어떤 미지의 시간에 창조된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증거도 없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이러한 인정을 어떤 특정한 경우에 그에게 반대하여 이용하려 한다면, 그는 당신을 매정하게 쫓아내어 입을 다물게 만들 것이다. 그는 유심론의 가능성을 추상적으로는 인정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우리가 아는 한, 그리(416)고 알 수 있는 한, 삼라 만상에는 어떤 창조주나 통치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에 관한 한, 물질과 에너지는 결코 창조될 수도 파괴될 수도 없다 ; 우리에게 있어, 사유는 에너지의 한 형태이며 두뇌의 기능이다 ;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물질적 세계가 불변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등등 등등 ; 그리하여 그가 과학적인 사람인 한, 그가 무엇인가를 아는 한, 그는 유물론자이다 ; 하지만 자신의 과학 바깥에서는, 즉 그가 제정신이 아닌 영역에서는, 그는 자신의 무지를 그리스 어로 번역하여 불가지론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쨌든 다음의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 설사 내가 불가지론자라 해도 이 소책자에서 스케치되고 있는 역사 파악을 ‘역사적 불가지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나를 놀려댈 것이며, 불가지론자들은 내가 자신들을 비웃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격분하며 따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내가 모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의 궁극적 원인과 결정적 추동력이 사회의 경제적 발전에, 생산 및 교환 방식의 변화에, 그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의 서로 다른 계급들로의 분열과 이 계급들의 투쟁에 있다고 보는 세계사의 진행에 대한 특정한 파악을 지칭하기 위해, 다른 여러 언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어로도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독일어로는 속물들이라고 부르는 영국의 ‘덕망 있는 양반들’이라 해도 그렇게 크게 놀라 자빠지지는 않았으면 하고.
만약 내가 역사적 유물론이 영국의 속물적인 덕망 있는 양반들에게도 편익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면, 사람들은 아마 내게 그런 관용을 더 잘 베풀어 줄 것이다. 사오십 년 전쯤 영국에 정착한 모든 교육받은 외국인들이, 자신들에게는 영국의 ‘덕망 있는’ 중간 계급의 종교적 위선과 넋잃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나는 언급했다. 이제 나는 그 시대의 덕망 있는 영국의 중간 계급이 지적인 외국인들에게 보였던 것만큼 그렇게까지 우매하지는 않았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들의 종교적 경향들에 대해 설명해 보자.
유럽이 중세에서 벗어났을 때, 도시의 발흥하던 시민 층은 혁명적 요소였다. 이 계급은 중세의 봉건 체제 내부에서 공인된 지위를 전취해 두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팽창력에 비하면 이미 너무나 협소한 것이 되어 버렸(417)다. 시민 층의 자유로운 발전은 더 이상 봉건 체제와 어울리지 않게 되었고, 봉건 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봉건 체제의 거대한 국제적 중심은 로마 카톨릭 교회였다. 이 교회는 봉건화된 서유럽 내부의 온갖 싸움에도 불구하고 그 서유럽 유럽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정치적 전일체로 단결시켰으며, 이 전일체는 분리주의적인 그리스 정교의 세계뿐만 아니라 모하메드교의 세계와도 맞서고 있었다. 이 교회는 신의 축성에 의한 성스러운 후광으로 봉건 제도를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고유의 위계제를 봉건적 모범에 따라 편성하였고, 마침내 모든 봉건 영주들 가운데 최고 자리에 올랐으며, 모든 카톨릭 보유 토지의 적어도 삼분의 일을 차지했다. 세속적 봉건주의를 나라마다 개별적으로 공격하기에 앞서, 그 중심인 성스러운 이 조직을 파괴해야만 했다.
하지만 시민 층의 발흥과 발을 맞추어 과학의 엄청난 약진이 이루어졌다. 천문학, 역학, 물리학, 해부학, 생리학이 다시금 연구되었다. 시민 층은 자신의 공업 생산의 발전을 위해, 자연의 물체들의 속성들과 자연력의 실행 방식을 연구하는 과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과학은 교회에 순종하는 하녀에 불과했으며, 신앙에 의해 설정된 한계를 넘어가는 것을 결코 허락받지 못했다−요컨대 그것은 결코 과학이 아니었다. 이제 과학은 교회에 반란을 일으켰다 ; 시민 층은 과학이 필요했고, 이 반란에 참여했다.
