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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양반들도 맥을 못 춘다는 개평마을로 향한다. 조선 시대 성리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일두 정여창(1450~1504)과 옥계 노진(1518~1578)이 배출된 전형적인 양반 씨족 마을이다.
개평마을은 함양군 내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반촌이다. 정여창 같은 대유학자를 배출한 것은 물론 상당수의 유명인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신라 때 최치원이 함양 태수였던 것을 비롯해 김종직, 박지원 등이 지방 관리로 함양을 거쳐 갔다. 이처럼 많은 명사의 발자취가 남겨진 곳이므로 영남 유림의 본산을 꼽을 때 좌 안동, 우 함양이라고도 일컫는다.
가족 및 친족 제도로 반영되는 문중의 범위와 성격은 조선 전기와 후기가 크게 다르다. 고려 시대는 불교 의례와 비종법적인 친족 체제가 기본이었는데, 조선 전기에 성리학이 보급되면서 점차 성리학적인 예제로 개혁되는 과도기에 들어간다.
조선 후기의 가장 큰 변화는 장자 상속을 기본으로 하는 차등 상속 때문에 일어난다. 장자 상속이란 재산을 장자에게 몰아주고 제사를 전담하게 하는 것이므로, 같은 혈족 중에서도 제사를 주도하는 종가를 중심으로 주도권이 강화되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이성 친족이나 방계 친족은 마을 조직에서 서서히 이탈해 동족 마을의 위상을 더욱 크게 한다. 이런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개평마을이다.
개평마을은 도숭산과 산에서 흘러내리는 두 개울이 만나는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도숭산 뒤쪽 천황봉에서 뻗어 내려오는 주맥이 셋 있는데 하나는 남쪽으로 향해 함양읍의 토대를 마련하고, 하나는 북으로 향해 안음현의 토대를 마련하며, 마지막 하나는 두 줄기의 가운데로 향해 도숭산을 거쳐 개평마을의 기를 형성한다. 이 지형이 '介(개)'자 모양이라 개화대 또는 개우대 마을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개평으로 불린다.
개평마을의 역사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원래는 경주 김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14세기에 정여창의 증조부인 정지의가 처갓집인 이곳으로 들어와 근거지를 잡기 시작했고, 곧바로 풍천 노씨도 입향했다.
풍천 노씨 입향조인 노숙동이 함양에 입향한 내력은 전설적이다. 노숙동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앞 종바위 근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마을에 입거한 김점이 집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에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깨어났다. 무언가 길조가 있다고 느낀 그는 하인을 시켜 주변을 살피게 했고, 종바위 위에서 자고 있는 노숙동을 발견했다. 김점은 그를 불러오게 해 융숭하게 대접했고 추후에 사위로 삼았다. 김점은 정복주의 사위이고 정복주는 정여창의 할아버지다. 즉, 하동 정씨가 먼저 개평에 입향하고 사위인 김점의 사위로 풍천 노씨가 들어온 것이다.
개평마을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양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일두 정여창과 문효공 옥계 노진이 배출된 이후부터다. 두 사람 모두 남명 조식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일두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도학자인 동시에 성리학자로 이기론, 심성론, 선악천리론 등의 사상을 기초로 소학과 가례의 실천적 효행에 모범을 보였으며, 특히 부모에 대한 효행을 삶의 근본으로 삼았다.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당하는 고난을 받았지만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옥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1년(1546)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박사, 전적, 예조낭관을 거쳐 지례 현감으로 있었으며 청백리로 뽑힐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수찬, 교리, 지평, 부응교, 직제학, 형조 참의를 거쳐 도승지, 진주 목사, 충청도 관찰사, 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선조 8년(1575)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했고 그 후에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취임하지 못했다. 저서로 『옥계문집』이 있으며 남원의 창주서원, 함양의 당주서원에 제향되었다.
