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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 공화국 국회의원 겸 여당 총재 자리에 올라 있는 김씨는 이민 3세. 1921년 함경도를 나와 연해주에서 살던 그의 할아버지는 1930년대 말 시베리아 야쿠츠크(현재 사하 공화국의 수도)로 강제 이주당한다. 국내 정치에 실패한 스탈린이 약소민족 이주정책을 펼쳐 실수를 만회하고자 한 것. 김씨는 “아버지가 7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짐도 못 챙기고 쫓겨났을 게 뻔하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야쿠치안'(야쿠츠크 사람)과 결혼했다. 김씨가 1930년대 몰아닥친 창씨개명에도 불구하고 성(姓)을 지키고 있는 것은 순전히 할아버지 덕이다. 농업기술자로서 시베리아 그 얼어붙은 땅에서 농업혁명을 일으켰던 것. 할아버지는 소련이 마침 2차대전과 맞물려 식량난에 허덕일 때 채농(菜農) 양산에 성공,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1980년대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라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 야쿠츠크에서 변호사 개업 후에는 말 그대로 탄탄대로. 법조인으로 실력을 다진 그는 1992년 사하 공화국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할 때 초대 제헌의원으로 뽑혔고, 이것이 정계 진출의 발판이 됐다.
미하일 니콜라예프 사하 공화국 초대 대통령은 1993년 그를 비서실장으로 발탁했다. 김씨는 이듬해 사하 공화국 국가법률회사를 설립,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인지도를 높였다. 본격적인 정치 활동은 야쿠츠크 시의회 의장을 거쳐 국회의원에 당선된 1998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국회에 진출하자마자 덜컥 국회의장 출마를 선언, 정치적 시련을 맞는다. 젊은 정치 초년병으로서 의욕만 앞섰던 것. 이민족 주제에 톡톡 튀는 모습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다이아몬드·천연가스 등 자원의 보고
어릴 적부터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그에게 ‘한국인’이라는 단어는 자부심이자 핸디캡이었다. 유엔 세계평화의날 기념행사(9월 27~28일)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김씨는 “고려인이기 때문에 더더욱 정치를 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민족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깨는 데는 남을 지배하고 이끌 수 있는 정치인이 되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었던 것.
김씨는 웅변술·친화력·리더십 등 정치인으로서의 미덕을 고루 갖춘 재목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특히 남다른 창가(唱歌) 실력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현재 쓰고 있는 감투만 해도 사하 공화국 민속창가협회장, 민속체육회장, 러시아 연방 변호사협회 부회장 등 다채롭다.
사하 공화국은 천연자원의 보고(寶庫). 다이아몬드 생산량은 세계 총생산량의 25%에 달하며, 천연가스(9000억t)와 석유는 매장량이 많은 데다 질도 우수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을 뽑아내고 수송할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것. 김씨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천연가스 수출 송유관 건설과 다이아몬드 생산 등에 외자를 유치, 러시아 연방 내에서 경제적 주도권을 잡겠다”고 말했다.
사하 공화국은 1992년 독립했지만 국방·치안·외교 등에 러시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주권을 부분 양도한 것이나 다름 없다. 더욱이 당시 러시아와 맺은 ‘연방경제협정’에 따라 사하 공화국은 생필품을 원조받는 대신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80%를 러시아에 넘겨줘야 하는 형편이다.
아직 후보 등록(10월 23일 마감)이 끝나지 않은 현재 사하 공화국 대통령 선거(12월 23일)에 출마 의사를 표시한 사람은 10명. 현 국회의장이자 야당 총재인 바실리 필리포프, 니콜라예프 현 대통령 등 3~4 후보가 경합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사하 공화국 대선의 특색은 1차 투표에서 다득표자 두 명을 가려 결선 투표를 한다는 점. 김씨로서는 결선 투표에 오르는 데 실패하더라도, 당선 가능한 후보에게 정치적 힘을 실어준 뒤 차기 대선을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그늘'에 불과한 니콜라예프 정권에 염증을 느껴온 유권자들이 젊고 개혁 성향인 김씨를 선택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김씨는 “뚜껑을 열어봐야 하지만 나에게도 승산이 있다”며 자신감을 표명했다. 그는 “한국말은 못 하지만 내 뿌리는 한국”이라며 “대통령에 당선되면 경제·문화 등 한국과의 교류를 넓혀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박돈규 조선일보 국제부 )2001.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