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 말 한낮의 바람이지만 아직 차갑다. 아내와 함께했던 ‘제2회 팔공산 달빛걷기대회’ 30km 종목의 코스를 따라 드라이브한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시간이 나면 돌아보는 코스인데 아직 삭막하다. 차에서 내려 양지바른 곳의 나뭇가지를 자세히 본다.
“싹눈이 나왔을까?” 아직 보이지 않지만 줄기의 색은 변하고 있다.
팔공산 순환도로 가로수길은 단풍나무와 벚나무가 주류를 이룬다. 봄에는 벚꽃비를 내려 행복한 세상의 주인공을 탄생시키고 여름엔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의 안식처가 된다. “대구의 가을은 팔공산에서 시작한다.”라는 말과 같이 뜨거웠던 기억을 단풍으로 물들이고 겨울은 눈꽃을 피우며 사람들의 느린 걸음을 유혹한다.
이월 말의 팔공산 순환도로는 걷는 사람이나 운행차량이 드물어 자신을 돌아보고 예고 없이 불어올 봄바람을 생각하기엔 안성맞춤이다.
그해 이월은 눈이 많이 내렸다. 위병소 PX엔 온통 하얀색의 그녀가 서 있었다. 하얀 털모자와 벙어리장갑, 흰 바지에 하얀 신발을 신고 그림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뭘 먹을래?”
“따끈한 우유”
면회로 인한 8시간의 외출이 허락되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라만 보던 세상 또한 하얀색이다. 눈꽃으로 피어난 가로수를 따라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모교로 갔다. 모든 것을 덮어버린 백색의 캠퍼스를 걸으며 안부를 묻는다. 만나지 못한 시간 탓인지 서먹서먹하고 할 이야기도 많지 않다. 잔디밭이 눈밭이다. 소담스러운 눈침대에 누워 본다.
“면회는 왜?”
“그냥 오고 싶어서”
유성의 커피집에서도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오만한 생각들이 대화를 가로막았는지도 모른다.
그녀와는 대전에 있는 서점에서 두고 간 지갑을 인연으로 만났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그녀는 생머리에 미소가 고왔다. 그녀 덕분에 시내에 자주 나가 홍명상가와 중앙대파트를 누비며 음악감상실과 서점을 찾곤 했다. "즐거움은 짧고 아쉬움은 길다"라는 말과 같이 군입대 전에 그녀의 집안 사정으로 만남을 계속할 수 없었다.
가슴 한구석에 안개처럼 스며있던 그녀를 보내고 돌아온 군부대의 길은 검은 아스팔트 길로 변해 있었다.
복학 후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하얀색 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생머리에 활짝 웃는 모습도 그대로였다. 그동안의 서먹한 관계를 떨쳐버리려 노력했지만, 이야기할수록 현재 상황을 되돌리기엔 서로에게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절친과 함께 천안에 왔다가 천안역 앞 커피숍에서 말없이 돌아선 그녀의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세월이 흘러 벙어리장갑란 용어를 손모아장갑으로 바꾸자는 캠페인 속에서 하얀 벙어리장갑을 낀 그녀의 모습을 찾아보기도 했다.
옳고 그름보다 진영의 논리가 휩쓸고 있는 세상에서 돌아선 그녀가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때늦은 겨울바람이 앙상한 가지를 흔들어도 기다리던 봄바람은 소리없이 스며들어 일상의 행복을 회복시키고 있다.
2025.2.28.(47)
첫댓글 오늘 낮에는 무척 더웠습니다. 봄이 빨리 옵니다. 봄이 되면 먼 기억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더욱 매진 하기 바랍니다.
봄은 여자의 계절. 가을은 남자의계절, 주희쌤 기억 속의 그녀가 봄바람을 타고 왔군요.
아스라하게 문득 가끔 나타나는 꿈속의 꽃길 같은 우리 모두의 첫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