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후계는 세습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북측의 후계문제는 남측 국민들에게 난해한 암호처럼 보인다. 북측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전달받기는커녕, 수구우파의 대북비방만 들어온 남측 국민들이 평소에도 북측에서 일어나는 여러 변화의 사실관계조차 파악하기 힘든데, 북측에서 일어나는 변화들 가운데서도 최고, 최대의 변화인 후계문제가 언론에 보도되었으니 그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수구우파는 이런 어려운 정황을 이용하여 대북비방의 수위를 더 높였다. 스스로 진보인사임을 자처하던 몇몇 사람도 저들의 대북비방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북측의 후계문제에 대한 사실인식을 배제한 저들의 대북비방은 이성적 판단과 토론을 몰아내는 광기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수구우파는 북측의 후계문제에 대해 발언을 자제하는 신중론자에 대해서도 자기들의 대북비방에 동조하지 않으면 종북론자 딱지를 붙이겠노라고 윽박질렀다. 후계문제에 대한 사실인식을 배제한 채 무조건 대북비방 아니면 대북찬양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저들의 윽박지름은, 이성적 판단과 토론으로 정보를 소통하는 정상사회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실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가치평가는, 그 사실에 대한 인식과정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가치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북비방만 들려오는 남측에서는 북측의 후계문제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알아서도 안 된다는 식의 반이성적인 분위기가 출렁거린다. 대북비방 이외에 아무 정보도 듣지 못했으면서, 후계를 세습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몰상식이 아니면 무엇인가! 아래 정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추대란 대중이 누구를 떠받들어 지도자로 세운다는 뜻이고, 세습이란 누군가가 자기의 재산, 지위, 권한 등을 정실 아내가 낳은 아들(적자)에게 물려준다는 뜻이다. 북측에서는 누가 후계자를 지명하거나 인민들이 투표로 후계자를 선거하는 것이 아니라, 후계자를 추대한다고 말한다. 그와 달리, 수구우파는 세습한다고 말한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수구우파가 주장하는 세습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 집중 부각시킨다. 여러 측면이 있는 사물을 인식할 때, 어느 한 측면만 보고 판단하면 착오를 범하는 것처럼, 후계문제의 여러 측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고, 다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이라는 한 측면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착오다. 수구우파의 세습론은 바로 그 착오공간에 침투하여 후계 개념을 세습 개념으로 슬쩍 바꿔놓고 비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계 개념은 세습 개념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어에는 히레디터리(hereditary)라는 말과 썩세션(succession)이라는 말이 있는데, 전자는 세습이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후자는 승계 또는 세습이라는 여러 가지 뜻으로 두루 쓰인다. 그와 달리, 우리말에서는 후계와 세습을 가려서 쓴다. 두 개념이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두 개념의 상이성은 아래와 같다.
첫째, 수구우파가 말하는 세습은 왕위세습을 뜻한다. 그런데 북측은 영국, 스웨덴, 스페인, 태국, 일본처럼 왕위를 세습하는 입헌군주국이 아니라, 군주라는 말을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공화국이다. 물론 수구우파는 북측의 수령이 군주와 똑같지 않느냐고 우기지만, 사회주의나라에서 인민과 함께 혁명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수령은 입헌군주국에서 실권 없는 상징적 존재로 남아있는 군주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또한 자기 인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수령은 봉건신분제를 틀어쥐고 인민을 억눌렀던 봉건군주와 정반대다. 전혀 다른 것이나 정반대의 것을 똑같다고 우기는 것은, 논리를 저버린 생억지다.
둘째, 입헌군주국이나 봉건군주국의 왕위세습에서는 국민들이 군주의 친자를 옹립하는 과정이 원천적으로 배제된다. 단지 군주의 친자라는 조건만 충족되면 군주는 인민의 의사와 상관 없이 그를 세자로 봉작하는데, 이를 세자책봉이라 한다. 수구우파가 말하는 세습은 세자책봉이다.
