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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글 올립니다.
침착하게 사랑하기 / 차도하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2020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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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뽑은 서효인 시인은 심사평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소 작은 세계를 말하려는 듯한 제목과는 달리 쉬이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용기가 돋보였다. 천진해 보이는 어투가 단단한 세계를 뒷받침하고, 너른 시선이 가벼운 문체를 단속했다. 이 같은 특성을 묶어 범박하게도 ‘새로움’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리라. 무엇보다 기성 시인 누구도 쉽게 떠올릴 수 없게 한 개성의 충만함이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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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형의 작품을 볼 때마다 저는 생각합니다. 시를 꼭 길게 쓸 필요는 없구나, 하고 말이죠. 전에 올린 팁글에서 지금의 문예지가 장시로 가는 추세라고 했고, 장시도 분명 그만의 매력이 있겠지만, 이런 작품을 보면 확실히 시는 분량으로 승부할 건 아닌 듯합니다. 즉, 시적 긴장감을 얼마나 끝까지 잘 유지하느냐에 달린 것 같네요. 그때 호흡이 길면 장시가 되는 거고, 이번 작품처럼 짧으면 단시가 되는 거겠죠.
우선 이 작품이 심사자의 시선을 끈 이유는 역시나 제목입니다. 지난날 소개했던 박형권 시인의 '쓸쓸함의 비결'처럼 시쳇말로 이 작품 역시 제목에서 반쯤은 먹고 들어갑니다. '침착하게'와 '사랑하기'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네요. 이런 거 보면 앞으로 제목을 정할 때 거듭 고심해야겠습니다. 이 시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잘 읽힌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60%쯤은 확실히 알겠는데 나머지 3~40%는 애매하게 안다는 거겠죠. 이 애매한 게 늘 문젭니다.ㅎ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난해한 애매함이 아니라 좀 알 것 같은 애매함이죠. 그렇지 않나요?
솔직히 저도 제목 외에 어떤 점이 끌리는가 싶어 거듭 읽었지만, 딱히 이것 때문이라고 할만한 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심사평에서처럼 천진해 보이는 어투가 단단한 세계를 뒷받침한다거나, 너른 시선이 가벼운 문체를 단속했다는 평은 아주 그럴듯한 말입니다. 가벼운 문체로 천진하게 말해가는 대화체가 등장하지만,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인 '신'을 말하고 있거든요. 그리곤 신을 부정하죠. 그래서일까요. 저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잘못된 믿음으로 기독교를 욕보였던 그간의 행위가 떠올랐답니다. 뭐 굳이 특정 종교뿐이겠습니까? 신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모든 것일 겁니다.
시를 해석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고, 정답도 없지만, 그래도 이번처럼 막연하지만, 몽실몽실하게 잡히는 감정이 있다면 한 번쯤 해석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다음에 이런 유사한 시를 만났을 때 오늘처럼 텍스트적인 해석이 도움 될 테니까요. 그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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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믿고, 친구를 믿고, 가족을 믿고, 이 사회를 믿는 화자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우리는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거고요. 1연에서부터 화자는 이미 멍든 몸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죠. 그러니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상태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러자 화자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믿음의 대상인 신(이웃, 친구, 가족, 사회 등등)이 신앙(가르침)으로 설명하기(위로하기) 위해 화자의 손을 잡고 강변을 걷습니다. 그런데 화자는 물비린내를 싫어합니다. 화자를 잘 아는 신이라면서 그것도 모르고 손을 잡고 강변을 걷는 것부터가 뭔가 잘못됐습니다.
2연에서 신은 온갖 좋은 말로 화자를 위로합니다. 위로라기보다는 뭐랄까요... 천사에 대해, 천사의 미소에 대해 의례적인 말을 하죠. 예를 들면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을 겪은 여자가 남친에게 공감해달라고 투정을 부렸는데 남자가 입바른 소릴 한달까요. 그때 마침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옵니다.
3연에서 화자가 신에게 묻습니다.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는데 그렇다면 당신도 손을 잡은 저 연인들처럼 나를 그렇게 사랑하냐고요. 그러자 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마치 남친이 여친의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너도 잘한 건 없어, 라고 말하며 모든 만물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식이죠. 그러니 여자와 남자는 다툴 게 뻔합니다. 4연에서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고요.
