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자 - 광활한 정신 세계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道)
▶ 광활한 정신 세계의 끝없는 이야기
노장 철학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고, 노자와 장자는 중국 고대 도가 사상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똑같은 철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고, 노자나 장자라는 인물이 어디서 무엇을 한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노자>와 <장자>라는 책을 중심으로 강의를 하게 됩니다.
아프리카에는 양과 닮은 스프링 복이라는 야생 동물이 있답니다. 그놈들은 수백, 수천 마리씩 떼를 지어 풀밭을 찾아 다니는데, 풀밭을 만나면 뜯어먹고 다 먹으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풀밭이 있어도 계속 달리는 경우가 있답니다. 그건 앞쪽에서 풀을 죄다 뜯어먹어 버려 먹을 게 없어진 뒷놈들이 앞에 가는 놈들을 밀어붙이기 때문이랍니다.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점점 더 빨라져 새로운 풀밭이 나타나도 먹지 못하고, 떼를 지어 계속 달리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한꺼번에 몰살하는 수도 있답니다.
장자의 눈으로 우리 현대인들을 본다면, 바로 이 스프링 복이라는 양떼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날마다 바쁘게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바쁘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고,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장자와 함께 산에 오르면 이런 대화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 아래 차들과 사람들을 보게 분주히 무엇인가를 쫓아 다니지 않는가. 저들이 무얼 찾고 있는지 알겠는가?"
"저 사람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바쁘게 뛰고 있습니다. 벌건 눈으로 권력과 명예와 부와 사치 향락을 쫓는 자들도 있겠지만, 우리들은 실업자가 되어 산기슭이나 어슬렁거리는 것보다는 부지런히 살아가는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매우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서 열심히 찾아 다니는 것 아닐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이제 자기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道)
도는 길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니면 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이 길을 넓히지, 길이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길 아닌 곳으로 가면 가시덩굴이나 진흙탕에 빠져 고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길로 가야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人道)입니다. 요즈음은 인도보다 차도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람이 갈 길에 차들이 점점 쳐들어와 인도가 차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공자가 말한 인도는 '효제 충신'이었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스스로 최선을 다해야 하고 남에게 미더워야 한다. 이 인도를 잘 닦으면 어진 사람(仁人)이 된다. 어진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고, 남과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남의 감정과 고통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인도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仁)은 모든 도덕의 근원이다.'
차는 사람이 몰고 가는 것이므로 차도도 결국 인도입니다. 공자는 어진 사람이면 차를 타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바람이 치는 날 막뒤집힐 듯한 우산을 요리조리 가누면서 인도로 걸어가는 사람과 자가용 뒷자리에 편안히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도로 가는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그러나 공자는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걸아가는 사람에게 흙탕물을 튀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정도의 배려만 있으면 이런 불평등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길을 넓히는 데 반대하지 않으며, 때로는 새 길을 만들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장자는 공자의 말이 그럴듯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속임수라고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차도로 가도 좋고 길을 넓힐 수도 있다는 공자의 말은, '사람다운 사람'의 이름을 빌린 인간들이 길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옹호해 주고, 가난한 백성이 부역과 전쟁에 동원되어 가족과 떨어져 객지에서 죽고 마는 상황을 합리화시켜 준다고 장자는 생각하였습니다. 공자가 군대(군사력), 식량(경제력), 백성들의 신뢰(권력의 정당성) 가운데 정치가가 끝내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은 백성들의 신뢰라고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장자의 비난은 너무 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자는 '부국 강병'을 외치는 법가나 '도덕 정치'를 외치는 유가나, 춥고 배고픈 백성들의 눈으로 보면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자의 생각은 이랬습니다.
'길이란 무엇인가. 공자가 말하는 길은 진정한 길이 아니다. 진정한 길은 어떤 사람만이 만들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만 편하게 가는 그런 길이 아니다.'
한번은 장자가 문혜군이라는 왕을 초청해 놓고, 소 잡는 기술자를 강사로 내세워 도를 강의하게 하였습니다. 강사는 먼저 실기로 왕에게 시범을 보였습니다. 그의 손놀림과 자세, 칼을 쓰는 동작은 마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혜군이 경탄하며 말했습니다.
"아아, 훌륭하도다!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도 있는가?"
