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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규율 수도회와 탁발 수도회의 영성
12-13세기에는 유럽의 경제, 사회, 정치 및 문화 등 전면적인 측면에서 수도자 세계에 “새로운 영성”을 일으키면서 커다란 영향을 준 질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6-7세기가 “수도승의 세기”였다면 13세기부터는 “스콜라 철학자들”의 세기가 시작된다. “수도회의” 신학은 성서에 대해 묵상된 성찰이었다. “근거(권위)”를 통하여, 다시 말하면, 교부들과 그 외의 저술가들에 의하여 문학사적 의미로부터 알레고리적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중의 의미들로 해석된 성서를 통하여 교의(dogma)를 증명하고 있었다. 신학은 어떠한 학문 이상의 것, 하나의 삶이었으며 “영성”이었다. 신학자는 동시에 하나의 “영성가”였다.
13세기에 계시의 내용에 대한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작업인 “거룩한 학문”,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탄생된다. 내용은 바뀌지 않았으나, 교수법과 방법론은 바뀌었다. “견해들(학설들)”은 서로 연결되어 “근거들(권위들)”로 선택되었으며, 신학자들은 영성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모순적 경우에 직면하였다. 베크(혹은 켄터베리)의 안셀모는 새로운 경향을 출발시킨다. 그러나 확고히 뿌리내린 그의 수도승적 신비주의로 인해 그의 사색이 감미로운 하느님 체험을 약화시키는 일을 없었다. 베드로 다미아노는 변화를 통찰하였고, 성서연구에 적용된 변증론(일종의 논리학)의 위험에 반대하여 경계하면서 이 변화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베드로 롬바르도(+1160)와 아벨라르(+1142) 등은 새로운 신학을 제시하였다.
신학자들과 영성가들 사이에, “수도회의” 신학과 “스콜라” 신학 사이의 투쟁이 있었던 시기는 12세기로서, 이 투쟁은 교의신학과 영성신학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결별로 이끌 것이었으며, 15세기에 가서 그 정점에 이를 것이었다. 처음에 “신학자”를 거부한 것은 “영성가”였지만, 나중에는“신학자”가 “영성가”와 신비가를 불신하게 될 것이었다.
정치, 사회 및 경제 방면에서의 발전들도 역시 중요하다. 11세기부터 유럽에서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다. 인구의 증가, 시골에서 인구밀집지역들로의 이동은 상업과 산업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를 출발시켰고, 따라서 새로운 사회계급이 태동되고 있었으니 바로 중산층이었다(도시 혹은 커다란 마을의 주민들). 장원제도는 해체되고 있었다.
세속과 교회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도시들이 생겨났다. 민주적 분위기, 새로운 경제와 새로운 문화, 물질을 즐기며 살려는 기운들이 팽배했고 새로운 정신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무지했던 중산층들은 시대에 적응하기를 바랐고, 이 때에 수도원 및 주교 설립의 학교들의 제한되었던 환경을 확장할 필요에 의해 발생하던 대학들의 강의실들을 채웠다. 문화는 보편화되고, 동시에 더욱 세속화되었다. 신학은 더 이상 유일한 학문은 아니게 될 것이었으며, 철학과 법학과 경쟁해야만 하게 될 것이었다.
동시에, 교회와 새로운 충산층의 치부(致富)에 대항하는 저항의 표지들로서 청빈주의적, 반성직주의적 운동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와 배경 속에서 규율성직자회들(Canonici regulares)과 무엇보다도 탁발수도회들(Ordines mendicantium) 등 수도생활의 새로운 형태들의 기원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규율성직자회
“그레고리오” 개혁의 유익한 효과들 중의 하나가 성직자의 개혁이었다. 니콜라오 2세(1059) 교황과 알렉산델 2세(1061) 교황은 사제들의 독신생활 이외에, 재산의 공동 소유의 의무 없이 공동생활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첫 발걸음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쾰른 교구 크산텐(Xanten)의 성 노르베르토가 내딛였다. 그는 크산텐의 참사회원직을 내놓고, 13명의 동료들과 함께, 프랑스 북부에 성 아오스딩의 규칙아래 정결, 순명, 가난을 사는 프레몽트레(Prémontré)회를 세웠다. 회원들의 관상 생활과 성직자들의 개혁, 그리고 동정 마리아와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을 동시에 장려하면서, 본당들 안에서 그들의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규율성직자회들은 유럽 내에 많이 있었으나, 그 어떤 회도 성 빅토르의 규율성직자회 만큼 유명하게 되지는 못했다. 성 빅토르회는 순교자 마르세유의 성 빅토르(S. Victor de Marseille) 에게 헌정되었으며, 파리 근처에서 1110년 샹포의 기욤(Guillaume de Champeaux)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성 빅토르 대수도원은 영성생활의 찬란한 중심지였으며, 등장하기 시작하는 스콜라철학의 지고한 위치에 있었던, 이미 갈라서기 시작하던 때에 신학과 신비학을 일치시키기 위한 특전적인 환경이었다. 성 빅토르 회원들 가운데, 특히 후고(Hugo de San Victor)와 리챠드(Richard de San Victor) 안에서, 영성은 신학의 지지를 받았으며, 신학자의 사랑어린 관상으로부터 조명되었다.
