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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Ⅲ - 우현의 후학 ①황수영(焦雨 黃壽永),②진홍섭(樹默 秦弘燮),③이경성(石南 李慶成),④우현학의 정립
ohyh45 ・ 2019. 12. 26. 21:17
『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Ⅰhttps://blog.naver.com/ohyh45/221748278778
한국미의 탐구를 위해 떠나는 순례 - 연재를 시작하며- 우현, 짧은 생후 남겨진 그의 잊지 못할 발자취
1. 우현을 만나다 -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외로이 밝힌 선각자
2.식민지·가정사 아픔 오롯이 …'시대의 등불' 깨어나다[우현의 삶①]
3. 애증이 엇갈리는 고향, 인천 -넘집는 물결이 삼킨 고향 … 어찌 슬픔없이 사랑하리오[우현의 삶②]
4. 보성으로 가는 통학길은 문학소년의 사색공간- 10년 동안 기차 통학하며 배움에 정진[우현의 삶③]
5. 경성제국대학의 두 얼굴 배움의 길- ①식민지배 엘리트 교육기관 … 그 속에서 싹튼 저항 의식
6. 예과,고귀한 이상과 낭만을 즐기다 배움의 길-②"상아탑 기만을 발길로 차고"-조선인임을 잊지 않았다
7. 경성제국대학의 학우들 배움의 길 - ③암울한 시대의 북받친 울분 … 毒酒로 함께 달랜 文友들
8. 고유섭과 경성제대의 선생들 배움의 길 -④ 보편·자율성 '학문의 道' 삼은 미학세계 안내자들
9. 한국미술사 연구에 첫걸음을 내딛다 - 억누를 수 없던 학문열정 … 고미술사 탐구 매달려
『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Ⅱhttps://blog.naver.com/ohyh45/221749234559
10. 한국미술사 연구에 첫걸음을 내딛다 - 민족 자존심 간직 … 학문의 금자탑 쌓아 올리다
11. 송도고적, 개성 그리고 고려문화의 예술기행 -치밀한 고증으로 고려 황도의 전설을 넘어서다
12. 고려청자, 흙으로 빚은'파란 꽃' - 고려비색은 천하제일...오감으로 느끼다
13. '조선탑파의 연구' 조선미술 양식사 탐구 금자탑 - 혼신 다한 고탑연구로 민족 자존심 세우다
14. '조선건축미술사 초고' 젊은 꿈이 세우고자 한 이 땅의 건축미술 -식민사관 맞선 올곧은 신념
15. '조선미술의 줏대'를 세우기 위한 궁리 - "우리 미술은 무기교의 기교요 감각·심리·정서적인 것이로다"
16.『조선미술사』(상)"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힘에 응분해 울려지나니" -한국인 정체성 지켜내다
17.『조선미술사』(하) - 불운한 시대 짧은 생 바쳐 한국미술사 반석 놓다
18.『조선금석학 초고』 드넓은 학문세계, 금석학에 첫걸음 -고대사 밝히는 열쇠...금석학 문을 열다
19.『수상·기행·일기·시』가슴에 묻어둔 문학에 대한 열정- 문학열정 불살라 혼탁한 시대 길잡이로
『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Ⅲhttps://blog.naver.com/ohyh45/221750398831
20.『스승의 길을 따라서』초우(焦雨)황수영(黃壽永)-우현 마지막 지킨 제자,恩師 뜻·업적 책으로기려
21.「급월(汲月)의 교훈을 되새기며」 수묵(樹默) 진홍섭(秦弘燮) -스승 따라 '박물관 사람' 되다
22.「편지를 통해 우현을 만나다」석남(石南)이경성(李慶成)-인생을 바꾼 서신 교류…인천박물관 건립
23. 우현학의 정립을 기다리다 - 연재를 마치며 - 기억에서 역사로 …'홀로 간 그 길'기리고 가꿔야
20. 『스승의 길을 따라서』초우(焦雨) 황수영(黃壽永) - 우현 마지막 지킨 제자
… 恩師 뜻·업적 책으로 기려
▲ 경주 토함산 석굴암에서. 왼쪽 첫번째가 고유섭,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황수영. (1941.4.)
