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이런 노래를 아시는지요? 한 때는 산을 사랑하는 이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불렀던 노래, 지금은 한국의 시인들과 문인들 97%가 가장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 이 고개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이 노래는 386 세대들에겐 무언가 아련한 서글픔을 곱씹게 한다고들 합니다.
저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양희은 선생이 불러 히트를 친 노래 ‘한계령’의 1절입니다. 지금이야 ‘한계령’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원래 이름이나 한계령으로 불리기 바로 직전의 이름은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노래의 원저작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분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작사자가 아닌 노래가 되어 진 노랫말 이전의 원작시를 쓴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노래를 작곡을 한 분은 하덕규 선생이 맞습니다. 조성모가 불러 많은 이들이 더욱 사랑하게 한 노래 ‘가시나무’를 작사 · 작곡을 한 분입니다. 하지만 얼마전까지 작사도 그 분이 한 걸로 되어 있었습니다. 분명히 밝혀둘 것은 작사라는 게 원작에서 일부를 차용하여 쓴 것도 작사라면 맞습니다. 하지만 원작을 인정하면 작사가는 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이미 같은 제목으로 쓴 시가 40여 편이 넘으니 앞으로도 틈만 나면 할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한계령에서Ⅰ 정덕수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메일지. 삼만육천오백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 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메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 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 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1981년 10월 3일 한계령에서 고향 오색을 보며
작은 사진은 2001년 6월에 고향을 다시 돌아가 지금의 아이들 엄마인 아내와 함께 한계령을 올라가던 도중 촬영한 칠형제봉입니다. 이 한계령을 처음 썼을 때가 1981년 이니 광주항쟁이 있고 만 1년 5개월 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저는 여전히 어린 18살 이었습니다. 이 글을 처음 쓰던 그 당시 지금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이 시로 된 노래를 부르시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늘 그런 듯 합니다. 자신이 어떤 목적을 갖고 한 일보다 그렇지 않은 말 그대로 순수한 의도로 한 일이 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갖게 하는 듯 싶습니다. 만약 한계령을 노랫말로 쓰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면 이 시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계령의 아름다운 모습을 극찬하기에 바빴을 건 뻔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런 시각으로 한계령을 찾고 봅니다. 저는 한계령은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차근차근 오늘은 그 지나간 이야기들을 우리 래은이와 래원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다시금 되새겨 볼 생각입니다.
조금 긴 글이 되겠지만 천천히 읽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05년 1월 1일 첫 새벽 이곳을 올랐습니다. 양양군에서 많은 이들이 인제군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이곳을 양양군의 땅이며 원래 이름도 양양군에 속한 오색리의 지명을 딴 『오색령』이지 인제군에 속한 인제군 북면 한계리의 지명을 딴 한계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이 오색령(한계령) 정상에 표지석을 세운 것입니다. 그 준공식에 초대를 받은 것이지요. 매년 정월 초하루면 이곳은 해맞이 명소로 많은 분들이 새해 소망을 빌고 해맞이를 합니다. 해맞이 행사가 시작될 기 시간에 이곳에서 남설악적십자산악구조대 대원들의 진행으로 행사가 있었습니다. 구조대원들이야 대부분 저와 선후배 사이입니다만 사실 대게의 사람들이 그렇 듯 고향에서는 정작 밖에서는 아무리 잘 알려진 사람이라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의 경우엔 지금도 여전히 양양군에 사는 사람도 자신과 같은 고향에 사는 사람이 노래 한계령이 된 시 한계령에서를 쓴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가끔 이런 행사에 초대를 받아 가게되면 그런 말을 듣습니다.
“형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뭐 이해는 됩니다. 자신들과 같은 구조대원이나 어떤 대외적으로 활동을 하지도 않는데 그곳에 춥거나 덥거나 참석을 하였으니 궁금한 일이겠지요.
