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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71
1월11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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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겸손해질수록>
예수님 공생활 초기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유명한 논쟁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하여 ‘세례 원조 논쟁’입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논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원조 논쟁’은 심심치 않게 벌어집니다. 때로 법적 투쟁까지 불사합니다. 장충동이나 신림동, 춘천이나 양평 같은 지방에서 아직도 원조 논쟁은 치열합니다. 한쪽에서 ‘원조 ○○동 족발’이라고 크게 간판을 내겁니다. 그럼 건너편 가게에서는 ‘진짜 ○○동 족발’이라고 맞대응합니다. 그 다음 집에서 내거는 간판은 이렇습니다. ‘완전 진짜 ○○동 족발’ ㅋㅋㅋ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와 관련해서 원조는 단연 세례자 요한이 분명했습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이 주도한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갱신운동은 전 국민적, 선풍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얼마나 범국민적이었던지 세리와 창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까지 몰려와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제 막 공생활을 시작한 예수님의 세례 운동은 세력 면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비교가 안 될 지경이었습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스승들인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그분들의 제자들 사이에서 알력과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세례자 요한 제자들의 볼멘 목소리를 통해 상당한 긴장상태가 있었다는 것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표현이 꽤나 정중하고 완곡하게 들리지만 사실 세례자 요한 제자들의 심기는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을 스승 세례자 요한을 압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요르단 강은 우리 영역인데, 세례와 관련해서는 우리가 원조인데, 이게 뭡니까? 손님들 다 저리로 몰려가고 있는데, 뭔가 스승님께서 손을 쓰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까?’
그 때 세례자 요한의 태도에 우리의 시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향해 ‘그래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다. 뭔가 대비책을 마련하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세례자 요한은 오래 지속된 논쟁을 한 번에 잠재우는 말 한마디, 정말이지 기가 막힌 한 마디 말을 던집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요한복음 3장 28절)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복음 3장 30절)
세례자 요한이 평소 지니고 있었던 극단의 겸손이 돋보이는 선언입니다. 참된 겸손의 덕이 어떤 것인가 묵상해봅니다.
그저 난 아니다, 난 부족하다, 난 형편없다며 무조건 뒤로 빼는 모습이 겸손은 아닙니다. 자신의 신원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겸손의 덕의 출발점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대단한 겸손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요란한 박수갈채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물, 주인이 아니라 종,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 파견한 사람이 아니라 파견된 자라는 명확한 신원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 교회는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극도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교회가 그분으로 인해 불어온 쇄신의 바람으로 인해 제2의 프란치스코 운동을 바탕으로 겸손과 청빈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다방면에 걸쳐 탁월하고 출중한 사목자라 할지라도 이 겸손과 청빈의 덕이 결여되었을 때 우리는 받아놓은 점수를 다 깎아먹습니다.
우리가 고급 브랜드로 치장을 하고 높이높이 올라갈수록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칭송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허탈한 웃음을 터트릴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낮아지고 겸손해질수록, 더 가난해질수록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하늘나라를 발견할 것이며 그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목이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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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신부를 차지하는 것은 신랑이다."
장발장은 매우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자베르 경감에게 쫓기는 신세로서 누구와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것은 상대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위험하고 사치스런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한 아이를 맡아서 키워야 했는데 그가 코제트라는 예쁜 여자아이입니다.
장발장은 코제트를 통해 그동안 가져보지 못했던 감정을 가지게 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장발장이 코제트를 잘 키워내는 것이 자기의 부주의 때문에 자신의 공장에서 쫓겨난 팡틴이란 코제트의 어머니에 대한 보속을 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장발장에게 코제트는 삶의 또 다른 의미가 되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코제트가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남자는 혁명 주동자로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저 잠자코 있으면 그 남자는 죽을 것이고 코제트는 다시 장발장에게 의지한 채 둘은 예전처럼 의지하며 살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코제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코제트의 연인인 마리우스를 구하러 갑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도망 다니던 처지에다가 또한 자살한 자베르 경감에 대한 살인죄까지 누명을 쓰게 된 장발장은 더 이상 코제트와 함께 있어서는 안 됨을 깨닫고 둘을 결혼시키고는 조용히 그들 곁을 떠납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마리우스는 코제트에게
“당신의 아버지는 성인이셨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인이라 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결정을, 그러나 옳은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일 것입니다.