미술사학계 1세대 '개성삼걸' - 부친 권고로 경제학과 입학
우현 사후 본격 미술사 공부 - 유고 정리·출간 핵심적 역할
▲ 개성출신 세친구,
미술사 연구 이끌어한국미술사학계에서는 이른바 '개성삼걸(開城三傑)'이라 하여 후학들이 '황진최'라 일컫는데 이는 황수영·진홍섭·최순우 세 분을 지칭한다. 이 세 분은 한국미술사학계의 제1세대로서 한국미술사 연구를 이끌어 왔고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공교롭게도 세 분 모두 개성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개성삼걸'로 불리고 있다.
이제 세 분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참고로 연배를 살펴보면 최순우(崔淳雨, 1916~1984) 전국립박물관장이 두 살 위이고, 진홍섭(秦弘燮, 1918, 3.8.~2010.11.6.) 전이화여대박물관장과 황수영(黃壽永, 1918.6.10~2011.2.1.) 전 동국대학교총장은 동갑이나 진관장의 생일이 석 달 빠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연배의 순서와는 다르게 '황진최'라 일컫게 된 연유와 언제부터 그렇게 부르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나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한국미술사학회와 한국고고학회의 전신인 고고미술동인회의 창설과 그 후 『고고미술』이라는 동인 학술지의 간행 등에서 황수영, 진홍섭, 김원룡, 최순우 등이 구심점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들을 따르던 2세대 후학들이 자연스럽게 그 과정에서 개성 출신인 세 분을 일러 '개성삼걸'로 지칭하면서 함자의 성씨를 합쳐 부른데서 연유한 것 같다.
특히 황수영과 진홍섭 두 분은 동갑이고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이자 고향인 개성에서 우현(又玄)의 가르침을 받아 선생의 사후에는 전공까지 바꿔 스승의 뒤를 이어 미술사 연구에 진력하는 남다른 인연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 우현이 황수영에게 써 준 글씨
『논어』「爲政(위정)」편의 한 구절 :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배우되 생각하지 아니하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되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롭다)
▲ 인생을 바꾼 우현과의 만남
초우(蕉雨) 황수영은 우현 고유섭 선생의 사후에 그 유고 정리를 맡아 유저(遺著)를 출간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해내었다. 우현 선생과의 첫 만남을 「선사(先師)의 뒤를 따라」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又玄(우현)선생을 개성박물관으로 찾아 선생과의 첫날의 화제도 이 고려청자에 관한 것이었다. 開城府立博物館(개성부립박물관)이 개관된 것이 1930년, 선생이 이곳에 부임하신 것이 그보다 3년 후였다. 그전에도 박물관을 자주 찾았고, 간혹 관장의 모습을 짐작하기는 하였으나 면담을 위하여 선생을 사무실로 찾은 것은 고교시절이었다.
고려청자는 天下(천하)의 名器(명기)로 그 이름이 높았는데 왜 一朝(일조)에 없어졌습니까, 그것은 청기와장(匠)이 그 秘法(비법)을 전수하지 않은 까닭으로 보아야 합니까.이것이 나의 선생에 대한 첫 질문이었다.
선생은 나의 당돌한 첫 질문을 끝까지 들으시고 대답하시기를,
"고려청자는 그같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비법의 전달이란 입장에서 고찰하기보다는 고려자기는 그 당시의 역사와 문화·사회의 입장에서 생각하여야 이해가 이루어질 것이다. 고려청자는 秘法(비법)의 傳受(전수)가 아니 되어서 사라진 것은 아니며, 靑瓷(청자)는 다시 粉靑沙器(분청사기)로서 새롭게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造形(조형)은 역사와 사회의 변천 속에서 고찰하여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시었다. 선생과의 첫 대화가 있은 후 나는 박물관을 찾는 횟수가 거듭되었다.
- <황수영,「선사(先師)의 길을 따라」『韓國史市民講座(한국사시민강좌)』제11집, 1992/
『黃壽永全集(황수영전집)』5, 혜안, 1997. p.446>
초우 선생은 어려서부터 '옛 것을 좋아하는 호고(好古)'의 취향이 있었다고 한다.어린 시절 만월대를 찾아 비 갠 뒤 쉽게 눈에 띄는 청자편 등을 주머니 가득히 넣어 집에 가져갔다가 할머니에게서 꾸중을 들었던 기억, 또는 서울 제이고보(경복고등학교 전신) 3학년 때 경주로 수학여행 가서 황룡사지를 찾아 마을아이들이 직접 파낸 기화 두 점을 주머니를 털어 사 가지고 학교에 둔 일이 자랑스럽게 느끼기도 하였다고 회상한다.