1.1. 성 빅토르의 후고(+1141)
작센출신으로 아주 젊었을 때 성 빅토르회에 입회했다. 1133년 수도원의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성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후고는 “아오스딩, 그레고리오, 베르나르도의 가장 완벽한 종합”이라는 것이다. 후고에 있어서 완덕의 목표는 관상이다. 관상은 진리 추구에 있어서 최종적 언어이며, 철학적-신학적 사변의 절정이다. 이 탐구에 있어서 첫 과정들은 피조물들, 성서,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비참함 등에 대한 성찰로 이끄는 성서 봉독과 묵상이다. 묵상은 간청과 탄원을 드리는 기도로 끝난다(이 모든 것을 두 권의 소책자안에서 전개하고 있다:「묵상하기(De meditando)」와「기도방법(De modo orandi」).
영적 여정의 마지막 단계는 관상이다. 그렇지만 사변적이고 불완전한 관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사랑의 충만으로서 쏟아 부어 넣어주시는 관상이며, 세상의 재물을 경멸하게 하고(「세상의 헛됨(De vanitate mundi)」),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일치 안에서 완료된다(「신부를 향한 신랑의 사랑(De amore sponsi ad sponsam)」).
1.2. 성 빅토르의 리챠드(+1173)
스콜라 신비가이며, 중세 신비신학의 위대한 이론가들 중의 한사람이다. 스콧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성 빅토르 대수도원에서 후고의 제자였으며, 1162년부터 임종 때까지 원장을 지냈다.
후고같이, 스콜라의 좌표 내에서 움직였다. 목표는 사랑어린 관상이며, 리챠드는 단계들과 대상들, 또한 관상의 각 단계에서 쌓아지는 사랑의 단계들도 구별하면서 더욱 깊이 연구하였다.
덕의 획득과 정념의 조절을 통한 관상의 예비과정으로서 첫 번째 책인 Beniamin Minor, Liber de praeparatione animi ad contemplationem을 저술하였다. “관상을 위한 영혼의 준비에 대하여”라는 부제(副題)가 의미심장하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신비적인 책은 Beniamin Maior, De gratia contemplationis이다. 외적인 대상들에 대한 관상, 성찰(cogitatio) 혹은 순수한 반성이 선행된다. 다음으로 묵상(meditatio), 즉 우리 안에 있는 가치들에 대한 지식이 따른다. 관상(contemplatio)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영혼 스스로 나오도록 한다. 관상의 마지막 단계는 수도자가 도달해야 할 완덕의 마지막 단계이다.
관상의 대상들도 구별한다. 즉 물질적인 것들, 이성적인 것들, 세상의 눈에 보이는 사물 안에 투영된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고 비물질적인 본질들, 신앙을 통하여 알려진 하느님과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알려진 하느님 등이다. 또한 관상의 형태들도 규정한다. 즉 인간적 혹은 수득(收得)된 관상, 인간적-신적 관상, 그리고 신적 혹은 주입(注入)된 관상 등이다.
영성 생활에 대한 대단히 높은 수준의 그의 전망을「사랑의 네 단계(De quattuor gradibus caritatis)」라는 논문으로 완성하였다. 여기서 그는 관상의 다른 형태들, 그리고 관상된 대상들과 관련을 짓는다. 이는 신비체험의 단계들이다. 첫 단계에서 하느님은 열정적으로 당신을 열망하는 영혼을 방문하신다. 둘째 단계에서 신랑의 방문을 받고 그의 현존을 맛본다.
혼합된(인간적-신적) 관상에 해당한다. 셋째 단계에서 탈혼(奪魂: mentis excessus), 즉 신랑과의 일치의 순간을 체험한다. 영적결혼이라고 보겠다. 넷째 단계는 같은 결혼이지만 결실들을 낸다. 신부의 다산성(多産)性)의 특징적인 시기이다. 정감적 일치는 효과적(실제적)일치가 된다. 영혼은 오직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열정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 한다. 마지막 두개의 단계가 주입된 혹은 본연의 의미에서 신비적 관상에 해당된다.
