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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의 명소와 시의 탄생
동석암에 묵으며 宿動石庵
높고 낮은 나무꾼들의 길이 맑은 계곡물을 둘러싸고, 高低樵路繞淸泉
절은 단풍 비단 숲가에 있다. 寺在丹楓錦繡邊
스님과 뜬 구름은 지는 해로 돌아가고 僧與浮雲歸落日
객은 호학산을 따라서 신선의 세계로 들어간다. 客從呼鶴入諸天
천년의 동석이 새로운 얼굴을 만나고, 千年動石逢新面
하룻밤의 등잔불 아래 대화에 숙세의 인연을 안다. 一夜懸燈認夙緣
종소리 몇 번이나 어디서 일어나는가, 鐘磬數聲何處起
앞 봉우리가 지척인데 신선이 있다. 前峯咫尺有眞仙
-류숙
국가가 편찬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내연산에 대․중․소의 세 바위가 솥발모양으로 벌려있는데, 사람들이 삼동석이라고 한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두 손으로 흔들면 꿈쩍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삼동석(三動石)은 내연산의, 삼용추(三龍湫-연산, 관음, 잠룡 세 폭포)는 신귀산의 랜드마크로 여겼다. 포항에는 내연산이 있고, 내연산의 상징 경관은 삼동석이고, 대표 경관은 삼용추인 것이다.
<사진8. 삼동석>
조선시대 오백 년 동안 삼동석을 방문하고 유일하게 시문을 남긴 사람은 취흘(醉吃) 류숙(柳潚, 1564-1636)이다. 인조반정 뒤에 조카의 광해군 복위운동이 발각되어 <<어우야담>>으로 유명한 숙부 류몽인은 처형당하고 취흘은 연루되어 60세에 청하로 귀양 와서 죽는 해까지 열네 해를 살았다. 그가 1625년 단풍철에 산림보호표지석인 봉표석이 있는 호학산을 넘고, 삼동석 곁의 암자, 동석암에서 묵었다. 1636년 봄에 청하현감 심동귀와 삼동석을 다시 찾았다. 그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열람하고 삼동석을 찾았고, 교유하던 사람들에게 늘 삼동석이야말로 내연산의 상징물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삼동석이 단풍숲가에 있고 큰 종 모양이라고 하였다.
<사진9. 주연>
필자는 그의 시문을 읽고 2013년 3월 10일 아침 일찍 보경사에서 출발하여 경북도립수목원 부근의 선바위까지 삼동석과 동석암 암자터, 주연(舟淵)을 찾아서 내연계곡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아직도 잔설이 있고 그늘에 얼음이 있었다. 계곡 가의 속칭 선바위와 두 바위가 삼각형으로 상중하에 벌려 있고, 부근에 2곳의 암자터가 있고, 그 하류에 주연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취흘이 찾아와 암자에 묵어 간 이래로 거의 400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마음에서 잃어버린 삼동석을 되찾는 실로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산을 돌아내려오며 일주문 앞에 서서 우러러본 밤하늘에 별들이 치렁치렁하게 빛나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삼동석이 솥발 모양으로 3곳에 벌려있어서 별칭이 삼정석(三鼎石)이다.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문인으로서 대산 이상정,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등과 교유하였던 봉화 닭실마을(酉谷里) 사람 강좌(江左) 권만(權萬, 1688-1749)은 청하현감으로 부임하는 당질이자 제자인 소산(小山) 권정택(權正宅, 1707-1765)을 1746년 가을에 송별하며 내연산을 함께 찾자고 약속하였다. 당시에 권만이 지은 시와 내연산을 찾지 못하고 이듬해 초봄에 돌아간 권만을 위하여 권정택이 쓴 제문에 삼정석이 나타난다.
황여일의 행장을 지은 권만은 그의 <유내영산록>을 읽고 ‘소금강’이라고 하는 내연산 산놀이를 오매불망 기다려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당질이 청하현감으로 부임하고 자신은 양산 군수직에서 물러나며 나귀를 사서 작은 거문고를 싣고 시 주머니를 걸고서 청하현감인 권정택과 내연산을 찾아서 100편의 시를 지어도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때 내연산의 상징경관인 삼동석을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기고, 청하현을 다스리는 조카를 위하여 삼동석에서 소, 돼지, 양을 희생으로 바치는 큰 제사를 지내고 싶어 하였다.
