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후서 5장 1-4절. 땅의 장막집과 하늘의 영원한 집
1. 지난 시간에는 바울 사도가 늘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지만,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복음을 위한 고난 때문에, 장차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 오늘은 바울 사도가 하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살고, 세상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4절. 바울의 육신적 삶은 광야의 초막생활(the life of tabernacle in the wilderness)과 같은 것으로서, 자신은 무거운 짐진 것처럼 탄식하면서(groaning) 천국 집(가나안의 집)을 사모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7절. 바울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성령님을 모시고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8-10절.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3. 오늘 설교의 제목은 <땅의 장막집과 하늘의 영원한 집>입니다.
1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we know that if the earthly tent which is our house is torn down, we have a building from God, a house not made with hands, eternal in the heavens.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아느니라.
οἴδαμεν γὰρ ὅτι ἐὰν ἡ ἐπίγειος ἡμῶν οἰκία, τοῦ σκήνους, καταλυθῇ,
we have known for that if the earthly of us house, the tent, should be destroyed
직역하면 ‘왜냐하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집, 장막집이 무너진다면 (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아느니라’(οἴδαμεν)는 완료형으로서(we have known)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너지면’(καταλυθῇ)는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should be destroyed) 결정적으로 확 무너지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οἰκοδομὴν ἐκ Θεοῦ ἔχομεν,
building from God we have
직역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집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가지고 있다’(ἔχομεν)는 현재형으로서(we have), 현재 우리가 하늘 집을 가지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οἰκίαν ἀχειροποίητον, αἰώνιο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house not made with hands, eternal in the heaven
New International Version: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천막집이 무너지면,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빌딩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For we know that if the earthly tent we live in is destroyed, we have a building from God, an eternal house in heaven, not built by human hands)
New Living Translation: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천막집이 무너지면( 즉, 우리가 죽어서 이 세상 육체를 떠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시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집 즉 영원한 육체를 우리가 가질 줄을 알기 때문이다. (For we know that when this earthly tent we live in is taken down (that is, when we die and leave this earthly body), we will have a house in heaven, an eternal body made for us by God himself and not by human hands)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1. 여기서 <장막 집>이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사는 육신을 가리키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란 장차 천국에서 가지고 살게 될 부활의 몸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진다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수명을 다해서 죽는 것을 가리킵니다.
중동지역에서는 목축을 주로 하기 때문에, 목축을 하면서 천막생활을 하다가, 다른 목초지로 이동할 때는 천막을 걷고, 새로운 천막을 세우는 일이 익숙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다가 이 육체가 죽게 되면, 천국에서 병들지 않고 죽지도 않는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다가 죽으면, 우리의 삶이 끝나버리고 더 이상 다른 삶이 없다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육체는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 영혼은 없어지거나 죽지 않고 천국에 가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육신의 몸이 부활하여 병들지 않고 죽지도 않는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린도전서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2. 이런 부활에 대한 말씀이 젊었을 때는 실제로 마음에 와닿지 않지만, 나이가 많아 늙어서 죽음을 실제로 바라볼 때는,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부활의 몸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실제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3. 이처럼 부활의 몸과 영원한 천국 생활이 우리의 장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사회와 가정에서의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고, 교회에서도 주의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1.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란 성도가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살게 될 부활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이 부활의 육체는 병들지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천국은 병균도 없고 질병도 없고, 해충도 없고, 악한 짐승들도 없고, 마귀도 없고, 나쁜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 강에서 흐르는 물은 생명을 늘 건강하고 새롭게 만들어주는 샘물이고, 생명 나무 과일과 잎은 약초와 같습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의사도 없고, 병원도 없고, 약국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육체에 질병이 들까 봐서 걱정하고, 육체의 건강을 잘 돌봐도 100세쯤 살면 죽게 됩니다.
또한 이 세상에는 많은 병균들과 해충과 악한 짐승들과 악한 사람들과 사고가 많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악한 것들이 하나도 없고, 사고도 없고, 사람들도 다 선량하기만 합니다.