소 잡는 기술자가 칼을 놓고 말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이 아니지요. 제가 처음 소 잡는 일을 시작했을 때는 보이는 것이 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자 소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마음으로 소와 만날 뿐 눈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췄고, 마음만이 움직입니다. 오직 소의 결대로 칼을 움직여 살과 뼈 사이의 큰 틈을 쪼개 벌리고, 뼈와 뼈 사이의 빈 곳에 칼을 밀어넣고, 소의 몸 중 원래부터 빈 곳을 따라가니 뼈나 살이 엉겨붙은 곳에 칼이 닿는 일이 없고, 하물며 큰 뼈에 닿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솜씨 좋은 사람도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이 엉긴 곳을 베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백정은 다달이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칼은 지금 19년이 되었습니다. 잡은 소는 수 천 마리가 됩니다. 그런데도 칼날은 금방 숫돌에 갈아 낸 것 같습니다. 원래 소의 뼈마디 사이에는 빈 틈이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집어 넣으니, 거기에는 자연히 넉넉하고 넓어 아무리 칼날을 휘저어도 반드시 남는 구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19년이나 쓴 칼날이 아직도 금방 숫돌에 갈아낸 것 같지요.
하지만 살과 뼈가 얼키고 설킨 곳에서는 저 역시 어려워집니다. 두렵고 조심스럽기만 하고, 눈이 한곳에 고정되어 손놀림이 더뎌집니다. 따라서 칼의 움직임도 매우 미묘해집니다. 그래서 찢고 벌려 다 가르고 발라내면, 마치 흙덩이가 땅에 쌓이듯 고깃덩이가 쌓이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저는 칼을 들고 서서 사방을 돌아보며 흐뭇해 합니다. 그리고는 칼을 닦아 넣어 두지요."
"정말 훌륭하다. 나는 그대의 말을 듣고 비로소 양생의 비결을 알았다."
위의 예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는 빈 것이다. 그것은 무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낳고 포용할 수 있다. 만물 중 하나인 인간은 도를 따라야 한다. 도를 벗어나면 오직 스스로를 상할 뿐이다. 도를 따르지 않고 쓴 칼날이 무디어지듯이."
"도는 원래 그런 것이고, 인간이 이렇게저렇게 넓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도는 자기들이 지어낸 도이다. 그들은 '이것이 사람이 갈 길이다'하고 가르치지만 '도는 이것이다'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도는 말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도는 감각과 사유로 알 수 없다
<장자>에는 '혼돈의 죽음'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쪽 바다의 황제는 숙이고, 북쪽 바다의 황제는 홀이며, 중앙 땅의 황제는 혼돈이다. 숙과 홀이 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나면 혼돈이 지극히 대접해 주었다. 숙과 홀은 혼돈의 덕에 어떻게 보답할까 의논한 끝에 이렇게 결정했다.
"사람은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혼돈은 홀로 이것이 없으니 우리가 뚫어 주세."
그리하여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일주일째에 혼돈은 죽고 말았다.
도는 우리의 감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오관은 각기 외부 사물의 모양과 색깔, 냄새, 맛, 촉감을 받아들이지만, 도는 오관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하고 말했습니다. 감각 뿐만 아니라 생각으로도 도를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무엇을 위해 도를 가르친 것일까요?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알아야 할 것은 무한하다.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쫓는 일은 위태로울 뿐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알았다고 여기는 것은 더욱 위태롭다. 착한 일을 하더라도 유명해지지 말고, 나쁜 짓을 하더라도 형벌에 걸리지는 말라. 중도(中道)를 기준으로 삼으면 몸을 상하지 않고, 생긴 대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으며,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고, 타고난 수명을 다할 수 있다.
장자는 통이 커서 별을 따다 공기놀이를 하는 이야기나 기를 타고 우주 여행을 하는 이야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 이야기는 너무 자잘합니다. 겨우 몸 다치지 말고 오래 살자는 이야기 아닙니까? 젊은 남자들이 군대 갈 때, 어른들이 한결같이 충고하는 말과 다를 게 없습니다.
"건강이 제일이다. 몸조심하거라."
"앞에 나서지도 말고 뒤에 처지지도 마라. 그저 중간만 가라."
이런 이야기는 철학이라기보다는 비굴하고 교활한 처세술 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질서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공자의 도를 비웃은 장자의 '큰 도'는, 사실 개인의 생명과 그것의 온전한 발현을 이루어 가는 문제와 단짝입니다. 이런 점에서 유가의 문제나 장자의 문제나 모두 인간들 속의 인간의 삶의 문제였습니다. 다만 장자는 유가에서 규정해 놓은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할 길'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를 위한 철학일까요?