이상에서 나는 발흥하려 애쓰던 시민 층이 현존하던 교회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던 두 가지 이유만을 지적한 셈이다 ; 그러나 첫째, 카톨릭 교회의 권세에 반대하는 투쟁에 이해 관계가 가장 많이 걸려 있는 계급이 바로 이 시민 층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 둘째, 당시 봉건주의에 대항하는 모든 투쟁이 종교적 색채를 띠면서 일차적으로 교회에 예봉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대학들과 도시의 실업가들이 전투의 함성을 외쳤을 때, 그 함성은 고작 생존 자체를 위해 자신들의 성직자 봉건 영주들 및 세속적 봉건 영주들과 도처에서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을 뿐이던 농촌의 인민 대중인 농민들에게서 커다(418)란 반향을 불가피하게 불러일으켰다.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유럽 시민 층의 거대한 투쟁은 세 차례의 결정적 대전투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 첫 번째는 독일의 종교 개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교회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라는 루터의 함성에 응답하여 두 차례의 정치적 봉기가 일어났다 : 먼저 1523년 프란쯔 폰 지킹엔의 지도 아래의 하층 귀족들, 이어서 1525년 농민 대전쟁. 둘 다 진압당했는데, 주로 그것은 이해 관계가 가장 큰 당파였던 도시 시민들의 우유부단함 때문이었다−여기서 이러한 우유부단함의 원인에 대해 탐구할 수는 없다. 그 순간부터 투쟁은 개별 영주들과 황제의 중앙 권력 사이의 다툼으로 변질되었으며, 그 결과로 독일은 200년 동안 유럽의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국민들의 대열에서 탈락하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물론 새로운 종교를 낳았다−게다가 그것은 절대 군주제가 필요로 했던 바로 그러한 종교였다. 북동부 독일의 농민들은 루터 파로 개종하자마자 자유민에서 농노로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터가 실패한 곳에서 깔벵은 승리했다. 그의 교리는 당시 시민들 가운데 가장 대담한 사람들에게 잘 맞았다. 그의 예정설은, 경쟁의 상업 세계에서는 성공과 파산이 개인의 활동이나 수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상관없는 사정들에 달려 있다는 사실의 종교적 표현이었다. 따라서 “각자의 의지나 행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에 달려 있다”는, 우월하기는 하지만 알 수 없는 경제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든 낡은 통상로와 상업 중심지가 새 것에 의해 밀려나게 되고 아메리카와 인도가 세상에 개방되어 종래에 가장 숭상받던 경제적 신조−금과 은의 가치−마저도 흔들리고 무너지는 경제적 변혁의 시대에는 특히 진실이었다. 게다가 깔벵의 교회 체제는 철저하게 민주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이었다 ; 신의 왕국이 공화국이 되어 버린 마당에, 차안의 세계의 왕국이 왕들, 주교들, 봉건 영주들의 신하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독일의 루터 파(419)가 독일의 소제후들의 수중에서 온순한 도구가 되어 버렸다면, 깔벵주의는 네덜란드에서는 공화국을, 잉글랜드와 특히 스코틀랜드에서는 강력한 공화주의적 당들을 기초하였다.
시민 층의 두 번째 대봉기는 깔벵주의에서 자신들의 투쟁 이론이 완성되어 있음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 봉기는 영국에서 일어났다. 도시의 시민 층이 봉기를 일으켰고, 농촌 지역의 중농(요우먼)이 승리를 쟁취했다. 특히 별난 점은 다음과 같다 : 세 차례의 부르주아 대혁명 모두에서 농민들이 전투 부대를 이루었는데, 일단 승리가 쟁취된 후에 이 승리의 경제적 결과로 인해 가장 확실하게 몰락하게 된 계급도 바로 농민들이었다. 크롬웰 이후 백년이 지나는 동안 영국의 요우먼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였다. 하지만 어쨌든 싸움이 마지막 결정적 순간까지 수행되어 찰스 1세를 교수대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들 요우먼과 도시 평민 분자들의 참여 덕분이었다. 당시 거두어 들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무르익어 있던 시민 층의 승리의 열매들만이라도 수확하기 위해서는, 혁명을 그러한 목적을 훨씬 넘어가는 곳까지 끌고 갈 필요가 있었다−1793년의 프랑스나 1848년의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실상 이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발전 법칙의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과도한 혁명 활동의 뒤를 이어 불가피하게 반동이 닥쳐왔는데, 이 반동도 나름대로 목적을 훨씬 넘어서서 나아갔다. 일련의 동요 이후에 마침내 새로운 무게 중심이 확보되어 그 이후의 발전을 위한 출발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속물들이 “대반란”이라고 부르는 영국 역사상의 저 장대한 시기와 그 이후의 투쟁들은, 자유주의적 역사 서술이 “명예 혁명”이(420)라고 명명하는 1689년의 비교적 사소한 사건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새로운 출발점은 대두하는 부르주아지와 과거의 봉건적 대토지 보유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타협이었다. 