주입된 애덕(caritas)의 사랑(amor)의 효과와 같은, 신비생활의 사도적 다산성은 그에 관한 리챠드의 주장에 의해 처음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되었다. 이로 인하여 후에 그는 영성 생활의 이론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선구자로서, 그의 이론은 예를 들어, 성녀 예수의 데레사와 같은 체험적 신비가들에 의하여 확인될 것이었다.
2. “탁발수도회”들의 공통적 특성들
탁발 수도회들은 이전의 회수도회(Ordines monastici)들에 대한 선택적 응답으로서 평신도 쇄신가들과 같은 노선에서 발생하였다.
그들의 특성들을 살펴보자.
2.1.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가난
수도승들은 집단적이 아니라 개인적 인격적인 가난을 지켰다. 쇄신작업들이 가난에 대한 분명한 이상과 함께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점차로 대수도원들은 사회적, 경제적 관점에서 막강한 단체들로 바뀌게 되었다.
“탁발수도회들”에 의해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이 도입되었다. 그리스도론적이며 복음적인 색조가 분명한 가난한 삶이 압도하였다. 사도직 수행을 위하여 가난한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유롭게 되자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이것이 모든 이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이해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회원들은 가난한 삶을 어떠한 이상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선택하였다. 도미니코 회원들은 오히려 가난을 사도직 수행을 위한 방법으로 간주하였다(복음의 메시지를 받을 이들을 위한 복음적 삶의 모범). 이러 저러한 동기로 탁발수도회들은 생활을 위하여, 그리고 더욱 자유로이 설교에 헌신하기 위하여 이동하면서 하는 탁발의 의무를 졌다. 이는 수도승들 사이에서는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며, 성직자들에게는 금지된 것이었다.
2.2. 사도적 활동
탁발수도회들은 신자들의 영성적 필요를 돕기 위하여 설교가, 교리교사들로서 백성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발생되었다. 몇몇의 회들이 처음에는 -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회원들 - 이동 설교가들인 평신도수도자들의 회였던 것이 사실이라면, 점차적으로 모든 탁발수도회들이 성직수도회로 변하여갔다.
교회 내에서, 이렇게 어느 정도 잊혀졌던 설교의 봉사가 실현되어갔다. 이는 도시 속에 수도원들(conventi)의 설립과(수도원들monasteri과는 반대로 백성들 가까이에), 합당한 문화적 준비의 요구를 초래했으며(대학입학), 주교들의 관할권으로부터의 면제의 특전의 이유로 더욱 심화된, 권한의 범위에 대한 문제를 놓고 벌인 재속성직자들(주교들과 본당신부들)과의 논쟁도 또한 야기했다. 점차로 안정성을 획득하였으니, 이것은 교계제도에 반성직적이며 반교계제도적인 이동 설교가들처럼 무정부적으로 구성된 다른 평신도들 무리들에 대한 조정을 가능하게 하였다.
2.3. 형제애
가난의 삶과 연결되어 형제애의 의미가 생겼다. 이 시기에 형제애는 새로운 회들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성장되어갔다. 모두들 서로를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사회적 계층들, 출신 가문이나 경제적, 문화적 차이들에 근거했던(출생뿐만 아니라 재산이 이미 구분의 한 요소를 이룬다) 계층에 따른 구분이 행해졌던 중세의 몇몇 대수도원에서 그렇게 자극적이던 관행이 사라졌다.
수도회 생활의 쇄신된 형태들은(발롬브로사회, 카말돌리회, 시토회 등), 새로운 것으로서, 가대 수도승들 외에, 다른 회원들, 즉, 문맹자들이면서, 고유한 규칙을 지키며 대수도원의 수작업들을 하는 평신도들인 평수사들(i conversi: 보조수사들) 혹은 평신도 형제들을 받아들였다. 탁발수도회원들의 수도원(convento)은 모든 사회계층에 열려 있었다. 물론 그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제직을 지망하지 않는 평신도 형제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수도원들(monasteri)의 평수사들과 엄밀한 의미에서 꼭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봉건세계의 극복이었다.
2.4. 이동성과 정주성
옛 수도회 전통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peregrinatio pro Christo)는 보속의 한 형태였다. 10-12세기의 수도회는 순회의 풍습을 내치고 수도승의 정착을 옹호하였다. 탁발수도회들은 정착생활과 사목활동, 설교와 탁발을 위한 이동이라는 공동체적 체험을 결부시킬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신약성서를 새로이 읽고 고무되어 옛 사도들의 공동체의 모형을 본받으려 하였다.