기계를 싫어하는 인간 기계들
어떤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주 옛날에는 여자들만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여자들이 모여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너무나 힘든 노동에 시간을 죄다 써 비린다. 이것을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를 의논했답니다. 결국 '우리들의 말에 절대 복종하면서도 힘이 세 일을 잘하는 동물을 만들자'고 결론이 났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남자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어느 시기엔가 직접 들에서 일하지 않고도 밥을 먹는 사람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어떤 숨어 사는 노인이 공자를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웃은 것이나 맹자가 "육체를 쓰는 사람이 정신을 쓰는 사람을 먹여 주고, 정신을 쓰는 사람이 육체를 쓰는 사람에게 받아 먹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당연한 관계'라고 한 것에도 이런 사정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맹자는 정신을 쓰는 사람은 육체를 쓰는 사람을 '위하여' 살아야 하고, 엄격한 자기 규율로 정의롸 도덕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훌륭한 어머니를 만난 덕택에 들에 나가 뙤약볕을 쬐면서 땅을 파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직접 경험해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장자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모양입니다. 지방 관리에게 쌀 꾸러 갔다가 푸대접 당하는 이야기, 짚신을 엮어서 생활한 이야기, 누더기를 입고 거지꼴로 위나라 왕을 만난 이야기 등이 나옵니다. 장자의 제자들 중에는 직접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사냥도 하고 고기도 잡았겠지요. 춘추 시대에 나온 철제 농기구가 장자가 살던 시대에는 이미 널리 보급되었으며, 소를 농사에 이용하고, 거름을 주는 방법을 개발하는 등 농업 생산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새 발명품 중에 물을 길어 올리는 기계가 있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 당대에 손꼽히는 부자였던 자공이 길을 가다가 한 농부를 만났습니다. 농부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가뭄으로 시들어 가는 곡식에 뿌려 주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돈버는 재주가 뛰어났던 자공은 새로운 발명품들에 대한 소식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농부에게 새로 나온 물 긷는 기계를 권했습니다. 농부는 자기도 그런 기계가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일부러 쓰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새 소식을 전해 주려 한 자공을 무안하게 만듭니다. 기계를 사용해서 편해지면 인간의 본마음이 변질된다고 하면서, 자기는 땀 흘리는 것을 일부러 선택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장자>에 실려 있는 이 이야기는 기계나 노동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기계를 사용하여 더 많이 생산하는 사회적인 변화가 생산을 담당하는 농부들에게 돌려주는 이득은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옛날 방식으로 살 때는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일한 만큼 수확하여 그에 맞추어 먹고 살았지만, 이제는 관리들이 와 세금도 내라 하고, 일하는 데도 간섭하고, 부역이나 전쟁에 끌고 가려 하니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기계가 가져다주는 편리함은 인간의 자연스런 자기 발현을 포기하는 대가로 주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기계와 인간의 문제인 동시에 인간과 인간의 문제였습니다.
사실 기계는 오히려 묵자 학파나 장자 학파에서 더 잘 만들었습니다. 고대인들도 자동으로 일하는 기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 시기 문헌에는 전쟁 무기용 발명품들도 나오고, 용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3일 밤낮을 자동으로 날아다닌 모형 비행기 이야기도 나옵니다.
장자의 시대보다 뒤에 쓰여진 것이지만, 역시 도가 사상가들의 저술인 <열자>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나라 제5대 천자 목왕이 서쪽 제후국들을 둘러보는 길에 어느 나라에서 언사(偃師)라는 이름을 가진 기술자를 선물로 받았다. 그는 천자를 위해 특별히 솜씨를 발휘하여 꼭두각시 인형을 만들었다. 걸음걸이도 능숙하고 몸놀림도 능란하여 살아 있는 사람과 다름없었다. 턱을 움직여 노래부르고 손을 흔들어 춤추는 모양을 보고, 천자는 진짜 인간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런데 연기를 한 차례 끝낸 이 인형이 천자를 모시고 있는 총회에게 윙크를 하는 게 아닌가.