2.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자기 건강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려고 얼마나 애를 쓰며, 또 직장생활이나 사업을 하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러나 천국에서는 병들지 않고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것과 모든 생필품이 다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힘들게 노력하지 않고 편히 쉴 수 있습니다.
즉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찬송가 479장에서 말씀한 대로,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평안히 쉴 곳이 없지만, 천국은 우리가 편히 쉴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3.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 아노라>는 말씀은, 바울 사도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것을 확신하고, 하늘나라를 믿고 사모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늘 본향을 사모하면서 믿음으로 세상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나그네 인생길이고, 하늘나라가 참된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15-16.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뿐이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만일 부활 천국이 없으면, 우리의 복음 전도와 모든 헌신 봉사가 헛것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리라.
그러나 바울은 부활의 몸과 천국이 있기 때문에, 모든 고난을 감수했습니다.
또한 우리 예수님께서도 하늘나라 영광을 바라보고, 부끄러운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리고 모세는 이 부활 천국을 위해서 애굽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렸습니다.
즉 모세는 바로 왕의 무남독녀 외딸의 양아들로서 애굽 왕이 될 사람이었지만, 부활 천국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히브리서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4.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이 천국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 년에 한 번 7월에 농사를 다 마친 후에 <초막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배부르고 등 따실 때, 든든한 집에서 천국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들에 나가서 풀과 나무로 초막집을 짓고 일주일간을 살도록 했습니다.
레위기 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닷세 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5. 이처럼 이 세상에 몰두하지 않고, 영원한 부활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일생을 바쳐서 이 값진 진주 같은 천국에 투자합니다.
마태복음 13:45-46.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육신과 이 세상은 몇 년 후에 무너질 천막집과 같다는 것을 아시고, 영원한 부활과 천국을 준비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과 육신을 떠나는 날, 영원한 천국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2절.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ndeed in this house we groan, longing to be clothed with our dwelling from heaven,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καὶ γὰρ, ἐν τούτῳ στενάζομεν,
and indeed, in this we groan,
‘탄식하며’(στενάζομεν)는 현재형으로서(we groan) 현재 우리가 탄식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τὸ οἰκητήριον ἡμῶν τὸ ἐξ οὐρανοῦ ἐπενδύσασθαι ἐπιποθοῦντες,
the dwelling of us which from heaven to be clothed with longing
직역하면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우리가 탄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덧입기를’(ἐπενδύσασθαι)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clothed) 갑자기 확 덧입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모하노라’(ἐπιποθοῦ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longing) 현재 사모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왜냐하면 참으로 우리는 이 집에서 탄식하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옷 입기를 사모하기 때문이다. (For indeed in this house we groan, longing to be clothed with our dwelling from heaven)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우리의 현재 육체 가운데서 지쳐가고 있으며, 우리의 하늘 육체를 새 옷처럼 입기를 사모하고 있다. (We grow weary in our present bodies, and we long to put on our heavenly bodies like new clothing )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1. 본문에서 <여기>는 천국이 아닌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즉 천국에 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탄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도 세상 만물과 우리 성도들이 탄식하면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22-23.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 그러면 왜 이 세상에서 만물과 우리가 탄식하며 살아갑니까?
네, 그것은 로마서 8장 21절에 말씀한 대로, 만물과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썩어짐에 종노릇 한 것 때문에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그래서 솔로몬도 전도서에서 이 세상의 삶이 궁극적으로 헛되고 헛되다고 했습니다.
