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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月의 기도/배시창 에발도
벌써 유월이다. 세월은 잘도 간다. 가는 세월 어떡하랴. 사월이 잔인한 계절이라면 오월은 뭐라고 할까. 개인적으로 희망을 잃어버린 계절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월 한 달 동안 햇빛 본 날은 며칠 되지 않았다. 대부분 비 내리는 날 아니면 구름 낀 날 들이였다. 신록의 계절은 왔지만 피부로 느끼는 계절은 옛날의 오월이 아닌 것 같다. 반소매 입고 여름을 노래 할 계절인데도 밤마다 몸속으로 스치는 서늘한 바람 때문에 마음까지 서늘해진다. 어린이날도, 어버이날도 지나갔다. 두 아들은 하늘 높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어른 새가되어 둥지를 떠났으나 이 날이 되면 그 시절 귀엽던 모습이 그리워진다. 그들을 키울 때 아버지로서 부족함이 없었는지 그리고 역할을 다했었는지 때 늦은 후회가 사무친다. 그러나 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주님의 착한 자녀로 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그들도 어버이 날 아버지 생각처럼 그 날 하루를 보냈으리라 생각한다. 매일 영혼을 맑게 하고 주님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는 길은 짧은 글로써 기도를 대신 바치고 있다.
5월1일 봄꽃은 피고지고 산천은 푸르름이 점점 더해 가는데 추위는 여전하다. 걱정하는 이 아무도 없다. 농부들만 아우성이다, 천주교에서 사대 강 반대 열기가 대단하다. 설득력 있는 만화도 제작하여 돌리고 있다. 주교회의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은 신명기(30,19)의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한다"이다. 창조주께서 지으신 세계를 사람 손으로 파헤치면 생명력을 잃는다. 생명의 말씀을 들을 정부도 아니다. 구호만의 설득은 메아리가 없다. 하느님 세상 살리기를 진정바란다면 이제행동으로 실천 할 때가 왔다. 신앙인만이라도 주님의 은총으로 무절제한 소비억제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소비억제가 사대 강 살리기 운동보다 더 큰 효과가 있을것이다.실패하드라도 책임과 의무감을 가지게 할 수 있다.
5월2일 오월 초하루, 신학 원 소풍날이다. 손에 일용할 양식을 들고 녹음이 짙은 숲속 길을 거센 숨결 참으며 오르고 있었다. 누군가"야! 주님계신 곳 조금가까이 오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저 먼 곳까지 가려면 얼마나 힘들겠냐." 침묵하며 걷고 있던 학생들을 웃겼다. 산상 미사 강론 때 신부님도 산정 상까지 오를 때 숨결이 어려웠던지 그럴 때에는 자연과 대화를 하라고 했다. 산새소리 들으며, 길섶에 핀 꽃을 바라보며, 시원한 바람 불어 맺힌 땀 훔쳐 줄때 하느님의 손길을 느껴보라 하셨다. 깊은 골짝 약수 물이 졸졸 흐르는 곳을 지날 때 "구석구석마다 당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나이다."라고 감사 기도하라고 하셨다. 자연이 바로 하느님의 몸이라고 하시면서.
5월3일 한센박사는 인간의 건강에는 운동, 음식, 절제가 필요하지만 그것만가지고 50%효과밖에 없다.50%는 영도 육적인 건강도 아니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한다. 두 그룹의 학생을 대상으로 연구한 논문이 있다. 한 그룹에는 테레사수녀의 생전 활동상을 비디오로 보여준 그룹과 폭력이 난무하는 내용을 보여준 그룹을 의학적으로 분석한 내용이다. 첫째그룹은 내분비물에서 병을 이겨내는 항체가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둘째그룹은 오히려 약해진다는 보고서이다. 사랑의 삶을 살아야한다는 이야기이다."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그리스도교는 사랑으로 완성된 희망의 종교이다. 구원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말고 사랑 속에서 찾아야한다.