천자는 크게 노하여 당장 언사를 즉이려 하였다. 언사는 벌벌 떨면서 인형을 풀어헤쳐 천자에게 보였다. 가죽, 나무, 아교, 옻, 백흑(白黑), 단청(丹靑)을 합쳐서 만든 것이었다. 천자가 하나하나 살펴보니, 안에는 간, 쓸개, 심장, 폐, 비장, 신장, 창자, 위장이 있고, 겉에는 근육과 뼈, 마디, 가죽과 털, 이빨과 머리털이 있는데 모두 모조품이었다. 천자가 시험 삼아 인형의 심장을 떼어내니 입으로 말을 하지 못했다. 간을 없애니 눈으로 보지 못했다. 신장을 없애니 발로 걷지 못했다.
천자는 비로소 기뻐하며 말했다.
"사람의 기술이 이처럼 조물주와 같을 수 있는가!"
진짜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완벽한 인형을 상상한 도가 사상가들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왕과 대신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억지롤 물렁뼈가 되어야 하는 광대를 대신할 기계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없었을까요?
<장자>에 매미 잡는 사람 이야기, 호랑이 사육사 이야기, 활 잘 쏘는 사람 이야기 등등이 나오는 것은, 이 책을 쓴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웠거나 애착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근대 이전의 기술은 '예술'의 의미를 가지듯이 <장자>에는 예술로서의 기술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장자의 무리들은 육체를 쓰는 사람들의 편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라면 철저하고 한맺힌 것이어야 할 텐데 어째서 장자의 이야기는 그토록 화려하고 황당한 것일까요?
장자의 우주 여행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다.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은 몇 천 리인지 알지 못한다. 한번 떨쳐 날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쪽 바다로 옮겨 간다. 남쪽 바다는 하늘의 못(天池)이다. <제해>는 괴상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 "붕이 남쪽 바다로 옮길 때, 물길을 갈라치는 것이 3000리요, 요동쳐 오르는 것이 9만 리이며, 여섯 달을 가서 쉰다"고 하였다.
매미와 산비둘기는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용을 써서 날아도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가지에 겨우 오르며, 때론 거기에도 이르지 못해 땅에 떨어지는데, 어찌 9만 리를 솟아올라 남쪽으로 간단 말이냐."
야외로 소풍가는 이는 세 끼 먹고 돌아와도 배가 부르며, 백 리를 가는 이는 밤새 양식을 찧고, 천 리를 가는 자는 석 달 동안 양식을 모은다.
이 두 벌레가 무엇을 알겠는가?
너무도 유명한 <장자> 첫문장입니다. 큰 뜻을 품고 길을 떠나는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할 때 쓰는 '붕정 만리(鵬程萬里)'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조선 시대 실학자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매우 신기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한 뒤로는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를 벗어나는 데 이용하였습니다. 개화기 선각자들도 지구의를 갖다 놓고 빙빙 돌리면서 사람들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천하의 중앙은 어느 나라일까요? 중국일까요, 미국일까요? 이리 돌리면 이 나라고, 저리 돌리면 저 나라가 됩니다. 우리도 부강해지면 천하의 중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거나 우주가 넓다는 생각은 이미 2300년 전에 장자의 머리 속에 있었습니다. 장자는 자기의 우주 여행 보고서를 이렇게 썼습니다.
"하늘의 푸르고 푸른 것이 자기의 본래 모습일까? 저쪽에서 이 땅을 보라. 그러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자는 어떤 우주선을 타고 갔을까요? 지네는 다리가 많은데도 뱀보다 느려 뱀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발 없이 빨리 가는 뱀은 형체도 없이 자기보다 빠른 바람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발도 없고 형체도 없지만, 우주의 끝까지 달려갈 수 있습니다. 장자는 자기의 정신을 천지 자연의 기에 태우고 여행한 것입니다.
맹자처럼 정신을 쓰는 사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쓰는 사람도 생각을 합니다. 농부도 이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계가 편리하지만 자기를 빼앗아 간다는 것도 알고, 위정자들이 어떻게 도둑질하는지도 압니다. 장자는 이 정신을 타고 천지를 왕래하였습니다.
맹자가 정신을 쓴 것은 집안 걱정, 나라 걱정, 헐벗고 굶주리고 외롭고 약한 삶들을 걱정한 것이었지만, 장자가 저 위에 올라가서 보니 두 나라의 전쟁이란 것이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는 꼴이었습니다. 좀더 올라갔더니 땅더어리는 물과 흙으로 되어 있고, 다시 더 올라갔더니 마치 하나의 달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더 넓게, 더 멀리 보고와서 세상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육체를 써, 서류나 장부를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동료들에게 정신을 쓰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는 어디에 있는가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도는 어디에 있는가?"
