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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년 12월 5일 토요일 덕유산
나홀로
구천동 어사길 탐방 : bethewise님의 공간 (ramblr.com)
향적봉 설천봉 탐방 : bethewise님의 공간 (ramblr.com)
거리 13.8 km
소요 시간6h 9m 52s
이동 시간5h 27m 58s
휴식 시간41m 54s
평균 속도2.5 km/h
최고점 1,653 m
총 획득고도722 m
서울을 중심으로 코로나 확진자 수가 500 명 전후로 유지되면서 심각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지난 주에 공주 푸르메 요양원에서 요양사 및 입원자들이 대거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통천포 요양원에서도 외출을 금지했다. 지난번 독감예방주사 접종과 관련 사망자가 많이 생겨나면서 엄마도 예방주사 접종을 받지 않았는데 사태가 진정되어 주사를 놓으려 하니 보호자가 직접 모시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안경테가 낡아서 안경도 새로 맞출 겸 금요일에 하루 휴가를 내서 엄마와 함께 병원을 찾아가기로 했다. 다행히 요양원에서는 짧은 외출을 허용하였다.
공주 터미널 근처에 있는 다비치 안경원에 가니 직원들이 친절하다. 시력 검사를 하니 오른쪽 눈은 너무 오랫동안 눈꺼풀이 가리고 있어 시력이 거의 상실되었지만 왼쪽 눈은 교정시력 0.6 이 나온다고 한다. 기존 안경과 돗수는 크게 변동이 없어 그 시력에 맞추었다.
안경원에서 청력시험도 하고 보청기를 맞춰준다고 한다. 일단 한 달간 시험적으로 착용을 해보라고 하는데 엄마는 기계음이 들린다며 귀챦아 한다. 결국 보청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같아서는 귓속에 넣는 매립형으로 하나 맞추고 싶은데 엄마는 기계음이 난다며 막무가내로 보청기를 거부한다.
큰누나 집에서 거나하게 점심을 먹고 엄마를 모시고 공주의료원을 찾아갔다. 무료로 공급하는 백신이 다른 병원에는 다 소진되고 공주 의료원에 여분이 있다는 확인을 받았다. 병원내에서는 휠체어로 움직이니 예방접종을 맞는 일이 금방 끝났다.
다시 요양원에 모셔다 드리는데 엄마는 큰누나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자고 조른다. 여러가지로 요양원에 가는 것을 싫어하신다. 평소에도 요양원은 갈 곳 없는 불쌍한 노인들이 죽기 전에 들어가는 곳으로 인식하고 계셨었다. 요양원에 들어가면 죽어야 나온다는 그런 개념을 갖고 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요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지내기를 원하신다. 길 가에 차를 세우고 요양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드리니 또 쉽게 이해하신다. 요양원에서 티비를 통해 많이 들었으니 기억력이 떨어져도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엄마와 작별한 후 유구 엄마집에 들렀다. 집을 비운지 거의 1년이 되어가니 집에 온기는 없고 마치 1년 전 시간이 멈춘 모습이다. 누나들이 유리창에 붙이려고 사다 놓은 뽁뽁이가 두루마리째 박스에 담겨 있고 안방에는 엄마가 잠자고 일어나 개어 놓은 이불이 침대에 그대로 얹혀 있다. 거실 탁자위에 있는 선인장은 말라서 부스러지고 냉장고는 누가 청소를 한 것인지 간장이 담긴 유리병과 몇 가지 반찬통만 덩그러니 들어 있다. 베란다에 있는 세탁기 위에는 벽과 천정에서 떨어진 페인트 가루가 하얗게 덮여 있다. 그리고 내가 엄니집에 온 목적이 떠오른다. 보일러 물이 얼지 않도록 물을 빼 놓으려고 왔다. 아래쪽 밸브를 여니 물이 쉽게 빠진다.
엄니가 다시 이 집에 들어와 살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집에 있는 세간살이를 치우고 집을 깨끗하게 비운 다음 처분을 해야 할 것 같다.
산행기
내일 새벽에 일어나 덕유산에 간다고 하니 누나는 이번에는 가지 말고 조금 쉬다가 올라가라 한다. 여러가지 집안 일도 상의하고 작은 누나 집에도 가 보고 또 큰 매형이 계시는 요양원에도 다녀오면 좋겠다는 누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나는 모른척하고 덕유산에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원님도 안하겠다면 억지로 시킬 수 없는 노릇이라며 누나는 그렇게 하라고 한다. 허락이 아니고 동의하는 것이다.
열 시도 안되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누나가 일어나 움직이는 기척에 눈을 뜨고 보니 새벽 3시다. 누나는 평상시처럼 새벽 2시에 잠이 깨었다고 한다. 벌써 밥을 다 차려 놓았다. 4시에 밥을 든든하게 먹고 집을 나섰다. 김치며, 무우, 콩, 사과 등 가져갈 것은 어제 미리 차에 실어 두었으니 지체없이 출발했다.
깜깜한 밤길에 오직 내 차 한 대만이 불빛을 비추며 산골 길을 달린다. 덕유산 들머리인 무주까지 한 시간 반 걸린다. 금산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30분쯤 눈을 붙이고 다시 달려서 아침 7시쯤 무주 구천동 입구인 삼공리에 도착하였다.
