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사이 사이에서 억새꽃과 바람이 숨바꼭질하는 제주의 숨은 비경
-성산십경 중 제 3경인 '수산야색水山野色'-
글/이승익(시인)
우리 고장을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물어보면 대다수가 대답하길 제주섬 특히, 성산읍 일대는
마치 외국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올망졸망 솟아오른 오름 무리와
광활하게 펼쳐진 억새밭과 정겨운 돌담 풍경,삼나무 혹은 소나무 무리가 군락을 이뤄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이국적인 느낌을 가지는가 싶다.
차를 타고 수산 성읍 간 도로를 달리거나 수산 송당(대천동)간 도로를 달려보면 길 양옆에 펼쳐진
넓은 초지를 볼 수 있다.마치 미국땅 어느 넓은 초원을 달리는 기분이 이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성으로 보나 경치로 보나 "성산십경"중 제 3경으로 '水山野色' 을 선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수산야색水山野色'이라 일컫는 수산평 일대는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곳임과 동시에 체계적으로
개발을 한다면 그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무분별한 개발보다는 일대에 산재한 동굴과
오름, 평야(초지)를 묶어 이야기(스토리텔링)를 전개하는 식의 문화적인 개발을 권장하고 싶다.
아울러 수산평을 배경으로 몽골역사(원나라)박물관 혹은 제주조랑말을 이용한 다양한 볼거리를 만들어
천 년 역사의 숨결을 일깨우는 장을 만들었으면 어떨까.이러한 일들은 수산마을 주민이 주체가 되여 추진
한다면 이룰 수 있다고 여긴다.
수산평에 대한 탐라지의 기록을 보면 고려 충렬왕 3년(1227년) 원나라에서 본도를 지배할 당시(1273-1368)
근 백 년 가까이 동서아막(東西阿幕)을 설치하여 다루가치로 하여금 몽고말 160필을 제주에서 감목하게
하였는데 동서아막을 首山(수산)평에 설치하여 목장과 병참 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이렇듯 수산평은 고려 시대부터 목장으로 병참 기지로 이어져 오늘날 수산리에 유일하게 남은 게 수산초등학교가 있는 수산진이다.수산진성은 세종 21년(1439년) 목사 한승순이 처음 쌓았다고 한다.제주도내에 소재
한 진성 중에 원형 보존이 비교적 잘 돼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4.3사건을 거치며 성내에 산재한 병사와
객사 등은 소실된 것으로 전한다.
수산진성 내에는 성을 쌓을 때 부역을 대신해 죽은 아기의 넋을 기리는 '진안내할망당' 신당이 소재하고 있어
지금도 수산리와 인근 마을 부녀자들은 마음속 섬김의 대상으로 발걸음 하는 걸로 안다.
수산마을은 오름 마을이다.한편으론 속칭 '대뜸'이라 일컫는 곳자왈이 길게 펼쳐져 있다.수산2리 마을은
곳자왈 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오죽하면 수산2리 마을이름이 '고잡'일까.'곳앞'이를테면 곳자왈
앞이라는 뜻이 제주어가 변해 '고잡'이라 부른다.
제주 중산간 마을인 수산 1.2리 마을은 예로부터 인심이 후하고 향학열이 높아 인재도 많이 배출됐다.
요즘은 제주시를 기점으로 교통이 발달하여 주로 생산되는 지역 특산물인 무우.감자등 특용작물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감귤과 함께 마을 대표 작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천 년 역사를 간직한 수산평 초원 길, 그 길을 한 번쯤 달려보길 권해 보며,이 글을 쓰는 필자 귀에
드 넓은 수산평 초원에서 천 년 전 뛰어 놀던 조랑말 울음 소리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