탁발 수도회 운동은, 도시의 현상으로서, 전 수도회 전통 속에서 전형적인, 세상으로부터의 도피(fuga mundi)와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수도자들의 육화의 종합을 암시하였다. 이 법률적 입장에 힘입어 - 영성을 살아가는 한 방식이 되는 - 탁발수도회들은 그들 시기의 사회 안에서, 신앙적 기능(형제애, 신심 및 자선 단체, 제3회...)뿐만 아니라, 사회 및 경제적 영역(사채를 피하기 위한 저당은행들, 사회의 민주적 개념...) 안에서도 다중의 기능을 행사하였다.
요약하면, 탁발수도회들은, 전형적인 수도회, 규율성직자회, 이동 평신도 설교가들 등 이전의 모든 체험들의 종합이다. “수사(형제)”는 사회의 종교적 조직 내에서 대단히 인정받는 신자의 한 형태가 될 것이었다. 탁발수도회들은 많이 설립되어 도시들과 지방의 작은 마을들에 이르기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보니파시오 8세(+1303)이후, 교회 내 아우구스티노회와 가르멜회의 존속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되었을 때(리용공의회[1274]에서 공인이 거부되었다), 탁발수도회는 넷이었다.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가르멜회와 아우구스티노회 등이었다. 현행 교황청연감에 의하면, 탁발수도회들은 17개이며, 그들 중 몇몇은 옛 가계에서 “개혁”된 수도회들이다.
3. 프란치스코 학파
프란치스코회의 창설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11-12세기의 영성적 환경을 잘 구체화하였다. 은세수도회제도, 가난, 복음정신의 이상으로. 교계제도 교회에의 긴밀한 일치로 인하여 다른 같은 운동들과 차별화하였다.
1182년 아씨시에서 부유한 옷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독립성과 자유의 상징으로 도시의 주교 앞에서 옷을 벗음으로써 중산층의 혼란한 처지를 벗어나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한 강력한 체험을 하였고, 그분 수난의 성흔(聖痕)을 받았다. 아씨시에서 1226년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이동 평신도 설교자들 운동의 지도자가 되려는 의향은 없었고, 그들을 위하여 두 편의 규칙과 거의 성서 본문들로 가득한 하나의 유언장을 남겼다.
프란치스코사상은 프란치스코 자신을 넘어가는 영성적 운동으로서, 그의 아들들-제자들의 신비 생활과 지혜로 성장하여, 격류와 바다가 되었다. 프란치스코사상은 대학의 박사들과 교수들의 저술들과 이동사도들의 설교를 통하여 유럽을 세기를 이어 정복하였고 뒤흔들었다. 프란치스코사상은 복음을 그 극도의 원칙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려는 열망과 모든 갈망에 대한 촉매가 되는 인상을 준다. 이 때문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한 인간, 한 그리스도인, 회심자이기를 중단하고 예언자, 카리스마로 가득한 초인,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요소들을 모든 극단에서 모아들이는 안테나, 그 요소들을 널리 퍼뜨리고, 변화시키는 방송국이 된다. 영성사에서 한 인간 프란치스코에게 관심을 두지만, 그보다 훨씬 더 운동에, 이 쇄신 체험에 따른 경향들에 관심을 둔다.
3,1, 특성들
프란치스코사상은,
- 그리스도중심주의. 인간 그리스도, 예수의 인간성, 인간-예수의 신비들, 즉, 그분의 탄생, 그분의 사도적 활동, 그분의 수난-죽음-부활,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 그분의 형제들, 사건들과 본성을 중점적으로 기초한다.
- 교회론. 프란치스코는 역사적 그리스도와 제도-교회를 거치면서 역사 속에서 실현되어 가던 신비적 그리스도와의 조화로 통찰하였다.
- 본받고자 하던 그리스도께 대한 크나 큰 사랑으로 받아들여진, 절대적 가난에 대한, 총체적인 의미로 이해된, 근본적 복음주의.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사랑의 요구로서, 세상에 대한 건전하고 잘 이해된 경멸. 겸손과 단순성.
- 역시 근본적으로 이해된 형제애. 이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물들과의 사랑어린 깊은 관계로 이해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영혼이 있거나 없거나 만물과 화해하였다. 그는 만물 안에서 하느님의 자취 이상의 것, 즉, 모든 것 위에 사랑 받으셔야 할 하느님의 모상들, 실재들을 보았다. 자연과의 형제적 통교는 위에 언급한 세상에 대한 경멸과 균형을 이룬다. 생태학적 균형의 수호자요, 자연 사랑에 빠진 시인으로서 표현한 그의 영혼의 서정시적 차원이 아니라 우주의 신성함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었다.
많은 것들이 그에게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였고, 이 때문에 그것들을 사랑하였다. 빛을 발하는 불꽃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사랑을 느꼈기에 그것을 끄려 하지 않았고, 어린 양을 통하여 하느님의 어린양을 기억했다.