이는 "나의 고향은 고려 오백 년의 고도이어서 나의 호고(好古)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키워주기에 충분하였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 또 개성사람만이 지니는 독특한 정서가 작용했을 것이다.고교에서 대학을 진학할 때 본인은 희랍사(希臘史)를 전공하고 싶어 하였으나 아버지는 고등문관 시험을 치도록 법문학부에 지원할 것을 말씀하시어 결과적으로 경제학부를 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졸업 후에 갈 길을 모색한 끝에 일본 최대의 학술출판사인 이와나미 서전(岩波書店)에서 출판 사무를 배우기로 하였다고 한다. 당시 졸업생은 모두 회사나 은행으로 취업하는데 이와 달리 색다른 지망을 하여 주임교수가 이를 거듭 확인하고 사장인 이와나미 씨를 소개하여 주었다.
소매부 실습을 거쳐 출판부 약2년 간 그 실무를 담당하기도 했는데 이때의 경험이 은사인 우현 선생의 유고 간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44년 봄 동경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시국은 점점 긴박하여 갔는데 직장은 갑자기 구할 수가 없어서 우현 선생은 여러 차례 걱정하여 주었다고 한다.
당시 젊은 나이로 무직자는 가차없이 징용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그런 와중에서도 오랜만에 고향에 머물며 그리고 거의 매일 박물관을 찾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런 연유로 초우 선생은 우현 선생의 마지막을 지켜본 제자가 되었다."지금도 똑똑하게 기억나는 일이다"라며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별세 이주 후에 열린 추도회. (1933.7.)
영전 바로 왼쪽이 진홍섭,그 왼쪽 뒤가 황수영, 영정 오른쪽이 부인 이점옥여사,그 앞이 차녀 병복.
1944년 6월에 들면서 선생은 갑자기 발병하시면서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그 날이 1940년 6월6일이었다. 이 날 아침 나는 일찍 교외인 덕암동(德岩洞) 집을 떠나서 자남산(子男山) 개성박물관에 올라서 선생의 사택을 찾았다. 사무실을 겸하고 있었던 서재에서 선생은 원고를 쓰고 있었다.
나의 내방을 알고는 붓을 멈추면서 "우리 같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각기 의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 환한 마당에 대좌하였다.산상(山上)의 공기는 더욱 맑았고 마당에는 라일락이 피어서 향기가 바람을 타고 다가왔다.개성만하더라도 서울에서 다시 북쪽이며 더욱이 박물관이 산정(山頂) 가까이 있어 라일락의 개화가 이같이 늦은 것일까.
그러나 선생과 대좌한 지 10분이 넘었을까, 선생은 갑자기 잠깐 내실에 다녀오시겠다고 하시면서 자리에 일어났다. 다시 약 10분이 넘어서 내실에서 전갈이 있어 나에게 기다리지 말고 귀가하라는 말씀이 있었다. 이에 앞서 급히 의원을 청하는 전화소리에 선생의 건강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더 머무르지 않고 선생의 말씀에 따라 박물관을 떠난 기억이 새롭다.
이 때 선생은 내실에 들자 각혈하였고 급히 의사를 청하였는데 그 후 꼭 20일 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마지막 병석에서 고생하였던 것이다. 주치의인 박병호(朴秉浩) 씨는 남대문 근처에서 개업하고 있었는데 선생과는 오랫동안 친교를 맺은 사이였다.
그 후 서울로 후퇴하여 개원한 박씨에게 청하여 『고고미술』(5권 6·7호, 1964. 6. 7.)에 글을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선생의 사인을 간경변증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별세 직후 개성 시민 사이에 떠돌던, 선생이 개성소주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은 까닭이 있는 것일까.