전도서 3:19.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생 동안 수고하고 애쓰는 것이 결국 슬픔이기 때문에 탄식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시편 90편에서 인생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리고 솔로몬도 인생들이 일생에 수고하고 애쓰지만 슬픔뿐이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2: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처럼 인생이 일생 동안 근심하고 수고하고 슬프게 사는 이유가 어디 에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로 말미암아 인간이 이처럼 근심하고 수고하고 슬프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90편 5-9절에는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근본적으로 탄식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즉 확실한 희망이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1. 인생이 근심과 수고와 슬픔뿐인데, 죽어서 지옥에 간다면 얼마나 절망적이고 비참한 인생입니까?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영생 천국의 놀라운 희망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무리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머지않아 잘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으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낮 동안에 힘들게 일해도 밤에 들어가 편히 쉴 가정이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일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가 힘들어도, 장차 좋은 직장을 가질 희망을 가지기 때문에, 힘들어도 참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지만, 장차 자녀들이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참아나갑니다.
우리 인생은 이 세상이 근심되고 수고하고 슬픔이 많지만, 하늘나라 고향에 가서 주님을 만나 위로를 받고, 생명수 강가에서 영생 복락을 누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세상 고초를 참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479장에는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쉴 곳이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라고 했습니다.
2. 이 세상에서 고생이 심한 사람은 더욱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을 것을 간절히 사모하고, 목마른 사람은 마실 물을 간절히 사모하듯이, 이 세상에서 괴로운 사람은 영생 천국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제 집사람도 못 고칠 병으로 고생이 막심할 때는, 어서 하늘나라에 가려고 유서를 몇 번이나 썼습니다.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죽을 때 흘리는 식은땀이 온몸에 질펀하게 흐르는 것과 머리가 빠개질 것같이 아픈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지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천국에 갈 것을 날마다 소원했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 은혜로 심장 수술을 성공적으로 하고, 10년이 되는 지금은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유서를 쓰지 않고, 날마다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3. 오늘 성경에서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 믿은 후로 인생길이 너무도 험난하고 힘들었습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세상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유대 나라 군대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후로는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민족 반역자라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4장에서는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이 와서 바울을 돌로 쳐서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7장에서는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하자, 바울이 베뢰아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죽이려 하자, 바울은 다시 밤에 배타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8장에서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이 갈리오 총독에게 바울을 죽여달라고 고소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9장에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 아데미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유대인들 수만 명이 데모를 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험악한 인생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더욱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한 것은 고린도 교회의 반바울파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즉 고린도후서 3장 1절에 말씀한 대로, 고린도 교회의 반바울파 사람들은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비방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2장 6절에 말씀한 대로, 고린도교회의 반바울파 사람들은 바울이 헌금을 횡령해 먹은 도둑놈이라고 비방했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1장 6절에 말씀한 대로, 반바울파 사람들은 바울이 말이 어눌하고 설교를 잘 못 한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말씀한 대로, 반바울파 사람들은 바울이 간질 같은 고질병을 앓고 있는 것 때문에 비방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개척 설립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비방하자, 바울은 본 절에서 고생과 수고가 없는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4.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도 이렇게 비방을 받고 하늘나라를 사모했으니,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얼마나 비방을 받겠습니까?
바울 사도에 비해서 영력도 형편없이 부족하고, 말씀도 기도도 사랑도 심히 부족한 우리들이야 얼마나 비방거리가 많겠습니까?
5.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박해를 당해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우리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심지어 귀신 들렸다고 비방했으니, 하물며 우리 성도들이야 더한 비방을 당해도 이상하게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25-27.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이처럼 성도들이 세상에서는 불신자들에게 비방과 핍박을 받지만, 그럴수록 더욱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똑같이 죄짓고 살면서도 아무런 괴로움이 없다면,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마귀는 마귀의 자식이 죄짓고 살아도 좋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불신앙으로 살면 슬퍼하시면서 징계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짓고 불신앙으로 살아도 아무런 가책이나 징계가 없으면, 버린 자식이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안일과 부귀에 깊이 빠지지 마시고,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자손이 복을 받고, 하늘나라에서도 영광과 상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nasmuch as we, having put it on, will not be found naked.