"없는 곳이 없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지적하여 말해 보시오."
"쇠파리에 있다."
"도가 어찌 그렇게 지저분한 데 있는가?"
"가라지나 피 같은 잡초에 있다."
"어째서 더 하찮은 것에 있는가?"
"옹기 조각에 있다."
"왜 점점 더 심해지는가?"
"똥 오줌에 있다."
"....."
장자가 말하였다.
"당신의 질문은 본질을 물은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물을 벗어나 도를 이야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지극한 도는 이와 같고, 위대한 말도 이와 같다."
도는 바로 우리들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것은 고상하고 깨끗하고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 우리가 만지는 그릇 속에, 농부가 이용하는 거름 속에, 우리와 더불어 사는 하찮은 미물들 속에 있습니다. 도는 많이 배운 사람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육체를 쓰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이들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공자나 맹자가 말하는 도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고, 땀흘리며 일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질까요?
도를 분열시킨 것
<장자> 33편 중 두 번째 편의 제목은 '제물론'입니다. 제물론은 모든 이론을 가지런히 한다, 다시 말해 서로 다투는 온갖 의견들을 잠재운다는 뜻입니다. 전국 시대는 나라간의 전쟁과 학파간의 이론 경쟁이 치열한 시기였고, 장자는 이러한 상황이 평화와 공존의 상황으로 바뀌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인들이 자기 주장을 퍼뜨리고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나설수록 세상은 더 혼한스러워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짝을 여는 도둑에 대비하려면 반드시 끈으로 묶고, 자물쇠를 채워야 한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현명함이다. 그러나 큰 도둑은 궤짝을 지고 상자를 들고 주머니를 둘러메고 달아나면서 오히려 끈과 자무로시가 약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현명함이란 결국 큰 도둑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아닌가(지식인이란 자들은 나라를 전쟁으로 빼앗는 군주들의 종이 아닌가)?
도덕은 명예욕 때문에 흔들리고, 지략은 전쟁 속에서 나온다. 명예욕은 서로를 파괴하고, 지략은 전쟁 무기가 된다. 이 두가지는 흉한 것이니 추구할 만한 것이 아니다.
장자는 침략 전쟁으로 나라를 훔치는 군주에게 봉사하는 지식인들의 이론이 어떠한 맹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깊이 문제 삼았습니다. 그는 당시 지식인들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론들은 어떻게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너와 내가 논쟁을 하여 네가 이겼다면, 과연 너는 옳고 나는 틀린 것인가. 내가 너를 이겼다면, 과연 나는 옳고 너는 틀린 것인가.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없어 제삼자를 부른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바르게 판정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 너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너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나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다르므로 어떻게 바르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와 의견이 같은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같으므로 이렇게 바르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너와 나와 제삼자가 모두 서로 알 수 없는데, 또 다른 사람을 부른다고 되겠는가.
논쟁자들은 왜 논쟁을 마무리할 수 없는 걸까요? 그것은 옳고 그름의 표준을 삼을 수 있는 기준이 없고, 언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분열시키고 시비를 일으키는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하나라면) 이미 하나라고 했으니 말한 것이 있는가. 이미 하나라고 했으니 말한 내용이 있지 않은가. 하나인 세계와 하나라는 말이 있으니 둘이 되고, 둘과 하나가 셋이 된다. 이 이하는 계산이 뛰어난 사람도 다 헤아릴 수 없는데, 처음에 여럿일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결국 언어를 가지고 세계를 말하면, 하나인지 둘인지도 합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자는 통일된 전체상을 보지 못하고, 만물을 낱낱이 구분하여 한 모퉁이를 본 것을 가지고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논쟁을 거부하였습니다.
유명한 논리학자 혜시는 장자의 친구였습니다. 둘은 이런 논쟁을 하였습니다.
장자와 혜시가 호의 다리 위에서 한가하게 거닐고 있었다.
장자 : 피라미가 자유롭게 놀고 있구나.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지.
혜자 :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 줄 아는가?
장자 :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을 아는가?
혜자 : 나는 자네가 아니니 자네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니니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틀림없네.
장자 :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세. 자네가 나에게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 줄 아느냐고 물은 것은, 이미 내 말을 알아듣고서 물은 것이네. 어떻게 알았는지 말하겠네. 나는 이 물가에서 알았네.