5연부터는 아예 신을 남친(애인)이라고 가정하고 말해보죠. 왜 공감해 주지 않냐고 화를 내는 여친에게 남자는 침착하게 말합니다. 사랑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과는 별개니까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여친은 당연히 남자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 강변을 걷죠. 그리곤 강에 어둠이 내려앉더니 이내 무거운 천처럼 보입니다.
핵심적인 연은 바로 6연입니다. 무거운 천으로 바뀐 강은 화자의 멍든 마음을 전혀 위로하지 않죠. 오히려 멍은 들지 않겠지만, 화자를 더욱 아프게만 합니다. 차라리 멍으로 보이기라도 하면 그나마 나을 텐데, 보이지도 않으면서 아프기만 하다는 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속으로 드는 골병을 말합니다. 그리고 7연에서 결론 내립니다. 처음부터 화자를 진심으로 위로하는 존재는 없었다고요. 진실한 관계인 연인들이 멀어지자, 화자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화자가 믿고 싶었던 대상들이 오히려 화자를 나무랍니다.
그러니 침착하게 사랑하기는 우리 사회의 어떤 허위의식을 드러낸 제목이 아닐까 싶네요. 말로는 지성인답게 객관적이고 침착하다지만, 알고 보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알맹이 없는 사랑인 거죠. 어느 누가 사랑 앞에서 침착할 수 있을까요? 혹시 모르겠군요. AI 기술이 더 발달하여 로봇과도 사랑이 가능하다면 로봇이야말로 침착하게 사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로봇에게 우리는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할 겁니다. 시에서의 화자처럼.
이제 다시 심사평을 읽어봅시다. 다소 작은 세계를 말하려는 듯한 제목과는 달리 쉬이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용기가 돋보였다. 천진해 보이는 어투가 단단한 세계를 뒷받침하고, 너른 시선이 가벼운 문체를 단속했다. 이 같은 특성을 묶어 범박하게도 ‘새로움’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리라.
제목만 봐서는 사랑에 관한 작은 이야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관계론적 자아의 성찰이나 치유 같은 꽤나 큰 주제를 말하고 있었네요. 무거운 주제일수록 가벼운 문체로 가볍게 말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거, 저도 이번에 다시 배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시를 쓸 때 어깨에 힘 빼고 가볍게, 수필 쓰듯이 써놓고, 곁가지를 줄여가듯이 퇴고해 보면 어떨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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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하 시인, 그녀가 지금 살아 있다면 얼마나 많은 작품을 썼을까요. 그녀는 등단 후 2년이 지나 산문집을 한 권 내고서 작년 시월 향년 24세의 나이로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 출판사 '봄날의책'에 60여 편의 시를 투고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세상을 떠났는데 올해 초에 그녀의 유고 시집 『미래의 손』이 나왔더군요. 시집을 여는 첫 시는 <입국심사>인데 그녀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지금 입국심사를 마치고 천국에 있을 겁니다. 거기서도 시를 아주 많이 쓰고 있을 겁니다. 다만, 그녀가 처음 낸 산문집인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의 리뷰를 읽어보면 감당하기 힘든 솔직한 고백으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법에 무지몽매한 아버지, 폭력으로 점철된 유년, 동성연애를 향한 무심한 비난, 죽음을 결심한 어떤 밤의 기억…. 그녀의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산문집에서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겠다"고 적은 소개말로 미루어 보면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지나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그녀는 떠나고 없지만, 그녀의 블로그는 여전히 남았습니다. 사망일 5일 전인 작년 10월 17일까지의 기록 10개의 글이 있더군요. 몸이 아프다거나 병에 관한 글이 보이지 않아서 더 안타까웠습니다. https://blog.naver.com/review_-_
오늘 새벽 늦게까지 블루홀에 관한 영상을 찾아봤습니다. 블루홀은 쉽게 말하자면 바다의 싱크홀이라고 보면 되는데요. 지름과 깊이가 어마어마하더군요. 아래 영상은 물속에서 다시 한번 다이빙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블루홀로 들어가는 프리 다이버의 영상입니다. 프리 다이버는 아무런 장비 없이 몸과 정신력으로만 수중 50m, 100m를 잠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참고로, 프리 다이버의 성지로 알려진 이집트의 다합 블루홀은 주변에 다이버들의 묘지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더군요. 블루홀은 그만큼 정복욕을 자극하는 동시에 두려운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글을 전업으로 쓰는 일 역시도 때로는 두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skWqzvaL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