εἴ γε καὶ ἐνδυσάμενοι, οὐ γυμνοὶ εὑρεθησόμεθα.
if indeed also having been clothed, not naked we will be found
직역하면 ‘또한 이렇게 덧입게 되면,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란 뜻입니다.
‘입음은’(ἐνδυσάμενοι)은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been clothed) 단호하게 덧입게 되는 모습을 가린킵니다.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에서 동사(εὑρεθησόμεθα)는 미래형으로서(we will be found) ‘우리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란 뜻입니다.
New International Version: 우리가 옷을 입을 때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게 하려는 것 때문이다. (because when we are clothed, we will not be found naked).
New Living Translation: 왜냐하면 우리가 하늘의 육체들을 입게 될 때, 육체가 없는 영혼들이 되지 않으려는 것 때문이다. (For we will put on heavenly bodies; we will not be spirits without bodies.)
1. 오늘 본문은 하늘나라에 갔을 때, 부활의 몸을 입지 못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고, 부활의 몸을 입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늘나라에서 부활의 몸을 입으려면, 이 세상에서의 모든 죄가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씻은 흰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에 갔을 때, 우리는 벌거벗은 자가 아니라, 예복을 입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예복이란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은 의의 예복을 말합니다.
2. 마태복음 22장 2절에는 천국에서 잔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잔치에 참여하도록 전도자들이 거리를 다니면서 전도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전도자들을 보내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모두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천국 잔치 자리가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와서 예복을 입지 않는 자들에게 왜 예복을 입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입이 있어도 대답을 못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 사람들을 밖의 어두운 데로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고 쫓겨난 자들이 이를 갈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천국 잔치에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참여할 수 있으나,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은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깥 어두운 지옥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씻음받고 예수님의 의로 옷 입어야 합니다.
3. 그래서 요한계시록 7장에는 천국에서 찬양하며 예배하는 14장 4천 명이 나오는데, 7장 14절에는 이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깨끗이 씻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씻는 것이 중요합니다.
4. 이처럼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것도 예수님의 피로 씻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 세상에서 죄를 깨끗이 용서받고 주님과 동행하여 승리의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호수아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 사람들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은 작은 성읍이라, 이스라엘 군사 60만 명 중에 수천 명만 가서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사들이 예상외로 여지없이 패배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낙담하게 되고 모두 울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나가서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 7장 12절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죄가 있기 때문이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네, 그 죄는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 성에서 금은과 옷을 훔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범죄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패배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씻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5.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결한 생활 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레위기 11장 45절에는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음식도 깨끗한 음식을 먹으라고 하셨고, 육체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부 관계를 해도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니, 그 몸을 씻어서 하루가 지나야 거룩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생리가 끝나도 삼 일이 지나야 깨끗해진다고 했습니다.
또한 가족이 상을 당해도 몸을 성결하게 한 다음에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성결을 원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동행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씻음받아야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6.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우리가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만 하면,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1:8-9.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다윗도 일생을 살아본 경험을 바탕으로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2: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7. 그러므로 우리가 형통한 삶을 사느냐, 아니면 만사 불통한 삶을 사느냐 하는 관건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떠나가셨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446장에는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니까, 며칠이면 들어갈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면서 헛된 삶을 살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은 성공적인 인생이 되고, 주님이 떠나가시면 헛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삼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늘 승리했지만, 하나님이 떠나가시니까 패배했습니다.
8. <예화>
어떤 사람이 청년 시절에 성령 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비한 체험도 했으며, 하나님께서 쓰시는 놀라운 체험도 했습니다.
그러자 경기고등학교 식당을 인수 받아서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래서 총각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 집사가 인기가 높아져서 많은 여성들이 따랐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 집사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탈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떠나버리시고, 이 청년 집사가 병이 들었습니다.