보통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머물러주기를 원하지만, 장발장은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포기합니다. 아마 모든 아버지들이 딸이 결혼한다면 약간은 장발장과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딸의 행복을 빌어주며 신랑에게 신부를 건네줄 때는 자신이 죽고 나서도 딸을 보호해줄 딸의 짝을 보며 안도의 마음을 갖기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었고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까지도 모두 요한을 떠나 그분께로 갔습니다. 그 중 처음으로 세례자를 떠나 그리스도께 간 인물이 요한과 안드레아였습니다.
이에 세례자에게 남아있는 의리 있는 제자들이 세례자를 걱정하며 이렇게 간합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대답은 의외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신부를 차지하는 것은 신랑입니다. 신부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좋은 신랑을 맞는 것에 기뻐합니다. 사실 스승과 제자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는 요한은 바로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한 신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만큼 자신의 제자들을 행복하게 해 줄 스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에 기뻐하기 때문에 성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리스도께 가는 길에서 신앙으로 만나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 나에게 갖는 애정을 놓고 싶어 하기 싫어할 때도 있게 마련입니다. 누가 사랑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랑은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가 신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타고 와서 내려 그리스도께로 갈 수 있는 배와도 같습니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면 지금까지 함께 했던 사람은 떠나보내 줘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나와 그 사람과의 관계도,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그 사람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모두 상처를 입게 됩니다. 배를 떠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한 발자국도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항구에 도착하면 배는 멈추고 사람은 내려서 목적지로 계속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실화라고 합니다.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아들이 삶의 낙이었습니다.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아들을 빼앗기는 것 같아서 며느리보다 아들에게 더 잘해주려고 했습니다. 반찬도 어머니가 해 주는 것을 먹어야 하고, 옷도 어머니가 사 오기도 하셨고, 심지어는 밤에 아들과 며느리가 잠자는 방 문 앞에서 지키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에 며느리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랬더니 결국 어머니의 이 집착을 참아오던 아들도 어머니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며 어머니 곁을 떠납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차지하는 것은 신부여야 합니다. 어머니가 개입했다가는 모든 관계가 다 끊어져버리게 됩니다.
우리와 우리가 아는, 혹은 우리에게 애정을 가진 사람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요한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그리스도의 첫 제자가 된 인물입니다. 그의 복음 첫 장에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말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첫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적지 않게 많이 나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가도록 보내준 스승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요한에게는 첫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가장 큰 성인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없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큰 칭찬입니다. 자신이 잘 키운 제자를 당신에게 기쁘게 보내준 사람을 어찌 모른 채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길은 우리가 신랑이 아니라 유일한 신랑은 그리스도이시고 그분만이 신부를 차지할 권한이 있음을 깨달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참 신랑에게로 잘 인도하는 것입니다.
도로 표지판이 도로 중앙에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길옆에 있어야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것은 신랑인 것입니다. 나는 작아지고 그 분은 커지셔야합니다.
버리는 것이 다시 얻는 길이고, 떠나보내는 것이 다시 만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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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22-30 :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우리는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름답고 겸손된 자세를 볼 수 있다. 즉,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 요한에게 불평을 한다. 그러나 요한의 답변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답변으로서 3가지를 설명한다.
우선은 세례자 요한은 사실상 자신의 위치가 하느님의 단순한 전달자며 앞으로 오실 더 크신 분을 위한 선구자요 예비자로 보냄을 받았을 뿐, 그 이상의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킨다.
둘째로 그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새로이 나타난 선생이 더 많은 제자와 더 많은 개심자들을 얻고 있다면, 그것은 요한에게서 사람들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며, 하느님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자기들과 하느님은 너무나 밀접한 인연으로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그 관계를 신랑 신부의 혼인관계 인연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표현했고, 이러한 인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신을 따를 때에는 마치 정혼한 여인이 혼인한 계약을 위반하여 부정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탈출 34,15; 신명 31,16; 시편 73,27 등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랑이요, 이스라엘 백성은 신부라는 것이며, 세례자 요한은 신랑과 신부를 맺어주는 연락자이며 신랑과 신부를 함께 모시는 사람으로서 혼인 잔치를 주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이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면서 그 신랑을 신부에게로 맞아들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임무는 끝났으니 기꺼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무대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즉 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 그리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이스라엘 사이에 혼인준비를 하는 것으로서 그 사명이 끝났을 때 자신은 뒤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은 좌절과 질투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자기의 임무를 다했다는 기쁨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오늘 복음에 나타난 요한의 참된 겸손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겸손된 삶을 본받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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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공관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라집니다. 반면,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중심으로 함께 등장합니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은, 대개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하게 합니다.