청하사군을 보내며 送淸河使君
청하현은 바닷가에 있고, 淸河縣在海天涯
너를 보내며 선조*의 시를 다시 읊조린다. 送爾重吟先祖詩
다스리고 보살핌이 악어 길들이듯 하는 날을 보고, 治理行看馴鰐日
가을 벼가 태풍의 피해 입었다는 것이 차라리 거짓이었으면. 秋禾寧被颶風欺
높고 높은 내연산의 가을빛은 빛나는데, 內延秋色逈崢嶸
이제 청하태수를 길 떠나보낸다. 今送淸河太守行
신선이 삼정석에 있음을 아노니 知有仙人三鼎石
그대를 위하여 함께 머물며 큰 제사를 베풀리라. 爲君留與供三牲
*선조는 청하현감 권윤경(權允經)으로 추정됨. 연산폭 남쪽 피우석에 권윤경의 인명 각자가 있음.
-권만
제문
전년 가을에 소자가 관직에 부임할 때 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따라 오셔서 저를 백암(栢巖)(김륵(金玏), 1540-1616)) 선생의 묘 앞(봉화군 상운면 운계리에 김륵의 묘가 있음)에서 전송하였습니다. 소자가 길에서 인사를 드리니 선생님께서는 말을 세우고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청하가 비록 10실(室)의 작은 고을이지만 사직과 백성이 있으니 적다고 할 수 없다. 너는 수령으로 고을을 다스리기를 부지런히 하여라. 청하의 내연산은 바닷가의 명산이다. 소금강이라는 별칭이 있으니 나는 오매불망 가고 싶은 것이 오래다. 이제 너가 그곳의 주인이 되었고 나 또한 올해(1747, 60세) 새로이 양산 군수 관직을 벗고서 작은 노새 한 마리를 사서 명승지 구경할 도구를 갖추었다. 너의 행정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내년 늦봄에 짧은 거문고를 싣고 시 짓는 종이 주머니를 매달고서 너를 따라 삼정석(三鼎石)과 열두 폭포의 경치 속에서 내가 시를 읊고 네가 화답하여 100편의 시를 읊어도 또한 시원하지 않을 것이다. 가거라. 이렇게 산신령에게 아뢰고 기다려라.”
소자는 ‘예’하고 대답하고서 길을 떠났습니다. 청하에서 업무를 본지 며칠이 지나서 말을 타고 내연산의 산문(山門)에 이르러 산신령에게 아뢰었습니다. 내연산의 바위와 골이 아득하고 그윽하며 폭포가 쏟아지는 암벽은 맑고 웅장하고 기이하고 빼어났습니다.
우리 고향 봉화의 청량산을 보았고 청송 주왕산을 가보았지만 모두 저의 필력으로는 그 빼어난 경치를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내연산이 일찍이 선생을 만나 그 아름다움을 읊은 시를 얻어서 산문이 기운을 토해내지 못함을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내년 봄이 그렇게 멀지가 않아서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번민하는 한이 오히려 있었습니다. 어찌 4순이 못되어 선생님께서 초연하게 돌아가실 줄을 뜻하였겠습니까.
선생님이 전에 여러 날을 편찮으시며 학을 타는 꿈이 있었는데 정말 오늘 일이야말로 꿈인가 합니다. 선생님의 영혼이 돌아가심과 함께 다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수레를 타고 찬바람을 몰며 3산(봉래, 방장, 영주 3개의 신선이 사는 산) 10주(州)에 노닐며 뭇 신선과 어깨를 부딪치고 크게 웃으실 것을 제가 모르겠습니까마는, 또한 시간이 나시면 이른바 내연산이라는 곳으로도 내려오시어 묵은 빚을 갚으셔야 합니다. 저와 작별하며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말입니다.
아니면 청하고을의 해월루(海月樓)에 오르시어 소자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어떠한 지 살피시고 가만히 저를 달래어서 그윽한 가운데 도움의 말씀을 해 주십시오.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하지만 선생님의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하오니 소자가 어찌 길이 통곡하고 깊이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하여도 선생님께서 병석에 계실 때 소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씀하셨습니다. ‘큰 한계가 이미 굳어졌다. 죽음의 두려움은 모르겠다. 삶과 죽음의 변화를 살피니 또한 텅 비어서 죽음을 애달파하는 생각도 없다’고 하신 것은 선생님이 이미 생사가 나누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제사지냅니다. 감히 공사(公私)의 근심을 다하는 아픔과 생사의 슬픔과 고통의 말로써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지는 않으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 내연산 산놀이 가자던 그 약속은 말씀드리옵니다. 선생님께서 소자의 말 밖의 다하지 못하는 깊은 슬픔을 헤아려 주실 것이라 엎드려 생각하옵니다.