그러나 북측의 후계과정에서는, 친자관계만 있으면 수령이 자의적으로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이 아니다. 북측의 후계과정은 각계층 인민들의 대중적 옹립운동→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내부적 추대→당대회의 공식적 추대로 진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2010년 9월 28일에 소집된 당대표자회 도중에 별도로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진행된 것은, 당중앙위원회 전체 위원들이 인민들의 옹립요구를 반영하여 후계자를 내부적으로 추대하였음을 말해준다. 북측 인민들이 전개한 후계자 옹립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셋째, 입헌군주국이나 봉건군주국의 왕위세습은 장자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장자세습이다. 그런데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자가 아니다.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아들인 것은 마찬가지므로 세습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장자세습전통과 달리, 장자가 아닌 인물이 후계자로 추대된 것은 그의 충실성과 성품, 지도력과 실력이 객관적으로 인정받은 과정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몇 가지 정보가 전해준 객관적 사실
이번에 북측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공개한, 후계자의 당내 추대에 관한 몇 가지 정보가 전해준 객관적 사실은 아래와 같다.
첫째, 북측 언론이 보도한 사진에 나온 그의 풍채를 보면, 그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꼭 닮은 20대 후반의 청년이다. 이것은 그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임을 말해준다.
둘째, 당대표자회의를 마치고 금수산기념궁전 광장에서 찍은 기념사진을 보면, 맨앞줄 정중앙에 앉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오른쪽으로 앉아있는 고령의 인민군 차수들 가운데 두 번째 상석에 그 20대 후반의 청년이 앉아있다. 인민군 대장인 그가 인민군 차수들 가운데 두 번째 좌석에 앉은 것은, 그가 당중앙위원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추대되었음을 말해준다.
셋째, 그는 김정일 최고사령관으로부터 인민군 대장의 군사칭호를 수여받고,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의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았다. 당중앙군사위원회에는 김정일 위원장 밑에 부위원장 두 사람이 있는데, 그 20대 후반의 청년 이외에 다른 한 사람은 인민군 차수인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이다.
인민군 총정치국은 최고사령관의 군대 정치지도를 보좌하고, 인민군 총참모부는 최고사령관의 군령(military command)을 보좌하고, 인민무력부는 최고사령관의 군정(military administration)을 보좌하는데, 당중앙군사위원회의 권능은 무엇일까? 조선로동당 규약에 따르면, 당중앙군사위원회는 “당의 군사정책 수행방법을 결정하고, 인민군을 포함한 전 무장력 강화와 군수산업 발전에 관한 사업을 조직, 지도하며, 우리나라의 군대를 지휘한다.”
다른 한편, 북측의 후계자론에 따르면, 후계자의 영도를 실현하기 위한 사상체계, 조직체계, 사업질서와 규율을 후계자의 영도체계라 한다. 수령의 유일영도체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후계자의 영도체계도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중앙방송>은 2004년 9월 23일에 발표한 논설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를 세우는 것은 당의 전투력과 위력을 강화하게 하는 기본요인’에서, “로동계급의 당이 수령의 후계자의 령도체계를 튼튼히 세우지 못하면 음모가, 야심가들에 의해 혁명의 명맥이 끊어지며 결국 당과 혁명을 망쳐먹게 된다”고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당중앙군사위원회의 권능과 후계자의 영도체계를 종합해서 생각하면, 김정은 인민군 대장이 후계자로서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사정책 결정을 보좌할 뿐 아니라, 그의 군사정책에 따라 군사력 강화사업을 조직, 지도하고, 인민군을 지휘하는 중책을 맡은 것이다.
어느 집단이건, 새로운 지도자가 그 집단을 이끌기 시작하면, 집단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김정은 인민군 대장이 인민군을 지도하기 시작하였으니, 인민군의 사업과 활동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최근 인민군에게서 일어난 일련의 변화는, 후계자의 군사지도력이 어떠한지를 말해주는 객관적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논한다.
북측 인민들 속에서 전개된 후계자 옹립운동
수구우파의 세습론이 후계를 세습이라고 우기는 사실왜곡인데도 남측 국민들에게 먹혀들어가는 까닭은, 이번에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내부적으로 후계자를 추대한 것에 대해서만 세상에 알려졌을 뿐, 그보다 먼저 북측 인민들이 후계자를 옹립하는 운동을 벌인 선행과정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계자를 옹립하는 대중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정보는 아래와 같다.