하동 정씨의 경우 서인에서 노론으로 일괄적인 흐름을 보이는 반면 풍천 노씨는 주로 남인이었지만 서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즉 하동 정씨는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위치를 공고히 했지만 풍천 노씨는 학문적 실천과 실리적인 면을 강조했다. 이는 풍천 노씨가 하동 정씨보다 상대적으로 열세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차이는 양 문중의 중앙 정계 진출은 물론 개평 마을에서의 활동 영역에서도 은연중 엿보인다.
우선 하동 정씨가 풍천 노씨보다 건축 활동에서 우위를 띤다. 하동 정씨의 대지 규모는 풍천 노씨보다 월등히 크다. 하동 정씨가 마을 내에서 주도적인 입지를 갖고 있고 풍천 노씨는 이들과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결과는 두 문중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하동 정씨는 위세적이고 탄탄한 배경을 바탕으로 종파와 종손 중심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반면, 풍천 노씨는 상대적으로 지파와 지손 중심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즉, 풍천 노씨는 개평마을과 떨어진 곳에 많은 씨족이 분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평마을이 남다른 전통 마을인 이유는 신분별, 문중별로 영역이 확연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반가의 주거지는 중앙 부분에 기다란 영역을 이루면서 평민들의 공동 영역과 명백하게 구분된다. 그러면서도 양 문중의 공동 장소가 다른 축을 이루고 있다. 하동 정씨는 도곡서원, 대종가, 만귀정 등이 선산인 숭안산을 향해 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풍천 노씨는 대종가, 동산정사 등이 선산인 주곡산을 향해 축을 형성하고 있다.
평민의 주거지는 북쪽으로는 덕암들과 경계를 이루면서 남쪽으로는 마을 초입부터 옥계천을 따라 주변부에 형성되었다. 마을 초입의 정자나무, 동신제 장소인 신선대, 마을 중간 부분에 위치한 우물도 평민용이다. 이들이 거주했던 가랍집이 비록 허물어진 상태이지만 개울 언저리와 건너편에 남아 있다.
양반과 평민의 위계는 마을 부락제를 봐도 알 수 있다. 개평마을 부락제는 섣달 그믐날부터 마을 주민이 농악 및 풍물을 울리며 가가호호 방문해서 조금씩 쌀을 추렴해 당산제를 준비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정월 대보름 마을 사람 중에서 선정된 제관 3명이 마을 초입에 있는 정자나무, 신선대, 종암우물 주위 등 세 곳에서 동시에 당산제를 올린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제 3일 전부터 궂은 것을 보지 않고 비린 것을 먹지 않는 등 마음을 깨끗이 비웠다고 한다.
당산제에 참가한 사람은 사대부 양반이 아니고 평민뿐이었다. 양반들은 마을에 자신들만의 공동 장소, 즉 문중의 대종가가 있으므로 굳이 부락제에 참가할 필요가 없었다. 남자들은 사랑대청에 모여 공동 관심사를 협의했고 여성들도 안채에서 교류했다. 물론 마을에 있는 정사와 서원도 양반들의 활동 장소였다. 함께 살았지만 부락제조차 함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대의 양반과 평민의 위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개평마을에도 현대화의 물결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급격한 사회·경제 구조의 변화로 많은 주민이 타지로 전출해 인구가 감소하고 건물들이 퇴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이 정도의 전통적 환경이 조선 초기부터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마을은 거의 없다. 아직도 크고 작은 한옥 60여 채가 남아 있고 100여 가구에서 2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대학 교수만 150명을 배출했다고 한다. 600년이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개평마을의 상징성과 중요성을 이해할 것이다.
개평마을을 들어서면 오른쪽과 왼쪽으로 큰길이 있다. 오른쪽은 새로운 문명의 혜택으로 만들어진 길이며 중요 민속자료 제186호인 하동 정씨 대종가가 보인다. 그 아래로 풍천 노씨 대종가, 오담고택, 노참판댁 고가 등 한옥들이 흙담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있으므로 한옥 박물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가장 중심이 되는 자리에 정여창 고택이 있으므로 이곳부터 답사를 시작한다.