무엇보다도 바로 하느님을 대리하기에 사제들을 사랑하였다. 이러한 신앙의 사랑어린 전망 속에서 모든 것이 그에게는 “형제”로 보였다. 형제인 태양, 누이인 달, 그리고 별들, 형제인 바람, 누이인 물, 형제인 불꽃, 우리 누이요 어머니인 대지, 우리 누이인 죽음(「형제인 태양의 노래」참조). 무엇보다도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느꼈다. 그의 “형제애”의 대상인 가까이 있는 형제들과 구원받도록 도움을 주고자 하는 멀리 있는 형제들 모두에게.
- 살아가는 것의 기쁨. 이는 역사, 세상, 피조물-자연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에서 나온다. 프란치스코 - 그리고 프란치스코사상 - 는 ‘새 세상’ 창조를 돕는다. 이미 새롭고 쇄신된 그의 시기의 역사를 변화시키는데 이바지 한다. 기쁨은 재물의 사용 혹은 남용에서 나오지 않고, 오히려 초자연적 복음주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는 사실의 발견에서 나온다.
- 정감적 영성. 프란치스코사상은, 스콜라적 학문이 되었어도, 의지가 지성을 지배하고, 사랑이 지식을 지배하는 수도회 신학의 옛 전통을 계승한다. 따라서 이를, 순전한 학문이 되기 전에, 삶으로서 이해된 영성의 마지막 연결 고리라고 간주할 수 있다.
3.2. 학파의 주요 인물들
프란치스코 사상은, 대중적 “운동”을 넘어, ‘영성 학파’가 되었다. 아주 일찍이 회원들은 대학에 학생들로서 교수들로서 들어갔다. 프란치스코회 거장들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성 보나벤투라(+1274)이다. 그의「하느님을 향한 정신의 여정(Itinerarium mentis in Deum)」은 아오스딩계와 디오니시오계 영성의 종합이다.
여기서 “상승”(길), “조명”(빛), “사색”(성찰) 들을 통한 하느님께로의 상승 여정을 서술하고 있다. 외부 세계는, 내적(심리학적) 그리고 형이상학적-신학적 세계처럼, 하느님 현존의 발자취들이 있는 곳들이다. 그러나 상승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보기까지 계속된다. 이는 관상, 지성적이고 사랑어린 관상을 통해서, 그리고 ‘정신의 절정(apex mentis)이 하느님을 누리는 사랑의 탈혼을 통하여 진행된다. 이는 신비신학의 절정이며, 박학한 무지이다.
성 보나벤투라는 또한 세 가지 길의 계승자요 전파자이다. 즉, 정화(purgatio), 조명(illuminatio), 완덕(perfectio)라는 삼중의 길(De triplici via), 혹은 죄의 정화, 그리스도를 본받음, 신랑과의 일치 등을 말한다.
다른 저자들은,「관상에 대한 책」의 저자인 라이문도 루요(Raimundo Lullo: +1316)이 있으며, 볼로냐의 가타리나, 폴리뇨의 안젤라, 그리고 누구보다도 헨리 허프(Henry Herp: + 1477)가 있다. 그는「신비신학(Theologia mystica)」을 저술했는데, 이 저서는 이전 문화의 대단히 광범위한 집대성이며, 후대의 많은 신비가들이 그들의 주요 원천으로 삼았다.
4. 도미니코 학파
도미니코 성인(Santo Domingo de Guzmán)은 스페인 부르고스의 칼레루에가(Caleruega)에서 1170년 탄생하였으며 볼로냐에서 1221년 운명하였다. 1216년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설교가 형제들(Fratelli Predicatori)”의 회를 인준하였다. 같은 해 성인의 첫 제자들은 첫 수도원을 프랑스의 툴루즈에 세웠다. 이 수도회의 탄생은 프랑스 남부의 카타리파의 존재와 연관이 있으며, 가톨릭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가들의 유능하고 안정적인 모임을 지역교회와 보편교회에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는 의미였다.
이탈리아에서의 중산층의 존재가 가난에 대한 예언자적 운동으로서 프란치스코회를 일으켰다면, 프랑스에서는 이단의 존재가 성 도미니코의 설교가들을 일으켰다. 도미니코는 어떠한 「규칙」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그의 제자들은 성 아오스딩의「규칙」아래서 “규율수도회(Ordo canonicus)”(호노리오 3세 인준 칙서)의 회원처럼 살았다. 설교가들의 생활은 규율성직자회의 형태에 근거하여 잘 조직되어 있었다. 규칙을 지키고, 공동으로 성무일도를 바치며, 독방에서 생활하였다.
4.1. 도미니코 영성의 특성들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나타낸다.