뜻이 맞아 서로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경우와, 뜻이 달라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함께하는 기쁨을 가져다주고, 후자는 함께하는 것이 경쟁이나 대립, 또는 질투의 감정을 불러오고는 합니다.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경우일까요?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와야 할 곳은 ‘여기’이지, 예수님께서 계시는 ‘저기’가 아니라는 그들의 시선에서 경쟁과 질투로 얼룩진 적개심마저 느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질타하기보다, ‘기쁨’을 이야기합니다.이 기쁨은 하느님과 그 백성의 결합을 상징하는 혼인에 빗대어 해석되기도 합니다만(호세 2,19-20; 에페 5,31-32 참조), 오늘 복음은 신랑과 신부의 결합보다 신랑의 등장에 대한 기쁨에 집중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등장을 기뻐합니다.
유다 전통에 따르면, 신랑의 친구 가운데 믿을 만한 친구 둘이 신랑과 신부의 결합을 지켜봅니다. ‘신랑의 목소리’는 신랑이 신부와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선포와 같습니다.신랑의 친구로서 요한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 한 몸을 이루는 친교를 기뻐하는 셈입니다.
내 것만이 옳고, 네 것은 그르다는 생각에 서로가 하나 되는 것을 거부하고 한자리에 있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오늘의 세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보여 주는 경쟁의 결과입니다. 하느님의 일에서조차 경쟁할 필요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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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창환 다니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다 땅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시면서 세례를 주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가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기 위해서 몰리는 것을 이야기 하며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반응에 요한은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라는 대답을 하며 자신의 사명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이제 자신의 시대는 끝이 났으며 드디어 오셔야 할 분이 오셔서 하늘의 일을 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그 다음은 사라지는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단순히 자기를 ‘신랑의 친구’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신랑의 친구’는 결혼하는 신랑의 들러리입니다. 들러리의 임무는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에 맞아들일 때 그의 임무는 끝이 납니다. 즉 세례자 요한의 임무도 신부인 인류가 신랑이신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도록 잘 준비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다 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덧붙여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하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이 말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의 자세가 얼마나 예수님을 증언함에 있어서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자신의 위치에 맞는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칫 그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칭송과 따름을 통해서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고 우쭐댈 수도 있었지만, 본인의 임무에 충실하며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세례자 요한의 이러한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아는 자세!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하는 자세!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의 강론’을 마치면서 저 또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본받아 사제의 직분에 충실하며 저에게 주어진 사명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고,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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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욕심 내지 않을래요>
요한 3,22-30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사람 욕심 내지 않을래요>
욕심 가운데에 으뜸은
사람 욕심이라지요
사람을 제 것 삼으려는
욕심 말이에요
그런데 말이지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말이에요
모든 욕심의 뿌리가
사람 욕심 아닐까요
사람을 갉아먹는
온 갖가지 욕심들은
사람 욕심의
변화무쌍한 변종이고요
돈이든 힘이든
무언가를 더 가지려고
안달하는 까닭도
사람을 얻기 위함 아니겠어요
자기 사람 만들려다 안 되니까
자기 사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남의 사람이니까
시샘하고 미워하고 욕도 하고요
그런데 말이지요
사람 사는 세상에 말이지요
내 사람 네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어요
그냥 사람이지요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그를 빚으신 분의 사람 말이에요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놓아주어야겠어요
사람 내신 분에게
사람을 곱게 보내야지요
어쩌다 나에게
머물려는 듯싶으면
내가 아니라 그분이라며
한걸음 더 가라 다독여주고파요
때로는 내가 그분이 되어
정성껏 보듬어야겠지만
내가 결코 그분을 가리는
거추장거리 안 되길 바랄 뿐이죠
누군가 나와 함께 하기에
마냥 편하고 행복하다면
나를 통해서 그분을 만났으리라
겸손하게 생각해야겠지요
사람을 내신 그분은 커지시고
그분이 내신 나는 작아져
나는 아쉬움 없이 사라지고
그분만 남는 언젠가
나를 만나는 사람 누구든지
내가 아니라 그분을 만나기를
사람 욕심 찌꺼기가 남아있는
부족한 마음으로 기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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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은총의 특권을…>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을 수 없고, 함께 우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을 보고 예전에는 나보다 더 안 좋았고, 더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나보다 더 잘나가는 것을 볼 때, 썩 기분이 내키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남들과 비교하면 공연히 주눅이 들거나 그들을 은근히 시기, 질투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세례자 요한 제자들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예수님께로 모여 듭니다.