정부의 공식 지정 명칭은 문화재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인 '함양 정병옥 가옥'이지만 하동 정씨 대종가, 정여창 고택, 일두고택, 정병옥 가옥 모두 같은 곳이다. 함양은 선비와 문인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으며 대표적인 인물이 일두 정여창이다. 조선조 5현이자 동국 18현으로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개 향교, 9개의 서원에서 모시는 성리학의 대가다.
고택은 1570년 정여창 생가 자리에 지어진 이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 번 중건되었다. 풍수에서는 대문을 기의 출입구로 여겼으므로 건물에서 대문의 방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대단히 중요시했다. 솟을대문 주위의 담장은 대문과 함께 사신사 역할을 한다. 이처럼 살림집을 풍수로 풀 때 집의 주된 건물은 혈, 마당은 명당이 된다.
솟을대문 앞에는 하마비가 자리해 주인의 명망을 알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솟을대문에는 벽사의 의미가 있는 호랑이 뼈나 가시가 많은 오가피나무 등이 걸려 있는데, 이곳에는 나라에서 내린 정려 패인 효자문 문패가 다섯 개 걸려 있다. 정려문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안채로 가는 일각문이, 오른편으로 넓은 사랑 마당에 잘 다듬은 디딤돌과 소맷돌을 갖춘 사랑이 보인다. 비교적 높은 축대 위에는 사랑채가 있고 안사랑채로 이어지는 쪽담 아래에는 두 그루의 구불거리는 노송이 사랑채 누마루에 기대 있다.
사랑채 방문 위에 천장까지 닿도록, 소위 대문짝만 하게 써놓은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집안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충효절의'는 흥선대원군이 썼고 '백세청풍'은 김정희의 글씨라고 하나 고증은 안 된 상태다. 대문채는 쪽마루를 두어 좌우 두 칸씩 네 칸의 방을 꾸미고 왼쪽 끝에 사랑 측간을 만들어놓았다.
사랑채 계단에 올라서면 디딤돌인 섬돌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꽉 맞게 잘 다듬은 장대석을 2단으로 쌓은 모습이 보인다. 신을 벗고 드나들기 편하게 널찍한 디딤돌을 만든 것이다. 기단이 높아 건물이 높게 들려 있는 듯하므로 마루 아래를 널로 막아 보이지 않게 했다. 사랑방 후면에 붙어 있는 마루방은 사랑방과 미닫이로 연결되어 있다. 안채로 통하는 마루는 청판을 이용한 장마루 형식으로, 대청에 사용하는 우물마루와는 다르다.
사랑채는 ㄱ자형에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 크기로 동쪽에 누마루를 꾸며 놓았다.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과 중문 아래채가 나란히 一자형으로 결합된 형태다. 전후퇴를 넓게 만든 사랑방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두 개의 건넌방과 누마루를 내어 달았다. 중문 아래채와 연결되는 오른편에는 두 칸의 대청마루를 만들고 툇마루를 꾸몄는데 이 집의 특별한 마루 형식이다. 뜨거운 여름, 툇마루와 연결되는 사분합을 들어 처마에 걸면 네 칸 크기의 커다란 대청마루로 변신한다.
