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옥 문화칼럼 _ 칼을 가는 남자
정조의 효성과 휴머니즘
까마귀가 울면 재수가 없다고 한다. 음산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듯한 울음소리도 그렇지만 까만 깃털에 매끄럽지 못한 외모도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예부터 까마귀가 아침에 울면 어린 아이가, 낮에 울면 젊은이가, 오후에 울면 늙은이가 죽을 징조로 여겼다. 더구나 한밤중에 울면 살인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까마귀의 울음을 매우 불길하게 여겼다. 까마귀의 울음은 곧 죽음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기분 나쁜 흉조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까마귀의 실체를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잘못된 편견에 의한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미 까마귀는 새끼를 60여 일 동안 정성을 다해 키운다. 그러다가 기력이 다해 스스로 살아가기 힘든 단계에 이르면 이번에는 새끼가 어미를 먹여 살린다. 반포지효(反哺之孝)가 그것이다. 조선 시대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충과 효 중에서 효도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기특한 새라 하여 자오(慈烏)라는 별칭으로 귀감을 삼은 것이 까마귀다. 그러던 것이 고려 말 조선 개국과 더불어 이성계 일파에 협력한 이직(李稷)이 자기를 비판하는 고려 충신들에게 ‘가마귀 검다하고 백로(白鷺)야 웃지마라’는 시조로 자신의 입장을 변론했고, 정몽주의 어머니는 ‘가마귀 디디는 곧애 백로야 가지 마라’라는 시조로 아들을 경계(警戒)했다. 시대의 가치가 변하면서 겉이 검은 까마귀와 백로를 소재로 한 글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까마귀는 흉조의 의미를 띄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도 철종시대의 가객(歌客) 박효관은 까마귀의 속성을 나타내는 시조로 사람들을 교훈하였다.
뉘라서 가마귀를 검고 흉타 하돗던고
반포보은(反哺報恩)이 그 아니 아름다운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허하노라
―박효관(1781-1880)
태양신을 상징하는 까마귀, 삼족오로서 고구려의 기상을 상징하는 까마귀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길조로 통한다. 그들에겐 오히려 까치가 흉조다. 까치가 울어대는 숲, 까마귀가 숨어들고 까치가 설쳐대면 5월이다. 그 5월이면 필자는 살아있는 효도의 현장을 찾아 나선다. 한 겨울에 연못에서 잉어가 튀어나온 왕상(王祥)의 이야기나 죽순이 솟아난 맹종(孟宗)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아닌 역사의 현장에서 상반된 효도의 양면을 본다.
정조대왕(1752-1800)은 열 한 살의 어린 나이(1762)에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보았다.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애원했지만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가슴에 한을 남기고 뒤주 속에서 무참히 죽고 말았다. 그 후 왕위에 오른 정조(1766)는 죄인의 신분으로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3년의 세월을 참고 기다렸다가 드디어 배봉산(지금의 시립대 뒷산)에 있는 아버지의 묘를 천하명당이라고 하는 화산에 천장(1789)하였다. 아버지가 죄인으로 죽었기 때문에 항상 죄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던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현륭원으로 격상하여 스스로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났다.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용주사를 원찰로 하여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부모은중경을 새겨 애틋한 아버지의 정을 기렸다.
그 5년 뒤(1794) 힘을 얻은 정조는 채제공을 총책임자로 하여 화성(수원성)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10년 계획이었으나 정약용과 같은 걸출한 실학자가 최첨단 장비를 개발하여 2년 반 만에 공사를 끝내고 그 성내에 5천여 세대가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는 18세기 최초의 계획도시를 세웠다. 삼남지방의 물량이 모여드는 교통 요지에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시키며 무역과 국방까지도 담당하는 중추도시로 설계한 것이다.
여기에는 정조의 심오한 뜻이 숨어있었다. 1794년은 한양 천도 400주년이 되는 해이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 되는 해이다. 계획대로라면 화성 축성이 끝나는 1804년은 어머니의 칠순이다. 더구나 아버지 사도세자는 어머니와 동갑이기 때문에 화성의 낙성식과 함께 대대적인 칠순잔치를 벌여 어머니를 위로하고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려 했다.