-권정택
보경사에서 출발하여 첫 길목으로, 산신제단이 있는 곳의 높이 치솟은 바위가 낙호암이다. 청하현의 유생 김득경(金得鏡)은 황여일 일행의 유산에 동행하여 ‘범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고 안내하였다. 그 오년 뒤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곽재우 의병장이 지휘하는 의령 정암진 전투에서 김득경 부자는 전사하였다.
문수암과 보현암이 갈라지는 곳에 가로세로로 갈라진 마당 바위가 문수대이다. 그 아래 벼랑 밑이 협암(挾巖)이다. 보경사에서 문수대까지 이르는 계곡이 무풍계(舞風溪)이다. 문수대에서 수십 걸음 거리에 벼랑길 오르막이 나오고 길가에 난간이 이어지고 바위 사이의 절벽 허공에 나무다리를 놓아두었다. 승선교(昇仙橋)인데, 태평교나 낙하교(落霞橋)로도 불렀다. 옛날에는 소나무로 잔교(棧橋)를 걸쳐 놓았는데, 근심걱정 없고 노을 지는 신선계의 태평한 시공으로 들어간다는 뜻의 이름이다.
<사진10. 사자폭포>
<사자담>
내연계곡의 첫 쌍둥이 폭포가 사자폭이다. 이른바 상생폭은 20세기에 쌍폭이라서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그 아래의 깊고 푸른 못이 사자담(구연(龜淵), 기화담)이다. 사자담 남쪽에 네 줄의 층암이 병풍처럼 솟아 있다. 그 중에 서쪽 끝의 것이 기생과 선비가 올라가 놀다가 기화담에 떨어져 죽었다고 하는 기화대(妓花臺)이다. 쌍둥이 폭포 사이에 못으로 기어 내려오는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낙구암(落龜巖)이고, 폭포 위의 시원하게 뚫린 계곡이 활연문(豁然門)이다. 폭포 옆으로 바위벼랑에 돌을 쌓아 겨우 사람이 다니는 길을 내었는데, 이 모퉁이가 사자항(獅子項)이다. 소동파의 게송처럼 사자폭포는 밤낮으로 사자후를 토한다.
조정을 비난하였다는 시를 지었다는 필화를 입어 황주(黃州)로 귀양 가 동쪽 언덕을 갈아 농사지으며 네 해 동안 살던 송나라의 소동파가 신종 원풍 7년(1084)에 황주를 떠나 여주(汝州)로 유배지를 옮겨가면서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벗, 상총(常總) 선사를 만났다. 두 사람은 등잔불을 걸고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소동파는 선불교의 공안(公案)인 ‘무정설법(無情說法)’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어서 게송을 지었다.
동림사 상총 장로 스님께 드림 贈東林總長老
계곡의 물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장광설(長廣舌)이니, 溪聲便是廣長舌
산의 빛깔이 어찌 청정한 몸이 아니겠는가. 山色豈非淸淨身
밤이 오자 팔만사천 게송을 설하니, 夜來八萬四千偈
훗날 남에게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他日如何擧似人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후라고 한다. 상생폭이라고 인식하는 오늘 우리는 사자폭포의 우렁찬 사자후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가. 밤낮으로 흐르는 내연산 계곡물이 팔만사천 게송을 설법하는 부처님의 장광설이고, 계절마다 볼 수 있는 찬연한 산색이 법신불의 청정한 몸임을 알아차릴 눈이 있는가. 사자항, 사자폭(獅子瀑), 사자담(獅子潭)은 오늘에 되찾아야할 보배롭고도 귀중한 이름들이다.
사자 바위 獅巖
괴석을 사자라 이름 하였으니, 怪石名獅子
으스대며 머리를 들려 하네. 憑凌首欲擡
끊어진 벼랑에 굽은 길을 여니, 斷崖開路曲
바위틈으로 사람이 다닐 수 있구나. 巖隙許人來
계곡물이 넘치면 배를 띄우기 좋고, 溪漲船宜泛
솔이 자라면 대들보 할만하다. 松長棟可栽
누구에게 되던져 법을 전 하리, 爲誰傳反擲
말없이 산모퉁이에 섰노라. 無語立山隈
-의민
사자쌍폭을 지나서 보현폭이 병풍에 둘러싸여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채, 물소리만 바위벽에 울려 메아리친다. 여기서 계단의 중간쯤에 오르면 신라시대 창건된 하문수암터 돌축대가 화살대숲 사이로 북쪽에 보인다. 하문수암터에서 동쪽으로 백 걸음 가면 견상암(見祥庵, 견성암(見性庵))터가 나온다. 그곳의 노송이 자라는 암대가 견성대이다.