- 눈에 띠게 주지적(主知的)이다. 학문이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높은 비약을 달성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지성과 의지, 사랑과 지식 사이의 우위에 대한 오랜 기간에 걸친 논쟁에서 도미니코회원들은 의지에 대한 지성의 우월성을 인정하였다는 뜻에서 그렇다. 치열하게 정감적 길(방법)을 살았던 서방의 전통을 깨뜨렸다.
- 탁월하게 사도적이다. 순전한 활동주의가 아니라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진리를 추구하였다. 거룩한 진리(신학, 성서...)를 이론적으로 심화시켰다. 한 도미니코 회원의, 모든 것은 그 아래다 두었던, 주요 작업은 노래로 성무일도를 바침, 봉쇄구역에서의 수련이었다. 이는 수덕 작업이었고 사도직을 위한 준비였다. 사도직은 엘리트(대학 내에서)로서의 것만은 아니었고 대중적이기도 하였다. 두 경우 모두 교회의 사명, 선교활동이었다.
- 관상에 기초를 두었다. 도미니코 회원들은 성 토마스에게서 볼 수 있는 한 원리에 기여했다. 즉, “관상되는 것과 관상 된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contemplari et contemplata aliis tradere)”. 성 도미니코의 삶에 대한 초기 목격증인들에 의하면. 창립자 성 도미니코가 했던 것처럼, 하느님께 관하여 말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말하라는 것이다. 위대한 스승들에게서 관상은 신비가 된다. 여기에 학파가 성령과 그 은사들의 영향에, 특별히 지혜의 성령에 부여하는 중요성이 있다. 관상은 진리 추구와 사도직을 키워야 하는 체험이다.
- 관면법. 이미 1220년도 제 1차 총참사회에서, 창립자가 아직 생존해 있던 때, 다음의 법규가 제정되었다. “수도자는 성숙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본회는「회헌」을, 위반 할 때에는 죄를 짓는 것과 같이 여기는 수준에서, 의무로 부과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모두들, 주인의 채찍 아래 있는 종들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따른 자유로운 사람들로서 책임감을 지니고 준수하기를 바란다.” 이 원칙을 정하고, 여기서 다음의 결과들이 연역되었다. 즉, 법규들은 본회의 주요 목적에 종속된다.
즉 진리 연구. 이 때문에「회헌」의 관면들에 관한 하나의 법규가 생긴다. 즉, “우리의 모든 원장들은 그들의 수하회원들과 자기 자신들에게 법규들과 그 준수들에 관한 관면을 줄 권한을 지닌다. 만일 그것들을 준수할 경우, 어떤 특정한 여건 속에서, 연구와, 강론 혹은 어떠한 종류든지 영혼들에 대한 의무적인 봉사에 해악이 될 수 있을 경우에.”
- 독창성. “수도 생활에 있어서 완전히 새롭고, 전적으로 독창적인, 따라서 전통적 실천들에 비해 혁명적인, 여기서 근본적인 특성을 지니며, 참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그들 수도회의 구조에 도입한 세 가지 요소들은 수도자의 인격의 발전, 항구적인 연구의 의무, 관면법 등이다. 관면할 가능성이 아니라 관면법이라는 사실을 눈여겨보도록 한다.” 설립자는 또한 “자기 수도회의 민주적 구조”, 즉 그 봉건사회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어떤 것, 다시 말하면, 권한, 권한의 시행이 아래로부터 온다는 사실도 도입하였다.
참사위원들은 지혜로 가득한 원칙을 제시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이 원리들이 본회의 기초적인 법규들을 이루며, 영구적이며 변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제하지 않으니, 여건상 필요하다면... 실제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떠한 유연성과 적응성을 지니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서원을 통하여 우리가 노력할 의무를 진 영혼들의 선익(善益)이라는 본회의 최종 목적에 비추어 늘 효과적인 결과를 이룰 수 있도록 할 것이다.”
4.2. 학파의 주요 인물들
모든 시기에 걸쳐 가장 중요한 도미니코회 저술가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an Tommaso d'Aquino: + 1274)이다.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특전적인 지성 중의 하나다. 성 토마스는, 하느님께 대한 사색과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너무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때, 신학자일 뿐만 아니라 “영성가”이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서 “영성”은, 삶을 넘어서, 하나의 학문이며, 원리들과 결과들의 어떠한 체계였다.「신학대전(Summa Theologiae)」과 다른 작품들은 늘 영성 생활의 원리들에 관한 고갈되지 않는 보고(寶庫)이다.
소위 “초자연적 유기체”라는 구조, 거의 우리 시대에까지 이르는「교본들」이라는 고전적 논술에 있어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천재적인 연구자요 저술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모든 그리스도교적 완덕과 그 성장의 기초는 성화 혹은 상존은총, 그리고 도움의 은총 안에 있다.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참여는 영혼을 초자연화하면서 영혼의 실체에 부응한다.