5월 4일 생덱쥐베르 소설 사막의 여우 로펙 이야기다. 사막에는 포아풀이 듬성듬성 나서 자란다. 풀포기 간격이 수백메타부터 수키로나 된다. 키는 작지만 뿌리가 물 찾으러 수키로 땅속 깊이로 뻗어 간다. 새벽녘에 풀잎에 이슬이 맺힌다. 낮 동안 땅속에 숨어 지내는 달팽이가 새벽마다 이슬을 따먹으려고 풀잎으로 기어오른다. 이 달팽이를 먹고사는 여우가 바로 로펙이다. 포기마다 한마리가 있을 때는 잡아먹고 두 마리가 있을 때는 한 마리를 남겨 놓는다. 여우라는 미물도 창조주의 법칙에 순종하며 살아가는데 인간들은 풀 뿌리째 뽑아 버리고 땅속에 있는 애 벌래 까지 훌터 갈 것이다. 하느님은 아직까지 계속 지켜보고만 계실 뿐이다
5월5일 "새들아 날아라 푸른 하늘을" 이 노래를 부른지도 50녀 년이 흘렀구나. 어린이날에 큰놈은 걸리고 둘째 놈은 어깨 태우고 동물원, 놀이터를 데리고 다니던 날들이 그리워진다. 집안에 박혀 청승 떨기보다는 행장을 꾸려 메고 을숙도 놀이공원을 지나 강변둑길을 찾았다. 놀이공원은 차와 어린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매일같이 걷는 길, 옛 생각에 푹 젖어 한참이나 걸었다. 어린 시절 두 아들의 귀여운 모습이 아련 거렸다. 그리고 잊어보려 고개를 흔들며 멀리 강물을 바라보니 강바람 불어와 갈 순은 춤추고 물결은 잔잔히 일렁거리고 있었다."보리밭 사이 길로 걸어가면" 옛 노래 불러보며 걸었으나 여전히 가슴은 그 날이 그리워 지드라.
5월6일 갑작스런 열기가 밀려와 내복을 홀랑 벗고 나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갑갑한 내복을 어떻게 입고 겨울을 지냈던가. 사람은 환경에 민감하고 또 적응력이 강하다. 봄이 와 두터 운 옷을 벗어버리고 나면 지난 겨울동안 겪었던 몸서리치던 추위를 금 새 잊어버린다. 인간은 경박하지만 좋은 말로는 환경에 잘 적응하는 편이다. 영적인 삶도 겨울이 있는 듯하다. 누구에게나 추운 겨울이 꼭 찾아온다. 그 겨울은 길고 지루하고 그 추위는 칼날보다 매섭다. 봄, 여름, 가을부터 쉼 없이 월동준비를 해야만 생명의 양식과 두터운 담요를 겨우 장만 할 수가 있고 또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언젠가 그분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희망의 봄을 기다리면서 겨울을 준비해야만 한다.
5월7일 아무 희망도 생각도 없이 혼자서 살아간다. 혼자 살아도 고뇌는 늘 있다. 그 때 마다 미사에 참여하여 주님을 불러본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흩어진 고뇌가 주님보다 먼저 달려와 주님과의 만남을 방해한다. 이처럼 기도가 잘 안 되는 날에는 산을 오른다. 오르는 가뿐 숨결에 고뇌는 멈춘다. 숲속에 앉아 흐른 땀을 훔칠 때 어디선가 아름다운 새 울음소리 들려온다. 그분의 목소리는 성서에도 있지만 자연 속에도 들린다. 새 울음소리는 그 분이 나를 부르는 소리이고, 흐르는 물소리는 내 맘을 달래주는 주님의 은총이다. 자연에서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숨결을 느끼면 성서말씀은 진한 사랑의 향기가 되어 더 가까이 다가온다.
5월8일 어버이 날이다.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온다. 혼자 어떻게 지내는가 물어보는 전화다. 작년 어버이 날 이였다. 뉴질랜드에서 아들 며느리가 메일로 엽서도 보내고 꽃도 보내왔다. 내가 생각하는 어버이날의 의미를 조용히 들려주었다. 서로 느끼는 따스한 정이 있고 자주 안부 전화하는 아비와 자식사이에 무슨 어버이날이 따로 필요한가. 형식적으로 꽃을 꼽아주고 호텔에서 식사하는 것보다 이날 하루 동안은 부자가 서로 차분한 마음으로 반성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날이었으면 한다고 했다. 부모 뜻에 따라 사랑을 나누고 착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라고 일러주었다. 의외로 이 날을 쓸쓸히 보내는 부모들이 많이 있단다. 이 날 하루 동안 자식들도 부모들도 힘 드는 날이다.
