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아를시대 -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고뇌와 상처만 가득하네 2편
https://youtu.be/yguGv0Ny6mI
#고흐 #아를시대 #Vincent_van_GogH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술적인것은 없다"
- 빈센트 반 고흐 -
아를Arles 시대 1888.2 ~ 1889.5
고흐의 작품세계는 크게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 머물렀던 지역에 따라 구분됩니다.
각박한 파리 생활에 지친 반 고흐는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계획으로 1888년 남프랑스 아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고흐는 열다섯 달 동안 <밤의 카페 테라스>(1888)를 포함해, 200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답니다.
고흐가 아를을 찾은 것은 1888년 2월. 겨울이었지만 파리의 우울한 생활을 벗어난 화가에게 도시에 대한 인상은 유독 따뜻했습니다.
네 제가 좀더 알아보려고 네이버 지식백과에 가봤습니다.
"남프랑스 아를은 고흐가 사랑한 마을이다. 그가 서성대던 카페, 병원, 골목길에도 고흐의 흔적이 내려앉았다.
세상에 적응 못하고 떠난 비운의 화가를 부둥켜안은 쪽은 어쩌면 아를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유작들은 전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지만 이방인들은 고흐를 더듬기 위해 작은 도시를 찾고 있다."
그의 호흡이 닿았던 대부분의 공간들은 캔버스 위에 담겼다. 고흐가 머물던 병원인 에스빠스 반 고흐 (Espace Van Gogh)는 문화센터로 용도가 바뀌었지만 작품 속 정원처럼 화려한 꽃이 피고 매년 여름이면 공연이 열린다.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카페는 아를에 대한 추억과 휴식이 서려 있다. 카페 반 고흐라는 이름으로, 노란색으로 치장된 채 여전히 성업 중이다.
카페와 술집이 술렁이는 골목을 벗어나면 론 강으로 연결된다. 고흐가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낸 낭만적인 공간이다. 푸른 강변과 주황색 지붕의 낮은 건물들이 이뤄내는 프로방스 마을의 단상은 소담스럽다. 강둑에 몸과 어깨를 기댄 연인들의 모습은 매혹적인 그림이 돼 시선을 사로잡는다.
고흐의 숨결 위에, 프로방스의 햇살 위에 덧칠해진 것은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아를의 풍경이 낯설고 신비로운 것은 사실 이 유적들 덕분이다. 로마인들은 고흐보다 2,000여 년 먼저 아를의 햇살과 풍경을 동경했다. 기원전 100년 즈음에 원형경기장과 고대 극장 등을 세웠으며 그 잔재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기장 외에도 무덤인 네크로폴리스 등을 남길 정도로 로마인들은 이 도시에 미련을 보였다. 경기장 아레나 등 로마시대의 유적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고흐는 아를에서 미술공동체를 꿈꿨다. 유일하게 초대해 응했던 고갱마저 곁을 떠났다. 천재 화가의 소망과 아픈 시련까지 담아낸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은 그래서 더욱 따뜻하고 애착이 간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를 - 프랑스 (세계의 명소, 서영진)
네 고흐는 아를에 와서 매우 흡족해 했답니다.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화가가 느꼈을 아를의 ‘매혹’이 담겨 있습니다. [노란 집], [아를 병원의 정원], [밤의 카페 테라스(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등 강렬한 색채의 작품 역시 그런 도시의 매혹이 자양분이 됐답니다.
아를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고흐는 아는 화가들에게 모두 편지를 써보내서 화가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답니다. 그런 제안에 응했던 사람은 유일하게 폴 고갱 뿐이었습니다.
같은 해 10월, 고갱이 고흐의 '노란 집'으로 이사를 왔지요. 두 화가는 몇 주간 함께 작업을 했으나 결국 사이가 악화되었고 급기야 고흐는 자신의 귓불을 자르는 사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두 사람의 갈등이 결정적으로 폭발한 이유는 바로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였답니다.
고흐의 그림에서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뚜렷한 눈동자를 보여주지만, 고갱이 그린 고흐는흐리멍텅한 모습으로 보여졌습니다. 고흐는 고갱이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서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고흐는 술집에서 고갱과 술을 마시다가 술잔을 집어던지는 걸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답니다.
결국 고갱이 온 지 두 달이 약간 지난 1888년 12월 23일,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고갱의 회고에 의하면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며 나타나서 자신을 찌를 듯해보였지만 노려보기만 하고서는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그 뒤에 귀를 잘라버린 걸로 보이며 잘라낸 걸 가끔 만나던 사이인 라셸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었고 그걸 보고 기겁한 라셸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합니다.
고갱은 떠나갔고, 고흐는 병원에 입원했지요.
이렇게 해서 고흐의 짧은 아를 시대는 끝나고 맙니다.
참고 : 나무위키/네이버 핵토르 블로그
좀 더 자세히 알고싶으신 분은 아래의 동영상을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