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게시판에 주신 '입자인동시파동'님 질문에 대한 답변이 길어져 불가피하게 이곳에 답변을 게재해 봅니다.
Q1) 단일의식은 왜 이런 자각과 자변을 하는 것입니까?
Ans1) 단일의식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체험해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단일의식은 이원성으로의 자변이 없이는 홀로 체험해 볼 방도가 없습니다.
자변을 통해 다양한 자기수단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사랑을 체험하고 자각합니다.
인간도 삼라만상도 단일의식이 쓰는 천백억 화신 수단 중 일부분입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 「알파와 오메가, 영원을 문답하다」를 참조하시면 도움 됩니다.
- 관련 링크: https://cafe.daum.net/beyonddeath/rfJP/137
Q2) 단일의식은 언제, 어떻게 나타났으며, 그 존재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Ans2) 언제 어떻게 나타나려면 단일의식이 어떤 대상이어야 하는데,
단일의식은 상대적 주객관을 통해 알 수 있는 대상이나 객체가 아닙니다.
단지불회(但知不會), 단지 만날 수 없지만 늘 우리와 잠시도 떨어진 적이 없는 것이
단일의식이라고 보조스님은 가리켜주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관점에서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궁굼 해 합니다.
그러나 단일의식은 스스로 있는 것이기에 인간의 이유와 목적은 그저 인간 차원의 질문일 뿐입니다.
단일의식은 인간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목적이 있을까요?
그냥 인간이란 모습의 걸작품으로도 사랑을 체험(자기자각)해 볼 뿐입니다.
실은 걸작품은 인간만이 걸작품인 것도 아니지요.
모든 유무형의 천백억 모습이 다 걸작품입니다.
우리 인간 개개인이 태어날 때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슴과도 같습니다.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니 이런 저런 이유와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 매진한 뿐이지요.
그리고 최초의 목적과 이유라는 것도 상황 따라 수시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가졌던 이유와 목적은 이유와 목적이 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이유와 목적은 정의 내릴 수 없는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선을 위해 남을 위해 살려고 거룩해 보이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단지 살다보니 그런 사랑을 베푸는 일이 자신에게 더 가치있게 다가오니 행하는 것 뿐이죠.
신을 섬기려 태어난 것도 아니며, 태어나 종교라는 것을 알게 되니 신의 경배라는 것도 생각해 보고
가치를 둔 사람은 특정 종교에 귀의 하는 것 아닌지요?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있었다면 이미 명문화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되어보기 위함이다’ 라는 말도 있는데,
정답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말이 존재이유 없다고 말 하는 것 보다는,
조금 접근한 답변이 될 수 있겠다 싶네요.
Q3) 선악, 도덕, 윤리를 따라야 합니까?
Ans3) 선악 도덕 윤리를 따라야 할 당위성은 없어 보입니다.
단지 선악 도덕 윤리를 무시했을 경우, 그것으로 인한 사회의 무질서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당장 고통을 당하는 것은 사람들이니까, 안전과 질서를 원하는 시람들이 최소한의 규제를
두고 규제 안에서 자유롭고 싶었던 마음에서 법 제정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단일의식은 인간의 법이 민주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걸 관여하고 싶은 것은 인간들 뿐이죠.
당장 공산주의로 들어가 개인의 자유가 훼손 당하면 싫으니까 민주주의를 찬성하는 것
뿐이고, 그래도 공산주의가 있는 것은 그 일반 사람들은 아니라는 속에서도 자신은
더 큰 남들의 자유까지 빼앗가 가며 누리는 자들이 있기에 그런 자들은 공산주의가
좋다고 할 것입니다.
개인의 상황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인식되지만,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은 없습니다
(가치중립). 단지 우리는 어려서부터 선악 도덕 윤리는 기본으로 꼭 지켜야하는
불문율로 세뇌되어 왔기에, 그것이 조금이라도 훼손하면 나쁜 일을 범하는 것으로 느끼기에,
자신이 먼저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준수하고, 지키지 않는 타인에 대해
그러면 반칙이라고 지적 할 수 있는거죠.
사람들 중에는 남들보다 더 안전에 민감하고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유형이 있게 되는데,
그런 유형들은 특히나 선악, 도덕, 윤리를 무척이나 중시하죠.
왜냐하면 그것이 흩트러지면 남들보다 더 큰 스트레스나 패닉에 빠지는
자신이 두렵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더 이상 선악, 도덕, 윤리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해 보기도 전에
거의 황금율로 단숨에 받아들이는 경향이 크죠. 너무도 옳아 보이니까.
그러나 인간 성향에 따라서는 그런 도덕 선악 윤리가 양심에 따라 상황에 맞게 행해지면
되는것이지, 심한 규제나 속박으로 까지 느껴지곤 하는 자유로움을 중시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싶습니다.