반갓집답게 사랑방은 겹집 평면으로 고방을 붙여 서재로 사용했다. 안채 쪽으로 커다란 광창을 만들고 창호지를 발라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막쌓기를 한 기단 위에 소맷돌을 갖춘 돌계단에 올라서면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해 원기둥을 세운 겹처마 팔작지붕인 5량 집이 드러난다. 겹처마는 네모나게 각진 부연을 사용했다. 이 부재를 대면 처마가 길어지고 처마 끝이 약간 솟아나 날렵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사랑채도 정여창 고택의 위세를 한껏 보여주지만 더욱 유명세를 타는 것은 사랑채 앞에 조성된 석가산이다. 이는 자연석을 이용해 삼봉형 주산을 높게 만들고, 좌우에 주산보다 낮은 각각의 높이로 봉우리를 만든 후 산봉 아래 깊은 석곡을 만들어 매화 등을 심은 조원이다. 풍수적인 비보로 쌓는 조산과 다른 점은 규모가 훨씬 작고 관념적이라는 것이다. 아담한 규모이지만 산과 바위, 물과 나무가 모두 들어 있다. 동양 전통의 신선 사상을 조형물로 나타낸 것으로 정여창 고택은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석가산은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생겼으며 한국에서는 백제, 신라 때 활발했고 일본은 백제에게 전수받아 정원의 골격을 이루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특이한 것은 조원은 대체로 후원에 두는데 이곳에서는 사랑 마당 담장 옆에 조성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석가산은 사랑채의 누마루에서 잘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가 각각 남서향과 동남향으로 방향을 달리하는데 바깥의 풍경을 석가산을 통해 빌린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사랑채 옆 곳간채의 중간에 세워진 일각문을 거쳐 안채 영역으로 들어가는데, 일각문에 들어서면 또 한 번 중문을 통과해야 한다. 남향한 一자형 안채는 경북 지방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달리 아래채와 곳간채, 사랑채가 일정한 여백을 두고 개방적으로 분할되어 있다. 일각문을 지나 사랑채 끝에 연결된 중문 아래채의 왼쪽으로 네 칸짜리 판자벽으로 만들어진 안곳간채가 나온다. 안채의 오른쪽으로는 안사랑채가 있고, 안채 뒤편에는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된 겹처마에 단청이 화려한 세 칸짜리 사당이 있다. 사당 옆에는 다섯 칸에 두 칸 크기의 큰 곳간채가 있다.
사당이 안채 뒤쪽에 있는 것이 이색적인데, 하동 정씨의 대종가이므로 수많은 제사를 원활하게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주자가례』에 "집을 지을 때 다른 것보다 사당을 먼저 건립하고 위치는 정침의 동쪽으로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는데도, 조선 전체를 통해 명가 중의 명가라고 불리는 하동 정씨의 자택에서 변화를 꾀한 것이다. 살아가는 데 실리적인 면을 무시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안채 대청마루에는 정여창 고택에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선비 집안이니 가세가 청빈할 수밖에 없으므로 주인은 가마니를 짜는 등 손수 일을 했다. 작업하는 동안 조명 삼아 관솔불을 지펴놓았는데 관솔이 힘차게 타오르니 받침돌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뜨거워진 돌은 마루의 장귀틀을 꽈배기처럼 뒤틀리게 했는데, 장귀틀이 그렇게 된 뒤부터 재산이 불 번지듯 불어났다고 한다. 이는 부지런한 자가 누린 재복이라고 풀이되며, 후손들은 선조들이 노력한 흔적을 두고두고 알려주기 위해 뒤틀린 귀틀을 갈아 끼우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한다.
정여창 고택에는 또 다른 전설이 있다. 아주 가난하던 시절 안주인이 밭에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뱀 한 마리가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길을 앞질러 갔다. 마치 길을 안내하는 듯이 한참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는데 뱀이 찾아간 집이 바로 자기 집이었다. 안주인은 뱀을 행주치마에 싸 성주님으로 모시도록 항아리를 마련했다. 지금도 곳간 깊은 곳에 은밀하게 모셔 놓은 성주 단지가 있다고 한다.
안채 서쪽 끝에는 부엌이 있는데, 부엌이야말로 주택에서 둘도 없이 중요한 공간이다. 『임원경제지』에서는 부엌을 우주의 원리로 해석했다.
"길이는 일곱 자 아홉 자로 하니 위로는 북두칠성을 본뜨고, 아래로는 구주(九州)에 대응함이요, 너비는 넉 자이니 사시(四時)를 본뜬 것이요, 높이는 석 자이니 삼재(三才)를 본뜬 것이다. 아궁이의 폭은 한 자 두 치이니 열두 시를 본뜬 것이요, 두 개의 솥을 앉힌 것은 해와 달을 본뜬 것이요, 부엌 고래가 여덟 치인 것은 팔풍(八風)을 본뜬 것이다."