벌써 날이 훤히 밝았다. 멀리 보이는 덕유산 산봉우리 위에 구름이 넘실 대고 햇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난다. 추운 날 산 위를 흐르는 구름은 상고대를 만들어 낸다. 지금부터 천천히 올라가면 멋진 상고대가 피어 있을 것이다.
어사길 (구천동에서 백련사까지)
개울을 건너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도로를 따라 오른다. 길 가에 늘어서 있는 모감주나무에 열매가 맺어 있는데 초여름 꽃이 필 때 오면 멋지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너무 늦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너무 일러서 그런지 길이 한적하다. 탐방로 입구에서 자동 안내를 통해 백련사나 향적봉으로 가는 사람들은 ‘어사길’을 이용하라고 한다. 전에 무주 구천동(九千洞) 계곡을 걸을 때는 차가 다니는 넓은 길을 뛰다시피 내려오느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던 터라 이번에는 시간 여유를 갖고 구천동을 볼 요량으로 둘레길로 꾸며진 어사길을 택했다.
마치 초등학교 자연학습장 같다. 이 계곡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사진에 이름을 붙여 놓았고 지나는 곳의 아름다운 담(潭)이나 소(沼)에 얽힌 사연들을 적어 놓았다. 덕유산이 워낙 크고 높은 산이니 이 품에 안겨서 살아가는 동.식물들이야 워낙 다양할 것이지만 모데미풀과 동의나물 그리고 애기앉은부채가 자란다는 설명을 보고 내년 봄에 다시 한 번 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이 계곡 안에까지 식당 등 상가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예전이라고 해봤자 어쩌면 80년대 아니면 더 늦은 90년대까지 그런 상황이 이어졌을 것 같다. 지금은 모두 아래쪽 상가지구로 이전하여 계곡 안쪽에는 흔적만 남아 있다. 얼마전까지 북한산 도봉산 계곡 안쪽에 들어차 있던 백숙집과 보신탕집들이 모두 철수했는데 이는 국가의 부(富)와 행정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이뤄낸 질서라고 생각한다.
어사길 중간쯤 팻말에 ‘김남관 대령’에 관한 소개글이 적혀 있다. 무주 태생인 김남관 대령이 60년대 초 무주 관광개발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일환으로 구천동 계곡에 9,000 개의 석불상을 세우려 계획하고 23개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런 작업은 그의 신분 (예비역 군인)과 무관한 것이겠으나 그의 행위가 군인정신으로 이뤄낸 일이어서 그런 것인지 대령이라는 신분을 표시해 놓았다.
구천동 계곡은 길이가 약 6 km에 달한다. 언제부터인지 계곡이 아름다워 마치 전설처럼 느껴지던 무주 구천동이다. 큰 산줄기에서 비롯되는 물이니 가뭄에도 물이 넘쳐 흐른다. 산골 추위에 벌써 얼음이 얼었다. 아직 겨울다운 겨울을 보지 못했는데 여기에 와서 비로소 겨울을 만난다.
구천동 주차장에서 4.4 km 지점에 ‘안심대(安心臺)’가 있고 안내문에 그 내력을 적어 놓았다. 생육신 중 한명인 매월당 김시습에 관한 얘기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15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인생무상을 몸소 체험하고 중이 되었다.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자 관직에 더욱 염증을 느끼고 초야에 묻혀 지냈다. 그 후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여섯 명의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이 새남터에서 처형당한 후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하도록 병사를 시켜 감시하고 있을 때 김 시습이 몰래 조각으로 흩어진 시신을 수습하여 강 건너 영등포에 가묘를 만들어 매장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중범죄로 단정짓고 김시습의 행적을 쫒았다. 여러 절을 전전하면서 관군의 눈을 피해 다니다가 덕유산 구천동 안으로 들어오자 비로소 관군들의 추적이 멈추었다. 이에 김시습은 햇볕이 드는 따뜻한 양지쪽에 이르러 긴장이 풀린 나머지 잠이 들고 말았다. 마침 무주에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던 백련사 주지스님이 김시습을 알아보고 이제 안심해도 좋다고 위로하고 백련사로 데려가 몸을 숨겨주었다고 한데서 이 안심대가 유래하였다는 이야기다.
이 안심대에서 둘레길 같은 어사길이 끝나고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임도와 합쳐진다. 임도는 계곡을 따라 백련사까지 이어진다. 수림으로 덮인 구천동 계곡에서 유일하게 햇빛을 볼 수 있다는 신양담(새양골)을 지나고 잔잔한 담에 얼굴을 비쳐 마음을 수양한다는 명경담(明鏡潭)에 이른다.