5월10일 어제 오후 도시고속도로 1차선에는 램프로 빠져나가는 차들이 줄을 서 있었다. 2차선으로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20여 메타 앞에서 갑자기 2차선으로 돌출하려는 차가 있어 무의식중에 핸들을 꺽어 3차선으로 진입하는 순간에 3차선을 달려오던 차와 충돌 할 뻔한 일이 있었다. 한참을 앞서가다 정체가 있어 잠시 대기하던 중 옆 차선에서 창문을 내리며 후락 숀을 울리기에 바라보았다. 중년의 남자가 손을 흔들며 인자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도 손을 흔들며 같이 웃어주었다. 놀라게 해주어 미안하다는 신호였다. 대형사고가 날 뻔 했는데도 미소로 답하는 순간 놀란 가슴은 순식간에 다 사라졌다. 세상 사람들 이처럼만 살면 주님이 바라시는 평화가 곧 올 텐데 말이다.
5월11일 처음 뵙는 신부님이 저녁미사를 집전하셨다. 신부님은 이 성당 출신으로서 현재 송정본당 신부님이라고 소개되어졌다. 강론 중에 "하느님을 사랑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대부분 "예"라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다음 거짓말인지 아닌지 곧 탈로 납니다. "정말이지요". 역시 "예"라고 크게 외쳤다. 그러면 "하느님 말씀대로 살아가시는 분들 손들라" 했다.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거짓말 한 죄로 반성하고 회개하는 순간이 되었다. 긴 강론이 필요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고, 하느님과 관계가 투명하지 않는 사람은 성체를 아무리 받아 모셔봐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모두가 왜 하느님을 사랑하는 체 할까.아니면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5월14일 신부교수님들은 공부를 많이 시킨다. 읽고 읽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학교에 갔다 돌아와 컴을 켜니 뉴질랜드 소식이 있었다. 얼굴은 모르지만 한 동네 사는 사십대 여인이 어린 두 딸과 자살했다는 내용 이였다. 비보를 듣고 한국에서 급히 날아간 기러기 아빠마저 자살했다는 슬픈 소식이다. 이렇게 끝내려고 결혼하고 자식 놓고 이민 갔는가 생각해보니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이기지 못할 고통은 주시지 않는다는데 그 고통을 견뎌내지 못 했어 그랬을까. 이민도 남의 야기를 듣고 함부로 가는 것이 아니다. 갈 때 주님을 모시고 가야한다. 그러면 남편 없이 살아가는 외로움과 현지에서 겪어야하는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텐데 말이다.
5월15일 엊저녁 제매가 찾아와 마신 술로 일지기 잠들어 새벽녘에 눈을 떴다. 촛불을 밝히니 성모님이 웃어 신다. 일찍 일어났다고 칭찬하시는 것 같다. 작년에 쓴 시를 찾아 읽어본다. 시와 함께 합창성가(주여 오소서)가 고요히 울려나온다. 갑자기 가슴이 울렁이며 이상한 기운이 솟아올라 눈을 적신다. 혼자 사는 에발도가 가련하여 주님께서 흘리시는 눈물일까. 짧은 순간이지만 마음이 거룩해지고 맑아지는 것 같다. 희미한 불빛아래 인자한 성모님이 미소지어시고 성가가 고요히 울려나오는 이 순간을 내 영혼도 매우 좋아하는가보다. 육신의 즐거움만을 찾는 일상 속에 잊혀 지내는 삭막한 영혼도 기뻐하며 즐기는 시간이 필요 한 것 같다. 새벽녘이 아주 좋은 시간이다
5월16일 십자가 고난 중에 오른쪽 강도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발에 향료를 부린 죄인한테도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셨다.탕자의 비유에서도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예수님은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묻지도 않고 용서 할 뿐이다. 용서한 사실 조차도 잊어버리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분이시라고 구엔반티유 주교님은 교황청에 고백한다(지금 이 순간을 위하여 참조)
5월17일 유명한 물리학자 파스칼의 이야기다.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30세가 될 때까지 신의 존재를 부정한 사람이다. 그의 누나 어린 딸이 얼굴에 악성 피부염을 앓고 있었는데 그 당시 의술로써 불치병으로 판정 났다. 기적은 생각치도 않았다. 단지 진실한 믿음으로 가련한 딸을 주님께 봉헌하러 피정을 자주 다녔다. 주님의 십자가 조각을 보관하는 곳에 다녀온 후 병이 나은 것을 본 파스칼은 비로소 신을 체험하게 된다. 그 후 갈등하던 그는 신의 존재 확률을 반반으로 잠정 결론짓고 존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존재하는 쪽에 인생을 걸면 풍요로운 인생경험을 할 수 있고 부정하면 인생 삶이 엉망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33세 요절 했다. 3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결론이 옳은 것 같다.