이 집의 안채도 이 규칙을 최대한 따르고 있다. 부엌의 상부에는 안방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다락을 두었고, 툇마루 끝의 부엌 옆에는 미닫이 창살이 정교하고 세련된 마루 벽장이 있다. 부엌 북쪽에 있는 미닫이 광창이 부엌을 밝게 해준다.
정여창 고택을 정리하면 안채와 아래채, 사랑채와 곳간채 등 독립된 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폐쇄된 ㅁ자형의 모습을 보인다. 그중 놀라운 것은 곳간채가 10칸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워낙 큰 저택이므로 채 또는 담장으로 분할된 독립적인 영역도 8개나 된다. 사랑 마당, 안사랑 마당, 사랑 마당에서 안마당으로의 이동 공간, 안마당, 안사랑 마당에서 안마당으로의 이동 공간, 바깥 곳간채와 안 곳간채의 작업 공간, 사당 영역 등이다.
사당은 겹처마에 금색의 화려한 단청을 하고 있으며 이익공 공포로 꾸몄고, 위에는 패랭이꽃을 그린 화반을 꾸며 아름답게 치장했다. 유교 사상이 뿌리 깊은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사당은 치장하지 않았지만 특별한 경우 단청과 공포를 꾸미도록 허락했다. 법도가 철저했던 조선에서도 예외를 두었던 사회상을 엿볼 수 있으며, 당대의 최고 가문에서 훌륭한 선조를 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한 모습도 볼 수 있다. 대부분은 반 칸의 퇴를 두고 삼문을 만든 후 위폐를 모시는데 여기에서는 툇마루를 깔아 신을 벗게 했다.
건축 전문가들은 이 집이 조선 중기 사대부 살림집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평가한다. 드라마 〈토지〉의 최참판댁은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했고, 〈다모〉에서는 어린 채옥의 생가로 활용해 명성을 높였다.
정여창 고택에서 약간 올라가면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407호인 오담고택이 보인다. 오담 정환필 선생이 기거한 집으로 사랑채는 1838년에, 안채는 1840년에 건설했다. 오담은 경로효친 사상을 강조한 조선 후기 학자였으며 일두의 12세 후손이다. 일두고택에 살고 있는 정명균에 따르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식 명칭을 부여할 때는 당대의 건물주 이름을 적는 것이 원칙이나 선조 이름인 오담을 고집해 결국 승낙받았다고 한다.
팔작지붕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은 어칸과 전후툇간으로 구성되었으며 후툇간은 전툇간에 비해 큰 규모로 비대칭의 단면 구조를 보인다. 전면 툇마루에는 둥근 기둥을 두었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사용했는데 약한 민흘림이 있으며 목재는 적송이다. 사랑채 옆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가면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전후 툇집으로 3량가인데 기단은 자연석을 3~4단 쌓고 그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두 각주이며 약한 민흘림을 두었다. 부섭지붕이 박공 면에 달렸는데 19세기 말 새로운 문물이 봇물같이 들어온 것을 반영한 것이다. 이 집의 특징은 정지 칸, 마루 칸, 건넌방 칸이 안방 칸에 비해 폭이 넓다는 점이다. 커다란 부재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재료를 자연 그대로 사용한 가구나 안채와 사랑채에 전후 툇간을 적용한 점 등이 조선 후기 주거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사랑채 앞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장독대가 있는데 원래 안채 앞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특히 사랑채 대청마루에 신주를 설치하는 등 대종가에서 분가한 양반 계층의 주거 형태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경남 문화재 자료 제361호인 하동 정씨고가는 큰길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이런 곳에 문화재가 있다니 놀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정경이 바로 우리 유산의 별미다.
이 집으로 가는 골목은 돌담이 가지런히 좌우를 호위하는 형상이다. 대문채를 지나자 눈앞에 널찍한 공간이 펼쳐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앞마당에 아무 치장이 없는 것이 기본이며 여기서도 그 규범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정면 여섯 칸에 측면 한 칸인 5량가로, 300년 이상 된 一자형이다. 전후 툇마루와 동쪽에 툇마루를 가진 맞배집이다. 중앙에 두 칸의 대청마루를 두었고 오른쪽에 두 칸의 안방과 부엌이, 왼쪽에 건넌방이 있다. 안방과 인접한 후면에 툇간을 두어서, 배면에서 보면 광창 판벽이 특이하다.