첫째, 2009년 6월 2일 <동아일보>는 북측 인민들이 널리 부르는 ‘발걸음’이라는 노래의 가사 전문을 보도하였다. 북측의 대표적인 작곡가 리종오가 노랫말을 쓰고 곡을 지은 노래 ‘발걸음’은 세 절로 되었는데, “우리 김 대장의 발걸음 따라 2월의 정기 뿌리며, 2월의 기상 뿌리며, 2월의 위업 받들어 앞으로 나아간다”는 내용과 “우리 김 대장이 발걸음 구르면 온나라 강산이 반기고, 온나라 인민이 따라서 구르고, 더 높이 울려 퍼져 찬란한 미래를 앞당긴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누가 들어봐도, 이 노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추대될 ‘김 대장’이 나타났음을 알려주는 노래다.
<연합뉴스> 2009년 9월 13일 보도는 노래 ‘발걸음’이 제3방송을 통해 북측 인민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불려지고 있음을 알려주었고, <연합뉴스> 2009년 10월 26일 보도는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북측 축구대표단 선수들도 숙소에서 훈련장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 그 노래를 불렀다고 전하였다. 제3방송은 북측 안에서만 들을 수 있는 유선방송인데, 이 유선방송을 통해 지침, 정보, 소식이 인민들에게 신속히 전달된다. 이처럼 북측 인민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추대될 ‘김 대장’의 출현을 알리는 노래를 널리 부른 것은, 후계자를 옹립하는 대중운동이 북측 인민들 속에서 전개되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2009년 9월 24일 <연합뉴스>는, 대만 사진작가 후앙 한밍이 원산을 방문하던 중 현지에서 찍어 2009년 9월 22일 자기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린 사진을 인용보도하였는데, 북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옥외직관물(남측에서는 옥외게시판)을 찍은 사진에는 “만경대 혈통, 백두의 혈통을 이은 청년대장 김정은 동지”라는 글과 함께 ‘발걸음’ 노랫말 전문이 보인다. 외국인 관광객이 그 사진을 찍었으니, 직관물이 서 있는 곳은 누구나 지나가는 길목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직관물이 지방도시 길거리에 등장한 것은, ‘청년대장’을 후계자로 옹립하는 분위기가 인민들 사이에서 무르익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청년대장’을 후계자로 옹립하는 분위기가 북측 인민들 사이에서 무르익었는데도, 그런 사실이 왜 남측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서울에서 발간된 월간지 <민족21>은 2009년 6월호 관련기사에서 “2000년대 들어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여러 차례 후계자 논의를 중단시키는 발언을 한 바 있다”고 하였다. 그 보도내용에 따르면, 북측에서 적어도 2000년대 전반기부터 후계자를 옹립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제하라고 지시하였다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그러한 지시가 내려졌기 때문에, 후계자를 옹립하는 움직임이 한 동안 잠잠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이명박 정권이 남북관계를 파탄상태에 몰아넣은 결과, 남측 인사들이 이전처럼 북측을 자주 방문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청년대장’을 후계자로 옹립하는 북측 인민들의 움직임이 남측에 알려지지 않았다.
셋째, 미국과 남측의 정보기관들은 북측 인민들 사이에서 ‘청년대장’을 후계자로 옹립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았으면서도, 자기들의 대북정보 수집능력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해 입을 다물었다. 예컨대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장실(ODNI) 산하 공개자료실(Open Source Center)이 북측에서 후계자를 옹립하는 움직임이 2001년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밝힌 보고서를 작성한 때는 2009년 5월 6일이었다. 미국은 그러한 움직임을 주시하면서도 7년 반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대장’이 “후계자로 내정되었다”는 정보는, 2009년 1월 15일 <연합뉴스> 보도를 통해 남측에 처음 알려졌다. 그리고 월간지 <민족21>도 2009년 6월호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이 같은 북의 움직임이 사실인 것으로 확인했다”고 확정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런데 <연합뉴스> 2009년 1월 15일 보도에 나온 “내정되었다”는 말은 오해하기 쉬운 표현이다. 원래 내정이라는 말은 비공식적으로 결정했다는 뜻이므로, 그 보도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비공식적으로 후계자를 정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물론 ‘청년대장’을 후계자로 추대하는 최종 결정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내린 것이 분명하나,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결정하기 전에 그 최종 결정을 촉진시킨 중요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 움직임은 이러하였다.