일제 말의 시국을 생각할 때 선생이 그 울적한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소주를 과음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병석에서 여러 차례 일본의 패전과 우리의 신생(新生)을 예언하시면서 재기를 염원하신 보람도 없이 그 달 26일 오후 마흔의 짧은 생애를 끝내셨다.너무나 짧은 생애였다.
학문의 연마를 쌓아 바야흐로 그 빛을 이 땅에 발휘하려던 시점에서 더욱이 해방을 눈앞에 두고 홀연히 유명을 달리 하심에 그 비보는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하였다.화장이 끝나 청교면(靑郊面) 수철동(水鐵洞) 묘지에 안장하고, 작은 석비를 세운 다음 나는 8월에 북만(北滿)으로의 길을 택하였다.
- <황수영, 「우현 50주기에 생각나는 일들」『문화사학』창간호,
1994./ 『黃壽永全集』5, 혜안, 1997. p.413>
우현 선생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루었고 화장 후 개풍군 청교면 수철동(水鐵洞)에 묘지를 마련하고 조그만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선생의 유고를 일괄하여 개성 시내 진홍섭 선생댁에 맡겼는데 그 정리를 초우 선생이 맡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우현 선생의 장서는 유족에 의하여 인천으로 옮겼는데 그 후 선생의 장서는 산일되었으나 목록만이 남아 참고가 되었다.
6·25 후 초우 선생이 인천의 고서점에서 우현 선생의 책을 발견하고 그 중 후카다 고산(深田康山)의 『미학전집(美學全集)』 3책을 오늘날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또 동국대의 이동림(李東林) 교수는 도미(渡美) 후 우현 선생의 수택본(手澤本)이라 하여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합본(光文合本) 1책을 초우에게 주었는데 이 책도 함께 인천박물관에 보내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현 선생 별세 직후 박물관 사무실 겸 선생의 서재에서는 선생을 추모하는 모임이 있었다. 선생을 가까이 모시고 따르던 사람과 박물관직원 그리고 유족이 모였다.이 자리에 초우 선생은 장문(長文)의 추도문(追悼文)을 읽었다고 한다.
그 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선생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남기고 가신 아름다운 생애를 본받으며 훌륭한 연구를 밝히는 것이 아닐까요." 초우 선생은 「선사의 길을 따라」에서 "선생에 올린 추도사의 요지는 선생의 생애를 본받으며 선생의 연구를 밝히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날을 고비로 평생의 갈 길을 새롭게 마련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1944년 7월10일이었다"고 적고 있다.
▲ 1944년 우현 고유섭이 제자 황수영에게 써 준 두 점의 글씨 중'大慧普覺禪師語錄(대혜보각선사어록)'
「禪不在靜處 亦不在鬧處 不在日用應緣處 不在思量分別」(선은 고요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시끄러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일상생활 속에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하고 헤아려 분별하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 험난했던 유작 간행의 길
우현의 유고를 정리하여 출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초우 선생은 그 일을 담담하게 적고 있지만 우리는 그 행간에서 참으로 눈물겨운 헌신과 노력을 읽을 수 있고 사제간의 두터운 인연을 깨닫게 된다. 마루 책장에 가득하였던 우현 유고가 1947년 초여름 어느 날 심양에 가택수색을 나온 개성경찰서 형사에 의하여 온 마루 전면에 산란(散亂)되었을 때는 몹시 당황하기도 하였다.
형사들은 우리 집에서 붉은 삐라 같은 인쇄물을 찾고 있었다.그 당시 잠시 고향에서 상업학교 교감으로 있으면서 국사를 맡고 있었는데 교내에서의 학생 대립이 첨예화하면서 좌익학생들의 출입을 빙자하여 나를 밀고한 듯하였다. 나는 그때 집을 찾는 학생을 구별한 일도 없었고 교실에서는 자유인에 대한 말도 하였다.
- <황수영, 「우현 50주기에 생각나는 일들」『문화사학』창간호, 1994.
/『黃壽永全集』5, 혜안, 1997. p.414>
그 후 선생의 유고 정리가 다시 진행되어서 서울신문사에서 유고 제2책으로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이 나올 때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워서 나는 선생의 유고정리를 5주기까지로 예고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었으니 6·25가 발발하였다.