이 중심적 핵심으로부터 신화(神化)는 영혼의 모든 능력(capacità)들 속으로 퍼지며 - 스콜라학자들은 potenze로 불렀다 - 향주덕과 윤리덕들을 통하여 사람의 모든 행위들을 완전하게 한다. 성장의 기초는 사랑의 실천에 있다. 이를 성인은 초보자, 진보자, 완덕에 이른 자로 구분한다. 이러한 구별은 우리가 이미 영성사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바, 정화의 길, 조명의 길, 일치의 길 등의 고전적인 구별과 같다. 성 토마스는 성령의 선물들의 영향에도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 영향이 구체화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니, 왜냐하면 영혼이, 자신의 본성을 극복하면서, 신적인 “방식”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선물들은 그리스도인의 완덕에 필요한 신비생활을 가능케한다.
다른 저술가들로서, 성 토마스의 스승이며, 다각적인 저술가이며, 위 디오니시오 아레오파지타의 주석가인 성 대 알베르토(+1280), 많이 읽혀지고, 대중적 신심에 많은 영향을 미친, 저명한 Leggenda Aurea의 저자 보라지네의 야고버(Giacomo da Voragine[da Varazze]: +1298), 이탈리아 문예부흥시기의 저명한 개혁가 예로니모 사보나롤라(+1498), 그리고 여성들 중에는 교회 박사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등을 들 수 있다.
5. 갈멜 학파
갈멜회원들은 윤리적으로 쇄락한 서방의 영성적 조난(遭難)의 결과로 생겨났다. 십자군에 참여했던(11세기 말엽부터) 몇몇 기사들이 갈멜 산(팔레스티나의)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었다. 옛 은수자들의 고독, 은둔, 관상적 침묵 등에 대한 갈망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날개 짓을 하였다. 가나안의 이교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열망하였던 관상가, 엘리야의 카리스마적 모습이 갈멜산 기슭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산위에 동굴들을 파고, 거처들을 마련하였다.
이상하게, 갈멜회원들의 기초적인 입법은 한 규율사제,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알베르토의 업적이다. 은수자들의 초기 모임의 영적인 수장 브로카르도가 그에게 청했던 것이다. 1209년 경 법전이 작성되었고 모임의 회수도자적-은세수도자적 여건에 잘 적응되었다. 호노리오 3세로부터 1226년 인준되었다.
사라센의 공습으로 인하여, 모임은 서방으로 이주하여야만 했다. 바로 위대한 두 탁발수도회,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들이 생겨나고 있던 때였다. 제 4차 라테란 공의회(1215)가, “재속사제들”의 사목활동에 관여하게 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앞으로는 수도회들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정했기에 미묘하던 때였다. 도미니코회원들의 위원회에서 검토된 뒤, 알베르토의 규칙은 새로운 유럽 상황에 적합하게 수정되었고, 동방과 은수제도에 기원을 두었던 이 수도회는 “탁발”수도회로 변화되었다.
인노첸시오 4세는 1247년 갈멜수도회원들의 “새”「규칙」을 인준하였다. 옛 은수적 신분으로 돌아가려는 향수에 찬 시도들이 없지는 않았다. 니콜로 갈리코(Niccolò Gàllico)는 1270년경 이런 의미에서「불화살(Ignea sagitta)」을 저술하였다. 탁발수도회제도가 평정을 하였고, 수도회는, 사목활동과 대학의 연구에 참여하면서, 유럽의 상황과 요구에 적응하였다.
갈멜 영성의 특성들
- 엘리야주의와 마리아주의. 갈멜의 생활의 모형인 두 인물은 엘리야와 마리아이다. 엘리야에게서는 고독한 관상 안에서, 삶의 엄격함에서 자라난, 그 카리스마적이며 예언자적인 특성, “관상적”인 태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투쟁가로서의 성격을 배운다. 엘리야는 법적인 의미에서 본 수도회의 창설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 기본적 측면들의 하나에 대한 영감을 주는 인물이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께 그다지도 가까이 있음으로서 모형이 되었다. 마리아의 역사적인 삶이 전개되었던 성지가 가까운 갈멜산에 살면서, 갈멜 은수자들은 그녀에게서 관상의 모형이요 덕의 모범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에게 산기슭에 경당을 바쳐드렸다. 또한 수도회의 명칭에도 그녀에 대한 언급이 있다. 즉, “갈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형제들”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또한 본 수도회를 정의하는 표어가 나온다. “모든 마리아적인 것은 갈멜적인 것이다(Totus marianus est Carmelus)”.