“스승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모여들던 사람들까지 다 예수님께로 가버리자 요한 제자들은 몹시도 언짢을 것이고 불만스러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세례자 요한은 내세울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 말대로 세례자 요한 마음속에는 전혀 시기와 질투가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질투하지 않고, ‘신랑의 친구’로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이 이런 모습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남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하심, 눈물을 흘리며 한 영혼을 사랑하심,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인내하심, 온 힘을 다하여 말씀을 이루시는 성실하심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야고보서 4장 14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이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 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오늘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고운님들의 눈이 잘 안 보이고 귀가 잘 안 들릴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은 간절히 원하지만, 몸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이 고운님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이라고 부르는 이 날에 어떤 사람들은 이 땅을 떠나는데,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선택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고운님들에게 주신 것으로 하느님을 위해 살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말할 수 없는 은총의 특권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고운님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하느님은 고운님들의 이름을 영원토록 기억하실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동전(렙톤) 두 닢, 작은 이에게 준 시원한 물 한잔, 주님께 부어드린 향유 등등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긴 이들의 흔적입니다. 하느님은 고운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은총의 특권으로 부르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고운님들 자신이 선택된 자임을 알고,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께 영광 돌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저도 주님의 섭리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믿으며,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으로 서로 손잡고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제 다만 기쁜 일이든 고통스러운 일이든 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라 생각하며, 고운님들의 삶의 자리에서 주어진 매 순간이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 수 있는 기도의 은총이 바다의 물결처럼 춤을 추듯 놀라운 기적의 섭리가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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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73)
♧♧ 시편 69편 28절…
"그들의 죄에다 죄를 더하소서. 그들이 당신 구원에 들지 못하게 하소서."
* 그들의 죄에다 죄를 더하소서...
이는 ‘악에서 다른 악으로 넘어지게 하시고’ 또는 ‘죄에 죄를 더하게 하시고’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악한 것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듯이 악인이 계획하는 것은 항상 악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악은 결국 하느님의 진노의 심판을 초래할 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인간의 심령을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하시지 아니하고, 그냥 죄를 행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만큼이나 저주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 당신 구원에 들지 못하게 하소서...
여기서 다윗은 악인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해 의인의 모임에 들지 못하며(시편 1편 5절. 참조), 그 결과 하느님이 베푸시는 구원에 은총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악인들이 계속해서 죄를 행하는 한 하느님께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없다.’라는 사실, 즉 저들의 죄악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나타내 줍니다.
♧♧ 시편 69편 29절…
"그들이 생명의 책에서 지워지고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소서."
* 생명의 책에서 지워지고...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족보를 가지고 있듯,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당신이 사랑하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책’인데, 죄를 지으면 그 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며 결국 하느님의 징벌을 당하게 된다고 여겼습니다.(탈출기 32장 33절. 참조) 이 구절은... 바로 이러한 개념에 근거한 간구로서 악인이 영원히 하느님의 저주 아래에 놓이기를 비는 것입니다. 한편, 이와 같은 ‘생명의 책’은 성경에서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이사야서 4장 3절. 다니엘서 12장 1절. 요한 묵시록 21장 27절. 참조) 즉 세상 창조 이후로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된 이들은 모두가 장차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될 줄로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소서.