그리하여 1·4후퇴 때 수원 신갈까지 피난 우차(牛車) 짐 속에 선생의 유고가 들어 있었다.이 선생의 유고는 그 후 다시 부산까지 후송되어서 전쟁의 재난을 모면할 수 있었는데 그 일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러나 선생 유고의 정리는 전화(戰禍)가 그치고 서울 수복 후에도 다시 수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황수영, 「우현 50주기에 생각나는 일들」『문화사학』창간호, 1994./『黃壽永全集』5, 혜안, 1997.p.415>
지난 반세기 동안 우현 유고의 정리를 담당하였고 이제 본인이 노년에 이르러 그 책무를 벗게 되었다. 생각하니 감개가 또한 무량하다. 그러나 선생의 유고가 이제 새로운 자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 활용은 금후의 문제로 남았으니 선생이 일찍이 초석을 놓았던 우리 미술사 연구의 길은 아직도 멀고 또 험난하다.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그 연찬의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위 책, p.417>
[출처] : 이기선 미술사학자 : <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 - 20. 『스승의 길을 따라서』초우(焦雨) 황수영(黃壽永) - 우현 마지막 지킨 제자 … 恩師 뜻·업적 책으로 기려 / 인천일보, 2013, 11. 26.
21. 「급월(汲月)의 교훈을 되새기며」수묵(樹默) 진홍섭(秦弘燮)
- 삶의 갈림길서 만난 스승 따라 '박물관 사람' 되다
진홍섭 유영
개성 부유한 지주 아들로 태어나 - 황수영 등 친구와 함께 일본 유학
고향 박물관서 우현과 만남 계기- 광복 후 개성·경주박물관장 지내
미술동인회 결성 '고고미술' 창간 - 20년간 梨大 교수·박물관장 역임
▲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 '방황과 집착의 연속'
수묵(樹默) 진홍섭(秦弘燮, 1918~2010)은 우현 고유섭 선생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수묵은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가 책임편집을 맡아 발행하는 『한국사시민강좌』라는 학술잡지에서 '연구생활의 회고'라는 주제의 원고 청탁을 받고 「급월(汲月)의 교훈을 새기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바 있다.
수묵 선생은 그 글에서 "順航(순항)과 逆境(역경)의 교차, 彷徨(방황)과 執着(집착)의 연속의 역정"이라고 자신의 인생역정을 표현하고 있다. 즉 몇 번의 인생의 갈림길에서 타의(他意)와 자의(自意)에 의해 삶을 선택하고 방황하였지만 끝내 스승인 '급월(汲月; 우현의 또 다른 아호)의 교훈을 되새기며' 미술사학자로서 그리고 교육자이며 '박물관 사람'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수묵은 개성의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은 매우 유복하였다.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1918년에 개성 동행랑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의 귀한 아들로 태어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개성시가는 남대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간선도로가 뚫리고 그중 북방으로 뚫린 길은 송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궁전자리인 만월대까지 이르는데, 이 도로 좌우에 상가가 형성되고 대로 뒤에 이와 평행되는 뒷골목이 있어 이곳은 주택가이다.
이 동·서의 뒷골목이 고려 때에 세웠다는 시가장랑의 흔적인 듯 동행랑·서행랑이라고 불러온다. 어려서는 제법 총기가 있다고 하여 탁자 위에 올려세우고 "사람은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크다는 것은 전주와 같이 키가 크다는 말이 아닙니다"라고 말을 가르쳐 몇 번이고 되풀이 시키던 기억이 난다.
<『韓國史市民講座(한국사시민강좌)』13집, 1993, 일조각, p.135>
그런데 수묵의 회고에 의하면 인생에서 몇 번의 갈림길을 만났는데, 그 첫 번째 갈림길은 중학 진학이었다고 한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가고 싶은 사람은 선택의 길이 두 가지 있었으니, 하나는 서울로 유학하는 길이고 하나는 개성에 있는 두 중학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길이었다.
1930년 당시 개성에는 중학교가 둘 있었으니, 하나는 사학의 명문인 송도고등보통학교(휴전 후 인천에서 개교)와 관립인 개성공립상업학교였다. 송도고는 조선인을 위하여 설립되어 쟁쟁한 교사들이 있었고(광복 후에 대학교 교수가 된 분이 많았다),
상업학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공학하는 학교일 뿐 아니라 교사들도 조선인은 붓글씨와 주산을 가르치던 단 한 사람뿐이었다. 따라서 이 두 학교의 성격과 체질이 상반되어 학생들의 기질, 졸업생의 동향이 전혀 달랐다.