만경대혁명학원 출신 ‘혁명동지’들이 떠맡은 책임
사회주의 나라인 북측의 정치체제가 다른 사회주의 나라의 정치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까닭은, 수령의 유일영도체계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수령의 유일영도체계를 유지하고 강화해온 결속력이 만경대혁명학원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만경대혁명학원의 역사를 알아야, 수령의 유일영도체계를 알 수 있고, 수령의 유일영도체계를 알아야 수령의 후계자가 어떻게 추대되는지 알 수 있다.
1947년 10월 12일 김일성 주석이 만경대혁명학원을 세웠을 때, 교문에 들어선 1기생은 320명이었다. 2기생도 그 정도 인원이었다. 그들은 9살짜리 아이로부터 23살이 된 청년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하였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항일투쟁에 목숨을 바친 혁명가와 투사들이 남긴 고아들이었다는 점이다. 그 고아들은 일제침략자들에게 부모를 여의고, 중국 동북지방에서 잡초처럼 살던 자기들을 일일이 찾아내 혁명위업을 계승할 간부급 인물로 키워주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숙 여사를 진심에서 아버지, 어머니로 부르며 자랐다.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만경대혁명학원을 116차례나 현지 지도하였는데, 다른 곳에 대한 현지 지도와 달리 그곳에 가면 반드시 원생들과 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들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일제침략자들과 싸우던 항일투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정숙 여사는 생애의 마지막 시기 2년 남짓한 기간에 25차례나 방문하여 원생들을 위해 옷도 해 입히고 김치도 담가주고 생일상도 차려주면서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김정숙 여사가 만경대혁명학원을 찾을 때마다 당시 유년이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갔다. 6.25전쟁 시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만경대혁명학원 원생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끊을 수 없는 혁명동지적 결속관계를 맺은 것은 필연이었다.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과 2기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추대된 197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근 40년 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혁명동지들이며, 북측을 이끌어온 책임간부들이다. 조선로동당은 후계시대에 이르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그들의 혁명동지적 결속관계를 통해 더욱 강화발전되었으며, 그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자기들의 혁명동지적 결속관계를 전사회적으로 확대하는 당의 정치사업을 지난 40년 동안 추진해왔다. 북측이 자긍심을 갖고 말하는, 수령-당-대중의 관계를 ‘일심단결’과 ‘혼연일체’로 결합시킨 거대한 사회정치적 생명은 그렇게 하여 탄생하였다. 그러한 사회정치적 생명체가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면 수령에 대한 인민의 충실성이 발현되는 것이고,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면 수령의 유일적 영도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구우파는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전면 부정하면서, 수령의 유일영도체계를 ‘독재’라고 비방하고 있다.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과 2기생의 부모세대인 혁명1세대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후계자로 추대한 때로부터 40여 년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또 다시 후계자를 추대하여 유일영도체계를 3세대와 4세대에게 계승하여야 하는 실로 막중한 책임이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과 2기생에게 주어졌다. 그 책임은 어느덧 70대와 80대 노년기에 접어든 그들이 자기 조국의 미래를 위해 수행해야 할, 어쩌면 자기들 생애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정치과업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자기들과 평생토록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혁명의 먼 길을 헤쳐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위한 도덕의리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만일 왜 중국처럼 집단영도체계로 전환하지 않고 이번에도 유일영도체계를 또 다시 고수했느냐고 누가 말한다면, 그 말은 그들이 고귀한 정치생명으로 간직해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혁명동지적 결속관계를 이제 포기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이며, 그들에게는 감히 입에 담지 못할 모욕적 언사가 될 것이다. 