명경담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무주에 날 때부터 몸이 크고 건강한 장사가 있었다. 성격 또한 거칠고 직설적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무주 무사라 부르며 어울리기를 꺼려하였으나 그는 마치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잘 난 사람인 양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였다. 무주 무사가 자신의 실력을 믿고 무과 시험을 치려고 마음먹고 예전에 그가 다니던 서당 선생님을 찾아갔다. 무과 시험을 치려면 무술 실력도 있어야 하지만 기본적인 글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무주무사를 무서워하지만 서당 스승님은 어릴 때부터 그를 보아왔기에 아직도 철없는 어린애 취급을 하였다. 사정을 들은 서당 스승님은 그에게 ‘네 무술 실력이 출중하다고 하나 백련사에서 수련하는 스님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라’ 하며 무주 무사의 경솔함을 꾸짖였다. 이에 무주무사는 스승의 말씀을 고깝게 여기면서 ‘그럼 제가 백련사를 찾아가 무술 경연을 펼쳐 다 이기고 오겠습니다’하고 아뢰고는 곧 바로 구천동 계곡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에 출발했던지라 계곡을 반쯤 지나갈 무렵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이 때 계곡 위쪽 숲 속에서 불빛이 비치기에 찾아가 보니 작은 암자에 스님 혼자서 불공을 드리고 있기에 하룻밤 묵어갈 것을 청하니 스님이 흔쾌히 받아주었다. 저녁을 먹고 둘이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무주 무사가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왜 이 작은 암자에 혼자서 계십니까” 스님이 대답하길 “저는 백련사에서 무술을 연마하던 중에 실력이 오르지 않아 이 곳에서 혼자 반성하면서 수양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무주무사는 무술이라는 말이 나오자 눈이 번쩍 뜨이면서 은근히 이 스님을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스님, 그럼 우리 적적한데 서로 무술 실력을 겨뤄보는 것은 어떨런지요?” 하니 스님도 “마침 저도 실력이 좀 늘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습니다.”하고 기꺼이 응했다.
둘은 암자 밖으로 나가 무술을 겨루는데 무주무사가 온 힘을 기울여 스님을 공격하려 해도 스님은 공격을 하지 않고 이리저리 피하기만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무주무사는 지쳐가기만 하고 스님에게 아무런 타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쳐있는 틈을 타서 스님이 무주무사의 사타구니를 걷어차니 무주무사는 데굴데굴 구르며 나가떨어졌다. “어이쿠, 아랫배를 찬다는 것이 너무 어두워서 제가 그만 실수로 엉뚱한 데를 건드린 모양입니다.”하고 사과하니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무주무사는 일어서며 “아닙니다. 제가 실력이 없어 진 것이니 괘념치 마십시요.”하고 몸을 추스린 후 암자에 들어갔다. 무주무사는 이제까지 자신이 제일 잘난 줄 알았는데 이처럼 백련사 중들 중에서도 실력이 없어 바깥 암자에서 수련하고 있는 수련승에게 무참히 패한 것에 심기가 몹시 불편해졌다. 그러나 사내 대장부로서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떻게 수련을 하시기에 그리 실력이 뛰어나십니까?” 이에 스님은 손사레를 치면서 “아이쿠 그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도 실력이 너무 딸려서 매일 이 계곡에 있는 명경담을 보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아니 무술 실력을 연마하는데 명경담이라니 그게 무슨말인가 궁금해하니 스님은 내일 아침이 밝으면 함께 가 보자고 한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 스님은 무주무사를 데리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맑은 물이 흐르는 구석에 꽤 넓은 담(潭)이 있는데 물이 어찌나 잔잔한지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이 자신의 상처투성이 얼굴이 비쳐진다. “저는 매일 이 못에 제 몸을 비쳐보고 스스로 더욱 겸손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아 아직도 요모양 요꼴입니다.” 하는 스님의 말에 무주무사는 이제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본다. 무주무사는 스스로 반성하며 집으로 돌아가 깊은 마음 수양과 무술을 연마한 후에야 무과 시험에 응시하여 장군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임도는 옛 백련사가 있던 ‘백련사터’를 지나 백련교를 건넌다. 신라 신문왕 (681~692)때 연못에 하얀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암자를 세우고 이름을 백련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한 때 이 절에는 무술을 연마하는 승병의 수가 9천명이나 되었기에 이 절이 있는 계곡을 ‘구천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대부분의 우리나라 절들이 그랬듯이 임진왜란에 불타고 일제시대를 지나고 한국전쟁때 또 소실된 것을 1962년부터 다시 지은 절이다. 지금 있는 절에는 대웅전과 명부전, 종루와 산신각 외에도 한옥으로 아담하게 지어진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는데 이 요사채는 1967년대 덕유산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조선시대 무주부의 관아였던 동헌 건물을 해체하여 이곳에 옮겨 세운 것이라 한다.
덕유산 백련사(德裕山 白蓮社)라고 초서 글씨로 멋지게 쓴 현액이 걸려있는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다섯 기의 부도(浮屠)가 있는데 매월당 부도라 쓴 가운데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저 아래 안심대에 얽힌 이야기도 있는데다 한자(漢子)도 똑 같은 매월당(梅月堂)이라 썼으니 당연히 김시습의 부도인 것으로 오인하였다. 실제로는 김시습이 활동하던 시기보다 훨씬 늦은 시기인 1784년 (정조8년) 매월당 설흔(雪欣) 스님의 사리를 모셔 놓은 부도탑이라고 한다. 김시습과 호가 같아 착각을 일으키기 쉽겠다.