이 두 중학교를 놓고 개성 사람들은 상업학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으니, 상업을 가르치는 학교라는 점과 졸업후에 취직하는데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하였던 것이다.나의 진로는 상업학교로 정해졌다.
서울로 유학 가는 졸업생이 몇 사람 있었고 나의 성적이 서울의 중학교 시험에 합격하기에는 충분하였으나 또 한 번 작용한 것이 '저 어린 것을'이라는 모성애였다. <같은 글, p.136>
▲ 개성 만월대에서. 왼쪽부터 전재규, 고유섭, 진홍섭, 박민종(1930~1940년대).
수묵은 5년간의 중학교 시절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그야말로 무위도식의 세월이었다. 안정된 생활에 안주하는 지주계급의 생활에 젖어서 견문을 넓히거나 자극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는 좁은 세계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 이유가 '상업학교'에서의 과정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으나, 그렇다고 깨닫고 자기의 갈 길을 찾을 용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고 진술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유학간 친구 황수영·박민종과는 "봉투에 3전짜리 우표를 붙일 자리가 모자라도록 두꺼운 편지를 주고 받기도 하고 방학이면 어울려 다니곤 하였다"고 한다.
특히 박민종(서울대 음대 교수로 정년)은 바이올린 공부에 열중하여 동아일보 주최 콩쿨대회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수재여서 그의 영향을 받아 클래식 음악의 레코드를 사서 당시로는 사치품에 속했던 '전기 축음기'로 듣기도 하고 급기야는 기타를 배우고 방학 때면 박민종과 집안에서 합주·독주 등의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하였다고 한다.
수묵은 "이러한 일들이 정상적인 학업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고 오히려 방해의 원인 되어 지금 돌이켜 보면 완전히 나태와 방황의 세월이었음에 틀림없었다"고 적고 있지만 이러한 그의 정서함양이나 예술적 기질은 나중에 미술사를 연구하면서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수묵의 인생에서 두 번째 갈림길은 일본유학이었다. "이때 서울로 유학갔던 황수영·박민종은 일본으로 유학 가기로 결심을 하고 있던 터라 이번에는 나도 이 대열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심정이 간절하였다. 이 의사를 비쳤더니 세 번째로 '저 어린 것을'의 심정으로 거절당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결단을 내려 일본유학을 가게 되었다.그런데 대학 재학 중에 아버지가 별세하게 되어 또 한 번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즉 학업을 계속하여 끝을 맺느냐 아니면 포기하고 재산관리를 하느냐는 갈림길이었다.이때 현명한 결단을 내려준 이는 어머니였다.
수묵은 일본 유학 생활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나 눈앞에는 갑자기 넓은 시야가 전개되었으니, 그들 본토의 문화는 식민지였던 한반도와는 전혀 달랐고 그들이 조선인 학생을 보는 시각은 고향에서의 감시의 눈과는 전혀 다른 반외국인을 보는 것 같았다.
비로소 나와 고향, 나아가서는 '우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느낌이었다. 중학교까지의 교육에서 '우리'의 역사에 접하지 못했던 과거에 생각이 미쳤을 때, 정의가 무엇이며, 사회가 무엇이며, 문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차원이 다른 방황이 시작되었다.
사회학·사회정책 같은 책을 탐독하던 까닭도 그 때문이었던 듯하다.이와 같이 일본 유학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해 주었고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었다. 일본인들에게 지지 않으려는 소박한 생각과 함께 우리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였다.방학 때 고향에 돌아오면 가까이 곳에 있는 유적으로 소풍을 다니기도 하고 박물관을 찾기도 하였다. <같은 글, p.138>
▲ (위 사진) 개성분관은 광복 이후 6·25전쟁 전까지 고려청자의 보금자리였다. 1947년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이 되기 전 개성부립박물관의 전경.(아래) 1952년 국립박물관의 부산 피란 시절 회의 모습. 왼쪽이 진홍섭. 왼쪽에서 세 번째가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네 번째가 고고미술가 임천, 가운데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인물이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고고학자 김원룡(1922~1993).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 우현과 만남 … 미술사 연구 필요성 느껴
수묵은 그 무렵 그의 인생의 영원한 스승이 되는 우현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개성부립박물관장이던 우현 고유섭 선생을 뵙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방학 때면 고향에 돌아와 황수영·장형식과 함께 자주 박물관에 놀러가곤 하였다.우현선생에게서 강의를 들은 바는 없으나 같이 유적을 답사하면서 또는 박물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받은 감명은 매우 컸다.