봉건적 대토지 보유자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귀족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훨씬 나중에야 프랑스에서 루이-필립이 그랬던 것처럼 다음과 같이 되는 길을 이미 오래 전부터 가고 있었다 : 민족 제일의 부르주아, 영국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옛날의 봉건 남작들은 서로를 때려죽였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비록 그 대부분이 오래된 가문의 후손들이었지만, 훨씬 먼 방계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집단을 이루었다 ; 그들의 관습과 성향은 봉건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부르주아적이었다 ; 그들은 화폐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으며, 곧바로 면양으로 수많은 소작인들을 몰아냄으로써 지대를 인상하기 시작했다. 헨리 8세는 교회 영지를 그냥 나눠 주거나 헐값에 판매함으로써 새로운 부르주아-지주들을 대규모로 창출하였다 ; 십칠 세기 말까지 끊임없이 계속된 대규모 영지들의 몰수도 그 후에 영지들이 졸부들 및 반半졸부들에게 분배됨으로써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헨리 7세 이래의 영국의 ‘귀족’은 공업 생산의 발전을 방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로 그로부터 편익으르 챙기려 들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당시 대토지 보유자들의 일부는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동기 때문에 금융 부르주아지 및 산업 부르주아지의 지도자들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1689년의 타협은 쉽게 이루어졌다. 정치적 전리품 가운데 최상의 것spolia optima−관직, 한직, 고액의 봉록−은 일정한 조건 아래 대토지 귀족 가문들에 주어졌는데, 그 조건이란 그들이 금융업, 제조업, 상업 분야 중간 계급의 경제적 이해를 충분히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이해는 충분히 강력한 것이었다 ; 당시 이미 그것은 그 민족의 일반적 정책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정도였다. 개별적 문제들을 두고 불화가 있었지만, 귀족 과두제는 그것 자체의 경제적 번영이 산업 및 상업 부르주아지의 번영과 뗄 수 없이 결(421)합되어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부르주아지는 영국 지배 계급의 변변찮은, 그러나 공인받은 구성 부분이었다. 그들은 다른 모든 지배 계급과 더불어, 방대한 근로 인민대중을 억압하는 데 공통의 이해를 갖게 되었다. 상인이나 제조업자 자신이 자기네 점원, 자기네 노동자, 자기네 하인들에 대해 주인의 지위, 또는 얼마 전까지 영국에서 말하듯이 ‘타고난 상전’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는 그들에게서 가능한 한 양질의 노동을 많이 짜내야 했다 ;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들에게 적절한 복종심을 심어 주어야 했다. 그는 스스로 종교를 믿었다 ; 그의 종교는 그에게 깃발을 제공해 주었는데, 그는 전에는 이 깃발을 들고 왕 및 영주들과 싸운 바 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러한 종교가 그에게 제공해 준 수단, 곧 자기의 타고난 하인들의 정서에 작용하여 신의 측량할 수 없이 깊은 뜻이 그들에게 예정해 준 주인의 명령에 그들이 복종하게끔 만들기 위한 수단을 발견하였다. 요컨대 이제 영국의 부르주아는 ‘하층 신분’, 곧 방대한 생산자 인민대중을 억압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거기에 사용되는 수단들 가운데 하나가 종교의 영향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종교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애착을 강화한 또 하나의 사정이 있었다 : 영국에서의 유물론의 대두. 이 새로운 무신론적 학설은 신앙심 깊은 중간 계급을 깜짝 놀라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부르주아지를 포함한 교육 받지 못한 방대한 대중에게도 충분히 괜찮았던 종교와는 달리 자신은 학자들과 교육받은 속인들에게만 적합한 철학이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홉스와 함께 그것은 왕의 전능함의 옹호자로서 무대에 등장했으며, 절대 군주제에게 저 튼튼하긴 하지만 심술궂은 녀석들puer robustus sed malitiosus, 즉 인민들을 억압하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홉스의 후계자들인 볼링브로크, 샤프츠베리 등등에 이르러도, 유물론의 이 새로운 이신론적 형태는 귀족적이고 비교적秘敎的인 학설로 남아 그 종교적 이단성뿐만 아니라 그 반부르주아적인 정치적 관련 때문에도 부르주아지의 미움을 샀다. 