의인들의 이름은 하느님의 생명의 책이 기록이 됩니다.(다니엘서 12장 1절. 루카 복음 10장 20절. 참조) 그러나 악인은 이러한 의인의 모임에 들지 못하며, 결코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없습니다.(요한 묵시록 20장 12절. 참조) 다윗은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 하느님께 의인과 악인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말아달라고 간구하고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정의의 온전한 실현을 위한 간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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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0년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인간의 집중력에 대해 실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평균 인간이 집중력을 지속하는 시간을 12초라고 발표했습니다. 참고로 금붕어가 집중력을 지속하는 시간이 9초라고 합니다. 비록 3초의 차이지만 그래도 인간의 집중력이 금붕어보다는 낫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의 다시 했던 실험을 통해 집중력 수치가 8초로 떨어진 것입니다. 금붕어보다도 못한 모습입니다. 대화하면서도 계속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모습,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서 제대로 생활하기 힘들어하는 모습, 특별히 할 일 없으면 인터넷에 들어가 그냥 시간을 소비하는 모습 등을 떠올리면 인간의 집중력이 얼마나 낮은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인 안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얼마나 집중을 하고 있나요? 기도할 때, 미사를 봉헌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 것입니다. 왜 이렇게 다른 생각들이 주님께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집중에 방해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 세상의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관한 생각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힘들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흥분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주었고 그리스도께서도 세례를 주셨습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생겼고, 요한에게도 사람들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예수님께 세례를 받으라고 보냅니다. 그에 반해 그리스도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요한에게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점이 요한의 제자들이 화났던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요.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바로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것입니다. 요한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불만,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예수님의 세력이 더 커지고 있다는 불만 등으로 스승인 요한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은 주님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고, 주님은 커지시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세상이 아닌 주님께 온전히 집중하고 있기에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께 집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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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찾기>
소중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안에 어떤 기억이 담겨 있을 때입니다. 제게 있어 특별한 무엇은 ‘수단’입니다. 이 수단은 신학교 3학년 때 착의식을 앞두고 맞춘 것입니다.벌써 25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이 수단을 입고 있습니다.
25년 전의 몸보다 훨씬 비대해진 지금의 몸이지만, 당시에 워낙 크게 맞춰서인지 지금 딱 맞습니다. 낡고 오래된 수단이지만, 불 쬐다가 태워서 기운 자국도 있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수단입니다. 왜냐하면, 신부 되기 전의 첫 마음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오래되었으니 이제 버릴 때도 되지 않았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기에 버릴 수 없는 특별한 것이 되었습니다. 다른 옷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의미의 옷입니다.
옷도 이렇다면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 역시 의미를 찾으면 너무나도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대상으로만 생각하면 절대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때 그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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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누가 종이 신문을 봅니까? 종이 신문을 본 지 오래되어서요?’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신문을 만들고, 홍보하는 제게는 어깨가 처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맛있는 집이라면 굳이 시간을 내서 찾아가곤 합니다. 먹어보고 맛있으면 이웃에게 소개하기도 합니다. 시간도, 비용도 기꺼이 낼 용의가 있습니다. 종이 신문이 영적으로 맛이 있다면, 지치고 힘든 일상에 위로와 용기를 준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고, 비용을 지급할 것 같습니다. 신문을 정독하면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립니다. 1년에 150불이니 한 달이면 13불이 채 안 됩니다. 고맙게도 제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새 영세자에게 평화신문을 소개하고, 구독료를 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친구들에게 성탄 선물로 평화신문을 보내 주는 문도 있습니다. 대자와 대녀에게 평화신문을 선물로 보내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평화신문의 가치를 알고 계십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이 주는 영적인 양식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매주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이 소개됩니다. 주변에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듯이,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병든 이의 모습으로, 외로운 이의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오시고 계십니다. 많은 분이 온정의 손길로 그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의 교황님의 일정과 교회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의 친구가 되어야 함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소개하는 지면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영적인 깊이를 봅니다. 현대의 신학 동향을 소개하는 지면도 있습니다. 간단한 교리 상식을 소개하는 지면도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 수사님의 이야기에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미주 지역의 한인 가톨릭 공동체의 다채로운 활동과 나눔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평화신문은 영적인 종합비타민입니다.
어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마리아, 엘리사벳, 요셉, 즈카리야, 목동, 동방박사, 시메온, 안나, 베로니카, 키레네 사람 시몬, 십자가상의 한 죄인, 세례자 요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겸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을까요? ‘헤로데, 왕궁의 사람들, 율법학자,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빌라도, 군중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지는 사람들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서를 보면 죄의 현장들이 잘 나타납니다.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은 일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바세바를 차지한 것은 욕망 때문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은 빼앗은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인 것은 분노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은 인색함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할 때 잠을 자던 제자들은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빨간 십자가가 도시를 가득 채워도, 화려한 교회의 건물이 우뚝 솟아도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능력과 그분의 지혜를 보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이 보여준 겸손함입니다.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함을 보여주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겸손함으로 죄의 뿌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참된 진리의 길로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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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작아지기(비움)의 여정>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
참 행복은 어디 있을까요? 오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참으로 작아지기의 여정에,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한 거기 그 자리가 영원한 생명의 참 행복의 자리입니다. 텅 빈 충만의 기쁨에 행복입니다.