언젠가 친구가 물었다. 왜 이름있는 큰 절은 모두 경치가 수려하고 도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산 속에 있는 거냐고. 나도 산을 다니면서 이런 의문을 갖게 되었다. 왜 그럴까? 언뜻 생각하기에 부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스스로도 수련을 통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속세의 간섭이 없는 물 맑고 바람 좋은 산 속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했었다. 하지만 다른 종교 사원들이 대부분 도심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너무 대조적이어서 그런 설명은 쉽게 수긍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불교에는 참선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는 선종(禪宗)도 있지만 이미 부처님이 깨우친 바를 속세 범민들에게 전하여 번민을 없애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교종(敎宗)이 더 널리 퍼져 있던 것을 감안하면 불교사원이 산 속에 위치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조선시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성벽을 관리하면서 성 내에서 무기를 제조하고 보관하고 또 적군과 싸우던 사람들은 중들이었다. 다른 말로 승병(僧兵)이라고 부르지만 이들의 주임무는 중생을 번민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침공해오는 적을 죽이고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다. 즉, 살생도 마다치 않는 전쟁을 수행했던 것이 불교였던 것이다.
바로 구천동 계곡의 이름도 백련사에서 수도하면서 무예를 익히던 승병들의 숫자가 한 때 9천명이나 되기에 붙여진 것이며, 그들의 식사 준비를 위해 쌀을 씻으면 계곡물이 쌀 뜨물로 인해 온통 하얗게 변하여 마치 눈이 내린 것 같다 하여 계곡 아래 마을 이름을 설천(雪川)이라 불렀다고 하니 백련사에 머물던 승병의 규모가 가히 짐작이 간다.
짐작컨데 우리나라의 절은 군사들의 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덕유산은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기에 백련사는 신라가 백제군을 방어하기 위한 보루였으며 또는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가 이 절에 묵으면서 승병들을 훈련시키고 싸움을 독려했으며 일제 강점기때는 독립군들의 아지트였을 것이다. 살생을 금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적인 교리인데 각 시대마다 지배자의 편에 서서 적과 싸웠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유독 불교만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기독교는 십자군 전쟁처럼 엄청나게 큰 규모의 전쟁도 자발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이슬람교도들은 현대에도 크고 작은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향적봉(香積峰 1614 미터)
백련사 산신각을 지나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향적봉까지 2.5 km 가파르지만 짧은 코스다. 산길 초입에 있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지나 오르막 전에 있는 쉼터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다. 누나가 싸준 떡과 커피 그리고 먹기 좋게 썰어 놓은 무우로 점심을 먹었다. 떡이 손에 묻을까봐 비닐장갑까지 넣어 놓았다.
내가 향적봉으로 오르는 동안 위에서 내려오는 산객들을 많이 마주쳤다. 중간쯤 지나갈 때 상고대가 조금 피어 있는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는 걸 보고 저 위에는 이보다 열 배는 더 멋지게 상고대가 피어 있다면서 여기서 시간 지체하지 말고 얼른 올라가라 한다.
2.5 km 오르막 길은 경사가 심해서 그리 만만한 코스는 아니다. 겨울철 길이 매우 미끄러울 때는 아이젠을 착용하고 내려가더라도 자칫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눈이 없으니 쉬엄쉬엄 걸어서 12시 정오에 향적봉 정상에 도착했다. 1시간 45분 걸렸다.
정상석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으려고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상상했으나 정상석 주변이 텅 비어 있다. 코로나 예방을 위해 정상석에서 5 미터 정도 멀찍이 줄을 쳐 놓아 접근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줄 밖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설천봉을 통해 올라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설천봉
중봉 방향은 안개로 인해 시야가 흐리다. 남덕유쪽으로 장쾌하게 펼쳐지는 조망을 기대하였으나 안개는 쉽게 걷힐 것 같지 않다. 설천봉으로 가 보기로 했다. 향적봉 정상에서 600 미터 떨어진 설천봉은 스키장의 일부로서 삼공리로부터 케이블카나 곤돌라를 이용해서 올라올 수 있다.
스키장의 입지에 적당한 곳이니만큼 겨울철 눈이 많이 내리고 상고대가 풍성한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향적봉에서 잠시 내려선 곳부터 검은 바위에 핀 눈꽃과 나뭇가지에 매달린 상고대가 눈부시다. 길 바닥은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녹고 그 녹은 물이 얼기를 반복하여 생긴 얼음으로 미끄럽다. 사람들은 길 양쪽으로 설치된 나무 난간을 붙잡고 넘어지지 않으려 조심하지만 가끔 어이쿠 하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면 한 두 명씩 엉덩방아를 찧고 있다. 도시 생활에 너무 길들여진 사람들은 아주 작은 환경 변화에도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스키장은 아직 개정 전이다. 일주일 때 영하의 날씨가 이어졌지만 아직 인공눈을 만들지 않은 것은 코로나 상황을 염두에 둔 조처인 것 같다. 많은 돈을 들여 눈을 만들어 놓아도 갑자기 코로나 사태가 악화된다면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화요일 밤부터 서울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 2.5 단계를 시행하며 밤 9시 이후 외출 금지령이 내려질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번 겨울은 스키장이 제대로 영업을 하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설천봉에서 바라보는 덕유산 최고봉 향적봉은 온통 상고대로 덮여 있는 그야말로 설국(雪國) 풍경이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막상 한겨울에는 어떠할지 가히 짐작이 간다. 이제 겨울의 초입. 앞으로 두어 번 다시 찾아와야 할 것 같다.