미술사라는 학문이 어떤 것인지 미처 알기도 전이고 그저 옛것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던 때였던 만큼 선생의 언행에는 모두 깊은 뜻이 있었으련만 그때는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의 관심이 그쪽으로 기울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아주 그쪽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학문이란 어떤 것이며 미술사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면서부터 선생의 언행에서 큰 감명을 느끼게 되었다.
… 언제가 들려주시던 선생의 雅號(아호)인 汲月堂(급월당)의 汲月의 뜻과 아울러 학문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원숭이가 못 가운데 비친 달을 길으려 밤새고 물을 떠올렸으나 날이 새어도 달은 여전히 못 속에 있더라는 급월우화는 이태백의 '捉月(착월)'과는 다른 학문의 심원함을 암시하는 내용이고, 이것을 아호로 삼은 선생의 학문에 대한 외경과 아울러 정진의 심정을 깊이 삭일 수 있었다.
이렇게 받은 일련의 충격과 자극은 지금도 잊을 수 없으며 자신이 걸어온 연구의 자취를 돌아볼 때마다 더욱 새로워져서 필생의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같은 글, p.139~140>
▲ 집고관 경주박물관(現 경주문화원)
▲'영원한 박물관인' 제1회 박물관인 상 수상
수묵은 영원한 박물관인이라 칭송되고 있다. 광복 후 개성박물관장을 시작으로 경주박물관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겸 박물관장을 역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국박물관협회에서 이를 기려 제1회 박물관인 상을 수묵 선생에게 수여하였다.
개성박물관장 시절과 6·26동란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같이 있던 최순우는 서울로 떠나고 얼마 안 있어 동란이 터졌다.6월25일 나는 서울에 있었는데 금족령 때문에 1개월 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내려가 보니 선생이 애써 장만하였던 지적도를 비롯한 각종 도면은 휴지쪽같이 산란되어 있었으나 진열실 안은 무사하였다.
높은 곳에 위치하였던 관계로 항상 미군항공기 감시비행의 공포 속에서 지냈고 급기야는 관사 근처 지하에 잔여 소장품을 매장하고 박물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1951년 1월 모든 것을 버리고 남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사건은 나의 인생에 또 한 번의 갈림길이 되었다.
영등포에서 강화로, 인천으로, 공주로, 목포로 몇 번이고 死線(사선)을 넘어 부산에 다다랐고, 몇 번이고 강화를 왕래하여 송악산을 바라보면서 실의를 달랬다.유물상자로 칸막이를 한 부산 광복동 약창고의 사무실에 기거하면서 매일 같이 남포동 부둣가 곰장어 굽는 냄새를 맡으며 헤매던 처절하던 시절은 그저 악몽으로 돌리기는 너무도 처절한 하루하루였다. <같은 책, p.142>
수묵은 경주박물관장 시절을 "경주에서의 생활은 큰 자극제가 되어 피상적인 흥미의 영역에 머물렀던 나의 미술사 연구에 확실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그 동안 접한 그 많은 고대미술의 정수들은 나로 하여금 그 길로의 정진을 하게 한 귀중한 촉진제가 되었다"고 회고 한 바 있다.
1953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당시 경주박물관에서는 성덕대왕신종, 집고관과 정원의 석조유물 그리고 목조 진열실의 토기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경주박물관의 상징인 신라금관은 미국으로 소개하여 금관실은 비어 있었다.
더러 관람객이 있기는 하였으나 금관이 없음을 알고 관람료를 돌려달라는 일까지 있었다.궁여지책으로 금관총 출토 금관의 모조품을 만들어 허술한 진열장 때문에 진열하지 못했던 몇 개의 금귀고리를 금관고에 진열하였다. 그것으로 한 때의 박물관 체면을 유지하였으나 그로 해서 모조금관을 비롯한 금제품 도난사건이 일어나 박물관은 한 때 문을 닫았고 직원들은 오랫동안 고초를 받았다.
