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에 관해 잘 모릅니다.
그저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지요.
이번 여름에 그대를 만나고 난 후
그대의 표정과 말투 정도를 조금 알만큼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꿈꿉니다.
그러나 막상 여행하려고 하면 준비할 것도 많아 피곤해지기도 하지요.
이때 준비란 여행에 가지고 갈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간 동안 미리 점검하고 해결해야 할 일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그대를 만나러 갈 때도 그랬습니다.
늘 그렇듯이 이틀 전에 여행 가방을 열어놓고 하루 전에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넣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대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여행 전날까지 행사가 많았고, 자리를 비우는 열흘의 시간동안 사무실 일정상 미리 준비할 일을 점검하기 바빴기 때문입니다. 마음 편하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대를 만나러 가는 일정에 함께 할 개인 가이드인 딸이 준비를 잘 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여행을 하고 나면 늘 기록을 남깁니다.
소소한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 수준이지만 기억이 산화되기 전에 차곡차곡 분류해봅니다.
나중에 보더라도 그날의 기분이나 일정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는 남깁니다.
그러나 그 기록을 자주 꺼내어 보지 않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날을 추억하기보다는 다른 추억을 만드는 것이 더 바람직하니까요.
다행히도 많은 일이 계속해서 만들어져서 현재의 시간도 벅찰 정도로 추억부자입니다.
여행 중 딸 덕분에 매일매일 행복했습니다.
그 행복의 시선을 갖고 네덜란드라는 당신에게 한발짝 다가가 보았습니다.
자, 그럼 그대를 만나고 난 후 조금 알게 된 모습을 정리해 보도록 할게요!
# 커피를 세계에 퍼트린 나라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홍해를 건너 예멘으로 전해졌다.
아랍인들은 볶은 원두만을 수출하며 커피산업을 독점했는데, 1616년 동인도회사가 커피 묘목을 암스테르담으로 몰래 가져와 온실 재배에 성공한다.
그 후 네덜란드는 자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와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자바섬 등에서 커피를 재배하여 동인도회사를 통해 세계 각지로 퍼트렸다.
여행중 나는 매일 카푸치노를 즐겼다.
한번은 아메리카노를 마셨는데 무척 진해서 다 마실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가이드님은 유럽에서의 라떼는 늘 실패였다며 함께 카푸치노를 즐겼다.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아이스아메리카노는 네덜란드 카페마다 다 있는 음료가 아니여서 일부러 찾아가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카페와 커피숍의 차이점이 있다. 커피숍은 마리화나를 비롯한 마약류를 판매한다.
실제 그 앞을 지나면 대마초 냄새가 진해서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다.
길거리를 지날 때에도 대마초 냄새가 종종 나는 걸 보면 반드시 커피숍에서만 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커피숍에 가면 안돼요~~
# 기억나죠, 헤이그특사
우리가 헤이그라고 부르는 이름은 영어식 표기이고 네덜란드에서는 덴하그라고 부른다.
헤이그하면 바로 떠오르는 역사적 장면은 고종황제의 헤이그특사이다.
일제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2년 후인 1907년, 이상설·이준·이위종 세 분의 특사가 이곳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한 역사적 장소이다.
당시의 교통상황과 정치적 상황에서 두 달여 기간에 걸쳐 이동을 해야만 했던 특사의 여정은 헤이그에 오니 더욱 실감났다.
역사책에서 만난 세 분의 모습이 새삼스레 존경스러웠다.
고종황제가 이준열사에게 수여한 특사 신임장을 보며 을사늑약 이후의 정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아내의 치마폭에 싸인 무능한 왕이라고 배웠던 고종이지만 최근에는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모습도 재조명되고 있다.
이준열사기념관은 세 분의 특사중 이준열사가 돌아가신 호텔이다.
지금은 사단법인 이준열사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995년부터 송창주 이준열사기념관 관장님과 이기항 이준아카데미 원장님이 관리와 홍보를 하고 계시다.
이기항원장님은 1972년 주재원으로 왔다 사업가로 활동하던 중 헤이그 드 용 호텔이 재개발로 매각될 위기에 처했다는 기사를 보고 당시 거금인 20만 달러를 들여 호텔을 인수했다고 한다.
1620년에 지어진 건물을 헤이그시로부터 매입하여 네덜란드의 협조와 우리나라 정부 국가보훈처, 한국일보 등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가꾸어지고 있는 특별한 건물이다.
