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것의 기억
한자일급여인
문학소녀들
꽃밭에서
쉰대렐라 여대생의 좌충우돌 일기, 오십이 면 어때? 대학생이면 그만!
집에 오자마자 올리는 글, 격랑의 바다에서 약전(丁若銓, 1758년~ 1816년)이 막 잡아 올린 고도리(고등어 새끼)의 날것 그대로의 생생함을 남기고 싶어서 약지를 잘라 생피를 뚝뚝, 병든 노모의 입으로 넣어 새 삶을 불러오는 느낌의 글을 쓰고 싶어서 자판을 두드린다.
2024년 3월 2일 토요일 오전 9시, 한국방송 통신대학교 102호실에서 국문과 오프라인 수업을 했다. 처음인 듯 꿈에서 본 듯, 오랜 지인인 듯 학우들과 함께했다.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소녀로 돌아갔다. 아마도 모두가 같은 감정일 것이다.
일단 국문과는 연령대가 다양해서 환상적이다. 나이별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어서 좋다. 한자라면 석삼(三)은 잘 아는데 넉사(四)부터는 헷갈리는 내 앞에 한자 일급자격증을 딴 소녀들이 가득한 방에 들어선 분위기였다. 성비율은 문학소녀들이 넘쳐서 남학생은 오는 순간 대환영이다. (제발 이런 고급 정보들을 널리 퍼뜨려주시길!) 시인인 남자 학우님께서 5명의 여자에 둘러 쌓여 커피를 마셔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점심식사 시간, 국문과 3학년 박정순대표님의 철저한 지휘아래 교실뒤에 김밥부터 온갖 달달한 간식들이 넘쳤다. 저녁까지 남을 만큼 넉넉한 음식들이 준비되었다.
귀한 잔치에 초대받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걸 다 생각했을까? 인간에 대한 배려를 배웠다. 나도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귀한 이에게 주는 정**홍삼진액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천안에서 김영희 학회장님께서 손수 만든 약밥을 가지고 응원하러 오셨다. 아산, 영동, 홍성에서 새벽길을 나선 학우들께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1교시 수업 <고전 시가론>
정기선교수님의 첫인상은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임영웅을 닮았다.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의 수업 방식도 그러했다. 모친의 칠순여행을 고향인 경주로 모시고 간 효자아들이다. 세 시간 동안의 긴 수업동안, 시계를 한 번도 안 봤다. 성인 ADHD인 나에겐 3일의 기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정신과 병동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걸그룹 댄스를 춰도 된다고 생각해서 지루한 대기 시간을 줄이는데 이용했다.
오늘은 신라인들이 즐긴 삶의 노래인 향가를 듣다가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렸다. 경덕왕과 월명사의 대화는 수십 년 넘게 알고만 있었던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를 만난 기분이었다. 경덕왕은 에밀레 종을 아버지인 성덕대왕을 기리며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도이장가 속 두 남자는 왕건의 사랑인 "신숭겸"과 "김락" 장수이다. 왕건을 대신해 죽은 사나이들을 회고하며 고려 예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만든 브로맨스글이다. 천년왕국의 노래가 25수밖에 안 남아있다. 과거로, 대과거로 가는 길! 예나 지금이나 그리움과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노래이다. 멋진 풍모의 화랑도들을 이끈 월명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스스로를 낮추는 겸허함으로 "신은 그냥 승려일 뿐입니다."라는 말속에 지혜의 샘을 지닌 남자임이 느껴졌다.
2교시 수업 <우리말의 구조>
송정근 교수님은 어려운 국어학을 그냥 "나훈아"같은 퍼포먼스를 하고 돌개바람처럼 사라졌다. 신데렐라 아닌 쉰대렐라(5땡나이에 여대생)인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문법이 우리가 평소에 하고 있는 말속에서 규칙과 불규칙을 찾는 숨은 그림 같은 경이로움을 가르쳐주셨다. 4가지(단일어, 복합어, 합성어, 파생어)만 기억하라고 하셨으나 집으로 오는 내내 다 잊어버렸다.
쉬는 시간이나 수업 끝나고 질문한다고 수시로 달달한 협박을 하셨다. 경고 같은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서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수업 내내 심쿵했다. 시험에 꼭 나올 것이라는 예언도 하셨으니 고삐를 꽉 잡고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나 스스로가 원해서 도전하는 번지점프 같은 것이었다.
고장 난 시계보다 대단한 것이 느리거나 빠른 시계이다. 아침 7시, 나에겐 첫새벽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달에 로켓 쏘듯 달려갔다. 대통령이 오라고 해도 난 이 시간에 움직이지 않는다. 스스로 택한 길! 돌아가신 시어머님께서 부르시면 달려갈 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사람에겐 이분법(dichotomy)이 본능에 들어있다는 것을 수업시간에 배웠다. 홍해처럼 편갈라서기로 난무하는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유전자에 새겨져 있었다. 우린 그렇게 이미 오래전에 약속한듯한 삶을 살아왔다.
3교시 수업 <문학 비평론>
"비평은 지적인 독서의 연장" -하우프(G. Hough)
민현주 교수님은 내가 부러워하는 이상형 여교수님이다. 소주 한잔에도 양볼이 발그레, 취할 것 같은 단아하고 수줍은 얼굴에 달달한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비평이란 매력적인 과목을 난 마치 사이코패스가 칼날 맛보듯 펜의 끌림을 느꼈다. 난 성격이 삐딱해서 까는 건 전문이다. 순자 어머니께서 넌 어찌 그리 비평을 잘하냐고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고 했다.
"좋다"와 "더 좋다"는 아빠와 다르게 난 뭐든지 "좋다."와 "나쁘다"로 구별하는 버릇이 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돌려 깎기 전문이다. 책 앞에 있어서는 더욱더 선을 잘 긋는다. 오래전 빌 게이츠가 추천한 책을 사서 읽고 그에게 "책 값 돌려달라."라고 문자 할뻔했다. 역사, 전기 비평, 마르크스주의 비평, 독자중심 비평 중 과제를 골라야 하는데 벌써부터 서른한 가지(31) 맛 아이스크림대 앞에선 아이가 된 기분이다.
호위 무사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수업얘기만 했다. 열심히 했으나 기억력이 사라져서 다 설명을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니까 남편이 고맙다고 다행이라고 답했다. 노래하는 종달새 같은 마누라가 울새가 되어버린 밤길, 모든 게 익숙한데 낯설다. 삶이란 삼백 년 만에 풀린 "페르마의 난제"보다 더 어려운 수수께끼이다. 아마도 그가 천년을 산다고 해도 못 풀 문제일 것이다.
세월의 모진 매에 때려 맞아야 사람이 되는 걸까? 마늘과 쑥만 가지고 동굴에서 면벽하고 참선해야 인간이 되는 것일까?
임명장까지 받아서 오는 길, 늘 야무지지 못한 마누라가 걱정되는지 말없는 남편이"넌 무슨 감투를 썼냐?"라고 물었다.
"오락부장"이라고 했다. 인생이 희극이다. 남편이 어이없다는 듯이 그냥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