따라서 귀족의 유물론과 이신론에 대항하여, 한때 스튜어트 왕조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깃발과 인원을 제공했던 바로 그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이 이번에(422)도 진보적 중간 계급의 주요한 전투력을 제공했으며,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위대한 자유당’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유물론은 영국에서 프랑스로 이식되었는데, 여기서 데까르뜨주의에서 유래하는 두 번째 유물론 철학 학파를 발견하여 그것과 융합되었다. 프랑스에서도 유물론은 처음에는 전적으로 귀족적인 교의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곧 그 혁명적 성격이 명명백백해졌다.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자기들의 비판을 종교적 문제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 그들은 자기 시대의 모든 과학적 전통과 모든 정치적 제도를 비판하였다 ; 그들은 자신들 이론의 일반적 적용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가장 짧은 길을 택하였다 : 그들은 대담하게도, 자신들에게 이름을 붙여 준 저 거대한 저작인 『백과 전서』에서 지식의 모든 대상에 대해 자신들의 이론을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유물론은 이러저러한 형태로−공표된 유물론으로서 또는 이신론으로서−모든 교육받은 프랑스 청년들의 세계관이 되었다 ; 더구나 대혁명 동안에는, 영국의 왕당파들이 세상에 내놓은 이 학설이 프랑스의 공화주의자들과 테러리스트들에게 이론적 깃발을 제공했으며 「인권 선언」의 대본을 제공했을 정도였다.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주아지의 세 번째 봉기였지만, 종교적 외피를 완전히 벗어 버리고 공공연하게 정치적 지반 위에서 싸운 것으로는 최초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실제로 한편의 전사들인 귀족들의 절멸과 다른 한편인 부르주아지의 완전한 승리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최초의 것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혁명 이전의 제도들과 혁명 이후의 제도들 사이의 중단 없는 연속성, 대토지 소유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의 타협이 법원의 판례들의 영속성과 봉건적 법률 형태의 정중한 보존으로 표현되었다. 프랑스에서 혁명은 과거의 전통들과의 철저한 단절을 이루어 내었고, 봉건주의의 마지막 흔적까지 쓸어버렸으며, 민법전에서 옛날의 로마법을 현대의 자본주의적 관계들에 능숙하게 응용하였다−이 로마법은 맑스가 “상품 생산”이라고 지칭한 경제적 발전 단계로부터 유래하는 법률적 관련의 거의 완벽한 표현이다 ; 이 응용은 아주 능숙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 프랑스 혁명 법전은 다른 모든 나라들−영국도 예외는 아니다−에서 소유권법의 개정에 있어 모범으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 한 가지 점은 잊(423)은 잊지 말자. 영국의 법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관계들을 여전히 미개한 봉건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 언어가 그것이 표현하는 사물과 일치하는 정도는 영국 철자법이 영어 발음과 일치하는 정도−어느 프랑스 사람의 말에 따르면 당신들은 런던이라고 쓰고 나서는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발음한다vous écrivez Londres et vous prononcez Constantinople고 한다−와 같다고 해도 이 영국의 법이야말로 저 인신적 자유, 지방적 자치, 재판에 의하지 않은 모든 외부적 간섭의 배제, 요컨대 저 옛 게르만의 자유의 가장 좋은 부분을 변조하지 않은 채로 유지하여 아메리카와 식민지들에 이식한 유일한 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옛 게르만의 자유의 가장 좋은 부분은 대륙에서는 절대 군주제 아래에서 상실되어 버렸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어쨌든 우리 영국의 부르주아에게 돌아가 보자. 프랑스 혁명은 영국의 부르주아에게, 대륙의 군주제의 도움을 얻어 프랑스의 해상 무역을 파산시킬 기회, 그 식민지들을 병합할 기회, 해상에서 경쟁자가 되고자 하는 프랑스 인들의 마지막 야망까지 좌절시킬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점이 영국의 부르주아가 프랑스 혁명과 싸운 한 가지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이 혁명의 방법이 그의 비위를 매우 거슬렀다는 것이었다. 혁명의 ‘저주받아 마땅한’ 테러리즘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지배를 끝까지 밀고 나가고자 하는 그 시도까지. 귀족은 부르주아에게 (자신들의 것 그대로의) 예의 범절을 가르쳐 주고, 그를 위해 유행을 만들어 주었으며, 국내의 질서 유지자인 육군과 새 식민지 영토 및 새 시장의 정복자인 선대에 장교들을 제공했는데, 이러한 귀족 없이 영국의 부르주아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물론 부르주아지 가운데 진보적 소수파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타협에서 자기들의 이익을 별로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 덜 부유한 편인 중간 계급으로 구성되는 이 소수파는 혁명에 공감하였으나 의회에서는 무기력했다.
