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상하게 숙취도 거의 없는 것이, 컨디션이 상당히 괜찮았다. 아,
기분 좋게 마셔서 그런가, 아니면,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고 그래서 그런가 하고 생각하면서
도 와이프에게는 “내가 주량이 은근히 는 모양이야”라고 하며 큰 소리를 쳤다. “양주도
많이 마시고, 양주 폭탄주에, 쏘주 폭탄주까지 여러 잔 마셨고, 나중에 생맥주까지 더 먹었
는데도 끄떡없으니 말이야.” 어제 입었던 남방을 빨래 통에 던져 넣으려는데, 흰 남방 가
슴 부분과 배 부분에 붉은 얼룩물이 넓게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한참이나 생각한 후에 알
아 내었지만, 그것은 경품으로 받은 빙수기 상자 탓이거나 기념품으로 받은 (아마 광식이가
기증한) 문방구가 담긴 쇼핑백 탓이었다. 우산을 썼지만 택시를 타고 내리는 사이에 옷이
젖었는데, 경품과 기념품을 계속 끌어 안고 있었으니 그 물이 들어 버린 것이다. 성구는
잘 들어 갔을까? 어젯 밤, 나하고 마지막까지 같이 있었던 사람은 김성구다. 우리는 같이
택시를 탔고, 나는 역삼동에서 성구를 내려주었다.
흰 남방만 해도, 나로서는 신중하게 생각해서 선택한 것이었다. 거기에다 면바지(진한 청
색)를 입었다가, 아무래도 이상하게 보여서 양복 바지로 갈아 입었다. 오랜 만에 나가는 동
창회인지라 의상부터 신경이 쓰였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모르긴 몰라
도 이발소에 가서 머리까지 하고 나간 것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치밀하게 계
획하고 실행한 것이었는데, 나는 일주일 전에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았다. 스포츠 머리
는 깎은지 일주일은 지나야 보기가 좋아지는 법이거든. 그리고 누가 “왜서 스포츠 머리로
하고 다니느냐?”고 물으면, “나를 알아 보기 쉽게 하느라고 일부러 고등학교 때 머리로 깎
고 나왔다”고 대답해서 좀 웃겨주어야지 하는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그러나, 병억인가,
승일인가가 그렇게 물어 주었건만, 나는 계획대로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앞 머리가 자꾸 빠져서 말이야.” 계획대로 되는 것은 없는 모양이다. 나는 시작 시간
도 잘못 기억하고 있어서, 6시 40분에서야 행사장에 도착했다.
먼저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나의 담임선생님이셨던 장병길선생님과 백원기선생님
께서는 나를 알아 보시는 것 같았다. 나중에 조용히 선생님들 테이블로 건너가 두 분 선생
님에게는 맥주를 따라 드렸지만,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지지는 못했다. 나는 마침 자리
가 남아 있어서, 명서, 장환이, 재국이, 영중이, 영희 등등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
았다. 내가 자리를 아주 잘못 잡은 것이라는 점은, 잠시 뒤, 덕영이가 합세하면서 분명하
게 밝혀졌다. 다른 테이블의 양주까지 끌어다 먹는가 하면, 아, 계속해서 제조되고 투하되
는 그 놈의 폭탄주...... 그래도 (나는 처음 해 보는 것이었지만) “위하여, 위하여, 위하
여, 한 참에”라는 경산회 건배 구호를 외칠 때는 속이 다 시원하였다.
영중이는 졸업 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영중이는 키가 작은 편이었는데, 키가
아주 커지고 체격이 전체적으로 당당해져 있었다. 그 자리에서도 말했지만, 나이 먹으면서
멋있어지는 것은 숀 코넬리하고 영중이밖에 없다. 한영희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모르는
아이였다. 그러나 영희가 스스럼 없이 나를 친구로 대해준 탓에 그리 되었겠지만, 잠깐 사
이에 우리는, 오랜 만에 만난 죽마고우처럼 다정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정말로 미안한 것
은, 저 쪽에서는 나를 알아 보는데, 내 쪽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때이다. 물론 이름도 낯
이 익고 심지어 얼굴까지도 완전히 낯설지는 않는데, 그 아이가 누군지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즉 그 친구의 고등학교 적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상대는 내 표정에서 이
런 사정을 알아 차리게 마련이다. 그러면 나는 솔직하게 사실대로 고백을 하였고, 친구는
내 기억을 되살려 주느라고 30 여 년 전의 이런 저런 에피소드를 찾아 내어 이야기해 주었
다. 승구와는 재미있게 이야기하였지만, 그의 어릴 적 모습이 떠 오른 것은 정작 택시타고
집에 갈 때였다.