즉, 이유 없이 잠을 못 자고, 온몸에 피부병이 생겨서 도무지 생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학교 식당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병든 몸으로 수십 년을 헛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좋은 여성을 만나 결혼하고, 죄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병이 치료되고, 다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즉, 황금 같은 30년의 세월을 허송하고, 완전한 건강을 회복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인생길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설립하고, 어린이집과 복지 센타를 설립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성공적인 삶을 살고, 하나님이 떠나가시면 헛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씻음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4절.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ndeed while we are in this tent, we groan, being burdened, because we do not want to be unclothed but to be clothed, so that what is mortal will be swallowed up by life.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καὶ γὰρ οἱ ὄντες ἐν τῷ σκήνει στενάζομεν, βαρούμενοι,
and for those being in the tent, we groan, being burdened,
직역하면 ‘왜냐하면 이 장막에 있는 자들인 우리가 짐을 지고 있으면서 탄식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있는’(ὄντες)은 현재분사로서(being) 현재 육신의 장막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짐을 지고 있으면서’(βαρούμενοι)는 현재분사 수동태로서(being burdened) 현재 짐 지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탄식하는’(στενάζομεν)은 현재형으로서(we groan) 현재 탄식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ἐφ’ ᾧ οὐ θέλομεν ἐκδύσασθαι
on the basis of that not we wish to be unclothed
직역하면 ‘우리가 벗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요’란 뜻입니다.
‘벗기를’(ἐκδύσασθαι)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unclothed) 단번에 확 벗어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원하기’(θέλομεν)는 현재형으로서(we wish) 현재 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ἀλλ’ ἐπενδύσασθαι,
but to be clothed
동사(ἐπενδύσασθ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clothed) 단번에 확 덧입는 것을 가리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ἵνα καταποθῇ τὸ θνητὸν ὑπὸ τῆς ζωῆς.
so that may be swallowed up the death by the life
직역하면 ‘이는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기 위함이다’란 뜻입니다.
‘삼킨 바 되게’(καταποθῇ)는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may be swallowed up) 단번에 확 삼켜지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참으로 우리가 이 천막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짐 지고 있는 것으로 탄식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벗은 자들이 되기를 원치 않고, 옷 입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이다. (For indeed while we are in this tent, we groan, being burdened, because we do not want to be unclothed but to be clothed, so that what is mortal will be swallowed up by life)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이 지상의 육체 속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신음하고 한숨을 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죽어서 우리가 지금 옷 입고 있는 이 육체들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육체로 옷 입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죽어가는 육체가 생명에게 삼켜지는 것이다. (While we live in these earthly bodies, we groan and sigh, but it's not that we want to die and get rid of these bodies that clothe us. Rather, we want to put on our new bodies so that these dying bodies will be swallowed up by life)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1.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사는 것은 무거운 짐 진 사람이 탄식하고, 신음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가 무거운 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인이 되면, 육체가 무거운 짐인 것을 실감합니다.
즉 어디를 가고 싶어도 몸이 병들고 약하여 몸이 무거운 짐이 되므로 어디를 가기가 무섭습니다.
병원에 다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상이 되고, 여러 가지 약 먹는 것이 일상이 되고, 어디를 가고 싶어도 갔다 와서 병이 날까봐서 가기가 무섭습니다.
몸이 무겁고 병들어서 어디를 가기가 무섭고, 무릎이 아파서 걷기가 힘들고, 허리도 굽어서 똑바로 서서 걷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젊을 때는 가축들을 기르고, 식물들도 기르지만, 노인이 되면 개 밥 주는 것도 귀찮고, 식물에 거름하고 풀 매는 것도 귀찮습니다.
또한 몸의 아픈 곳들을 관리하기도 힘듭니다.
무릎이 아파서 고쳐놓으면 이빨이 아파서 치료를 해야 합니다.
소변이 안 나와서 치료해놓으면, 피 순환이 안 되어서 손발이 저립니다.
눈이 약해지고, 귀가 어두워지고, 어지러움증이 생겨서 이비인후과를 자주 다닙니다.
혈압과 당뇨가 생깁니다.