입장료를 내면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랬다.
"이 방에서 이준 열사가 순국하셨습니다!"
이 장소를 관리하고 계신 이기항원장님께 인사드리고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역사적 장소에 서면 역사는 글에서 살아나와 내 안으로 생생하게 들어온다.
머나먼 곳에서 이준열사의 독립운동을 알리고, 그분의 정신을 계승하고 계신 두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 세계 최대 치즈 수출국
치즈는 네덜란드 쇼핑목록 1순위 아이템이라고 한다.
그에 걸맞게 암스테르담에 치즈 박물관도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치즈 매장이 자주 보인다.
동네 마트에도 다양한 치즈가 진열되어 있다.
우리는 치즈박물관 1층에서 테이스팅을 하고 한 개를 구매했다.
딸이 맛있다고 주저 없이 산 치즈인데, 집에 와서 먹어본 나는 진한 향에 놀라 더이상 도전을 하지 않았다.
치즈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엄마가 된 이후로, 마트에서 파는 슬라이스 치즈를 먹어본 경험이 다인 내 입맛으로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맛이었다.
암튼, 네덜란드는 연간 30만 톤의 치즈를 생산하고 70% 이상을 세계로 수출하는 최대 수출국이라고 한다.
# 풍차가 연상되는 네덜란드
여행 가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네덜란드 하면 금방 떠오르는 것은?”
하고 물어보면 대부분 튤립과 풍차라고 말했다.
우리는 잔세스칸스에서 풍차를 보았다.
네덜란드의 풍차는 저지대의 물을 퍼내거나 곡식을 빻기 위해 만들어졌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전국적으로 1만여 개의 풍차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관광지로 남아있다.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으로 칠한 집, 풍차, 수변 풍경등이 여행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한 폭의 그림 같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마을이었다.
딸과 함께 마을을 아슬랑거리는 동안 모네의 풍경화가 연상되었다.
특별한 풍경인 줄 알았는데 그냥 보이는 풍경이 그림속 풍경이었다.
# 운하와 자전거의 나라
네덜란드는 국토의 동서 간 최장길이가 176km로 3시간이면 가는 작은 나라이다.
대한민국 면적의 절반이 되지 않는 네덜란드에서 특징적인 것은 운하인데 암스테르담의 운하만 165개란다.
우와!! 길이는 약 100km에 달하며 운하 위 하우스 보트는 2,500채에 이른다고 한다.
이 운하는 '싱겔운하 내 암스테르담의 17세기 원형 운하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운하의 건설로 암스테르담은 17세기 '세계 경제의 수도'로 불릴 만큼 무역이 활발했다고 한다.
특이한 운하와 더불어 자전거의 나라로 불린다.
자전거 수는 사람보다 많고, 자동차 숫자의 4배에 달한다고 한다.
자전거도로도 발달해 있어서 신호가 별도로 있다.
하를렘에서는 자전거 주차장도 보았다.
자전거가 우선이고 그다음 트램, 마지막으로 자동차 순이라고 한다.
그런 자전거의 나라에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는 것은 매우 낭만적으로 보였다.
문제가 있다면 내가 자전거를 못탄다는 거였다.
그래서 여행 전, 네덜란드에 가서 반드시 자전거를 타야 한다고 해서 급하게 자전거 강습을 받아야 했다.
물론 순수 100퍼센트 자발적인 건 아니었다.
뜨거운 여름날 화성행궁 광장에서 2시간 강습을 받았다.
그리고 자전거 강습을 받는 동안 주변 사람들로부터 틀에 박힌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어야만 했다.
“아니, 자전거를 타는데 돈 내고 강습을 받는다구요? 살살 가다가 패달을 밟으면 앞으로 쭈욱 나가는데 왜 그걸 못타? 그 돈 나에게 줘요. 내가 잘 가르쳐줄테니.”
남 이야기라고 참 편하게들 말한다.
그게 되었다면 내가 지금까지 자전거를 못탔을까?
발이 안떨어지는데 뭘 앞으로 쭈욱 나가나요? 나도 힘빼고 달리고 싶다구욧~
현실은 힘빼기는 커녕 얼마나 몸에 힘을 주고 자전거 타기를 배웠는지 결국 손목 인대에 무리가 생겨 반깁스를 해야만 했다.
웃기지만 슬픈 자전거 배우기, 끝~~
첫댓글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