5월18일 우리는 삶속에서 많은 불편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짜증을 내면 교만이다. 그 중에도 늘 미소 지으며 여유 있고 낮은 자세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많다. 바로 겸손 때문이다. 겸손한 사람은 높은 곳에서나 낮은 곳에서나 항상 환영을 받는다. 화를 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신을 돋보이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영육이 병드는 일 밖에 없다. 겸손해지는 것이 바로 회개하는 일이고 구원 받는 일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인생도 다른 사람의 삶도 황폐화 시킨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겸손한 자세로 아랫사람을 섬겼고, 또 사랑과 용서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교만함을 가르쳤다면 누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겠는가. 겸손이 신앙의 덕목이다
5월19일 예수님은 수학을 모르시는 분입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광야에 놓아 둔 채 한 마리 양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남아있는 양들에게 어떤 변고가 일어날지 개의치 않습니다. 찾은 뒤 어깨위에 메고 돌라옵니다. 잘못도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리가 아흔 아홉 마리와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의 자비는 세세대대로 펼쳐집니다. 한 마리 양을 찾으러 예수님은 어떤 위험이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나, 자캐오의 집에 머물기를 바라셨던 연민 가득한 행동을 묵상해봅시다. 계산할 줄 모르는 단순함과 죄인들을 위한 그 사랑을...
5월20일 넘어야 할 눈 덮힌 높은 산길로 버스가 올라갑니다. 계속 눈발은 휘날립니다. 여차하면 계곡 아래로 떨어 질수 있습니다. 승객들은 운전기사만 바라봅니다. 기사 또한 진땀을 흘립니다. 차안에 간장이 감돕니다, 그때 뒷 자석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승객들은 뒤 돌아 봤습니다. 열 살을 넘긴 아이가 자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비탈진 고갯길을 넘은 후에 자고 있는 아이를 깨웠습니다,"애야, 우리는 위험한 고갯길을 간신히 넘었단다." "알고 있습니다. 잘못하면 큰일 날뻔 했지요" "그런데도 어떻게 편하게 잘 수 있었니." " 기사가 제 아버지랍니다. 아버지를 믿었지요." 인생은 산길을 넘는 곡예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기며 살아가야합니다
5월21일 미운사람과 증오하는 사람을 주님 품에 안기도록 3년간을 기도했다. 증오하던 사람이 지난주에 영세를 받았다. 돈밖에 모르던 그분이 영세를 받으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기도 빨인가 하여 고무되었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기도는 대상을 변화시키는 것 보다 먼저 자신이 변화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 신앙생활이 시작된다. 기도 시 마다 불쌍한 사람모습이 떠올라 측은한 생각이 들어 눈이 젖었고 미소 짓는 증오한 자의 모습도 보였다. 얼마나 신비한가. 목적이 숨어있는 기도는 구원받으려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고 오히려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가 자가장착에 빠지게 할수있다. 사랑과 용서와 감사 기도만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쉼 없이 기도하란 말이 이제야 알 것만 같다. 기도는 주님께 자신의 깨달음을 먼저 청원하는 것이다
5월22 은퇴한 백만장자들이 살고 있는 미국 어느 지상낙원 동네 이야기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치매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관심이 많은 의료연구진이 조사를 한 것이다. 결론은 아주 간단하였다. 부족함이 없고. 걱정이 없고, 다람쥐 채 바퀴 돌아가듯 단조로운 생활과 스트레스 없이 편안하게 산 것이 치매의 원인으로 밝혀진 것이다. 돈으로 천국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고통과 번민으로 물든 십자가에서 엷게 비추이는 은총의 빛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없는 곳에서 영적이고 육적인 축복을 찾을 수 없으며. 육적인 편안함과 즐거움 추구가 궁극적으로 회복 할 수없는 영적파멸을 초래 하는 것 같다