어제는 겨울속의 봄처럼 포근한 날씨에 빈 나무 가지들 사이로 환히 드러난 하늘과 산이 참 투명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하여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늘길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을 찍어 전송했습니다. 아주 예전 겨울에 써놨던 시가 지금도 공감이 갑니다.
-“누가 겨울 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
나무마다 푸른 하늘 가득하고
가지마다 빛나는 별들 가득 달린 나무들인데
누가 겨울 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1998.11.21
나뭇가지들 비움의 자리에 가득한 푸른 하늘입니다. 온갖 나뭇잎들 다 떠나 보내고 빈 가지들의 본질로 남으니 말 그대로 텅 빈 충만의 행복입니다. 하여 우리 수도승들이 좋아하는 겨울산, 겨울나무들입니다.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비우면 비울수록 투명히 드러나는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얼마전 수녀원에서 강론이 없던 평일 미사때의 참신한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때로는 자기로 가득한 군더더기 긴 강론들이 주님을 가려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론이 없으니 미사가, 사제가, 말씀이, 즉 주님만이 투명히 드러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참으로 미사 자체가, 사제의 삶 자체가, 침묵 자체가, 푸른 하늘을 환히 드러내는 텅 빈 겨울 나무들처럼 주님을 환히 드러내는 참 좋은 강론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참 좋은 삶이나 참 좋은 강론은 그 자체가 주님을 환히 드러내는 삶이요 강론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과의 관계가 참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들은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반응이 감동적입니다. 일체의 질투심이나 경쟁 의식이 없습니다. 빈 겨울 나무들을 통해 환히 드러난 푸른 하늘처럼, 텅 빈 무욕의 세례자 요한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예수님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이런 깨달음 역시 은총의 선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자기 비움의 겸손이 참 아름답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영원한 생명의 주님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알아 갈수록 비움의 여정, 작아지기의 여정, 겸손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오늘 복음의 백미입니다. 비단 세례자 요한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구도여정중의 수행자들인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작아지기의 여정,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텅 빈 충만의 기쁨과 행복에 참 아름다운 삶입니다. 주님만이 환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작아지기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을까요? 답은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열렬히 항구히 충실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아름다우신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자기 비움의, 작아지기의 여정입니다. 요한 사도의 고백이 참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우상을 멀리 하십시오.”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들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우리들을 지켜 주시어 악마가 손을 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저절로 우상도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사랑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있기에 가능한 작아지기의 여정이자 비움의 겸손한 여정이요, 이런 여정을 통해 투명히, 환히 참으로 아름답게 드러나는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영적 여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겸손한 작아지기의, 비움의 아름다운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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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모임에 참석해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 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비유합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당시 혼인 잔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이것 저것 챙기며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잔치 뒤편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를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권력이 영원한 줄 아나봅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회개의 세례는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요한은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박병규) 이때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봉사를 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뿐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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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성탄시기가 거의 완성에 이르러가는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우리의 시선이 누구를 향해야 할지 보여줍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요한 3,28)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점점 확산되는 예수님의 존재감에 위기의식을 느껴 스승에게 우려를 표하자 요한이 이렇게 답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명에 충실했지요. 그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 마음에서 자신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채워넣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1요한 5,20)
여기서 참되신 분은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참" 자체이신 분이시지요. 예수님의 온 생애와 말씀과 행위는 일관되게 아버지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께 모두 넘겨드리십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그런데 천상 천하 모든 만물이 바치는 영광을 받으시는 하느님의 시선은 우리 인간을 향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고루 나누어 주십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특히 우리 인간이 복된 이유는 우리 각자에게 하느님을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선이 흘러가는 방향성을 인식한다면 시기 질투나 경쟁에 괜한 힘을 들이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받은 것, 타인이 받은 것이 무엇이든간에 하느님의 한 조각이니 비교할 필요도 키재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름은 저마다 받은 선물의 다양성일 뿐이니까요.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영성체송).