결국 선악, 도덕, 윤리를 바라보는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서도 선악, 도덕, 윤리의 필요성에
대한 비중은 많은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어디까지나 인간적 차원의 이야기를 터치해 보는 것이구요.
그러나 전체가 한 몸통이 되어 극히 일부분인 인간 차원을 떠나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
단일의식의 관점에서는 꼭 도덕 윤리를 따라야 한다고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Q4) 만일, 세상살이, 특히 정치를 향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실제적 삶에서 선택, 행동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Ans4)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으면 소위 무정부 상태가 되어, 그 사회가 엉망이 될 것이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각자 자신이 하는 것은 선이며 옳고 자유라고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유리한
고지를 위해 미쳐 날뛰듯 할 것이라는 상상이 머리 속에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늘 균형이라는 게 작동하기에 한 동안은 어수선해 보여도 또 그 잠시 어수선한
가운데 뭔가 균형점을 동시에 찾아간다는 점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도 천둥 번개에 태풍이 몰아칠 때는 언제까지나 거세게 몰아칠 것 같아 겁을 주지만,
자연스레 기압골이 바뀌면서 거센 바람은 잔잔해 지면서 이내 균형점을 찾아갑니다.
인간들도 그런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 언제까지나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한
약탈과 방화가 계속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정교한 법이 없는 미개한 시절에도 법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남에게 해악을 끼쳐 살벌하기만 한 시회가 형성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오지의 주민들은 우리 같은 정교한 법이 없이도
개략적인 큰 규율 몇 개를 정해 놓고 그 속에서 자유를 구가하며
서로 협력하고 잘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본주의의 화려한 문명과는 거리가 멀게 살지만, 법이 허술해 보여도
나름 균형을 유지하며 행복하게 잘 산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개인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이 연기자임을 모르고 배역인 자신이 연극의 진정한
주체라는 착각하고 사는 한, 아무리 법을 제정하고 도덕 윤리를 강화해도
시시비비를 가리며 그것들이 내 뜻대로 흘러가주지 않을 때마다
고통과 공포를 느끼며 살 수 밖에 없는 게 우리의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면하고 자유롭고 평화스럽게 안심하며 살 수 있는 길은 우리 본래의 모습인
자신이 단일의식임을 회복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주객이 없어 임시적이고 가상이며 너나가 없는 하나의 단일의식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면,
즉 개인적 동기가 희박해지면 인간 세상이 저절로 조용해지는 것이지요.
지금도 자연은 조용하게 잘 돌아가는데, 자연의 일부인 인간들만이 뭔가 시끄럽고
요구하는 것도 많은 경향이 크죠.
다른 동식물은 죽음을 순리로 받아들이는데, 인간은 수명연장을 해 보겠다고 별별연구를
다하고 아우성 치고 있습니다.
죽음도 단일의식이 벌이는 생명 축제의 일환임을 안다면,
그리고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죽음은 일종의 트릭과 같은 것임을 안다면,
인간도 다른 자연들처럼 좀 더 조용해 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라는 매뉴얼을 잘못알고 있기에 잘못 된 것이 인류전체에게 습관화 되어서(同分妄見)
머리 복잡한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인간 개개인이 주체가 아닐 뿐 아니라,
행위자 이지도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깊은 이해도 하고 보면
행동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말을 스스로 다시 재고해보게 될 것입니다.
기준을 정한다는 것은 개개인이나 개인이 모인 집단 차원에서의 요구사항이기에
가상 주체, 무아의 입장에서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 되는 것이기에 기준 아닌 기준은
필요에 따라 임시 가설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단일의식에 대한 깊은 이해는 우리가 정말 알고 싶어하는 더 많은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조목조목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돌아가고 우리가 뒤집혀진 생각을 안고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지 낱낱이 파헤쳐 주고 있습니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신선한 주제들의 만남에 놀라실 것입니다.
부디 시간을 내어 쌓여진 동영상 강독을 과거의 것부터 시간을 가지고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밥통 스피커님의 아래 글 참조링크가 답변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대의 비밀지혜 그리고 돈, 권력, 정의(Justice): https://cafe.daum.net/beyonddeath/qSI3/87
부실한 답변이지만 일부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첫댓글 은하수 님께서 친절하게 막내의 동분망견까지 가치 중립과 무유 정법으로 일일이 바로잡아주시고 <꿈이로다>, <황성 옛터> 등 훌륭한 노래들을 부지런히 올려주셔 이래저래 수제자 님의 덕을 많이 보고 있네요^^ 4개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모두 큰 영감을 받았어요. 마지막에 올린 사부 님 글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좋은 준비 작업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