그리하여 유물론이 점점 더 프랑스 혁명의 신조가 될수록, 신을 경외하는 영국 부르주아는 더욱더 자기의 종교에 집착하게 되었다. 빠리의 공포시대는, 인민이 종교를 잃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유물론이 프랑스에서 이웃 나라들로 전파되어 친화성 있는 이(424)론적 흐름들, 특히 독일 철학을 통해 강화되면 될수록, 또한 실제로 대륙에서 일반적으로 유물론과 자유 사상이 교육받은 사람들의 필수적 자격이 되면 될수록, 영국의 중간 계급은 자신들의 잡다한 종교적 신조들에 더욱더 매달리게 되었다. 그러한 신조들은 서로 매우 다를 수도 있지만, 확실히 모두 종교적이고 기독교적인 것이었다.
혁명이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승리를 확정하는 동안에, 영국에서는 와트, 아크라이트, 카트라이트 등등의 사람들이 산업 혁명을 개시했으며, 이 혁명은 경제 권력의 무게 중심을 완전히 옮겨 놓았다. 부르주아지의 부는 이제 토지 귀족의 그것보다 한없이 빠르게 증대하게 되었다. 부르주아지 자체 내부에서도 금융 귀족, 은행가들 등등이 제조업자들에 의해 차차 무대 뒤로 밀려났다. 1689년의 타협은, 부르주아지에 유리하게 점차 수정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사자들 사이의 상대적 지위에 상응하지 않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당사자들의 성격도 변화하였다 ; 1830년의 부르주아지는 그 이전 세기의 부르주아지와는 매우 달랐다. 여전히 귀족의 수중에 맡겨져 있었으며 새로운 산업 부르주아지의 요구를 억누르기 위해 활용되었던 정치 권력은 새로운 경제적 이해와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귀족과의 새로운 투쟁이 필요하게 되었다 ; 이 투쟁은 새로운 경제 권력이 승리해야만 끝날 수 있었다. 먼저 1830년 프랑스 혁명의 자극을 받아, 개혁 법안이 일체의 저항을 물리치고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부르주아지에게 의회 내에서 공인된 강력한 지위를 부여했다. 그런 다음에 곡물법의 폐지가 이루어졌는데, 이 사건으로 토지 귀족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우위, 특히 부르주아지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부분인 제조업자들의 우위가 결정적으로 확립되었다. 이것은 부르주아지의 최대의 승리였으나, 또한 그들이 그들 자신만의 배타적 이해를 획득한 것으로서는 마지막 승리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후의 모든 승리를, 처음에는 동맹하였다가 나중에는 경쟁하게 된 새로운 사회 세력과 공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산업 혁명은 제조업 대자본가들이라는 계급을 창조했지만, 동시에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제조업 노동자 계급도 창조했다. 이 계급은, 산업 혁명이 산업 부문들을 차례로 장악하게 됨에 따라 그 숫자와 규모가 꾸준히 늘어났다. 숫자와 함께 그들의 세력도 증대하였으며, 이러한 세력은 마음내(425)켜 하지 않는 의회에 강요하여 단결의 자유를 금지한 법률을 폐지하게 한는데 성공했을 때인 1824년에 이미 실증되었다. 개혁 운동 기간 동안에 노동자들은 개혁파의 급진적 부분을 이루었다 ; 1832년의 법안이 그들에게서 투표권을 박탈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인민 헌장(people’s charter)으로 총괄하여 대부르주아의 반곡물법당에 대립하는 독립적인 차티스트당을 창립하였다. 그것은 우리 시대 최초의 노동자 당이었다.