더구나 그 해는 아버지의 묘를 화성으로 옮긴 다음 해에 얻은 아들이 15세로 성년이 되기 때문에 정조는 왕위를 아들(순조)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앉아 태종 이방원과 같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묘를 왕릉으로 격상시키고 싶었지만 할아버지 영조의 부탁 때문에 그 일을 하지 못하고 1800년 4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현륭원이 융릉으로 격상된 것은 고종이 황제로 오르면서 격상시킨 것임)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정조는 신하들을 능가하는 제왕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책도 많이 보고 무술도 연마하여 스스로를 군사(軍師)라 했다. 문무를 겸전한 임금으로서 모든 면에 완벽해지려 했다. 경연(經筵)에서도 신하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가르칠 만큼 실력을 갖췄다. 정조의 효는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고 싶은 만큼 자신에게 철저했고, 그 누구의 반대도 논리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설득 할 수 있는 인품과 학식을 갖췄다.
까마귀의 양면성 중 자오(慈烏)의 교훈을 주는 양성적 의미는 정조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에 비해 연산군은 음성적 의미를 대표한다. 정조의 효성은 수원이라는 문화도시를 만들었고 후손들에게 세계문화 유산이라는 화성을 남겨주었다. 수원 입구의 1번 국도변의 지지대(遲遲臺) 비는 효도의 상징으로 우뚝 서서 고려장을 서슴지 않는 현대인을 나무라고 있다.
연산군은 어머니에 대한 효도의 길을 잘못 택하여 재위 12년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기까지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아까운 신진사림의 인재를 많이 죽였다. 한명회 김종직 등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 참시했고, 단근질하기, 가슴 빠개기, 산사람 토막토막 자르기,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형벌을 내렸다. 무오사화는 사초가 문제였으나 갑자사화는 어머니 폐비 윤씨를 죽게 한 사람들에 대한 복수였다. 전국에 채청채홍사(採靑採紅使)를 파견하여 선발해온 미인들을 원각사에 집합시키고, 그 미녀들 중 300명을 뽑아 흥청(興淸)이라 했는데 왕이 주연에 나갈 때면 300명이 따라 나가는 모습을 보고 ‘흥청거린다’고 하였다. 오늘날 좋지 못한 용어로 사용하는 ‘흥청망청’의 어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머니에 대한 잘못된 효도는 결국 자신을 망쳤다.
가정의 달 5월에 어버이날을 생각해본다. 전국이 떠들썩한 어린이날은 국경일이라서 모두가 즐길 수 있지만 힘이 없는 노부모는 집이나 지키는 가장 쓸쓸한 날이다. 더구나 어버이날은 평일이라서 자식들이 부모 찾아뵙기도 어렵다. 참 싸가지 없는 나라다. 이미 365일이 어린이날처럼 바뀌어버린 현실에서 어린이날은 부모들이 아이들 기분 맞춰주기에 급급해하고 비싼 선물을 사주며 재롱을 피워야 하는 부담스런 날로 바뀌었다. 내일의 주인공, 내일의 꿈, 나라의 희망 등 아이들은 이미 떠오르는 태양으로 모든 면에서 예우를 한다. 그러나 노령화 사회를 걱정하는 현실은 관심이 너무 한쪽으로 기울었다. 단순하고 무례하며 자기중시적인 사고에 젖은 아이들에게 집안의 어른을 찾아 예를 갖출 줄 아는 데서부터 모듬살이의 전형을 깨닫게 해야 한다. 설날, 추석과 같은 명절보다 직접 부모와 연관이 있는 어버이날의 의미를 새겨야 한다. 5월에 맞는 단상은 그렇게 정조와 연산군의 역사로 비화하여 반포자오의 가르침으로 깊은 반성에 빠지게 한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누구나 소외당하지 않는 기쁜 가정의 달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