계단을 다 오르면 보현암으로 오르는 길목에 암반이 계곡 가 벼랑 위에 있는데, 습득대이다. 그 위의 보현암 자리가 한산대이다. 주변에는 늠름한 노송들이 좋다.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은 중국 당나라 때 천태산 국청사의 두 선승(禪僧)으로 저서로 <<삼은시집(三隱詩集)>>(일명 한산시집) 이 전해진다. 한산·습득의 전설은 송대(宋代) 선의 유행과 더불어 애호되어 자주 선화(禪畵)의 소재가 되었다.
보현암을 서쪽으로 돌아가면 나무 정자가 있는 쉼터가 있다. 주변에 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으며, 건물 토대가 보인다. 적멸암터다. 그곳의 길목이 적멸항이다. 황여일은 적멸암에서 묵어가며, 여행기에 이렇게 썼다.
“외로운 연기가 석양에 오르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졌다. 불당에 들어가 베개를 높이하고 누우니 바람과 냇물이 세차서 골을 울리는데, 바람소리의 울림이 영롱한 음성이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뼈를 차게 하고, 혼은 벌써 깨어나게 하였다. 밤은 일경인데 달이 산봉우리에 걸렸고, 달그림자가 못 가운데에 떨어졌다. 성글게 돋아난 별이 빛나고, 은하수가 비껴 돌았다. 적막하여 한 마리 새도 울지 않으니, 참으로 산중의 절경이었다. 팔월 칠일 갑자. 잠든 객들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숲 끝에 이미 붉은 해가 걸렸다.”
-<유내영산록>
적멸항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면 길가의 바위에 사람 하나가 앉을 만한 구멍이 있다. 풍혈(風穴)이다. 삼용추에 이르러 하용추인 잠룡폭을 굽어보고, 동쪽 위의 암벽 아래로 올라가면 커다란 굴이 있고, 그 앞에 석축이 있다. 황여일이 서하굴(栖霞窟)이라고 명명했다. 현수교 아래 쌍폭이 중용추인 관음폭이고 그 아래가 관음담(일명 감로담)이며, 움막 같은 두 바위굴이 관음굴이다. 관음폭 위의 웅장한 폭포가 상용추인 연산폭(내연폭, 여래폭, 용추)이고, 그 아래 못이 용담이다. 용담 아래에 또 다시 못을 이루며 물은 관음폭을 이룬다. 용담의 북쪽 암벽이 학소대이고, 학소대의 동쪽 위쪽에 길이가 일 미터 정도 되는 장방형의 감실이 있는데, 학의 둥지라는 학소두(鶴巢竇, 학소, 청학소)이다. 노을은 신선경을 말하고, 청학은 신선이 타고 다니는 새이다. 선인들은 삼용추를 신선경(神仙境)으로 여겼다.
용담 남쪽 암벽 아래에 물이 고인 바위 구덩이가 있고, 암벽에도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어서 비를 피할 만하다. 류숙이 상용추 위의 수리더미 중턱에 있던 내원암에서 묵고, 다음날 구기자술을 마시고 계곡 주변에서 약초를 캐다가 비를 만났다. 그는 물의 신령스러운 기운, 미르(용)가 깃들어 사는 용담 곁의 이 움푹 들어간 공간에서 비를 피하였다. 함께했던 승려들의 요청으로 그 공간을 피우석(避雨石)이라 하여 미르의 영험스러움을 드러내고, 장자(莊子)에 부끄럽지 않다는 의미를 붙여 상용추를 적선담(謫仙潭-적선은 이백의 별칭)이라고 하였으며, 약초를 캐고 구기자술을 마시며 신선술을 연마한 사람들이 노닐었다고 삼용추 계곡을 구기동(枸杞洞)이라 명명하였다.