향적봉으로 돌아와 중봉으로 갈 요량으로 대피소에 들렀다. 코로나 예방수칙에 따라 테이블에는 여러 명이 함께 앉지 않고 두 세 명씩 떨어져서 음식을 먹는다. 나도 테이블 앞에 선 채 남은 간식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대피소 안에서는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들이 밖을 내다보면서 비록 대피소이지만 건물 밖에서 불을 피워 조리하는 사람들을 통제한다.
짧은 휴식을 가진 후 중봉을 향해 난 길을 가려고 하는데 길 주변을 얼기설기 끈을 엮어 막아 놓았다. 그리고 다시 자세히 살펴본 후에야 지금 산불방지기간이라서 이 향적봉으로 오르는 코스만 열려 있고 나머지 탐방로는 막아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방기간은 국립공원에서 가을철 한 달 그리고 봄철 한 달 정도 기간을 정해 놓고 일체의 탐방을 금지하는 기간이다. 11월 16일부터 12월 15일까지 이 구간을 제외한 모든 구간이 막혀 있다.
다시 백련사로 원점회귀
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 넘어 중봉으로 내려가는 길에 펼쳐져 있을 멋진 풍광은 그저 머릿속 상상으로 남겨 두고 원점회귀 코스를 밟아 백련사로 향한다. 아침에 올라갈 때 피어 있던 얼마 안되는 상고대는 잠깐 사이의 햇볕에 다 녹아버렸다. 멀리 산봉우리 위에 흰 구름만 한가로이 떠 다닌다.
오후 2시 30분 백련사에 도착했다. 겨울 짧은 해는 벌써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쪽 산으로 넘어가려 한다. 늘 바쁘게 지나가느라 자세히 둘러볼 틈이 없던 백련사를 살펴본다. 절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은은한 목소리로 뜻 모르는 불경 외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대웅전 앞 뜰에 있는 명부전 벽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득도하는 모습과 인간 세상에서 죄 지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저승으로 가서 저승 문으로 들어가는데 지장보살이 이를 불쌍히 여겨 눈물을 훔치는 광경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앞 면 기둥에는 지장보살을 찬양하는 주련이 쓰여 있다.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神力) 지장보살의 위신력은
항하사겁설난진(恒河沙劫說難盡) 억겁을 두고 설명해도 다하기 어려우니
견문첨례일념간(見聞瞻禮一念間) 보고 듣고 예배하는 한 생각 사이에
이익인천무량사(利益人天無量事) 사람과 하늘에 이익 무량하여라.”
지장보살은 세상의 모든 중생이 구원을 받기 전에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서원을 한 보살이라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혹여 죽은 후에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명부전을 찾아와 속죄하고 앞으로 더욱 순종하며 착하게 살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지장보살님에게 이제까지 저지른 작은 잘못이라도 구제해 주기를 바라며 정성껏 시주하고 기도한다.
대웅전 전면 기둥 여섯 개에는 초서로 쓴 주련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조금 흐릿해졌다.
남무대방광불화엄경 (南無大方廣佛華嚴經)
천상천하무여불 (天上天下無如佛) 천상 천하 부처님 같은 이 없네
시방세계역무비 (十方世界亦無比) 온 세상 둘러봐도 비할 바 없네
세간소유아진견 (世間所有我盡見)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둘러봐도
일체무유여불자 (一切無有如佛者) 부처님 같은 이는 일체 없다네
남무실상묘법연화경 (南無實相妙法蓮華經)
대웅전을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편에는 법화경 오른편에는 화엄경을 지칭하는 글을 쓰고 그 가운데 네 개의 기둥에는 부처님이 어느 시대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견줄 수 없을 만치 뛰어나신 분이라고 절대적인 칭송을 읊고 있다. 불교는 이미 우리나라 민중 속에 오래 전부터 들어와 있으니 일상 생활에서는 화엄경이나 법화경의 의미를 알지 못해도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만 외워도 복을 받는다는 말에 일반 중생들은 절에 가서 절하고 시주하고 오면 이미 복을 예약한 것으로 여긴다. 이는 현재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갈 것이며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실제로 부처님의 말씀이 중생을 구제하였는지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불교는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보급되면서 주로 왕과 귀족들의 테두리 안에서 주도적으로 유통되었고 모든 경전이 한자로 되어 있으니 결국 지식인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는 일반 중생들을 위협하고 유혹하는 즉 채찍과 당근처럼 이용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왕권을 강화하고 계급사회를 지탱하면서 중하층 백성들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불교가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석가모니 (BC563~BC483)가 2천 5백년 전 스스로 깨닫고 당시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던 메시지와는 크게 다를 수 있겠다.