또한 건넌방 동쪽 편에 눈썹지붕을 내서 건넌방에 기거하는 며느리와 아이들의 편리를 고려한 것이 인상적이다. 건넌방 온돌은 전면에 함실아궁이를 두고 있으며, 여름에는 넓은 안마당에 여백을 두어 충분한 햇살과 바람을 받게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햇살이 강렬한 여름날 오후 안채의 대청마루에 서 있으면 시원한 안마당과 남풍에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든다.
하동 정씨의 대종가인 정여창 고택, 오담고택을 한껏 감상한 후 이와 경쟁 장소인 풍천 노씨 대종가를 찾아간다. 이 집은 오담고택에서 좌회전, 즉 개평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다. 입향조인 송재 노숙동이 경남 창원에서 처가인 이곳에 자리를 잡고 이사 오면서 지은 집이다. 송재는 호조예서참판 등을 역임했고 『고려사』 저술에도 참여했다. 지극히 청렴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고 하며, 1701년 숙종 때 도곡서원에 배향된 선비 중의 선비다.
현재 보이는 건물들은 순조 24년(1824) 건립되었으며 1940년대에 중수한 것이다. 남부 지방의 특징인 개방형이며 독립된 채들로 구성되었지만 사대부 집답게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곳간은 초가였으나 기와로 변경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에 전후퇴를 둔 팔작지붕이며 5량가다. 기둥은 방주를 사용했고 약한 민흘림이 있다. 대문간채는 양반가답게 솟을대문으로 삼문 형식이다. 사랑채는 전면 4칸, 측면 1칸에 전퇴를 두었고 팔작지붕으로 근래에 신축했다. 기와는 옛것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큰 제사가 있을 때 남자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풍천 노씨를 대표하는 종가이지만 정여창 고택에 비해서는 공간 구성이 약하고 영역의 성격이 분명하지 않아 건물을 지을 당시 하동 정씨에 비해 힘이 크게 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참판댁 고가는 개평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안채 앞마당 좌우로 광 1채, 억새로 만든 3칸 집, 대문 밖에 하인들이 거처하는 여러 채의 집이 있었으나 현재는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및 사당만 남아 있다.
사랑채는 전면 4칸, 측면 1칸으로 전퇴를 두었는데 부식된 기둥뿌리를 교체하지 않고 잘라내기만 해 건물이 다소 전면으로 내려앉았다. 우진각 지붕에 일본식 기와를 사용했다. 안채는 규모는 작지만 정면 4칸, 측면 1칸에 전퇴를 두었고 평면 배치는 사랑채와 유사하다. 대청에는 4짝 미세기문이 달려 있으며 정주간 앞에 장독대와 우물이 있다. 안채의 아랫방 옆을 돌아 뒤뜰로 나가면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전퇴가 있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단청을 하지 않고 전면에 퇴를 두고 원형 기둥을 했으며 마루를 두지 않았다.
대표적인 양반집이므로 명사들이 계속해서 기거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호조참판을 지낸 노광두(1771~1859)다. 그는 이 지방에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자 왕에게 조세를 감면해 달라고 상소했고, 왕은 그가 청백리임을 감안해 청을 들어주었다. 마을 주민들은 고마운 마음에 그에게 재물을 갖다주었지만 끝내 받지 않자 사랑채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대종가의 사랑채를 지어준 것은 전국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미담에 속한다.
이 집이 더욱 유명해진 이유는 조선 말기 우리나라 바둑계 일인자였던 사초 노근영(1875~1944)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고수 기타니 미노루 8단, 혼다 슈고 초단 등을 만방(萬放)으로 이기는 등 조선 바둑을 한 단계 올려놓았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국수라 불린다. 며느리의 산후 조리를 위해 보약을 지으러 나갔다가 바둑 친구를 만나 약을 손에 든 채로 서울로 바둑 유랑을 가는 등 많은 일화를 남긴 전설적인 인물이다. 조훈현, 이창호 국수 등이 그를 이었다고 알려진다.