느긋한 마음으로 산책하면서 무심코 한 말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혜시와 그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벌건 얼굴로 대꾸하는 장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푸르른 수풀과 맑은 시내, 싱그런 바람을 맞으며 장자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을 아무 부담없이 보고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그리는 유려한 곡선과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그 모습을 보고 장자는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고, 자유스런 모습이라고 느꼈습니다. 혜시도 장자의 기분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지만 습관적으로 말장난을 걸었습니다. 장자는 이런 말장난이 싫었습니다.
장자는 여기서도 만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자기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장자는 물고기와 통할 수 있었습니다. 만물이 하나임을 아는 사람만이 시비를 초월하고, 선악과 생사를 초월하여 무한한 자유의 세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 세상에 쓸모 없는 존재는 없다
장자의 '만물은 연관되어 있다'는 사상은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기초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꽃은 향기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똥은 더럽고 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꽃이란 식물이 물과 햇빛과 영양분을 받아들여 피운 것이고, 식물에게 좋은 영양분은 똥에 들어 있습니다. 꽃은 줄기나 잎, 공기나 물, 거름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연관을 아는 사람은 단순히 꽃은 아름답고, 똥은 더럽다고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구분되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추한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또 좋아함과 싫어함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고, 싫은 것을 버리게 합니다. 이러한 분별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고 싫은 것을 벗어나려 경쟁하고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연관되어 있고 세계가 하나임을 아는 사람을 지극한 사람, 달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없습니다.
장자의 친구 혜시가 선물로 받은 박씨를 심었는데, 지금까지 보지 못한 큰 박이 달렸습니다. 너무 커서 바가지를 만들면 펑퍼짐해서 물을 뜰 수가 없고, 물을 담으면 무게를 견디지 못해 쪼개졌습니다. 쓸모없는 박이라고 투덜거리는 혜시에게 장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호수에 띄워 놓고 배처럼 쓰지 않느냐?"
박은 바가지를 만들어 쓴다는 사람들의 분별, 선입견에 갇혀서 너무 큰 박은 쓸모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직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장자는 사람들이 인위적인 분별 규정 때문에 세계의 본모습을 못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만 따진다면, 우리가 걸어갈 때 필요한 길의 너비는 30센티미터면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강 위에 30센티미터 폭의 다리를 만들어 놓으면, 곡예사의 연기 무대는 될지 모르나 보통 사람들은 다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장자는 이런 비유를 써서 우리가 밟지 않는 땅도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주관적인 편견을 벗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자는 사람들이 미인 대회를 열어 고르고 고른 미인이라도 물고기가 보고는 물 속으로 숨고, 새들에게 다가가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이 보고는 결사적으로 도망칠 것이니, 미인 대회에서 뽑은 미인은 진정한 미의 기준에 맞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견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판단 차이를 비유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장자는 세상에서 소외된, 세상의 기준에서 비정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온전한 덕과 인간미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주장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름 모를 풀 한 포기나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싫어하고 미워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서로를 포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상대주의의 한계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시비, 선악, 미추의 기준을 허물어 버릴 때, 우리에게 어떤 기준이 남을까요? 장자가 말한 대로 옳고 그름, 착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이 우리가 지어 낸 환상일 뿐이고, 세계의 본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 물음이 너무 철학적인 논쟁을 몰고 온다면, 한 걸음 물러나 장자의 말대로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보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대상이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특별히 어떤 것을 선택하려고 애쓸 필요도 의욕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달동네에 살든 고급 아파트에 살든, 월급을 50만원 받든 200만원 받든, 걸어다니든 전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든, 남에게 존경을 받든 비난을 듣든, 직위가 높든 낮든 아무 차이도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지금 추구할 일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생각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삶과 죽음도 같은 것인데 우리는 왜 살까 하는 질문에 부딪치게 됩니다.
우리의 이런 질문에 대한 장자의 대답은 '그대로 좋다', '모든 것이 좋다'일 뿐입니다. 그러나 장자에게도 기준은 있습니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을 버리고 자연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도가 사상에서 '인위'와 '자연'이란 말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자연'이란 저절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소가 네 다리를 가진 것은 자연이고, 코뚜레를 하고 멍에를 쓴 것은 인위입니다.