<사진11. 류숙(바위 각자)>
늦봄에 내연산에 노닐며 고문수암에 묵으며 설희 스님과 황정경을 토론하고서 시를 지어 스님에게 줌
暮春遊內延山 宿古文殊 與雪煕上人討論黃庭經 仍以詩贈之
삐걱대는 가마타고 허공으로 들어가니, 伊軋藍輿入半空
선경이 멀리 저녁 놀 속에 있구나. 諸天遙在暮雲中
산은 봉래산을 갈무리하여 연꽃이 희고, 山藏蓬島蓮華白
땅은 무릉도원을 숨기고 있어 비단 물결 붉구나. 地祕桃源錦浪紅
여기서부터 고승이 도의 기운 많은데, 自是高僧多道氣
누가 귀양객이 또한 신선 늙은이인줄 알리오. 誰知謫客亦仙翁
황정경 강론을 마치니 향연이 일고, 黃庭講罷香煙起
쌍학이 너울너울 저녁 바람에 춤추는구나. 雙鶴蹁躚舞晩風
-류숙
조선시대에 유교와 불교를 소통 시킨 언어는 노장 사상과 도교 문화이었다. 계조암과 문수암은 영일만과 주변 지역이 굽어 보일만치 전망이 좋다. 계조암에는 경사(經史)에 밝고 <<장자(莊子)>>에 통달한 덕경(德瓊) 스님이, 문수암에는 신선술을 닦으며 도교 경전인 <<황정경(黃庭經)>>에 조예가 깊은 설희(雪熙) 스님이 머물렀다. 류숙은 이 두 스님과 시를 주고받으며 유불도, 삼교의 경계를 넘어 근원의 지평에서 그들과 만나 고달픈 귀양살이의 벗으로 삼았다. 그는 덕경과 설희 스님에게 주는 시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청하가 길이 끊어지고 아주 멀리 있음은 한유(韓愈)가 귀양 가 승려 태전(太顚)과 사귀었던 조주(潮州)에 밑지지 않고, 유종원(柳宗元)이 유배가 승려 호초(浩初)와 벗이 되었던 용성(龍城)의 빼어난 경치가 내연산에 높지 않다. 그들 당시의 방외(方外)의 사귐과 사령운(謝靈運)이 나막신에 밀랍을 칠하고 산수를 즐긴 일과 소동파(蘇東坡)가 등잔불 켠 선방에 묵어간 일과 비교할 수 있다. 혹은 꽃과 달로 서로 기약하고,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하고, 호사를 칭찬하여 베풀고, 늙은 나이에 우아하게 노닐어 나로 하여금 거친 곳에 즐겁게 머물게 하고, 그 귀양살이를 편안하게 하며, 그 근심을 풀어내게 하는 것은 실로 이 두 분의 도움이니, 남들이 비록 벗이 아니라고 하여도, 나는 반드시 벗이라고 이를 것이다.”
여름철, 비가 내리고 수량이 풍부하면 웅장한 소리를 밤낮으로 울리며 용담에는 시퍼런 물이 울컥울컥 소용돌이친다. 놀랍게도 그 물 속에 피라미가 물을 거슬러 헤엄치고 있다. 경이로운 생명력이다. 연산폭포 물줄기가 용담에 쏟아지며 사방으로 튀는 미세한 물 알갱이들에 햇빛이 비추어 들면 무지개가 선다.
1626년, 청하 고을에 입하 뒤로 칠십 일 동안 가뭄이 들자, 류숙은 기우제 제문을 짓고 현감 이립(李砬)은 용담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그날 밤, 이립은 용담 가의 바위에서 한데 잠을 자며 자신의 부덕을 참회하고 근신하였다. 목민관의 정성에 용신이 감응하여 이튿날 비가 흡족히 내렸음은 물론이다.
관음담가의 서쪽 암벽이 월영대(月影臺)이다. ‘청풍명월’에서 밝은 달에 짝할 맑은 바람이 없어서 월영대 입구의 돌문을 청풍문이라고 해월이 명명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홀연히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고 사람들은 바람신이 있어서 해월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해월은 그곳이 ‘달이 뜨고 솔 그늘에 달빛 그림자 지면 불국정토를 이루어 산의 한 승경이라’고 하였다. 낙재는 대비암에서 저녁밥을 먹고 월영대에 올라 교교한 달을 보며 밤을 지새고, 아침해를 맞았다. 관음담 주변에 바위 감실이 숭숭하여 월영대는 중허대(中虛臺)라고도 하였다.