부족함이 없으신 하느님은 완전하고 충만하시기에 우리 각자가 받은 은총 역시 무한하고 또 비교 불가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빛을 발하는 은총에 집착해 자기 것을 평가절하하기보다, 그에게 그 은총을 주신 분께로 시선을 돌려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요한 3,29)
요한은 자기가 하늘 나라의 혼인잔치에서 주인공인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친구임을 분명히 합니다. 신랑 친구는 신의와 충실성으로 혼인잔치를 지켜줍니다. 요한은 자기의 명성을 이용해 그리스도의 신부인 하느님 백성을 제 것으로 취하지 않고 곁에서 겸손히 신랑 신부의 사랑을 돕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차지하실 분은 오직 신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 생각과 기억은 무엇에도 한눈 팔리지 않고 신랑이신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결국 요한에서 그리스도께로, 그리스도에서 하느님께로, 하느님에서 우리에게로 이어졌던 시선은 다시 우리에게서 신랑이신 주님을 향해 되돌려집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조화롭고 아름다운 순환이 또 있을까요!
사랑하는 벗님! 신랑이신 주님이 신부인 우리를 차지하고 기뻐하십니다. 곁에서 지켜보는 신랑 친구의 기쁨도 클 것입니다만, 신랑의 기쁨과 신랑 친구의 기쁨은 분명 다릅니다. 혼인잔치를 준비하며 신부 단장을 하는 우리는 시선을 잘 고르고 다듬어야 합니다. 신랑과 신랑 친구 사이에서 시선이 흔들리지 않도록, 진정 시선을 꽃아 넣어야 할 분을 놓치지 않도록, 사랑이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행복에 겨워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시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1요한 5,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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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믿음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믿음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2코린13,5 참조) 하느님께서 자신이 전부를 이 세상에 전달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계시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바로 하느님이 계시한 장소이다. 따라서 이 세상이 하느님을 체험하는 장소이며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것을 믿는 것이다. 모든 이 세상 삶 안에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삶 안에 하느님이 와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복음화하고 하는 것도 내가 “모든 다른 사람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또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 복음화는 우선 자기부터 복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부터 복음화 된 후 다른 사람을 복음화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홍언 신부 영성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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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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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립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에서 세례를 베푸셨다’(요한 3,22 참조)는 보고로 시작됩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일한 본문입니다. 그리고 뒤에 4장 2절에서는 그의 제자들이 베푼 것으로 소개됩니다. 아마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 중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마도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의 성격에 관한 논쟁을 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나중에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초대교회에서 행하게 되는 세례, 곧 성령을 통해 죄의 사함을 받고 새로운 신적 생명으로 탄생하는 삼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와는 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분”으로, 계시를 통해 오신 분이심을 밝힙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이어서, 자신과 예수님을 동시에 증언하면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드러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과 ‘신부’는 성경적 표상입니다. 곧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신부를 표상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았습니다(에페 5,21-33). 그러니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차지임을 표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신랑’으로 드러내줍니다. 구약성경의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신부인 교회와의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라는 말은 그분만이 교회의 신랑이시며, 민족들의 구원의 동반자임을 말해줍니다.
한편,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고 신랑의 기쁨을 나누나, 결코 신부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시며’(요한 15,15 참조),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함께 깊이 믿기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친구들에게 당신 신부인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토록, 친구를 깊이 신뢰하고 존중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친구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그리고 당신께서는 친구에 대한 그 사랑, 그 신의를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몸소 드러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분명 우리의 친구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신랑의 친구인 우리는 신부인 교회를 차지할 수는 없지만, 교회를 친구의 신부로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의 사랑도 받고 있음을 가슴 깊이 새겨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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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입니다.”(요한 3,29)
주님!
당신만이 저의 신랑입니다.
당신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당신 마음을 듣게 하소서.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
당신을 다 내어주셨듯이 제 전부를 드리오니 저를 차지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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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쿨하게 인정>
"신랑친구는 신랑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하느님의 사람은 누가 잘되는 것을 보면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누가 잘되는 꼴을 못보고 훼방놓는 사람은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는게 아니라
괴로움을 느낍니다.
오늘 요한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어서
그분이 빛나면 자신이 빛나는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
진정 요한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그 뜻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만족합니다.
누가 잘 되고 빛나는 것을
진정 기뻐할 수 있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쿨하게 인정할때 멋진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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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30)
하느님만이
계실 뿐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작아져야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작아지면
모든 관계는
편안하고
평화롭습니다.
작아져야
우리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작아져야
환상과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작아져야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습니다.
작아지는 것이
참된 봉헌입니다.
하느님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봉헌의 여정은
우리의 자아가
작아지고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삶 안에서
점점 커지시는
감사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새로워지는 것이며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봉헌은
우리 자아가
작아지는 것입니다.
작아지신 아기
예수님의 봉헌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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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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