5월26일 산속에 움막을 짓고 평생 혼자 살았던 아버지가 뭍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놓고 죽었다. 그는 젊은 날 화상을 입고 어린 아들 딸을 고아원에 맡겨놓고서는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채 세상을 떠났다. 자식들과 세상에 흉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아버지 마음을 모른 채 오해하고 살았다. 그 아버지를 증오하며 묻어달라는 유언도 무시한 채 화장을 해버렸다. 유품을 태우다 오래된 일기장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어린 두 자식을 구하려다 화상 입은 내용과 흙에 묻어 달라는 유언내용이 적혀있었다. 그 뜨거운 불길이 죽어서도 싫었던 것 이었다. 이미 끝난 후였다. 그래도 자식들은 울었다. 울어봐야 슬픔만 깊어 질 뿐이다. 세상에 이런 슬픈 일도 있나하여 나도 울었다
5월27일 논리학을 모르시는 예수님.은전 열닢을 가진 여인이 한 닢을 잃어 버렸습니다. 등불을 밝혀 한 닢을 찾고 나서 이웃을 부릅니다.."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어버린 은전을 찾았습니다(루카 15,9)".은전 한 닢 때문에 이웃을 번거롭게 한다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은전을 찾았다고 이웃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은전 한 닢보다 잔치비용이 더들어갑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한 말을 인용하면"마음은 이성이 모르는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다."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 당신 마음속에 있는 이상한 논리를 밝히십니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
5월28일 인도 캘커터의 어느 빈민촌에 대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불빛 없이 살아가는 한 자폐증 청년이 있었다. 데레사 수녀님은 이 청년을 어둠속에서 끌어내기 위해 골방에 들어 갈 때 마다 불을 밝힌다. 밖으로 나오는 즉시 불이 다시 꺼진다. 수녀님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이 일을 오랫동안 지속했다. 그리고 이 청년을 위해 사랑의 기도를 바친다. 어둠이 지배하든 그 방에 어느 날 눈부신 햇살이 가득 찬다. 청년은 긴 어둠의 터널을 드디어 빠져나온 것이다. 빛을 싫어하는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다. 영혼이 병들면 육신도 병들기 마련이다. 수녀님의 정성과 기도로 어둠의 마귀를 물리친 청년은 그 후 훌륭한 신학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영혼구원에 앞장섰다
5월29일 세상이 잠들어 있을 때 짧은 글을 씁니다. 이제 습관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나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글도, 읽는 분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글도 씁니다. 아침마다 고마운 분의 맑은 메아리소리를 듣습니다. 그 메아리에서 뭔가를 찾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강림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치려하는 의지를 가진 자에게 만 성령을 내립니다. 자신이 잘 먹고 잘 살라고 성령님을 보내지 않습니다. 성령을 모신 분은 그 만큼 책임과 의무가 막중합니다. 성령을 모신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면서 유혹에 빠져 그분과 항상 함께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나갑니다. 매일 글 쓰는 이유는 글 쓴 대로 살아 갈 수 있도록 그분께 드린 약속 때문입니다
5월30일 뉴욕타임즈를 오랫동안 구독하던 한 수사님이 갑자기 신문과 절교를 한 것이다. 신문을 더 읽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하느님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몸 바친 분으로써 당연하다. 범죄와 살인강도 같은 어두운 이야기가 지면 대부분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좋은 시절의 신문이란 희망을 알려주는 메세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요즘신문을 보면 그분 판단이 옳았다. 신앙인은 늘어나도 하느님 세상은 요원하고 신문은 더 깊은 어둠의 수렁 속으로 세상 사람을 유혹한다. 종말이 가까워 오는 것일까. 종말이 가까워지면 신앙인들이 갑자기 늘어난다고 한다. 도태되어 가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고 천국만을 염원하는 안이한 신앙인들 책임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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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5월의 기도' 잘 읽었습니다. 일기를 쓰는 것처럼 기도하는 형제님이 부럽습니다.
사랑과 용서와 감사하는 기도가 자신을 변하게한다는 신비함을 느꼈습니다.