그들에게 집단영도체제는 상상할 수도 없다.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일성종합군사대학을 졸업한 새 세대 가운데는 당과 국가와 군대의 미래를 맡길 훌륭한 청년들이 수없이 많다.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과 2기생은 새 세대의 훌륭한 청년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을 수령의 후계자로 추대하여야 하였다. 수령의 혁명가문과 평생토록 혁명동지적 결속관계를 유지해온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과 2기생이 수령의 혁명가문에서 자란 새 세대 가운데서 충실성과 성품, 지도력과 능력을 지닌 사람을 수령의 후계자로 추대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혁명동지적 결속관계가 후계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당과 국가와 군대를 이끄는 그의 수많은 혁명동지들이 ‘청년대장’이라고 부른 청년을 후계자로 옹립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절차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군인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청년대장’에게 인민군 대장의 군사칭호를 수여하였다는 보도가 나오자, 남측 언론매체들은 민간인이 갑자기 인민군 대장이 된 것이 이상하다는 식으로 반응하였다. 그러나 그런 반응은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남측에서 군대에 가는 것은 병역이지만, 북측에서 군대에 가는 것은 병역이 아니라 영예다. 군대복무를 영예로운 과업으로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군대계급장’이 존재할 수 없고 영예로운 군사칭호가 존재한다. 북측에서는 마치 훈장을 수여하듯 장령급 군사칭호를 민간인에게도 수여한 전례가 있다.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과 2기생을 따라 북측 인민들이 ‘청년대장’이라고 부른 그 20대 후반의 청년은 자기 세대의 다른 청년들처럼 군대복무를 영예로 생각하는 군인이었다. <민족 21> 2009년 6월호 관련기사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군복을 입고 자랐”을 뿐 아니라, 2002년부터 2007년 4월까지 5년 동안 군사지휘관을 양성하는 최고 기관인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그의 전공은 포병학이었다고 한다.
‘청년대장’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재학 중에 있었던 몇 가지 일화는, 엉뚱한 일이었지만, <마이니치신붕>을 통해 외부에 알려졌다. 2009년 10월 5일 그 신문은 북측에서 유출된 대외비 문건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 동지의 위대성 교양 자료’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전문을 보도했다. 당시로서는 그 문건의 진위여부를 알기 힘들었으나, 지금 다시 읽어보면 외부의 조작문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일어 번역문을 우리말로 다시 옮기면서 어색하게 표현된 몇 군데를 뜻이 통하도록 약간 다듬어 인용한다.
‘교양자료’에 따르면, ‘청년대장’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선군혁명 사상과 이론을 당사업, 국가사업, 군사사업에 구현하기 위해 사상이론활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고 한다. 선군혁명의 사상과 이론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한 ‘교양자료’에 따르면, ‘청년대장’은 “매우 창조적인 착상으로 기발한 작전지도를 많이 작성하였”는데, 그 작전지도들에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사전략사상이 구현된, “기상천외하고 천변만화의 만점계획이 명시되었”다고 하였다. 그가 졸업논문으로 발표한, 군사작전에 도입한 컴퓨터 모의실험(simulation)을 인민군 고위지휘관들이 처음 참관한 때는 2006년 12월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가 최신 군사과학기술을 공부하고, 위성항법체계(GPS) 응용기술과 컴퓨터 응용기술을 군사작전에 도입하는 실력을 가졌음을 뜻한다. 이처럼 그가 최신 군사과학기술에 정통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영어와 독일어에 능한 외국어 실력을 갖추고 미국과 유럽에서 나오는 최신 과학기술자료들을 섭렵하였기 때문이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졸업생은 초급 군사지휘관으로 임관된다. ‘청년대장’도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한 2007년 4월 인민군 지휘관으로 임관되었을 것이다. 그는 어느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관되었을까? 북측에서는 조국을 지키는 수많은 인민군 부대들 가운데서도 특히 ‘조국의 심장’을 지키는 부대를 최정예 부대로 손꼽는다. 평양방어사령부 산하 부대가 바로 그 부대다.