인간의 행동에서 저절로 그러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자연스러 행동'이라고 할 때 그 기준은 모호합니다. '자연스럽다'는 것도 우리의 주관적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노자나 장자의 '자연'은 인간 중심의 편견을 벗어난 객관적인 무엇이고, 인간은 그것에 대하여 수동적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 보입니다. 때문에 순자는 장자의 사상을 '자연에 가려서 문명을 팽개친 사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순자는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 인간의 삶에 이용하여 문명을 이룩하는 것이 동물과 다른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순자의 입장에서 보면, 장자의 사상은 인간을 조직하고 관리하여 문명을 건설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주체적 인간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오히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그들이 끌고 가는 방향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장자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옹이가 많고 구불구불한 수천 년된 고목을 보고 "이 나무는 사람들이 쓸모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서 쓸모 없는 것의 쓸모 있음을 강의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주막에서 쉬는데, 주인이 잘 울지 않는 닭을 '쓸모가 없다'고 목을 비트는 것을 보고 장자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사이'에 처신해야 할 것이라고 강의하였다.
학자들은 장자의 사상을 오래 살기 위한 처세술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장생 불사하는 신선 이야기나 특별한 수련을 하여 초인이 되는 이야기는 장자의 아류들이 지어 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장자는 삶과 죽음의 구별조차도 거부한 사상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논쟁도 실은 허무한 것입니다. 장자는 자신의 온갖 주장들도 하나의 헛된 이론일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호랑나비의 꿈'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는, 그리고 틀림없다고 믿는 주장들이 실은 꿈일지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세계가 참세계고, 우리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이 세계는 하나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꿈에서 깨어나야 하고, 큰 꿈에서 깨어나야 참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장자의 사상을 상대주의라고 합니다.
장자학파 사람들은 당시의 현실 세력과 정치 문화의 중심에서 소외된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자신들의 철학 사이에 커다란 틈을 보았고, 자신들의 철학과 현실적 삶이 이중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장자학파 안에서 현실 타협과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사상가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장자의 사상이 상대주의가 아니라 외부 세계의 상대성을 극복하고 세계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주체성이 강한 사상이라고 봅니다.
장자가 남긴 것들
한번은 혜시가 관직 생활을 하고 있는 나라에 장자가 찾아갔습니다. 혜시는 장자를 자기 나라 왕에게 소개하길 꺼렸습니다. 그때 장자는 혜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봉황새를 아는가. 이 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아니면 않지 않고, 맑은 이슬이 아니면 먹지를 않는다네. 솔개가 썩은 쥐 한마리를 잡았는데 마침 지나가던 봉황새를 보고는, 자기 먹이를 빼앗길까 허겁지겁 했다네. 그 솔개 꼴이 바로 자네 꼴일세."
세상의 명예와 성공은 장자에게 웃음거리일 뿐 안중에도 없는 일입니다. 아마 제자들이 지어낸 말이겠지만, 권세에 아부하여 출세한 인간을 혹독하게 비난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자의 이웃에 크게 출세하여 수레 수십 대를 끌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이 있었답니다. 장자가 심술이 났는지 그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자네가 크게 출세했다니 축하하네. 그런데 소문에, 그 나라 왕의 종기를 짜 주면 수레를 한 대 주고, 등창을 입으로 빨아 고름을 짜내주면 수레 다섯 대를 준다던데, 자네는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게 많은 수레를 얻었나. 왕의 치칠이라고 핥아 준 건가."
우리는 장자가 정확히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알지 못하고, 죽어서 땅 속에 묻혔는지 하늘로 날아갔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장례를 의논하는 제자들에게, "땅 속에 묻으면 굼벵이와 벌레들이 파먹고, 산에 버리면 짐승과 새들이 먹은들 어떤가. 땅을 요로 삼고, 하늘을 이불 삼고, 해와 달과 별을 무덤 장식품 삼겠네"하였다하니 역시 장자다운 생각입니다.