감동적이군요. ^^ 가슴속에서 세상사로 들끓는 혼란을 조용히 잠재우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머물다 갑니다. 글과 음악 고맙습니다.
어제 신학원 방학을 하였습니다. 늦은나이로 입학하여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옛말에 "늦게 배운 도둑질 날새는 줄 모른다" 날새는 줄 모르면서 책을 읽었지요. 도움이 되었다면 "믿음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으며 주님도 도와주지 않으시고 지켜만 본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진리의 삶을 살기 위하여 바치는 자기 성찰을 위한 피나는 노력입니다. 주님에게 도우심을 청하며 자신의 결점을 단 한가지라도 고치려 노력해보는 일입니다. 교회는 믿음을 지켜주는 성이라면 세상은 믿음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수련장입니다. 교회안에서만 실질적인 믿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자신의 실천의지에 달린것입니다.
간절히 소망하는 일은 이루어 진다죠?
한때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자 열심히 기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삶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하는 반복이었습니다.
믿음은 저절로 주워지는것이 아니라 간구하고 기도하고 세상속에서 키워나가는것이라는 말씀, 그리고 실천의지에 달렸다는것 모두 옳은 말씀입니다. 엘발도님의 말씀에는 못미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진리의 삶을 살기위해 노력해야 한다는것, 그리고 진리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대해 마음 깊이 새겨봅니다.고맙습니다.
고양이님의 체험담 잘 들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가 첫걸음을 내딛으며 바라보는 신비함에 젖어 있을 뿐입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시고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신 주님의 완전한 사랑의 개념을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닐런지요.안다고 하면서 진짜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요. 자신이 약하고 가련하게보여 전능하신 분의 능력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이려하는 어리석고 교만한 사람이 아닌가. 온갖 생각에 젖어봅니다. 주님과 관계가 투명할 때는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줄것으로 확신합니다. 세속적인 바보가 되어 사랑하는 삶부터 시작해보려는데...
진정 자유로운 영혼을 보았지요. 삶의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너무도 분명히 아는.... 그리하여 세상 어떤 갈등과 선택의 기로에 서서도 한치의 망설임없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려는.....이렇게 혹은 저렇게 살아야 겠다는 다짐이 없어도 삶 자체가 하느님으로부터 기인되는 그런 영혼을요... 물론 살다보면 흑백이 분명치 않을 때도 있고 또한 흑백론은 분명 오류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느님이 바라보시기에 어떨까를 생각해보면 아무런 갈등없이, 좋은일을 하거나 양보하거나 봉사하거나 자신의 삶을 희생하거나 하는 경우에도 내가 무엇을 했다가 아닌 그져 당연한 일이었고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거나 자신의 선행을 선인지도
모른채 그냥 그렇게 사는 사람을 오랫동안 보아 왔지요. 그럼에도 그 영혼이 세상일로 상처받고 아파하고 고통받는것도 보았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것은 그런것이구나 하는..... 사람은 본대로, 깨달은 대로 실천하지 못해서 어리석다고 하는가 봅니다. ^^ 사설이 길었군요. 엘발도님께서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가기를 소망합니다. 고맙습니다.