백련사의 대웅전과 천왕문 사이에 있는 강당격인 우화루(雨花樓) 앞에는 오래된 돌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속은 이미 썩어 텅 비었고 혹여 쓰러질까봐 쇠기둥 두 개로 받혀 놓았다.
오후 2시 40분 절 구경을 마치고 다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차도를 따라 내려간다. 이미 올라올 때 어사길을 걸으면서 계곡 구경을 했으니 내려가는 길에는 차도(車道)를 따라서 걷는다. 아주 드물게 국립공원이나 백련사 절을 찾아가는 차가 지나다닐 뿐 길이 무척 한적하다.
이 길을 두 번 급하게 지나간 적이 있다. 모두 안내 산악회 버스 출발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경주하듯 뛰어 갔던 길이다. 오늘은 차를 직접 운전하고 왔으니 여유만만이다. 오늘도 산악회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인 듯 여러 명의 산님들이 종종걸음으로 나를 지나쳐 달려간다.
호탄암
길 가에는 어사길과 마찬가지로 계곡의 풍광을 소개하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구월담이니 청류담이니 하는 담(潭)이 대부분이다. 그와 달리 바위를 뜻하는 ‘호탄암’의 유래에 대한 전설이 재미있다. 그러니까 옛날 옛적 호랑이가 담배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옛날 덕유산 산신령이 머물고 있는 칠봉에 호랑이 암컷 두 마리가 함께 지내고 있었다. 두 자매 호랑이는 언니 호순이와 동생 호희였다. 호순이는 발이 무척 빨라 하루에도 몇 번씩 이 큰 덕유산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소식을 가져오고 또 신령님의 뜻을 덕유산에 살고 있는 생명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을 즐겨했다. 동생 호희는 언니만큼 빠르지는 않았지만 실영님 주변에 머물면서 어흥 어흥 하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부르기를 즐겼다.
산신령님은 무엇이든 알고 있으며 멀리 가지 않아도 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보고 들을 수 있는 신통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신통력이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신령님 스스로도 부단히 노력하고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신령님은 매일 덕유산 구천동 계곡에 있는 명경담에 찾아가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고 명상수련을 함으로써 자신의 신통력을 키우고 유지할 수 있었다.
어느 늦가을 신령님은 여느때와 같이 명경담에 내려가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고 명상 수련을 할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와진 날씨에 마음을 다잡지 않은 채 물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코가 간질간질 하더니 그만 재채기를 해버렸다. 아무런 준비없이 순식간에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차가운 기운이 목 뒤쪽에 있는 풍지혈로 들어가 몸 속에 있는 기를 다 헝클어 놓고 말았다. 이제까지 구름타고 날아다닐 만큼 신통력과 기운을 갖고 있던 신령님은 그 뒤로 자리에 몸져 눕게 되었으니 두 호랑이 자매는 곁에 보는 것이 안타까워 산 속을 헤매이며 갖은 약초를 채취하여 신령님께 정성껏 달여 먹였다. 그 덕분에 기운을 조금 차리는 것 같았지만 더 이상 회복을 기대할 수 없었다.
두 호랑이 자매가 너무 슬픈 나머지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어흥 어흥 울어대니 머지않은 백련사에 계시던 관음보살께서 그 소리를 듣고 친히 찾아와 사연을 물으니 호랑이는 소상하게 상황을 설명하였다. “너희들의 마음이 곱고 정성이 갸륵하여 내가 너희 신령을 살릴 수 있는 비방을 알려주겠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 실제로 너희들이 그 비방을 따라서 따를 수 있을지 의문이구나” 하면서 “저 남쪽 끝 지리산에는 참나무에 피는 상고대가 있는데 그 것을 가지째 꺽어다 정성껏 달여서 먹이면 신령님의 병을 고칠 수 있느니라”하고 비방을 알려주었다.
신령님이 죽을 줄만 알았는데 그런 비방을 듣고 호랑이 자매는 뛸 듯이 기뻐하였다. 언니 호순이는 동생 호희에게 “내가 발이 빠른 편이니 지리산에 가서 참나무에 핀 상고대를 따 올 동안 너는 신령님을 잘 보살피고 있거라.” 하고는 쏜살같이 지리산을 향해 내달렸다.
덕유산에서 지리산까지 그리 멀지 않으니 한 달음에 도착했지만 약이 된다는 참나무 상고대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높은 산 능선을 헤매이며 시끄럽게 울어대자 지리산 신령이 나타나 또 사연을 묻는다. 호순이는 자신은 덕유산에 사는데 신령님이 병에 걸려 지리산 상고대를 꺽어가려고 왔으나 그 상고대를 찾을 수 없어 이렇게 시름을 달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리산 신령님은 그런 호순이의 정성에 감동하여 상고대가 피어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 과연 지리산 신령님이 가르쳐준 곳에 가 보니 참나무 줄기에 아직 잎사귀도 성성한데 하얀 상고대가 성스러운 별처럼 피어 있었다. 호순이는 이 상고대가 지리산 신령님을 살릴 수 있는 약이라는 생각에 기쁨에 겨우 ‘어흥’하고 소리치며 참나무 가지를 덮썩 물었다.