취하여 축융봉을 내려옴 醉下祝融峰
만 리 길을 바람 타고 와서 보니, 我來萬里駕長風
골짝의 뭉게구름이 가슴을 틔워준다. 絶壑層雲許盪胸
탁주 세 사발에 호기가 솟아, 濁酒三杯豪氣發
낭랑히 읊조리며 축융봉을 날듯이 내려온다. 朗吟飛下祝融峰
-주희
영남 퇴계학의 정맥을 잇는 대학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연일현감으로 부임하여 1754년 봄에 농수 최천익, 의민 스님과 함께 학소대 위쪽의 계조대에 자리 잡은 계조암에서 <<논어>> 몇 장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계곡물을 건너서 남쪽의 대비암으로 가다가 월영대에 올라서 대 이름을 물었다. 기하대라고 하자, 대산은 주자가 벗들과 어울려 형산(衡山) 축융봉을 유산하고 지은 시, <취하여 축융봉을 내려옴(醉下祝融峰)>의 제4구 ‘朗吟飛下祝融峰(낭음비하축융봉)’을 들어보았느냐며 의민 스님에게 물었다. 이 시구의 ‘비하’에서 이름을 취하여 명명하였지만 소리가 와전되어 ‘기하(妓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며, 비하로 대 이름을 고치도록 하였다. <
사진12. 월영대(비하대), 상용추(연산폭)>
이들은 그날 대비암에서 대산이 제시한 하평성 (下平聲) 침(侵)운의 심자(深字)에 압운하는 시를 지었다.
대비암에 올라서. 운을 부르는데 심자를 얻었다. 上大悲庵。呼愉深字
한 뜰 솔 그림자에 그늘이 짙고, 一庭松檜影陰陰。
천 길 산비탈 깊이 암자가 있다. 千仞岡頭佛院深。
꽃은 지려하는데 새가 지저귀고, 花事欲闌時鳥語。
호젓이 종일토록 무심히 앉았다. 悠然終日坐無心。
-이상정
차운하는 시를 최진사 천익에게 주다. 2마리. 次韻贈崔進士 天翼 二首
시냇가 나무 들쑥날쑥하고 저녁 해가 넘어가고, 澗樹參差翳夕陰。
흐르는 물 따라 가서 깊은 근원으로 들어간다. 行隨流水入源深。
그날 지팡이 짚고 참됨을 찾아 갔지만 倚筇當日尋眞興。
오묘한 곳은 원래 다만 이 마음에 있다. 妙處元來只此心。
두 해를 바삐 보내며 세월을 썼고, 二年奔走費光陰。
고요한 곳에서 무단히 감개가 깊다. 靜處無端感慨深。
말 한마디도 진중하게 서로 벗이 되었고, 珍重一言相許地。
세한에도 저버리지 않을만한 마음이다. 可能毋負歲寒心。
-이상정
심자(心字)
여래의 마음이 중생의 마음이고, 如來心是衆生心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하나의 마음에서 나누어진다. 迷悟爰分一箇心
옷 가운데에 참된 보배 있음을 알지 못하고, 不識衣中眞寶在
종일 남의 보배를 세느라 헛되이 애쓴다. 數他終日謾勞心
-의민
청하현감으로 부임한 이상정의 손자 이병원은 <<농수집>>을 읽고서 이 사실을 알고 65년 뒤인 1818년 3월 15일에 형제와 가족들과 함께 비하대에 올라 조부의 발자취를 어루만지며 감격에 젖었다.
내연산에서 하산하던 이병원은 봉화에서 경주 옥산서원으로 유람을 가던 유학자 강필효(姜必孝)와 만나서 보경사에서 묵고 다음날 다시 비하대에 올랐다. 이병원은 친구인 그에게 부탁하여 ‘大山先生命名 飛下臺(대산선생명명 비하대)’라고 하는 큰 글자를 받아서 석공으로 하여금 바위 윗면에, 동행했던 이병원 형제, 아들, 친구의 이름을 바위 동면에 새기게 하였다.
<사진13. 강필효의 비하대 글씨>
그리고 이듬해 이병원은 대비암을 찾아와서 조부의 시, 현판을 보고 차운하는 시를 지었다.
삼가 조부의 대비암 시에 차운하다. 敬次王考大悲庵韻
대산 선생은 영조 계유년(1753)에 영일현감으로 부임하여 을해년(1755)년에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선생의 시 가운데 ‘두 해를 바쁘게’라고 한 것은 마땅히 이 시가 1754년에 지은 것이라야 한다. 지금부터 66년 전이다. 선생의 발자취를 어루만지니 선생의 높은 인품을 더욱 간절하게 사모하게 된다. 삼가 시를 지어 절의 벽에 걸어둔다. 다음이 지은 시이다.