‘교양자료’에 따르면, 그는 “군사작전에서 조직과 지휘를 매우 유리하게 전개하고, 포병부문에서 정확한 지점에 화력타격을 보장하는데 큰 역할을 하며, 누가 보아도 입체감이 있어 지형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정확도가 높은 새로운 작전지도”를 작성하였다고 했으니, ‘청년대장’은 평양방어사령부 산하 포병부대 지휘관으로 임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010년 9월 28일에 진행된 당대표자회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관한 언론보도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리용호 인민군 총참모장이다. 이번에 그는 홀로 인민군 차수의 군사칭호를 수여받았고,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고,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과 위원을 모두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은, 북측의 표현을 빌리면 ‘혁명의 수뇌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영림 내각 총리,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으로 구성되었다. 이런 정황을 보면, 리영호 총참모장은, 남측 언론에서 쓰는 말로 표현하여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리영호 총참모장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사단 참모장, 군단 작전부장,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훈련소 참모장, 훈련소 소장, 부총참모장을 거쳤다. <한겨레> 2010년 9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인민군의 “대표적 포병전문가로 알려진” 포병지휘관 출신이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포병학을 전공하며 특출한 실력을 발휘한 ‘청년대장’이 포병지휘관으로 임관되어 평양방어사령부 산하 포병부대로 갔던 2007년 4월 당시 평양방어사령관으로 있었던 이가 리영호 총참모장이다. 그는 2003년 9월부터 2009년 2월까지 평양방어사령관으로 있었다.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공부한 청년시절부터 68세가 된 오늘까지 수령의 혁명가문과 혁명동지적 결속관계를 맺은 군사간부로 최고사령관을 받들어온 평양방어사령관의 눈에 ‘청년대장’의 모습은 어떻게 비쳤을까?
‘교양자료’에 따르면, ‘청년대장’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공부하던 5년 동안, 수령에 대한 그의 “한없는 충실성과 특출한 실력, 고매한 인품에 매혹되여 수많은 일군이나 동지들이 이미 그 분을 자발적으로 받들어왔다”고 한다. 이것은 리영호 당시 평양방어사령관이 ‘청년대장’을 자기 휘하에 있는 포병지휘관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수령의 후계자로 옹립하였음을 말해준다.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의 인민군 고위지휘관들이 ‘청년대장’을 수령의 후계자로 옹립하는 자발적 움직임의 중심에는 당시 평양방어사령관이었던 리용호 총참모장이 있었다. 후계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만일 그가 어떤 결정적인 공을 세우지 않았다면, 이번에 그처럼 ‘초고속 승진’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후계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리용호 당시 평양방어사령관이 세운 결정적인 공은 무엇이었을까?
2010년 4월 7일 <연합뉴스>는, 대외비로 발간되는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 기관지 <조선인민군> 2010년 1월 8일 지면을 인용 보도하였다. 그 대외비 신문 제1면에는 장문의 사설이 실렸는데, 제목은 “인민군대는 위대한 수령, 위대한 최고사령관을 대를 이어 받들어온 충실성의 전통을 빛나게 계승해 나갈 것이다”로 되어있다. 그 사설이 실린 1월 8일은, ‘청년대장’이 태어난 날이므로, 그 사설은 ‘청년대장’에 대한 인민군의 충성심을 강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인민군이 ‘청년대장’을 수령의 후계자로 옹립하는 정치사업을 힘있게 추진하였음을 말해준다. 북측에서 가장 선도적이고, 가장 유력한 집단인 인민군이 ‘청년대장’을 수령의 후계자로 옹립하는 정치사업을 벌였으므로, 그 이후 당중앙위원회에서의 후계자 추대사업이 안정적으로, 그리고 급속도로 추진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민군 안에서 옹립사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사업에서 추진력을 발휘한 가장 대표적인 군사지휘관이 리영호 당시 평양방어사령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평양방어사령관(상장)에서 인민군 총참모장(대장)으로 승진한 때는 2009년 2월 11일이었다.
인민군 전술의 변화양상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언론보도를 주의 깊게 읽는 독자들은 알 수 있었겠지만, 인민군의 움직임을 전하는 북측 언론보도에 2009년 초부터 눈에 띄게 새로운 내용들이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외부에서도 감지할 수 있는 어떤 큰 변화가 인민군에게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변화양상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인민군의 포병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연합뉴스> 2010년 9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인민군은 지난 한 해 동안 240mm 방사포 200여 문과 대구경 장사정포 2,100여 문을 증강 배치하였다. 어마어마한 화력이 증강된 것이다. <중앙일보> 2010년 8월 2일 보도에 따르면, 인민군은 최전방 산악지대 남사면에 구축한 갱도진지의 대구경 장사정포를 북사면에 새로 구축한 갱도진지로 옮기고, 갱도진지 밖에 있는 포대에 방호덮개를 씌워 미국군의 확산탄 공격을 무력화하였다. 또한 <연합뉴스> 2009년 5월 8일 보도에 따르면, 2009년 1월부터 4월말까지 인민군이 서해 5도 수역에 있는 대수압도 앞바다를 향해 19차례에 걸쳐 총 1,000여 발의 포사격을 계속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2009년 1월 5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포병사령부 관하 제1489군부대의 포사격훈련을 참관하였음을 보도하면서, 240mm 방사포를 집중발사하는 장면을 찍은 현장사진을 이례적으로 실었다. 2009년 2월 12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포병사령부 관하 제681부대의 포사격훈련을 참관하였음을 보도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위 군사지휘관들과 당중앙위원회 책임간부들을 대동하고 포사격훈련을 참관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실었다. 2009년 3월 15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포병사령부 관하 제1911군부대의 포사격훈련을 참관하였음을 보도했다.