“이놈. 게 누구냐?” 이 때 호순이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산을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소리가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천사보다도 더 어여쁜 여인이 나풀거리는 날개옷을 입고 참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화려하게 꾸민 것도 아닌데 온 몸에서 퍼져 나오는 기품에 호순이는 그만 주눅이 들어 땅에 바짝 엎드리며 그 여인을 올려다 보았다. 호순이의 입은 다물었으나 눈은 그 여인의 정체를 묻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여인은 “나는 마고할미니라 !” 하고 자신의 신분을 말해주었다. 호순이는 이 말에 그만 눈물을 흘리면서 마고할미에게 다가가 사정 얘기를 하였다. 호순이도 이미 온 천하를 관장하는 마고할미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이 상고대는 산의 정기를 북돋아 주는 영물이라서 함부로 취할 수 없는 것이지만 너의 정성이 갸륵하여 내 특별히 허락하노라.”하면서 마고할미는 상고대 작은 가지 하나를 뚝 잘라 호순이에게 건네주었다. 호순이는 마고할미의 호의에 깊이 감사하며 상고대를 받아 입에 물고는 왔던 길을 쏜살같이 달려 구천동 계곡으로 되돌아갔다.
그 사이 시간도 쏜살같이 흘러 호순이가 상고대를 찾아 떠난 지 어느덧 100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동안 호희는 신령님 곁을 떠나지 않고 가까이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로 병간호를 하였으나 차도가 나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만 깊어 갈 따름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호순이가 떠나간 지리산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젖어 불러보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고 허공에 메아리만 맴돌았다.
“어흥 !” 이 날도 호희는 언니를 그리며 신음처럼 한 마디 내뱉었다. 이제는 호희의 목소리에 힘이 빠져버리고 노래소리 대신 한숨소리처럼 허공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어흥 !” 호희는 귀가 번쩍 뜨였다. 자신이 내뱉은 소리가 되울려오는 메아리가 아니었다. 몹시 약하지만 그건 분명 호순이 언니의 목소리였다. “어흥 !” 호희는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어흥!” 그리고 되돌아온 목소리는 분명 호순이 언니의 목소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호희는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내려갔다.
산죽(山竹)밭을 지나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혀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흐르는 구천동 계곡에 이르렀을 때 그 물가에 엎드려 신음하고 있는 호순이를 발견했다. 호순이의 입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상고대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호순이의 입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언니, 어떻게 된 일이야?” 놀란 호희의 물음에 호순이는 “그보다, 스승님은 어떠시니? 얼른 이 상고대를 가지고 가서 달여드려라. 그러면 금방 좋아시실게다.”하고 오히려 호순이는 신령님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었다.
호희는 호순 언니의 상처가 걱정되었지만 간곡한 언니의 눈초리를 살피고는 호순이에게서 상고대를 받아 입에 물고 비탈길을 달려 스승님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덕유산에서 뜯어모았던 갖은 약초와 함께 상고대 가지를 넣고 정성껏 달여 스승님께 들였다. “그래, 이 약만 드시면 스승님은 씻은 듯이 나으실거야.”하고 안도하면서도 호희의 입에서는 한숨이 배어나왔다. 입에서 피를 흘리던 호순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호희는 스승님이 약 사발을 다 비우시는 걸 보고 난 뒤 초막을 떠나 언니가 쓰러져 있는 계곡으로 내려갔다. 그 사이 더 나빠졌는지 호순이는 눈만 껌뻑거리면서 호희를 바라보았다. “언니 걱정마! 스승님께 약을 달여드렸으니 곧 나으실거야.” 하고 말하는 호희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지쳐보였다. 호희의 입에서도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상고대를 입에 물고 지리산에서 달려왔던 호순이와 이 것을 받아서 신령님의 초막까지 옮기면서 두 호랑이 두 자매는 상고대 얼음의 날카로운 날에 입에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상고대는 신선에게는 모든 병을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이지만 뭇 짐승들에게는 독극이었던 것이다. 죽어가는 언니 곁에 엎드린 호희의 입에서도 고통과 슬픔이 뒤섞인 신음소리가 배어 나왔다.