先生以元陵癸酉宰延烏。乙亥謝還。詩中謂二年奔走則當是甲戌年間所作。距今六十六載。摩挲遺躅。益切高山景行之思。謹拈出揭之寺壁。仍次其韻。
암자 뜰은 깊고 깊어서 여름 나무가 그늘지고, 庭院沉沉夏木陰。
우연히 불경을 만나서 깊은 산에 이르렀네. 偶逢經釋到山深。
절에는 예부터 관심이 없었고, 西林自古無端意。
당시를 아득히 기억하자니 도심을 얻었다. 緬憶當年證道心。
동해 바닷가 봉우리들마다 땅거미가 묻어오고, 亂峯東畔欲斜陰。
등불 아래 옛 부처님 모신 깊숙한 암자 하나 있다. 古佛燈明一院深。
여기서 신령스런 샘물은 그치지 않고 흘러가고, 自是靈源流不舍。
유연히 냇가의 공자님 마음을 깨닫는다. 悠然會得在川心。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님이 냇가에서 흐르는 물을 보시면서 말씀하시었다.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도다!”(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고 하였다.
-이병원
<울진 기성면 사동 해월헌>
울진 사동(沙銅) 해월헌에서 포항 청하현 해월루(海月樓)와 월포 조경대(釣鯨臺)를 거쳐서 내연산을 유산한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 1524-1605)과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은 1587년 8월 6일 영해부사 최경회와 청하읍성의 동문(부옹문) 앞에서 작별을 하고서 내연산을 이틀 동안 유산하였다. 최경회는 임진왜란 진주성 혈전의 영웅이다.
황여일의 내연산 여행기,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은 단행본으로도 유통되었을 만큼 기행문학의 백미이다. 뛰어난 문학성과 세밀한 기록성을 지니고 있어서 인문학의 공간인 내연산을 읽는 고전이 된다. 내연산이 있어서 이토록 빼어난 글이 탄생하였고, 이렇게도 아름다운 문장이 있어서 우리는 내연산의 마음을 읽고 감동에 젖을 수 있다. 그는 적멸암(寂滅庵)과 삼용추(三龍湫)와 월영대(月影臺)와 선열대(禪悅臺)에서 슬프도록 깊은 아름다움과 장쾌한 감흥을 유감없이 표현하였다.
삼동석과 삼용추를 비롯하여 내연계곡에서 필자는 약 50개의 명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 잊히고, 와전되고, 잃어버린 내연산의 명소들과 암자들을 <유내영산록>을 읽고 거의 되찾을 수가 있었다. ‘삼동석 곁에는 두 승암(僧庵)이 있으며 그곳에는 ‘입에서 물을 뿜는’(도교 신선술 수련) 자들이 산다. 주연이 삼동석 십리 하류에 있으며, 측량하지 못할 정도로 깊다. 보경사 금당 뒤에 지장전이 있고, 지장전 뒤에 관음각이 있다.’고 하는 등의 정보는 <유내영산록>에만 유일하게 등장한다.
황여일 일행은 월영대 남쪽, 잠룡폭 곁에 장엄하고 웅장하게 치솟은 바위봉우리, 선열대에 보경사 학연(學淵), 계조암 신오(信悟), 대비암 신전(信全) 스님들의 안내로 올랐다. 황여일이 묘입문(妙入門)이라고 명명한 월영대 남쪽의 바위문을 지나면 사방이 닫혀 감옥처럼 깊은 바닥이다. 그곳에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황여일이 충소문(沖宵門)이라고 명명했다. 다리를 건너 다시 가파른 벼랑에 난 조도(鳥道)를 기어서 올라가면 그곳에 두 암자터가 있다. 정상의 정방형의 넓은 백운암터, 그 남쪽 아래의 장방형의 좁은 운주암터가 있다. 백운암과 운주암을 합하여 선열암이라고 하였다. 신라․고려시대 이래로 수행자들이 머물며 선열에 잠겨 깊은 수행을 하였던 속세를 초탈한 도량이었다. 겸재의 <청하내연산폭포도>에 두 암자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속칭 선일대(仙逸臺)라고 하지만 선열대의 와전이다.
백운대에 붙임 題白雲臺
푸른 하늘에 치솟은 금빛 연꽃 봉우리요, 靑天削出金芙蓉
꼭대기에서 곧바로 쏟아지는 두 줄기 흰 폭포수이네. 絶頂直垂雙白龍
옛 절벽이 가파르고 가파른데 참선하는 스님 야위었고, 古壁巉巉道骨瘦
가을 못은 고요하고 고요하여 신령스런 바람피리 소리 비었다. 秋潭寂寂靈籟空
동해바다가 지척이고 해가 백운대의 겨드랑이에 솟고, 東溟咫尺日生腋
북두칠성 아래의 하늘 가슴에는 구름이 소용돌이친다. 北斗低仰雲盪胷
다시 층층 발아래에 월영대이고, 更下層層月影石
외로운 연기 올라오는 암자에서 맑은 종소리 들려오네. 孤烟蘭若送淸鍾
-황여일
해월과 숙부 대해 선생은 선열대에서 암자의 스님들이 지은 푸른 채소 반찬에 흰밥을 먹고 머루주를 걸러 마셨다. 높고 높은 선열대 위에서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었다. 발아래 삼용추가 한 방울 물이고, 보경사가 메추라기 둥지처럼 작게 보이더라고 하였다. 동해 만경창파에 씻고서 밤낮으로 해와 달이 뜨고 지며, 은하수가 흐르는 우주를 관조하였다. 때맞추어 청하현감 매당(梅堂) 조정간(趙廷幹)이 시를 보내왔고, 이 시에 차운하여 대해와 해월은 선열대에서 시를 낭랑히 읊조리며 산놀이의 감흥을 유감없이 표현하였다.
