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놈펜 국립 박물관 외경
구약성경통독을 마치며
마지막 묵상글 올립니다.
2024. 12. 20(금)
욥기 32장~42장 끝
(욥 37,7)
모든 사람의 일손을
막으시니 모든 인간이
그분의 일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욥 42,2)
저는 알았습니다.
묵상-
"저는 알았습니다."
욥의 뒤늦은 고백이다.
그렇게 많은 말을 하며
다 아는 듯이 하느님을
거론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드러내던 그가, 대체
42장 말미에서, 뭘
알아차렸다는 걸까.
가을의 주님,
겨울의 주님,
여름의 주님이라고
표현한 소제목이 예술이다.
어찌 이런 단어들을
생각해냈을까.
성령의 감도에 이끌려
쓴 책이 성경이라더니,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욥의 고통이 극한점에
이른 것을 겨울의 주님
이라고 써놨다.
그 겨울의 시작을 알린
구절이 참으로 적절하다.
(욥 37,7)
모든 사람의 일손을
막으시니 모든 인간이
그분의 일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와 교만을
깎아 단련하기 위해
주님께서 내미시는
옐로우 카드 얍!!
하던 일이 쭉 잘 되어
승승장구하다 보면
하느님의 거사가
일어난건지도 모를거다.
모든 일손을 막으시고
인생의 브레이크를
잡으실때, 우리 비로소
멈추어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고통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된다.
어쩔수 없이 말이다.
욥도 그랬다.
그 다음 단계는?
'그러면 짐승들은
은신처로 들어가
보금자리에 몸을
누입니다.
폭풍은 곳집에서
불어오고 추위는
북풍과 함께 옵니다.'
혹독한 겨울의 한복판에서
냉엄하신 겨울같은 주님과
마주하게 되는 거다.
욥의 말수가 좀 줄어들고
주변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나름 평정의
상태에 돌입했을 때,
여름의 주님이라는 제목이
등장한다.
그러다 마침내 욥은,
엘리후가 지적한,
'자신이 의롭다고
하느님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말을 곱씹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주도면밀하게 물으신다.
고양이가 쥐를 몰아가듯
하나부터 열까지 예리한
어조로 말이다.
내앞에 나설수 있느냐?
꿰뚫을 수 있느냐?
열어젖힐 수 있느냐?
천둥칠 수 있느냐?
채울 수 있느냐?
밤을 지새겠느냐?
골짜기를 갈겠느냐?
허걱,
하느님께서는 욥이
다 아는 척 교만하게 뱉은
말들을 정산하신다.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또 못할 게
없는 분임을 스스로
증명해보이시는 거다.
그런데 이게 뭐냐.
욥은 대답을 못한다.
한 개도 아는 게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욥 41,1)
보아라, 사람이 그것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은
환상일 뿐 보기만 해도
놀라 넘어진다.
맙소사. 그렇고말고다.
뭔가 잡을 수 있을것
같고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본성적인
마음, 다 알 것 같기도
한 심오한 착각.
결국엔 환상일 뿐, 나도
나를 모르고, 주님 도움없인
할 줄 아는 게 한 개도 없는데
지각없이 막,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인거다.
그걸 이제야 알아차린거다.
(욥 42,2)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거다.
삶이 고통스럽다 하여 몇 개
듣고 경험하며 터득한 것들을
다 아는 것으로 규정하고,
자신은 의로우니 이 고통,
기워갚게 해달랬으니,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욥은 이제야 고백한다.
하느님이 하느님답게
빛나고 존중받으시는
대목이다.
(욥 42,당신께서는3)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자아인식 제대로 하고,
한층 더 나아가
하느님 인식까지
하게 되는 은총의 순간,
욥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하며 부르짖는다
(욥 42,5)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대단한 욥,
지각없는 말로 주님의
크신 뜻을 가린 나약한
사나이였지만, 종래엔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교만과 무지를 인정한
겸손한 영혼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철썩같이
믿고 사탄에게 욥을
넘겨줄 수 있으셨을 터!!
하느님은 이런 분,
이런 걸 해주시는 분,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이었는데, 이제야
제 눈이 하느님다운
하느님을 뵈었다는
욥의 고백, 이야말로
진정한 겸손이다.
욥기 전체에서 드러난
너희가 몰라도 너무
모른다, 몰라서 그러는
거다. 라는 뉘앙스의
구절들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오버랩된다.
(루카 23,34)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군중들을 보시고,
저들은 지금 생각과 선입견과
신념의 틀에 매여 하느님의
뜻마저도 다 아는 것처럼
열광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알면 저렇게 할까요?
불쌍히 봐 주십시오.
라고 용서를 청하신
주님의 절규가 메아리친다.
주님,
욥기를 끝으로
구약성경 통독을
마칩니다.
나약한 욥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존재와
고통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많은 말들을
지껄이며 잘도
살아왔는지요.
아는 것보다 모르는게
더 많아 무지의 죄를
달고 살면서도 이리
지각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고 방해를
했으니, 참으로
오만방자한 삶이었습니다.
저의 허물을,
제 가족의 허물을,
세상 영혼들의 허물을,
너그럽게 봐 주시어
사랑과 자비로
대해주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드리며
찬미영광 바쳐드립니다.
저희 모두는 욥입니다.
이 적나라한 현실을
성경통독 마지막 날에
알게 해주셨습니다.
기적같은 시간,
성령의 보호와 이끌림에
의해 한 걸음씩 내딛은
구원의 여정이었습니다.
이제는 읽고 묵상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고자 하오니,
도와주십시요.
하느님 아빠 아버지.
사랑합니다.
영원토록요.
첫댓글 박지현 요셉피나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