- 관상적-사도적 특성. 비록 “혼합된”(관상-활동) 수도회이지만, 관상생활이 지배적이며, 자기 존재의 주요 목적이며 이유이다. 모든 것이 이 우선적 가치(침묵, 고독, 삶의 엄격함, 가난 등)에 의존하여 조직되었다. 사도직은 이차적이며, 관상적 특성에 해가 가지 않는 한 실천했다. 그러나 오히려 거의 관상적 태도의 한 요청으로서 필요하다. 관상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과의 긴밀한 일치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내면생활의 추구, 하느님 체험의 추구를 위한 관상이다. 가장 위대한 두 명의 스페인 신비가, 성녀 예수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적 흐름에 대한 묘사에 소위 “심리주의”가 지배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설명되었다. 신비체험에서 최고조에 이르는 관상이다.
-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살기. 갈멜의 특별한 요소는 아니다. 그러나「규칙」이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에 살아야 하며, 순수한 마음과 전적인 헌신으로 충실하게 그분께 봉사해야 한다(서언 참조).
이는 중세의 “순례”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더 훨씬 더 구속력 있는 의미, 즉 그리스도를 모범을 지니고 살며 그분께 가진 모든 것을 바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따름”을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이 나온 중세의 봉건적 맥락 속에서는 자기의 주님께 대하여 마치 신하처럼 처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 대한 책임감에 가득하여 귀 기울이며 있는 것. 순종을 바치며, 그에게 충실하게 있는 것, 충성서약을 파기하지 않는 것 등이다.
-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님의 법을 묵상하는 것.「규칙」의 힘의 커다란 경향들 중의 하나이다. 동방과 서방의 수도회적 전통에 다시금 연결된다. 외딴 곳이나 도시 안에 위치한(이는 새로운 일이니, 서방세계에 대한 적응을 위해 의무적으로) 갈멜 수도원이 있는데, 갈멜 회원은 독방에 자기의 중심이 있었으니, 이는 도미니코회원들처럼,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내면을 관상하고 누리기 위해서이다. 이 관상은 성독(lectio divina)의 도움을 받았다. “다른 것들”을 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가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 독서(lectio)는 묵상(meditatio)을 고무하였고, 묵상은 관상(contemplatio)을 북돋았다. 이러한 목표들을 위하여,「규칙」은 매우 통상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단식과 금육(12-13장), 가난(9장), 덕의 수련(14장), 노동(15장), 침묵(16장), 순명(18장) 등등.
갈멜수도회 원천에 대한 영성의 기초가 되는 작품은「초기 수도자들의 양성에 대한 책(Liber de institutione primorum monachorum)」이 있다. 저자는 익명이며 1370년경 필립 리보(Filippo Ribot)의 작품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본회의 개혁가들은 두 명의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신비가들인 성녀 예수의 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이다. 크나 큰 영향과 매력을 발산하였거나 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 가까운 다른 인물들은 성녀 리지외의 데레사, 복녀(성녀?) 삼위일체의 엘리사벳, 성녀 에디트 슈타인 등이다.
6. 아우구스티노 학파
이 학파나 그 기원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언급이 적다. 1256년 교황 알렉산델 4세는 여러 은수자들 무리를 모아 “성 아우구스티노의 은수자들”이라는 이름으로 탁발수도회를 닮은 한 수도회를 형성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의「규칙」에 따라 살면서 이 은수자들은 성인의 영성의 후예들로 자처하였다. 다른 탁발 수도회처럼 빠른 성장을 하였고, 대학 연구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영성의 특성들
트라페(Trapé)신부에 의하면 가장 특징적인 점들은 다음과 같다.
“1) 사랑의 수위성. 이는 절제된 주의(主意)주의, 하느님을 뵈려는 내재적인 열망을 포함한다. 사랑의 수위성은 아우구스티노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내 사랑, 내 소중함(amor meus, pondus meum)’이라는 저 유명한 표현과 함께.
2) 은총의 수위성. 이 문제는 또한 은총의 회복시키는 기능에 대한 힘 있는 강조를 포함하며.. 또한 ‘순수하다’고 불린 본성이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장식되었다는 어떠한 유익함도 포함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수위성. 이 수위성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대한 열정적인 찬미와, 의화의 문제에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
이 학파의 저술가들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제자이자 위대한 신학자인 에디지오 로마노(Edigio Romano: +1316)가 있다. 그는 프랑스의 美王 필립에게 헌정한 중세 집권자를 위한 수덕-윤리 교본인「군주들의 통치(De regimine principum)」를 저술하였다. 또한 에디지오의 제자, 비테르보의 야고버(Giacomo da Viterbo: +130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