<사진14. 선열대>
원운 原韻
그대가 가을산 속으로 들어가고, 君去秋山裏
가을산은 정말로 찾아 갈만 하여라. 秋山正可尋
폭포는 바위 아래서 울고, 泉流巖下咽
노송은 학 가에 그늘진다. 松老鶴邊陰
시상은 일천 가지 모습을 담고, 詩思籠千態
신선의 발걸음은 일만 고개를 넘는다. 仙蹤度萬岑
지은 시들 주머니에 모두 담으시고, 奚囊收拾盡
나머지는 부쳐서 이 늙은이 크게 읊게 하시라. 餘寄老夬吟
-조정간
조매당의 시에 화답하여 차운하다 次酬趙梅堂
옛날부터 듣던 호학산 풍경, 昔聞鶴山景
오늘에야 멀리 찾아왔네. 今日遠來尋
스님과 솔은 함께 늙어가고 僧與松同老
하늘은 골짝 따라 그늘진다. 天隨壑共陰
그대는 번거롭게 푸른 옥 지팡이 만들어 주고, 煩君綠玉杖
나는 흰 구름 고개를 넘는다. 度我白雲岑
절경은 시로 읊기가 어렵고, 絶勝難聲畫
풍경 만나 종일 시를 읊조린다. 臨風盡日吟
*녹옥장(綠玉杖):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말하는데, 녹옥의 가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청하읍성 동문 앞에서 청하현감 매당 조정간은 황응청과 황여일에게 해월루 앞의 대나무를 잘라 만든 지팡이를 선물하였다.
-황응청
조매당의 시에 차운하다 次趙梅堂韻
갈선은 어제 벌써 떠나갔고, 葛仙昨已別
봉래산에 가을이 다시 찾아왔네. 蓬島秋更尋
구동은 노을이 오래되었고, 龜洞丹霞古
용담은 흰 해에 그늘진다. 龍潭白日陰
열두 폭포는 우레치고, 雷霆十二瀑
일천 봉우리는 칼과 창처럼 솟았다. 劒戟一千岑
조물주는 다함없이 갈무리하였고, 造物藏無盡
천지간의 나는 이렇게 읊조리네. 乾坤我此吟
*갈선(葛仙): 포박자(抱朴子) 갈홍(葛洪, 284-363)이다. <<포박자>>, <<신선전>> 저자로 알려져 있다. 단사(丹砂 : 유화수은)가 현재의 베트남에서 산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갈홍은 베트남을 향해 가던 도중 잠시 광주(廣州) 지방에 들르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의 장관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머물러 달라는 제안을 했다. 갈홍은 하는 수 없이 그곳에 있는 나부산(羅浮山)에 들어가 연금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 속에 있던 갈홍이 광주의 장관 앞으로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먼 곳에 있는 스승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장관이 급히 산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갈홍은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 후 갈홍은 시해선(尸解仙)이 되었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았다고 한다.
*구동(龜洞): 낙구암, 구연이 있는 사자폭 주변을 말하는 것으로 보임.
-황여일
해월은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흰 구름이 허리에 걸리는 선열대를 백운대로 개명하였다. 선열대는 삼용추에서 올려다보면 암봉이기에 선열봉이라고 하였고, 운주암이 있기에 운주봉(雲住峰)이라고도 하였으며, 속칭 기화봉(妓花峰)이다.
오암 스님은 내연산의 이러한 풍경 속에서 출가 수행승으로 사는 당신의 내면 풍경을 시로 읊었다.
나의 넋두리 自諷
운주봉으로 붓을 삼고, 雲住峯爲筆
용추로 벼루를 만들어, 龍湫作硯池
일만 겹으로 펼쳐진 바위 병풍에, 巖屛開萬疊
뜻 가는대로 나의 시를 쓰리라. 隨意寫吾詩
-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