장자의 사상은 중국의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고,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 불교의 특징인 선불교로 자리잡는 데 큰 매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른바 '선불교'는 인도의 불교와 장자 사상의 결합이라고 합니다. 또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정치 권력의 중심부에 참여하지 못한 소외된 집단의 이론에서 출발하여 그 정서가 민중들에게 잘 들어맞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 200년 주기로 일어난 농민 봉기에서 하나의 혁명 정신으로 나타났습니다. 위진 남북조와 수당 시대에 불교와 도교가 성행할 때는 불로 장생과 신선 세계를 꿈꾸는 신비주의적 사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한편 현실 정치를 등지고 자연 속에 은둔하는 도가적 전통은,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탄생시켜 연단술, 점성술 등을 통해 중국의 의학, 천문학, 농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장자>에 그림자가 싫어서 계속 도망가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그림자도 더 빨리 따라오니 그는 더 빨리 달아나려고만 합니다. 장자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당신이 나무 그늘에서 쉬면 그림자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라고.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보면서 우리는 장자의 이러한 처방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무인 우주선을 보내 태양계를 탐사하고 전파 망원경으로 우주의 끝을 보려고 합니다. 수십 킬로미터의 입자 가속기를 설치하여 우주의 시초를 밝히려 하며, 유전 암호를 해독하여 생명의 신비를 벗기려 합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굶어죽는 사람이 수천만을 헤아리며, 핵의 위협과 공해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도가 점점 높아진다고도 하고, 오존층이 파괴되어 극지방에 가까울수록 백내장 같은 눈병이 훨씬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지금의 농토가 사막으로 변해 갈 것이라고 하고, 쓰레기가 인간을 덮어 버릴 것이라는 경고도 나옵니다.
인간이 개발과 발전이라고 추구한 노력이 결국 이런 문제만 낳는 것이라면, 인간을 쓰레기를 늘리기만 하는 지구의 오염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장자는 문명의 그림자인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면 나무 그늘 아래서 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대체로 인간을 더욱 편하게 살 수 있게 하면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길이 과학 기술의 발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자의 소극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자가 추구한 이상은, 꿈은 현실보다 너무 높고 힘은 현실보다 너무 약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다만 현대인들은 자신이 누리는 편리함과 자유로움 가운데 사치스러운 것은 없는지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자가 제기했던 주체의 해체 방법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 온 가치가 한 바탕 꿈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가 조작해 낸 욕망의 굴레 속에서 진정으로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저 통속적인 목표를 향하여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인간이 소의 코를 꿰고 말에 재갈을 물릴 때 이미 예고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소와 말을 옥죄기 시작할 때 그것이 비자연이며 도가 아니라고 경고한 사상가가 장자입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장자의 사상은 균형잡힌 사상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술가는 될지언정 과학자는 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견디기 어려운 현실의 무게를 정신적으로 견디려 하였습니다. 현실의 모순을 누구보다 잘 감지하였으면서도 한 눈을 감고 지나치려 하였습니다. 때로는 모두 틀렸다고 하고 때로는 모두 옳다고 하여 현실적 대결의 어느 편에 서기 어려웠습니다. 장자 사상의 해체적 성격은 역사 속에서 영원한 재야 세력으로 남을 듯하였지만,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이미 지배 계층 속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장자라는 2300년 전의 어느 육체 노동자가 틈틈이 정신 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생각의 단편들을 훑어보았습니다. 장자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썼으리라고 생각되는 '천하'편의 장자에 대한 평가를 소개하는 것으로 강의를 맺으려 합니다.
세계는 항상 홀연히 흘러가니 일정한 형태가 없다. 모든 존재는 무상하게 변화해 가는 것이다.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죽음인가? 나는 자연과 함께 가는 것인가? 정신은 어디로 움직여 가는 것인가? 그들은 훌훌 어디로 가고 총총히 어디로 떠나는가? 모든 존재는 눈앞에 펼쳐 있으되, 돌아갈 곳을 모르는구나! 옛날 도술에 이러한 것이 있었으니 장주(장자)가 듣고서 기뻐하였다.
그는 언제나 터무니없는 환상, 황당한 이야기, 끝없는 변론으로 제멋대로 사설을 늘어놓지만, 편견을 고집하지 않았고, 한쪽 면으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더러워서 정중한 말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두서없이 흘러가는 말로써 변화 무쌍하게 담론하고, 옛 성현의 말씀으로 진실을 믿게 하고, 비유로써 도리를 펼쳤다.
그는 홀로 천지 자연과 더불어 정신을 교류하였으나 스스로 뽐내어 다른 사물을 경시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세속에 섞여 살았다.... 그의 정신은 위로는 천지를 만든 자와 함께 노닐었고, 아래로는 삶과 죽음, 처음과 끝을 넘어서 존재하는 자연과 벗이 되었다. 그의 철학 사상은 원대하고 넓고, 깊고 무한하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조화 적절함에 있으니,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모든 변화에 적응하고 모든 존재를 해석함에 있어 그의 이론은 무진장하다. 그 이론의 전개는 끝이 없고 홀홀 망망하여 다 파악될 수 없도다!
첫댓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