고양이님, 이 곳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지 몇년이 지났건만 이런 토론은 처음입니다.이런 토론이 많아야 좋은 것 아닌가요.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억지로라도 몇자 적어보면 마음이 정리가 됩니다. 글 내용이 다 옳다고 생각은 안합니다. 누군가 아픈 곳을 건드려 주기를 기다렸지요. 고양이님이 겪어온 체험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자기것을 다주고도 뺨맞는 세상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그것을 이겨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용서하고 사랑까지 하라고 합니다. 격어보지 않는 사람은 그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알아주어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 고통을 이겨내고 힘을 얻으면 자신의 승리보다도 주님의 승리로 돌아갑니다.감사합니다
타인의 글에 답글을 다는것은 아주 조심스러운 일이지요^^ 신앙인으로써 결핍된 믿음을 갖고 있는 저이지만 그래도 모태신앙인지라 타 종교에 흔들리지 않을 확신정도는 있습니다. 환경상 많은 유혹을 받지요. ㅎㅎ
살면서 짐작한 일임에도 상처를 받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몹시 배신감을 느끼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 대부분입니다. 타인을 믿지 말라는것이 아니라 일어날 일에 대한 가능성을 다각도로 타진해 보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누군가 저에게 돈을 빌렸다고 치지요. 그 돈을 빌려줄때 안스러운 마음이나 급한 사정을 생각해서 어렵게 빌려 줬는데 연락조차 끊겼다고
한다면 화가나고 언잖겠지요. 그러나 돈을 빌려줄때 받지 못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권유로 투자할때도 내게 없어도 될 돈인가 아닌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하지요. 또 비밀이나 부끄러운 일을 남에게 말할때는 그 말이 피치못할 사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 요행을 바라거나 안전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분명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복잡하고 머리아픈 일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일상화 되면 전전긍긍할 일도 줄어들지요.^^ 결국 모든 상처는 세상으로부터 오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기에 아프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다 아시는 얘기를 하는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신학원 출신들이 배운지식을 활용하여 예비신자들 교육을 해보려고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도해보고자 신부님을 모시고 단합대회를 열었습니다. 신부님도 도와주시려고 약속을 했지요. 당연한 일인데도 그렇게 감사하게 생각하는 신자들의 표정을 볼때 이상한 생각이 들더이다. 신부님을 너무 의식하는 신자들의 모습이 마치 초등학교 자녀를 둔 학부모 같더군요. 그리고 신부님의 태도도 마치 군림하는 것 같은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리더군요. 낮은자세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주님과 너무 대조되는 모습이더군요.요사이는 양들이 풀밭을 찾아갑니다. 목자들을 인도합니다.왜 그럴까요. 잘못 가고 가고 있기때문입니다
ㅎㅎ 훌륭한 계획을 갖고 계시군요. 신부님은 신자들에게 있어 부모님과 같은 존재지요. ㅎㅎ 신부직을 수행한다는것 또한 많은 자기 희생이 따르고요. 바쁘신 중에도 신자들을 위해 무언가 하실려고 하는 노력이 신자들에겐 고마울 수 밖에요. 그리고 신부님도 사람이랍니다. 순간적으로 그럴수도 있지요. 신부님이나 수녀님들도 인간적 측면에선 저희와 크게 다를것 없다고 봅니다. 신이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실수를 통해 배움을 얻지요. 노벨평화상을 탄 간디도 자서전에서 젊을적 인도의 가부장적 인식에 젖어 있어서 부인에게 폭행을 행사한적도 있다고 회고합니다. 성인이란, 존경받을 만한 훌륭한 사람도 처음부터 인격이 완성되어
있지는 않는거지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끊임없이 더 낳은 인간이 되도록 수양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인격도 완성되어 가는것이라고 봅니다. ㅎㅎ 신부님들도 환경의 지배를 받다보니 경직된 사고를 갖게 될수는 있겠으나 늘 자신을 경계하고 돌아보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그러나. 상하체계가 분명한 순종의 삶을 살고 계신 신부님들은 분명 존경받을만하다 하겠습니다. 저희들이 걷지 못하는 길을 걷고 계시고 저희들이 감당하지 못할 부분을 감당하고 계신 수고는 인정해야 하니까요. ^^ 좀더 넓고 좀더 관대한 눈으로 보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의 직책만 보지 마시고 그분들의 인간적 갈등까지도요. ^^ 고맙습니다.
그 이해심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순간적으로 잘못 생각한 점을 깨우쳐주셔셔 감사합니다. 그래서 대화는 필요한 것이가봅니다. "벼락을 맞았습니다"에도 신부님 욕하면 지옥간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야기한 그 신부님을 미워한 레지오 단원이 입에 솔이 나서 한참이나 고생했거던요. 그 책을 읽고난후 신부님 욕하는 버릇이 고쳐 졌습니다. 그러나 바른것과 틀린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들 역시 인간이란 말 역시 잘 압니다. 인간적인 삶을 접으신 분들이라 그 분들이 선택한 길이 올바른 길이라 믿고 어리석은 우리는 그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따라갈 뿐입니다. 동정이 사랑이 아니라 때로는 악마일수 있다고 느낍니다
불편하게 생각하시지 않고 제 말에 공감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엘발도님 덕분에 저 자신을 다시 살펴보고 사람을 사랑하는것,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 예수님께서 저희을 위해 치루신 희생과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항상 엘발도님과 함께 하기를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