노참판댁 고가 앞에서 '일두 선생 산책로'라고 쓰인 팻말을 따라 개울을 넘으면 왼쪽으로 노 씨의 전설이 담긴 종암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옥계천 좌우에 있던 다섯 개의 샘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로 볼 때 개평마을은 행주형 입지로 배에 구멍을 내면 배가 가라앉는다고 해 우물을 파지 못하고 자연 암반에서 솟아나오는 다섯 개의 우물만 사용했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마을에 우물이 파여 버렸다. 청하현감을 지낸 정덕재가 이를 알고 바위에 종암이란 글자를 새겨 누구도 소나무나 우물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바위에서 산책로를 따라 약간 올라가면 수령 약 500년 정도의 커다란 함양 개평리 소나무가 있으며 왼쪽으로 약간 걸으면 사초 노근영의 무덤이 있다. 이곳에서는 개평마을의 그림 같은 전경이 펼쳐지므로 풍수지리를 잘 알지 못해도 마을이 좋은 자리에 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을의 주된 주민이 두 성씨이므로 정자도 각각 있다. 하동 정씨의 만귀정은 상개평으로 들어가는 마을 윗자락에 있다. 서산 군수를 지낸 개은 정재기(1811~1879)가 1871년 일두를 추모해 건설한 것이다. 죽림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방형의 연못 안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유교적 우주관을 나타낸다. 오른쪽 가장자리 한 칸을 마루로 처리했으며, 중간에 높은 턱을 둔 영남 지역 정자 유형에 들어간다. 외부의 연못 경관과 잘 어울리며 풍호암이 있는 옥계천 건너편의 송석정과 마주보고 있다. 풍호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대형 바위가 있는 커다란 못을 옥호담이라고 하는데, 개평마을 사람들이 목욕하던 곳이라고 한다.
풍천 노씨의 동남정사는 노숙동과 노진이 강학하던 자리에 후손들이 지은 정자로, 높은 언덕에서 오돗골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정면 4칸 중 오른쪽 1칸 방, 마루, 왼쪽 방 2개로 되어 있으며 전퇴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어 경쾌한 모습을 보이는 납도리집 팔작지붕이다.
개평마을을 방문하면 경상남도 기념물 제254호이며 마을 입구 왼쪽에 있는 소나무 군락지를 빠뜨리지 않기 바란다. 마을 앞 야산의 능선을 따라 조성된 적송이며 풍수지리에 따라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비보림으로 조성되었다.
수령은 300~400년 정도로 추정되고 큰 나무는 높이 15미터, 가슴 높이 둘레 160~220센티미터이며, 작은 나무는 높이 10미터, 가슴 높이 둘레 80~150센티미터로 각각 위용이 대단하다. 현재 100여 주가 있으며 면적은 약 1만 제곱미터다.
특이한 것은 이 군락지 안에 경남 기념물 제211호로 지정된 '함양개평리소나무'가 있다는 것이다. 100여 개의 소나무 중 단연 으뜸이므로 천연기념물 군락지 안에 있지만 별도로 경남에서 기념물로 지정했다. 높이 16미터, 가슴 높이 둘레 2.95미터이며 추정 수령은 약 500년이다.
소나무 군락지의 머리 부분에는 제단이 있는데 마을 평민들이 부락제를 지낸 곳이다. 해방 이후에도 마을 사람들이 당송 밑에서 제사를 지낸 후 지신밟기를 했다고 전해진다.
개평마을은 500여 년 전통의 가양주인 지리산 솔송주의 특산지로도 유명하다. 하동 정씨 문중에 대대로 내려온 솔잎으로 담그는 술이며 1997년 후손들에 의해 복원, 개발되어 판매하고 있다.