신라 때 금관의 성분은 지금의 것과 달라서 금관을 부셔서 다른 물건으로 만든다 해도 곧 알게 된다고 신문에 냈더니, 뒤에 안 일이지만 금관을 들고 기차를 기다리면서 경주역에서 신문을 보니 그러한 내용이 실려 있어 서천의 모래 속에 묻었던 것이 노출되어 도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부임하자마자 고초를 겪었다. 이러한 상황이라서 관람객의 수가 많은 것은 아니고 별로 바쁜 일도 없었다.<같은 책 p.148>
그 무렵 수묵 선생에게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하나는 1957년부터 2년에 걸쳐 있었던 우리 문화재의 미국순회전시에 그 관리자로 김원룡과 함께 1958년부터 1년간 미국에 체류하였던 일이며, 그 기간 동안에 미국내 주요 박물관을 1개월에 걸쳐 견학할 수 있었던 일이다.
이로 해서 유물의 보관전시는 물론, 유물을 통한 연구 등을 비롯한 방대한 수집품을 통해 세계의 고대미술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고고미술동인회(考古美術同人會)의 결성이었다.1960년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과 함께 몇몇 동인(同人)이 발기하여 동인회를 결성하고 8월15일 광복일을 기하여 동인지 『考古美術(고고미술)』을 월간으로 창간하였다.
▲ 이화여대 박물관 전경
▲ "박물관 중심 20년 교수생활, 보람있는 시기"
1963년부터 1983년까지 이화여대 교수 겸 박물관장을 역임한 수묵은 "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20년간의 이대 교수생활은 나의 일생에서 인대깊었던 시기의 한 토막이었고 또한 보람있는 시기였다고 생각된다"고 회고 한 바 있다.
학생 때부터 官吏(관리)는 되지 말자고 서로 다짐하였고 개성과 경주의 박물관장 때도 학도로 자처했지 '관리'의 의식이 전혀 없었는데 이때의 문화재과장은 '문화재에 지식을 가진 행정관리' 행세를 해야 하는 자리였다. 매우 주저하였으나 주위에서 문화재 관리가 독자적으로 수행되는 출발점이니 그 기초를 닦아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권고를 따라 1년간령 기한부로 취임을 수락하였다.
먼저 이 부서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의 문화재에 관한 기록을 영구히 남길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개개의 문화재에 관한 사소한 변동이라도 일일이 기록하는 제도를 만들어 산일된 기록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불과 수개월 후에 5·16이 일어나고 국장에는 현역 대령이 취임하였으며 감사는 강화되었다.관료기질이 몸에 선 나에게 군대식 근무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급기야 문화재과의 소관 사무였던 창경원 동물원의 1일 사료 비용이 얼마인가를 묻는 감찰원의 질문에 답변을 못한 탓으로 권고사직의 판정이 내렸다.
마침 이때 이화여대 박물관의 심형구 관장의 불의의 별세로 관장이 공석으로 있어서 김옥길 총장의 특별배려로 부교수로 채용되어 방황의 시간이 끝났다. <같은 책, p.146>
▲ 경주 남산 탑동 식혜골에서 출토된 남산신성비(제1비).
진홍섭 선생은 남산산성비의 수가 대략 200개 가까이 될 것이라는 견해를 발표하기도 했다.
[출처] : 이기선 미술사학자 : <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 - 21. 「급월(汲月)의 교훈을 되새기며」수묵(樹默) 진홍섭(秦弘燮) - 삶의 갈림길서 만난 스승 따라 '박물관 사람' 되다 / 인천일보, 2013, 12. 3.
[출처] 『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Ⅲ - 우현의 후학 ①황수영(焦雨 黃壽永),②진홍섭(樹默 秦弘燮),③이경성(石南 李慶成),④우현학의 정립|작성자 ohyh45
『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Ⅲ - 우현의 후학 ①황수영(焦雨 黃壽永),②진홍섭(樹默 秦弘燮),③이경성(石南 李慶成),④우현학의 정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