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계추처럼 흔들리며 서서히 오버행을 내려선다. 하강기를 통해 물먹은 자일에서 빠져나오는 물줄기가 손목깃을 타고 들어 가슴에 와 젖어든다. 평소에 손발이 차가운 채미선 언니는, 하강하며 “영미야. 나 발가락 없으면 등반 어떻게 하냐?”고 한다. 발가락이 굉장히 시린가보다. 아니 칼로 그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언니. 발가락 아무나 쉽게 안 잘라요. 걱정 말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10회의 오버행 하강을 하고 밤 9시가 되어 땅에 내려선 순간 모두들 신발을 벗고 우모복 속에서 발을 보호했다. 전날 아침 8시에 암벽화를 신고 37시간 만에 다시 신발을 갈아 신고 땅에 내려섰다.
남겨두고 간 물과 간식으로 요기한 후 밤의 어둠과 안개에 가려진 그랑카푸생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뜬다. 화이트 아웃으로 한 시간 반 거리의 헬브르너 케이블카 스테이션을 찾지 못하고 자정 30분 전에 설동을 팠다. 처음엔 대충 설면을 깎아 체온에 의지해 배낭을 깔고 앉았다. 그러나 한 시간 만에 살랑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이 깨었다. 차라리 움직이는 편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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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랑카푸생 하강을 준비할 무렵 비에 젖은 눈들이 암벽화에 스미고 금새 바위에 눈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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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블레이드도 없는 아이스 바일을 들고 설동을 파기 시작했다. 잠시 후 채미선 언니가 장갑이 다 젖어 맨손으로 헬멧을 들고 설동 파는 작업을 도와 줘 세 시간 만에 소형 설동이 만들어졌다. 설동을 파며 갈증에 눈을 좀 집어 먹었더니 몸이 춥다.
날이 밝아오자 밖에 있던 명희 언니가 흥분된 목소리로 “사람이 오고 있다”고 한다. 설동 밖으로 나서니 세 명의 남자가 온다. 화이트 아웃에 방향과 거리 감각을 잃었지만 우리는 산장을 향하고 있었고 텐트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추위에 떠는 우리를 보더니 물과 비스킷을 주며 자신들은 빙하 트레킹을 할 거라 여유가 있다며 우리의 텐트가 보이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허술하게 쳐 두었던 텐트가 약 10m 정도 이동했다. 길옆에 텐트를 쳤더니 누군가 스틱을 사용해 텐트를 고정해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2일 밤을 비박하며 한 시간을 자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텐트가 사라지고 없었다면 그 허탈감이란……. 야간등반, 비박, 구조요청, 탈출, 설동 등 우리 나름대로의 알프스 5종 세트를 지나치도록 뻔뻔하게 즐기고 돌아왔다. 텐트를 다시 고쳐 치고 침낭 속에 피곤한 몸을 던져놓고 나니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다.
좋은 기운을 가득 담아가는 알프스 등반
5종 세트로 지친 몸을 회복한 후, 마지막 남은 일정동안 부담 없이 편안한 등반을 하기로 했다. 토리노 산장에서 산장 밥도 먹어보고 주변 풍광이 좋다는 당뒤제앙(Dent du Geant·4,013m)을 등반하러 갔다. 토리노 산장에서 에베레스트를 여성 최초로 등정한 다베이 준코 여사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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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 뒤제앙 정상에서 후원사 깃발을 든 대원들. 성모마리아상 뒤로 그랑드조라스가 보인다.
- 당뒤제앙은 정상까지 파이프 굵기의 고정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많은 손님과 가이드들이 줄을 서서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알프스답지 않은 모습이다. 로프의 중간 확보물에 장비를 설치하며 등반하는 화영 언니의 뒷모습이 힘이 넘친다. 화영 언니는 우리 팀의 비타민, 박카스 같은 존재다. 늘 시들지 않는 유머감각과 넘치는 끼로 사나운 분위기도 잠재우는 매력이 있다. 화영 언니가 없었다면 등반하며 웃을 일이 반의반도 안 되었을 거다.
정상엔 성모마리아상이 이탈리아 쿠르마이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가운데 청명한 대기 속에 펼쳐진 정상의 파노라마들이 압권이다. 에귀디미디에서부터 타귈과 몽블랑, 그랑카푸생, 제앙빙하와 그랑드조라스, 이탈리아 저 너머의 산군들 등. 히말라야와는 다르게 짧은 어프로치로 다양한 등반과 풍부한 경치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알프스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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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뒤제앙 정상부에 올라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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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등반에서 많은 에너지를 충전하고 돌아가는 기분이다. 등반의 어려움을 떠나 좋은 기운들을 가득 담은 느낌이다. 사실 등반하러 나와 오랜 시간을 지내다보면 서로 마음에 안 맞는 부분이 있다. 원정이란 등반을 하며 서로의 간격을 좁혀 나가고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숨을 쉬려면 마신 숨을 다시 내뱉어야 하듯이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얻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희생이 있어야 하나가 되건만 나는 스스로를 얼마나 버리고 가는지 부끄러운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원정대 명칭 2011 Woman Alps Fun Expedition
대원, 소속 이명희(노스페이스), 채미선(골수회), 한미선(한산악회), 서화영(설우산악회), 김영미(강릉대산악부 OB)
대상지 유럽 알프스산군 샤모니 중심
등반기간 2011.7.12~8.12
결과 코스믹 리지, 에귀디미디 레뷔파 루트, 그랑카푸생 보나티 루트, 당뒤제앙 등정
후원 노스페이스
- 등반정보 보험 CAF(Club Alpine Francais)에서 9월 말부터 다음해 9월 말까지 1년 단위로 가입하며 유럽 전 지역에서 헬기구조, 병원비, 산장 할인 등을 받을 수 있다. 가격 66.47유로
멀티패스 케이블카를 탈 때마다 표를 끊지 않고 5회, 10회, 15회 등으로 묶어서 끊으면 저렴하다. 연속과 비연속으로 나뉘어 있고 하루에 몇 번을 타든지 하루를 1회로 본다. 단 샤모니에서만 사용 가능하다.
날씨 정보 http://www.chamoni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