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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구자범 지휘자의 베토벤 합창 교향곡 연주를 기다리는 분들께
안녕하세요? 지휘자 구자범의 음악을 사랑하는 철학자 김상봉입니다. 저처럼 구자범의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은 구 지휘자가 오는 5월 7일 예술의 전당에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의 가사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연주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 연주는 성악가 오미선, 김선정, 김석철, 공병우가 독창 부분을 노래하고, 국립합창단, 서울시립합창단, 안양시립합창단 그리고 참콰이어가 합창을 맡고, 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관현악을 맡아 이루어집니다.
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처럼 평소에는 자신이 속한 연주단체에서 활동하는 연주자들이 특정한 연주 기획에 따라 같이 모여 구성한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입니다. 이번의 베토벤 9번 교향곡 역시, 가까이는 정하나 경기필하모니 악장과 이윤의 제2악장, 이나현 트럼펫 수석 등 경기필 시절의 동료들에서부터 멀리는 오슬로 필하모니의 호른 수석 김홍박까지 국내외 다양한 교향악단의 정상급 연주자 92명이 참여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9번 교향곡의 합창은 국립합창단, 서울시 합창단 그리고 안양시립합창단과 함께 역시 일종의 페스티벌 합창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참콰이어가 함께 연주하게 됩니다.
아무런 권력도 없는 독립적 지휘자의 제안에 응답하여, 한 번의 연주를 위해 이렇게 많은 연주자들이 같이 모여 연습하고 연주한다는 것은, 생각하면 놀랍고 진기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오로지 예술적 관심과 열정에 따라, 이런 연주에 함께 참여할 의향을 지닌 음악인들이 우리 나라에 이렇게 많다는 것에 대해 저는 진심으로 놀라움과 고마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아마도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수많은 기존의 연주단체들이 있는데 그런 연주단체들의 정해진 프로그램 외부에서 이런 연주회를 기획할 필요가 있는가?’ 이번 연주에 참여하는 연주자들이 대부분 기존의 연주단체에 속한 연주자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이 굳이 자기가 속한 단체 외부에서 이런 연주 활동을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묻게 됩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이 한 가지는 아닐 것입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처럼 일 년에 한 번 바그너의 오페라를 연주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되는 오케스트라도 있고,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처럼 전 세계의 정상급 연주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기 위해 구성되는 오케스트라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는 5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의 연주를 위해 모이는 참 필하모니는 무엇을 위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입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저는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위해 탄생한 오케스트라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특정한 음악의 연주를 위해서도 아니고, 최고의 기량을 뽐내기 위해서도 아니라, 그 모든 것에 앞서 예술이 추구하는 으뜸의 가치, 즉 예술의 자유를 위해서인 것입니다.
돌아보면 서양 고전음악의 역사는 한편에서는 다양한 제도적 기관의 후원과 후견 아래 육성되어 왔습니다. 오래전 교회의 지붕 밑에서 근대적 음악의 역사가 태동한 뒤에, 한동안 왕과 귀족의 궁정이 고전음악의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민 혁명과 함께 근대적 국민국가의 시대가 열린 뒤에는 국가가 제도화된 음악교육에서부터 시작하여, 연주공간을 마련하고 또 연주단체를 조직하고 유지하는 일을 떠맡았습니다.
이런 사정은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오케스트라가 조직되어 있고, 수많은 학교에서 훌륭한 연주자들을 길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바탕 위에서 이즈음 한국의 젊은 연주자들은 세계 최고의 콩쿠르에서 최고의 성과를 얻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공공적인 제도적 후원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제도는 한편에서 예술적 재능을 육성하고 꽃피우는 토대가 되지만, 다른 한편에서 예술적 자유를 제약하는 한계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제도 자체가 나빠서라기보다는, 모든 존재자가 정해진 형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숙명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정신의 예술가는 제도적 후견 아래 한 사람의 예술가로 태어나지만, 독립적 예술혼을 위해 제도에 의해 규정된 테두리를 넘어가려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모험인지는 모차르트의 삶과 죽음이 모자람 없이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예술혼을 포기하지 못하는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낳아 준 기성의 제도권 밖으로 탈주를 감행합니다. 더러는 그런 탈주로 예술가 개인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만, 전체의 눈으로 보자면 예술은 제도가 그어놓은 경계를 끊임없이 초월하는 자유로운 예술가들 덕분에 확장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어제의 변방이 오늘의 중심이 되고 다시 그 중심은 새로운 변방에 의해 확장되고 풍요해지는 것입니다.