나로서 제일 반가왔던 사람은 성구였다. 성구는 중학교 동창이니 정말로 오랜 만에 본 것
이고, 그래서 알아 보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래도 한 중년 신사가 나타나 “내가 김성군데
알아 보겠냐?”고 했을 때 그를 알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제법 추억이 많
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일인데, 교단 옆에서 둘이 씨름을 하다가 내가 그만 화분을
깨뜨려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점심 시간을 틈타 제기동의 우리 집에 같이 가서 돈을 타다
가 똑같은 화분을 하나 사다 놓았다. 고무나무 화분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더 친해졌고
나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성구네 집에 자주 놀러 갔었다. 성구가 아직 험한 방황을 시작하
지 않을 때였다. 성구는 공부도 잘했고, 뭐든지 잘했다. 설마 꼬마 응원 리더 김성구의 모
습을 기억하지 못하지는 않겠지?
이것은 성구가 학교의 공식적인 응원 리더로 뽑히기 전 일인데, 어느 날 우리 반에서는 우
리 반 응원단장을 뽑는 행사가 벌어졌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나를 응원단장으로 추천하였
다. 그러나 이 아이는 삼삼칠 박수니 기차 박수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런 것
을 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허우적거리면서 춤추는 듯한
동작을 선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내 동작을 따라(?) 박수를 쳤지만, 물론, 금방 시
들해져 버렸다. 그 때 나는, 규칙을 모르는 게임에 내몰린 셈이었다. 두 번째로 추천을 받
아 나온 아이가 성구였다. 성구는 사립 국민학교를 다녀서 그런 것을 많이 보았을 뿐 아니
라 그 방면에는 특별한 재능과 끼를 지니고 있었다. 몸에 꼭 끼는 아래, 위 노란 색 타이즈
를 입고 스프링처럼 통통 튀면서 효창 구장을 뛰어다니던 성구의 모습은 다들 기억하잖아?
우리 반 아이들은, 전교생을 리드하는 저 아이가 바로 우리 반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
곤 하였다. 그 뒤로 언제부터인가 성구는, 내가 잘 모르는 아이들과 어울려 다녔고 또 언제
부터인가는 아예 보이질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성구
와 이야기를 하느라고, 트럼펫 주자 덕종이 노래이외에 다른 노래는 거의 듣지 못했다. 성
구는 남원이와 수석이가 불러 내 주어서 동창회에 나오게 되었다면서, 두 전임 회장에게 아
주 고마워 하였다.
회장단의 배려는 말할 것도 없지만, 평회원인 우리들도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여 다들 편안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애들이 많이 컸다. 우리들이 많이 큰 것 같다는 말이다. 그
바람에 지난 밤 신사동 한 귀퉁이가 아주 떠들썩하였다. 아테네의 델포이 신전에는 “이 곳
이 우주의 배꼽(Omphalos)”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이 따
로 있겠는가? 아메리카인디언의 작은 부족들도 추장의 천막 근처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
는 제단 근처 등 자기 마을의 중심부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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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토론 이야기방♡
몇 년 만에 참석하는 동창회인가?
조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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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58
06.06.12 12:06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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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우~ 그렇게 세심한 계획이 있었구먼.영태, 진짜 오랫만에 봤는데도 금방 알겠던데 뭐~글 쓸 꺼리가 많으면 오히려 잘 못 쓰겠던데...역시 교수님답게 조목조목 옴파로스 속으로 들어가 돋보기를 들이댔네.악동 성구와 모범생 영태가 그리 친했었군. 조분조분 풀어나가는 얘기 솜씨에...어느새 옛날로~~ 감사 영태!
영태야, 반가웠고 고맙다...산에서 자주보자..너를 위한 특별코스를 개발할모양이니까...
재한이와 명진이가 올린 이미지에다.. 창연이의 동영상... 또 영태의 다정다감한 글이 지난 토요일 우리 친구들의 모습을 한 폭의 수채화로 내 앞에 그려놓누나... 고맙다 친구들.. 보고싶네...
기모야, 정말 대단했다. 명진이의 선수 같은 춤솜씨는 알고 있니? 덕영이는 사람들을 좀 안아 주는 취미가 있는데, 변강쇠같은 그 몸매는 알고 있겠지? 피날레가 제일 화려하고 길었어. 성률이, 수석이 등등이 나와서 말이야. 다 끝나고 이제 집에 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수석이가 나오더니......기모가 이런 것을 모두 보았어야 하는데.
영태가 더 대단하다..정말 세심하고 자상한.. 영태의 모습 참 보기좋았다. 앞으론 자주 좀 보자...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구나... 조 교수의 글 솜씨... 나도 그 날 찜질방 가서 목욕하고 몸 풀고 동창회엘 갔다는 거 아이냐... 나도 준비 많이 했다. 아내 덕분에...
어쩌면 그렇게 영태 모습은 옛날 그대로 일까...마냥 문학 소년 같으니~~
영태야~~만나서 너무 반가웠다.....
감회어린글 잘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