전통 마을에 관심이 높아지자, 각지에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무분별하게 파괴한 전통 마을을 살리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물론 개평마을의 참모습을 찾는 연구도 이루어졌는데 내용이 매우 진지하다.
우선 외곽 도로 노면과 각 건물들의 진입로로 이용되는 안길 대부분이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마을의 경관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들 도로를 친환경적인 재료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새마을 운동 등으로 크게 변형된 담도 주목을 끈다. 일부 구간의 토석 담과 돌각 담이 대체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지만 북쪽 외곽 도로 쪽에는 블록 담이 많이 보인다. 전통 담에 시멘트 회반죽을 바르거나 일식 평기와를 덮기도 했다.
더욱 마을의 경관을 해치는 것은 남쪽 옥계천을 따라 견칫돌과 시멘트 회반죽을 사용한 제방이다. 마을의 역사적 경관을 정비, 보전하는 것이 당대의 현안이므로 근간 새로운 형태의 전통 마을이 꾸며질 것으로 생각된다.
개평마을을 방문하더라도 인근에 있는 함양읍 대덕동의 함양상림(천연기념물 제154호)을 지나치면 개평마을을 보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다. 넓이가 읍내를 가로지르는 둑을 따라 13만 제곱미터에 이르며 120여 종 2만여 그루의 식물이 살고 있다. 이 숲이 특별한 이유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원시림이 아니라 무려 1,100년 전 만들어진 우리 역사 최초의 인공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보호받는 장소 중 유일하게 낙엽 활엽수 군락지인 상림은 신라 말 해동공자라 불렸던 최치원(857~?)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천의 범람과 주민들의 수해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물길을 돌려 나무를 심었으며,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어 조성되었지만 현재는 상림만 존재한다.
초입에 약수터가 있으며 함화루라는 건축물이 운치를 더한다. 원래는 함양읍성의 남문으로 망악루라는 현판을 가지고 있었고 남문에서 지리산이 보여 이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1932년 고적보존회 대표였던 송계 노덕영이 사재를 들여 현재 위치에 이건해 함화루라고 개칭했다.
상림에는 뱀이나 개미가 없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림은 어디에서나 마음 놓고 앉아서 쉴 수 있다. 땅이나 나무가 주위와 다를 바 없는데도 그런 까닭은 최치원의 지극한 효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고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허락을 받고 나갔으며 돌아와서도 동태를 알려 근심하시지 않도록 해 하늘이 낸 효자로 알려졌다. 어느 날, 어머니가 혼자서 바람을 쐴 겸 상림에 산책을 나갔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이야기를 들은 최치원은 숲으로 달려가 "상림에 있는 모든 해충은 일체 없어져라. 그리고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마라"라고 주문을 외웠다. 그 후로 모든 해충이 사라졌다고 한다. 최치원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과 땅, 심지어 미물도 감동했다는 전설이다. 사람들은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을 것이라고 한다.
상림 한쪽에는 고운 최치원, 덕곡 조승숙, 점필재 김종직, 일로 당양관, 뇌계 유호인, 일두 정여창, 옥계 노진, 개암 강직, 연암 박지원, 진암 이병헌, 의재 문태서 등 함양을 빛낸 열한 명의 흉상이 배치된 인물공원이 있다. 최근에는 약 300여 종의 연꽃으로 연꽃 단지를 조성해 방문객들의 눈길을 끈다.
상림 입구에는 사랑나무로 알려진 연리목이 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연리목은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합쳐진 것이다. 그런데 이곳의 연리목은 특이하게도 서로 다른 개서어나무와 느티나무가 합쳐진 것이다. 연리목은 예부터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왔다. 나무 앞에서 서로 손을 꼭 잡고 기도하면 부부 간의 애정이 더욱 두터워지고 남녀 간의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진다.
산책길 중간에 있는 작은 정자 사운정 옆에는 최치원 선생의 공적비가 있다. 또한 숲 조성 당시 최치원이 나무에 걸어놓았다는 금호미가 있는데 마음씨 착한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 전설이 있다. 아직까지 금호미를 봤다는 사람은 없다는데 정말로 착한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