그 뒤 1848년 2월과 3월에 대륙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노동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적어도 빠리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견지에서는 절대로 허용될 수 없는 요구들을 내세웠다. 그런 다음에 전반적 반동이 뒤를 이었다. 먼저 1848년 4월 10일 차티스트당의 패배, 같은 해 6월 빠리 노동자 봉기의 분쇄, 그런 다음에 1849년 이딸리아, 헝가리, 남독일에서의 재난, 마지막으로 1851년 12월 2일 루이 보나빠르뜨의 빠리에서의 승리, 그리하여 적어도 당분간은 노동자의 요구라는 도깨비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렀던가! 영국의 부르주아가 서민들을 종교적 정서 속에 계속 묶어 놓아야 할 필요성을 예전부터 벌써 확신하고 있었다면, 이런 모든 경험을 겪고 난 후에는 그 필요성을 더욱더 절박하게 느낄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그는 대륙에 있는 자기 동지들의 비웃음을 개의치 않으면서 한층 신분의 복음화를 위해 해마다 수많은 돈을 지출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종교 기관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당시 종교 사업의 최대 조직자였던 브라더 조나산에게 청하여 아메리카로부터 신앙 부흥 운동, 무디와 생키 등등을 수입하였다 ; 마침내 그는 구세군의 위험스런 도움까지 받아들였는데, 이 교파는 원시 기독교의 선전 수단을 새롭게 되살리고 빈민을 선민으로 생각하여 대하며 자신들의 종교적 방식으로 자본주의와 투쟁함으로써, 오늘 자신들에게 현금을 내주고 있는 유복한 사람들에게 언젠가 치명적 타격이 될 수도 있는 원시 기독교적 계급 투쟁의 요소를 퍼뜨리고 있다.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부르주아지가 중세에 봉건 귀족이 그랬던 것과 같은 배타적 방식으로 정치 권력을−적어도 상당한 기간에 걸쳐−점령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 발전 법칙의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봉건주의가 완전히 근절된 프랑스에서조차 부르주아지가 계급 전체로서 지배권을(426) 잡았던 것은 짧은 기간뿐이었다. 1830년에서 1848년까지의 루이-필립 아래에서는 부르주아지의 한 작은 부분이 통치하였을 뿐이며, 훨씬 더 큰 부분은 엄격한 재산 평가에 의해 선거권을 박탈당하고 있었다. 제2공화국 아래에서는 부르주아지 전체가 통치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삼 년 동안이었다 ; 그들의 무능력은 제2제국에 길을 내주었다. 지금 제3공화국 아래에서 처음으로 전체로서의 부르주아지가 이십 년을 넘게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나, 벌써 분명한 쇠퇴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부르주아지의 장기간의 지배는 지금까지, 아메리카처럼 봉건주의가 존재했던 적이 없으며 사회가 애초부터 부르주아적 기초에서 출발한 나라들에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프랑스와 아메리카에서조차 부르주아지의 계승자인 노동자들이 벌써부터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고 있다.
영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온전한 지배권을 행사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1832년 승리 이후에도 귀족은 모든 고위 정부 관직을 거의 독점적으로 차지하였다. 부유한 중간 계급이 이러한 일을 왜 그렇게 굴종적으로 묵인하였는가 하는 점은 나로서는, 그 뒤 언젠가 자유당원이며 대제조업자인 W. E. 포스터 씨가 브래드포드의 청년들에게 연설을 간청하기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는 역시 프랑스 어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으며, 자기가 장관이 되어 프랑스 어가 적어도 영어만큼은 필요한 사회에 갑자기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얼마나 우둔하게 여겨졌던가에 대해 설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당시의 영국의 부르주아는 대개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졸부들이었기 때문에, 사업가적인 민첩함이 가미된 섬나라다운 편협성과 섬나라다운 오만함과는 다른 특성들이 요구되는 고위 정부 관직은 싫든 좋든 모두 귀족에게 맡겨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까(427)지도 ‘중간 계급의 교육Middle-class education’을 두고 신문 지상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논쟁은 영국의 중간 계급이 아직도 스스로가 최상의 교육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좀더 급이 낮은 교육을 찾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또한 곡물법의 폐지 이후에도, 승리를 쟁취해 낸 사람들인 콥든 가, 브라이트 가, 포스터 가 등등이 마침내 이십 년 후에 새로운 개혁 법안이 그들에게 내각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어 주게 될 때까지 공직에 일체 참여할 수 없도록 배제된 채 있었다는 사실은 아주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다. 