일련의 보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여느 포중대의 포사격훈련이 아니라 포병사령부 직속부대의 포사격훈련을 계속 참관하였다는 점이다. ‘북한의 고위 소식통’이 한 말을 인용한 <동아일보> 2010년 3월 2일 보도에 따르면, ‘청년대장’은 2009년 초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인민군 고위지휘관들이 참관한 가운데 인민군의 포사격 훈련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청년대장’이 인민군 포병사령부의 전술훈련을 직접 지휘하였음을 말해준다.
둘째, 2009년에 포사격훈련 보도를 중시하였던 북측 언론은 2010년에 와서 대규모 종합전술훈련 보도를 중시하였다. 보도초점이 포사격훈련에서 대규모 종합전술훈련으로 이동한 것이다.
2010년 1월 18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3군 합동 실전훈련을 참관하였음을 보도했다. 이 훈련의 진행상황에 대해서는 2010년 2월 1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인민군은 왜 바다로 방사포를 쏘았을까?’에서 자세히 논했다. 또한 2010년 4월 14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태양절에 즈음하여 진행된 인민군 제567대련합부대 종합훈련을 참관하였음을 보도했다.
위의 두 보도는 ‘청년대장’이 작성한 작전계획에 따라 대규모 종합전술훈련이 실시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대규모 종합전술훈련 보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고위지휘관들, 당중앙위원회 책임간부들과 함께 훈련을 참관해온 관례와 다르게, 각급 기관 책임간부들, 여러 군부대의 지휘관들도 함께 참관하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간부들과 군지휘관들이 ‘청년대장’의 작전지휘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셋째, 최신 군사과학기술을 도입한 인민군의 변화된 모습이 보도되었다. 이를테면, 2009년 2월 12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포병사령부 관하 제681부대의 포사격훈련을 참관하는 사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그를 수행한 책임간부들이 벽에 커다란 책장이 있는 어떤 방에서 전방을 바라보는 모습이 담겨있다. 그 방은 작전지휘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까지 북측 언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격훈련장의 옥외전망대에서 훈련상황을 굽어보는 사진들을 실어왔는데, 위의 사진은 이례적으로 작전지휘실에서 사격훈련을 내다보는 장면이다. 이러한 사진장면의 변화는 인민군의 전술훈련에 최신 군사과학기술이 도입된 어떤 변화가 있었음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2010년 4월 25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창건 78주년을 맞아 인민군 제586군부대를 시찰하였음을 보도했다. 이 보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투기술기재들을 돌아보신 후 부대의 작전지휘실과 군사연구실들에 들리시여 훈련정형을 료해”한 것이다. 이것은 인민군 부대에 첨단화된 전투기술기재들이 배치되고, 각종 군사연구실들이 설치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보도는, 인민군 부대에 최신 군사과학기술을 도입한 사업이 ‘청년대장’의 지도로 추진되었음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 <한겨레> 2010년 1월 27일 보도에 따르면, 항행금지구역을 선포한 뒤에 해상사격을 한 적이 없는 인민군이 처음으로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 항행금지구역을 선포하고 해상사격을 하였다. 또한 ‘북방한계선’을 향해 포사격을 한 적이 없는 인민군이 처음으로 그 선이 지나는 백령도와 대청도 앞바다를 향해 집중적으로 포사격을 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일보> 2010년 1월 29일 보도에 나온 대로, 인민군이 포격조짐을 사전에 한미연합군에게 노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미연합군은 인민군이 어떤 종류의 포를 어디서 몇 발이나 쏘았는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하였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원래 인민군의 포사격 순서는, 갱도진지 차폐문을 열고 대구경 장사정포를 포대로 끌어낸 다음, 관측병이 무선통신으로 사격좌표를 불러주면, 포병들이 그 좌표에 따라 사격을 시작하는 것이다. 준비시간이 걸리고, 피격위험이 높다. 이런 정황에서, 한미연합군 첩보부대는 인민군 포병부대 관측병의 무선통신을 감청하여 포사격 조짐을 미리 간파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09년 초부터 인민군 관측병이 무선통신으로 포병들에게 사격좌표를 불러주던 종래 방식이 사라지고, 불시에 포사격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전에 인민군은 해안절벽에 구축한 갱도진지에서 해안포를 쏘았는데, 2009년부터는 한미연합군 정찰기의 공중관측범위에서 벗어난 산 넘어 내륙지방에서 240mm 방사포와 170mm 자행포(자주포)로 혼성 포사격을 하였다.
