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신비 제 5단 :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Fifth Sorrowful Mystery :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 그 어떤 부모도 남의 자식 살리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외아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을 것이며,
죽을 줄 뻔히 알고 있는데 외아들을 적진에 보내어 죽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즉, 당신의 외아들을 팔아서 우리를, 나를 사신 것.
우리는 이것을 사도신경에서 고백하고 있으며 이것이 신앙의 신비.
♥ 인간의 계산은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지만
하느님 계산은 하나에서 하나를 빼도
그 결과 수십만, 수백만, 수억이라도 가능하시다.
성부께서는 예수님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이를 구원하신 것. 이것이 하느님의 계산 방식.
♥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 모든 물질은 한계가 있다.
태어남과 죽음의 법칙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와 죄는 스스로 아무리 몸부림쳐도
구제 불가능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만날 때 가능.
인간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으로 치유되고,
인간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 자, 눈을 감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묵상---
길고 두꺼우면서도 날카로운 쇠못을 예수님의 손바닥에 대고
망치로 내리칠 때 “탕, 탕, 탕” 소리가 골고타 골짜기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어 본다.
고통에 짓눌린 예수님의 얼굴은 또 어떠하실까 상상해 본다---
도대체 그 고통의 도가 얼마나 심했으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일까?
그 극심한 고통을 통해 주님은 나를 구원하셨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은 충실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증거이며,
십자가의 죽음은 임무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차원의 시작. 즉 부활의 영광,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
성서는;
마르코 16, 33-41 마태오 27, 45-56 루가 23, 44-49 요한 19, 28-30
핵심성서 : 루가 23, 46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묵상 주제; 최종적 궁극적인 구원하심을 위하여(for final perseverance)
-. 누구를 위하여 혹은 무엇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이 자신에게 있는가?
-. 죽음의 철학은 무엇인가?
-. 나의 죽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가?
그 인생 유종의 미를 위해 노력하는가?
※ 막시 밀리안 콜베 신부님과 그분의 죽으심
이런 죽음도 있다.
1800 말~1900 초에 살았던 분으로 우리와 동시대 사람,
꼰벤뚜알 프란치스꼬 수도회 수사.
폴란드 출생이고 그 나라는 성모신심이 강한 나라인데다 사회주의가 거쳐 간 나라.
폴란드에는 블랙 마돈나(Black Madonna) 가 유명하고 폴란드 교회는
사회주의 정권을 이긴 나라인데 그것은 성모신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콜베 신부님은 성모 신심의 전통 배경에서 출생했고 성장했다.
그에게 성모님이 꿈에 나타나시어 붉은 관, 흰 관을 보여주시며
어느 것을 원하는가? 하셨을 때 둘 다 원한다는 대답을 하고 꿈에서 깼다.
붉은 것은 순교, 하얀 관은 독신과 정결 의미.
그가 수도원에 입회하여 나중에 서품 전 로마에 있었을 때
레닌, 후르시쵸프의 사회주의 정권이 점차로 물들어 오는 것을 보고
교회를 지키기 위한 결심을 했고 서품 후 폴란드에 가서 “성모의 마을”을 세우셨다.
제2차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 히틀러는 폴란드 바르사바 침공으로 시작.
침공 시에 방송, 관공서 공략.
콜베 신부도 체포되어 16670 이라는 수인 번호를 받게 된다.
그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무차별 지명으로 사형수를 선정할 때
한 젊은이를 대신하여 브리츠 수용소장에게 자청하여 아사,
즉 굶어죽는 것을 스스로 원하여 당한 것이다.
이때 수용소 안에는 죽음이라는 공포의 분위기가 무너져 내리게 되었다고
대신 살아난 프란츠 가요프니체프가 증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두 가지.
-. 예수님 말씀 중에 요한 15, 13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고 하셨는데 순교는 교회의 전통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만
콜베 신부님은 한 젊은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랑의 순교라는데
또 다른 의미가 있다.
-. 왜 고통의 장소에 가려 했을까?
사형수로 지명되어 죽어야 할 나머지 9명을 안아주려는 것.
착한 목자로서 이리와 늑대가 오면 달아나는 것이 아니고
또 계산적이고 경제적인 논리가 아닌 착한 목자로서의 계산법인 것인데
그것은 99마리는 놔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 예수님을 닮은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