이처럼 늘 병마와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이렇게 우리 육체는 늘 무거운 짐이 되어서, 우리가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늘 탄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2. 이처럼 이 세상에서는 모든 인간도 탄식하며, 모든 만물조차도 탄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는 피조물도 탄식하고 인간도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22-23.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그래서 어떤 분은 어서 빨리 이 육체를 벗어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벗고자 함이 아니라, 부활의 몸으로 덧입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1. 어떤 사람은 어서 빨리 무거운 육체를 벗어버리고 싶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중한 병으로 고생하면서 육체를 지고 가기가 힘들어서 그럴 것입니다.
얼마나 병든 육체를 가지고 견디기가 어려우면, 어서 죽고 싶어 할까 하고 이해가 갑니다.
2.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육체를 가지고 살기가 힘들더라도, 무작정 죽기를 바라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고, 부활의 몸으로 덧입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참된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참된 소원은 고생스러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 복락의 천국에 가서 부활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스러운 세상을 원망하고 죽기만 바랄 것이 아니라,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성령님과 동행하다가, 아름다운 임종을 맞이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1. 이것은 우리의 죽을 몸이 부활체로 변화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육체는 병들고 죽고 썩는 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차 가지게 될 부활의 몸은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썩지 않는 몸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물고기의 육체와 새의 육체가 다르고, 짐승의 육체와 사람의 육체가 다르듯이, 지금 우리의 죽을 육체와 장차 입게 될 부활의 육체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고기는 물에서는 잘 살지만, 물 밖으로 나오면 죽습니다.
반대로 사람이나 개나 새는 공기 중에서는 잘살지만, 물속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그리고 나비는 애벌레 때는 하늘을 날지 못하지만,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면, 하늘을 납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의 육체는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물속에 들어갈 수도 없지만, 장차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되면,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물속에 들어갈 수도 있고, 벽을 뚫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몸은 공기 중에서 빨리 날아가면 불타버리지만, 부활의 몸은 아무리 먼 거리라도 우리의 생각의 속도처럼 빨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볼 때 그렇습니다.
이렇게 지금의 연약한 육체가 부활의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2.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이런 부활의 몸으로 덧입기를 탄식하듯이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죽을 몸이 부활의 몸으로 순식간에 변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시에 그 영혼이 부활체를 옷 입듯이 입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 몸이 죽어서 장사되고, 흙 속에서 썩어버렸더라도, 예수님의 한 마디면 성도들의 영혼이 부활의 몸을 입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3. 이것은 우리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실 때 이미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요한복음 11장 43절에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향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시자,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육체가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걸어 나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큰 소리로 호령하실 터인데, 그때 모든 성도들이 부활의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28-29절에서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4. 저는 성도가 죽어서 산에 가 시신을 땅에 묻는 하관 예배를 드릴 때, 꼭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과 육체의 부활에 대해서 설교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셨듯이, 예수님이 <아무개야 나오라!>고 하실 것이고, 그때 죽은 성도들이 살아날 것이라고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잊지 못할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제가 <아무개야 나오라!>고 큰 소리로 외치자, 어떤 사람이 저 산 아래서 <안 나간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하관 예배를 드리던 많은 성도들이 웃었습니다.
저도 웃음이 나왔지만, 그 사람을 향해서 더 큰 소리로 <아무개야 나오라!>고 계속 소리치니까, 그 사람이 더 이상 <안 나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사건이었지만, 저는 하관 예배 때마다 예수님의 호령으로 죽은 성도가 부활의 몸을 입는 사건을 큰소리로 선포하곤 합니다.
5.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호령하심으로 우리가 다시 살아날 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참된 소망입니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 교회의 어려움을 당하면서, 이런 소망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영생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낙심하지 말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병들고 힘든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시더라도, 부활의 산 소망을 갖고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소망 가운데 평안한 임종을 맞이하시고, 우리 주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호령하실 때,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가지고 살아나셔서 기쁨으로 만나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