한편 상고대 달인 약을 먹은 덕유산 신령은 다음날 거짓말처럼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신령은 초막 밖으로 나와 호랑이 자매를 찾았으나 주변은 적막강산 아무런 기척도 없고 호순이 호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주위에 무성하게 자란 산죽 잎에 검붉은 핏자국이 여기저기 맺혀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분명 호랑이 자매에게 무슨 변고가 생겼다는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신령은 핏자국이 난 산죽을 헤치며 그 흔적을 따라 계곡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산죽밭이 끝나는 개울가에 호순이와 호희가 나란히 엎드린 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제야 신령은 자초지종을 알아차리고 두 자매가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에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하며 두 눈에서 희한의 눈물이 물 흐르듯 흘러내렸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흐르는 동안 두 호랑이 자매의 몸은 신령의 눈물에 젖어 들더니 점차 단단한 바위로 변하였다. 호랑이 등에 난 누런 줄무늬가 선명한 것이 영락없는 호순이와 호희의 생전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이에 신령은 두 바위를 호탄암이라 부르며 그들과 함께 했던 날들을 기리면서 지금도 덕유산 자락을 오가면서 살고 있다 한다. 이미 신성(神性)을 갖춘 호랑이 자매는 바위로 변해 구천동 계곡에 누워서 쉬다가도 밤이 되면 본성이 조금 살아나 꿈틀거리다가 비나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기지개를 켜면서 털가죽을 훌훌 털고 산죽 숲으로 들어가 놀다가 여유있게 돌아와 다시 엎드린 채 바위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인월담 (印月潭)
구천동(九千洞)계곡은 늘 나무 그늘에 덮여 있지만 넓은 못이 있는 곳은 나무 사이로 달빛을 볼 수 있다. 그 달빛이 잔잔한 물에 박혀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지만 정작 그런 풍경을 보는 사람이 없으니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보아주는 이가 있으면 좋겠다며 한숨 쉬는 소리가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에 섞여 새어 나온다. 인월담은 예전에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하게 긴 세월을 살아왔으나 최근 들어 자신의 존재감마저 부정하고 싶은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인월담을 알아주는 것은 달 빛 어린 밤이면 찾아와 부드러운 혀로 얼굴을 핥아주고 가벼운 발짓으로 간지럽히고 가는 꽃 사슴뿐이었다.
“인월아, 너는 참 아름답구나. 이 조용한 밤에 온 몸으로 달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네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반하고 말거야.” 의기소침해하는 인월담을 보며 사슴이 위로하려 말했다.
“사슴아, 그러면 뭐 하겠니? 정작 달빛 비치는 밤에는 나를 봐주는 이 하나 없는 것을. 나는 정말 이대로 살아도 괜챦은 건지 모르겠구나.” 인월담은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무슨말이야? 너는 달빛 비치는 밤에 황홀하리만치 아름답지만 낮에도 나뭇가지로 치장하고 새들에게 귀염받고 살고 있쟎아?” 사슴은 인월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조용하던 계곡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더니 계곡 윗쪽에서 군인 한 명이 주위 눈치를 살피면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사슴은 깜짝 놀라 인월담 옆 숲에 몸을 숨기고 살펴보았다. “이거 큰일일세. 여기 이 못을 건너가지 못하면 일본놈들에게 잡히고 말텐데. 내가 잡히면 우리 독립군은 끝장이야.” 이렇게 말하는 이는 백련암 근처에서 본거지를 두고 활동하던 독립군 문태서 단장이었다. 그들의 본거지가 일본군에 의해 습격을 당해 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문 단장도 추격을 피해서 도주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사슴아, 우리가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인월은 문태서 단장을 도와주고 싶었다. 인월의 의중을 알아차린 사슴은 “그래, 인월아 우리가 도와주자. 네 몸속에 문 단장을 숨겨주자.” 인월담에는 작은 폭포가 있는데 그 폭포 속에 사람이 서넛 들어갈 만한 자리가 있는 것을 사슴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슴은 숨어 있던 수풀에서 나와 문 태서 단장에게 다가갔다. 문 단장은 갑자기 튀어나온 사슴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자기에게 다가와 고개를 젓는 사슴을 보고 그 뜻을 헤아려 보았다. 이 사슴이 자기에게 뭔가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 문 단장은 사슴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1 미터 남짓 되는 작은 폭포가 있었는데 그 안쪽에 굴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문 단장은 사슴의 의로운 마음을 읽고는 지체없이 그 작은 굴 속에 몸을 숨겼다.
문 단장이 폭포 속 굴에 들어가자 마자 위에서 여러 명의 일본군 군인들이 총칼을 차고 주변을 살피면서 내려오더니 인월담을 비켜서 계속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일본군이 사라지자 굴 속에서 나온 문 태서 단장은 사슴을 찾아 고맙다고 안아주었다. 사슴은 쭈뼛거리면서 발로 인월담 물을 첨벙거렸다. “내가 한게 아니에요. 인월담이 단장님을 도와드린거에요.” 그제야 문 단장은 인월담에 얼굴을 비쳐보면서 “그래, 인월담아 고맙다. 네 덕분에 내가 살았구나.”하고 웃어 보였다.
목숨을 구한 문 태서 단장이 내려가자 인월담은 자신도 좋은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에 마음이 출렁거렸다. 꽃사슴도 인월담이 다시 마음을 다잡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덩달아 기뻐서 인월담을 토닥인다. 그렇게 구천동 계곡에 달빛 어린 밤이 저물어간다.
인월담 덕분에 목숨을 구한 문 태서 장군은 그 이후에도 덕유산 일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면서 수 많은 공을 거두었으면 1914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경성 형무소로 압송되어 옥사하였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야 새벽부터 시작한 트레킹을 마치고 삼공리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비록 산방기간이라서 중봉쪽은 둘러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구천동 계곡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겨울 계곡의 모습과 애틋한 전설 그리고 향적봉과 설천봉 사이에 펼쳐진 환상적인 상고대는 나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아주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