인민군이 어떤 종류의 포를 어디서 몇 발이나 쏘는지를 한미연합군이 사전에 알 수 없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이것은 인민군 포병부대가 위성항법체계와 컴퓨터로 자동화된 첨단 사격통제장치를 가동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교양자료’에서 ‘청년대장’이 위성항법체계 응용기술과 컴퓨터 응용기술을 포병전술에 도입하였다고 했으니, ‘청년대장’의 지도에 따라 인민군 포병부대에서 첨단 사격통제장치를 가동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인민군의 포사격이 정밀타격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인민군은 2010년에 1월 27일, 그리고 8월 8일과 9일 서해 5도 수역을 향해 정밀타격방식으로 포를 쏘았다. 1월 27일의 포사격 진행상황에 대해서는 2010년 2월 1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인민군은 왜 바다로 방사포를 쏘았을까?’에서 자세히 논했고, 8월 8일과 9일의 포사격 진행상황에 대해서는 2010년 8월 16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네 차례 위협사격에 숨겨진 이야기’에서 자세히 논했다.
포탄이 비행하는 거리, 속도, 궤적을 미리 계산한 뒤, 어려 종류의 포를 각기 다른 사격지점에서 각기 다른 시각에 쏘는 포사격을 동시탄착사격(TOT, time-on-target barrage)이라 한다. 한미연합군의 동시탄착사격은 탄착시간 30초 이내에 탄착공간 1㎢ 안에 있는 고정표적를 집중포격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인민군의 동시탄착사격도 그러하였다.
그런데 2009년부터 인민군의 포사격은 탄착시간을 10초 이내로 줄이고, 지상의 고정목표가 아니라 바다에서 움직이는 이동목표를 맞추는 정밀타격방식으로 상향, 발전되었다. 한미연합군은 사격훈련장에 설치된 야산만한 넓이의 타격권을 향해 포를 집중사격하는 데 비해, 인민군은 해상에서 이동하는 하나의 타격점을 향해 여러 문의 포를 조준하여 정밀타격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민군 야전포병전술체계가 첨단과학기술로 재정비되었음을 말해준다.
‘교양자료’에 따르면, ‘청년대장’이 “여러 발의 포탄을 한 구멍으로 통과시키는 비범한 사격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청년대장’이 인민군 야전포병전술체계에 첨단과학기술을 도입하였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위에 언급한 인민군 전술의 변화양상은 인민군의 작전지휘체계에 후계자의 영도가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북측의 표현을 빌리면, 후계자가 군사부문에서 선군혁명위업을 계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
첫댓글 후계는 세습이 아니라는 당위성을 설명하려고 한 것 같으니 논리가 비약적이고 부족하며, 글의 주제도 중반까지는 후계에 대한 문제에서 그냥 청년대장의 포병전술 능력 설명으로 가서 끝나는 군요. 이런 논증으로는 조선의 후계가 세습이 아니라는 논리를 표출해낼 수 없을 듯 합니다.
윗글은 북측권력의 본질을 설명한 듯 합니다.장문이기는 하나 일독 권장합니다.
저는 김정은대장 체계로 확립되었고, 인민군의 사격전술도 상향조정되었다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