게다가 오늘날까지도 영국의 부르주아지는 자기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다는 감정에 아주 깊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과 인민의 비용으로 장식용 건달 계급을 먹여 살리면서 그들로 하여금 온갖 화려한 일에서 국민을 그럴듯하게 대표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 가운데 어떤 한 부르주아가 이 계급, 즉 결국 그들 자신이 만들어 낸 이 배타적 집단에 가입해도 될 만하다는 인정을 받게 되면, 그들 스스로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공업 중간 계급과 상업 중간 계급은, 새로운 경쟁자인 노동자 계급이 무대에 나타났을 때에도 아직 토지 귀족을 정치 권력에서 완전(428)히 몰아내는 일을 끝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차티스트 운동과 대륙의 혁명들에 대한 반동, 게다가 1848년에서 1866년까지의 영국 공업의 전대 미문의 확대(통상적으로는 자유 무역 하나에만 기인하는 것이라 이야기되고 있으나, 그보다는 철도, 대양 기선과 교류 수단 일반의 엄청난 확대에 따른 것이다)는 노동자들을 다시 자유당에 종속시켰으며, 노동자들은 차티스트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당의 급진적 부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투표권에 대한 노동자들이 요구는 억누르기 어렵게 되어 갔다 ; 자유당의 지도자인 휘그 당이 여전히 겁을 집어먹고 있는 동안에, 디즈레일리가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였다 ; 그는 토리 당에게 유리한 시기를 이용하여 도시 선거구에 (세입자들도 모두 포함하는) 세대주 투표권을 도입하였고, 그럼으로써 선거구의 개정을 함께 이루어 냈다. 그 후 곧 비밀 투표(the ballot)가 잇따랐다 ; 그런 다음에 1884년에 세대주 투표권은 모든 지역으로 확장되어 농촌 선거구로까지 확장되었으며, 선거 지역을 새로 나누어 적어도 어느 정도 균형이 잡히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조치를 통해 선거에 있어 노동자 계급의 세력은 상당히 커져서, 지금은 150 내지 200 선거 지역에서 유권자의 다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전통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치는 학교로서 의회 제도만큼 좋은 것은 없다! 중간 계급이 존 매너즈 경이 농담으로 “우리 유서 깊은 귀족”이라고 부르는 집단을 공경심과 경외감으로 우러러본다면, 노동자 대중은 당시의 이른바 ‘더 나은 계급’인 부르주아지를 존경심과 공손함으로 바라본다. 또 사실 십오 년 전의 영국 노동자는 모범적인 노동자여서, 자기의 고용주를 지극히 존경하며 참작하는 그의 태도나 자기 자신의 요구를 제기할 때의 그 겸손하고 자제하는 태도는 우리 독일의 강단 사회주의자들이 자기네 조국 독일 노동자의 치유 불가능한 공산주의적이고 혁명적인 경향 때문에 받았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하지만 영국의 부르주아들은 훌륭한 사업가들이어서, 독일의 교수들보다는 훨씬 앞날을 잘 내다보았다. 그들이 노동자들과 권력을 나누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뿐이었다. 차티스트 시기에 그들은 이 튼튼하긴 하지만 심술궂은 녀석들, 즉 인민들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배웠다. 그 이래로(429) 인민 헌장의 상당 부분은 그들에 의해 강요되어 국법으로 되었다. 이제 인민을 도덕적 수단을 통해 억눌러 두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 대중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도덕적 수단 가운데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것은 여전히 다음과 같았다−종교, 그 때문에 학교 이사회에서 성직자가 다수를 점하는 것이며, 그 때문에 의식주의파에서 구세군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온갖 종류의 믿음이 깊은 데마고기를 위해 부르주아지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조세가 점점 증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대륙 부르주아의 자유 사상과 종교적 무관심에 대한 영국의 덕망 있는 속물 근성의 승리가 닥쳐왔다. 프랑스와 독일의 노동자들은 반역적이게 되었다. 그들은 완전히 사회주의에 전염되었고, 게다가 자기들이 지배권을 전취하는 수단의 합법성에는 매우 정당하게도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그 튼튼한 자들은 여기서 실제로 나날이 점점 더 심술궂게 되어갔다. 프랑스와 독일 부르주아들에게 마지막 수단으로 남아 있던 길은, 마치 어떤 장난 꾸러기 사내 아이가 뱃멀미가 점점 심해지는 것을 느끼고서는 그때까지 갑판 위에서 허풍을 떨며 폼을 재고 피우던 담배를 내던져 버리듯 자기들의 자유사상을 암암리에 잠재워 버리는 것뿐이지 않았는가? 종교를 비웃던 자들이 한 사람씩 차례로 겉으로는 믿음이 깊은 체하면서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과 의식을 존중하며 말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직접 그러한 것을 따르기까지 하였다. 프랑스의 부르주아들은 금요일에는 육류를 피했고, 독일의 부르주아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장황한 설교를 듣느라 교회 의자에서 진을 뺐다. 그들은 자기들의 유물론과 함께 궁지에 빠졌다. “종교는 인민에게 유지되어야 한다Die religion muß dem Volk erhalten werden”−이것이 사회를 전반적 몰락에서 구할 마지막이자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들 자신에게 불행한 점은 그들이 종교를 영원히 파멸시키려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 뒤에야 비로소 이 점을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영국의 부르주아가 냉소하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외칠 차례가 된 순(430)간이 닥쳐왔다 : 이 바보들아, 난 그런 것쯤은 벌써 이백 년 전부터 너희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었단 말야!