2010년 5월 5.18 30주년 기념 연주 이래 지휘자 구자범은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적 실험을 감행해 왔습니다. 그의 실험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음악 예술을 아름답지만 고립된 추상성에서 해방시켜, 시민적 삶 또는 민중적 삶의 구체적이고도 생동적인 총체성 속에 스며들게 하려는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단지 서양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음악적 삶의 일부가 된 서양 고전 음악을 어떻게 하면 소수가 향유하는 근엄하고 엄숙한 예술이 아니라 대중과 소통하고, 역사에 뿌리박고, 현실에 응답하는 그런 살아 있는 예술이 되도록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그를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적 실험의 길로 나아가게 한 근원적 동기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번 베토벤 합창교향곡의 성악부분을 모두 우리말로 번역하여 연주하는 것 역시 그런 의미로 이해합니다. 저는 지난 2010년 5.18 기념 연주회를 위해 말러 교향곡 2번의 가사를 우리말로 옮겼고 그때 그 연주의 감동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이번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의 가사를 우리말로 연주하는 것이 과연 말러의 교향곡 2번의 경우처럼 음악적으로 성공적일지 아닐지는 감히 예단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런 시도가 성공이 보장되어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시도였다면, 이미 모두가 그런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의 성악 부분을 독일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부르는 것은 아직 누구도 걸어보지 않은 길로서, 자칫하면 실패할 수도 있는 모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구자범 지휘자가 자신의 첫 번째 베토벤 교향곡 지휘에서 그런 어렵고 위험한 길을 선택한 까닭은, 9번 교향곡의 클라이맥스인 합창을 우리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고 같이 부를 수 있는 가사로 연주함으로써만, 이 위대한 예술작품이 오늘 여기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생동하는 음악으로서 역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 연주에 참여하는 다른 연주자들 역시 그 믿음에 공감하기 때문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하여 이번 연주를 기다리는 많은 분들 역시 그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하나의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구자범 지휘자의 이런 시도가 언제까지 가능하겠습니까? 같은 음악 예술이라도 만약 혼자 연주하거나, 작곡하는 일이라면, 한 사람의 예술가는 재정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 없이 자유로이 예술적 실험을 감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휘가 문제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많게는 수백 명의 동료들이 같이 모여 연습하고 연주하기 위해서는 지휘자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합창 교향곡만 하더라도 92명의 관현악 연주자들과 262명의 합창단이 ‘예술의전당’ 대공연장인 콘서트홀 무대에 섭니다. 공연장의 대관료에서부터 참여하는 연주자와 합창단에 이르기까지 합당한 보수가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품을 무대 위에 올리는 연주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연주도 엄연한 노동이요, 모든 노동에는 합당한 보수가 주어져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구자범이 무대에 올렸던 여러 번의 독립적인 연주회를 위해 많은 분들의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었습니다. 연주회에 따라서는 입장권을 판매하여 재정을 보충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외부적 도움이나 입장권 수익만으로 재정적인 문제가 다 해소될 수는 없으므로, 때마다 구자범 지휘자는 연주 자체에 집중해야 할 시간에 재정적인 문제로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무심한 우리는 그의 연주를 듣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연주회장을 떠났습니다.
그런 청중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저는, 언제까지 이런 연주를 듣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는지, 아니 그와 별개로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지휘자와 그에 참여하는 연주자들을 착취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지, 되묻게 됩니다. 만약 제가 그렇듯이 여러분도, 구자범 지휘자가 베토벤 9번 교향곡만이 아니라 다른 교향곡을 지휘하는 것을 듣기 원하신다면, 또는 그가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나 바흐의 마태수난곡 같은 대곡을 지휘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시는 분이라면, 이제 우리가 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후원하는 ‘참 음악의 벗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번 연주처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함께하는 공연은 한 사람의 지휘자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예산이지만, 많은 사람이 더불어 그 짐을 나누어 진다면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는 예산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자범 그리고 그와 함께 이번 연주에 참여하는 모든 연주자들이 이번 연주를 위해 오로지 음악적 성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우리도 ‘참음악의 벗들’이 되어 이 뜻깊은 공연에 후원자로서 참여하자는 제안을 드립니다.
후원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다음의 계좌로 여러분의 뜻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신한은행 110-179-632150,
예금주; 구자범(참음악)
[이 계좌는 SOHO사업자로 정식 등록된 계좌로서, 필요하신 분들에게는 세금계산서를 발급해 드립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다음의 이메일 주소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chammusik@gmail.com]
동참해 주실 모든 분들께 미리 충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5월 7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뵐 때까지
평안을 빌며,
참음악의 벗, 김상봉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