하지만 영국의 부르주아의 종교적 완고함도, 대륙의 부르주아의 징 치고 막 내린 다음의 개종도, 상승세를 타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물결을 가로막지는 못할 것이 염려된다. 전통은 하나의 거대한 제동력이며, 역사의 타력惰力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수동적인 것일 뿐이므로 압도되어야 한다. 또한 종교는 지속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방벽을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법률적, 철학적 및 종교적 표상들이 어떤 주어진 사회에서 지배적인 경제적 관계들의 가까운 또는 먼 후예라면, 경제적 관계들이 근본적으로 변한 후에도 이러한 표상들이 오랫동안 그대로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계시를 믿든지, 그렇지 않으면 와해되고 있는 사회는 어떤 종교적 설교로도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든지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영국에서도 노동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은 온갖 종류의 전통들에 속박되어 있다. 부르주아적 전통들−보수당과 자유당이라는 두 정당만 존재할 수 있다든지, 노동자 계급은 위대한 자유당을 매개로 하여 속죄를 받아야 한다든지 하는 널리 퍼져 있는 미신들. 그리고 독자적 행동을 취하려는 최초의 실험적 시도들의 시대에서부터 물려받은 노동자적 전통들−수많은 오랜 노동조합들에서는 정규적인 견습 기간을 마치지 않은 모든 노동자들을 배제하는 것 ; 이것은 그런 조합들안에 자기 자신의 파업 파괴자들을 키우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전통들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노동자 계급은 전진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브렌타노 교수 같은 양반까지도 자기의 강단 사회주의자 형제들에게 유감을 표시하며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영국에서 모든 일이 그러한 것처럼, 여기서는 망설이고 저기서는 별반 성과가 없을 수도 있는 실험적 시도를 행하면서 천천히 정연한 발걸음으로 움직이고 있다 ; 그들은 때때로 사회주의라는 명칭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불신하면서도 그 사태는 점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그들은 움직이고 있으며, 운동은 차례로 노동자 층을 사로잡고 있다. 이제 운동은 런던 이스트엔드의 미숙련 노동자들을 죽음 같은 잠에서 깨우고 있는바, 이 새로운 세력이 운동에 어떤 값진 자극을 되돌려 주었는가 하는 점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431)있는 대로이다. 그리고 비록 운동의 보조가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조급성에 발맞춰 주지 못하고 있다 해도, 이 이러저러한 사람들은 영국 국민성의 가장 좋은 측면을 생생하게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과 영국에서는 일단 쟁취된 진보가 다시 상실되는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이유들 때문에 옛 차티스트들의 아들들이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할아버지들에 비한다면 이 손자들은 그다지 뒤떨어져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디만 유럽 노동자 계급의 승리가 영국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에 의해서만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뒤의 두 나라에서 노동자 운동은 영국보다 한참 앞서 있다. 더욱이 독일에서 노동자 운동은 예측할 수 있는 시일 내의 승리를 앞두고 있다. 독일 노동자 운동이 지난 이십오 년 동안에 이룬 진보는 유례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갈수록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독일의 부르주아지가 정치적 능력, 규율, 용기, 정력 따위에 있어 비참할 정도로 가련하게 결점을 드러내고 있다면, 노동자 계급은 자기가 이러한 모든 특성들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거의 사백 년 전에 독일은 유럽 중간 계급 최초의 대봉기의 진원지였다 ;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독일이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초의 대승리를 위한 무대가 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이겠는가?
F. 엥겔스
1892년 4월에 씌어짐.
출전 : 『신세대』. 11년차.
1892/93년. 제1권. 제1호와 2호.
맑스·엥겔스 저작집.
제22권. 287-311면.
김석진 번역
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5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박종철출판사 편집부 엮음, 김세균 감수, 박종철출판사 1997. 402-4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