『옛 오색령』 이 표지석을 세우던 2005년 첫 아침은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섭게 추웠습니다. 대부분의 지역 기관장들이 인사를 사양합니다.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소개가 끝나고 고사 했지만 결국 표지석 앞에 섰습니다. 제 평생 그렇게 빠른 시간에 시(詩) 『한계령에서』를 낭송 해 본 기억이 없습니다. 대부분 3분 40초에서 4분 정도 걸리는데 그 날은 채 2분도 걸리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고도 얼어 죽는 줄 알 정도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혹한 속에서 바람을 몸으로 막아주며 제 낭송 하는 걸 들어주셨는데 이 공간을 통하여 정말 감사했었다고 인사를 드립니다.
오색령은 이토록 제겐 정말 많은 추억과 아픔과, 눈물, 그리움의 원천인 곳입니다.
잠시 예전 글 한 부분을 인용 해 보겠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원작을 가져가 아주 다른 사람의 창작으로 발표를 하였다면 어떤 느낌으로들 대처할까? 난, 참 오랜 세월을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찾지 못하고 그저 막연한 추측으로 다만 시간이 해결하여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계령에서 Ⅱ"는 이런 사실을 알게된지 만 3년 째 되던 해에 다시 그 한계령에서 쓴 글이다. 인생 굽잇길마다 왜 그리도 발목을 휘어감는 가시넝쿨은 많은지, 또 발 걸려 넘어질 돌부리는 또 왜 그렇게 많은 것인지? 그러나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 인생길이 아닌가. 때로는 내 몸이 부서질 듯 고통스러움 속에 헤매었지만 끝까지 참고 가야만 했다.
처음 '한계령에서'를 쓸 때와는 내 삶의 모습도 많이 달라져있었고, 순간순간 지난 날들을 회상하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잃어 버린 듯 하던 어린시절의 추억들과, 급하게 폭풍우 속에 휘말려 돌아가는 듯 변하는 고향의 모습에 일종의 연민마져 느끼며, 유년의 기억 저 편에 울고 있는 작은 아이를 떠 올리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주 작은 기억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얼레지 나물이다. 이른 봄, 언 땅을 비집고 올라온 얼레지를 어머니는 양은다라이를 들고 뒷산을 올라가 가득히 뜯어다 삶아 물에 담궈두곤 끼니 때마다 국을 끓이거나 무쳐 가족들의 밥상에 올려놓으셨다. 얼레지 꽃이 핀 봄 산골에 간혹 짖궂은 눈이 내리곤 하였다. 어찌 아무리 어린 나이의 나였다곤 하나, 얼마되지도 않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끈을 놓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머니가 집을 나가신 것이 내가 여섯 살 되던 해, 이제 막 봄에서 여름으로의 행장을 계절들이 꾸리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 이 어머니와 얼레지 나물에 대한 기억은 바로 직전과 그 전 해의 기억이 모두일 것이리라.
다만 마을 이름만 예쁜 오색리! 난 한동안 고향을 그렇게 떠 올렸다.
이제 흙먼지 날리던 신작로는 아주 오랜 옛날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고향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불과 6년 전(1985년 5월) 어머님를 낯 선 정선땅에 모시고 그 일을 빌미로하여 아버지와 의절한 채 다시 객지로 떠돌던 내가 고향을 찾을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산이 무작정 좋았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들어가던 산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아주 지칠대로 지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나를 어떤 거부의 몸짓 하나 보이지 않고 넉넉한 품으로 받아주었다. 죽고싶어 산을 찾던 내가, 살기 위하여 산을 찾게된 것이다.
「삼천 육백 쉰 날 지난 뒤
마지막 연을 완성하고 그 날 난 폭음을 한 채 한계령 설악루 찬 시멘트바닥에서 밤새워 울었다.」
지금 래원이가 서 있는 이 자리, 이 장소의 의미를 아는 분이 몇 분이나 될까요? 하덕규 선생은 아실까요? 이 자리에 서 보셨을까요? 양희은 선생은? 아닐 것입니다. 이 장소엔 참 많은 분들이 잠시 머물다 가셨을 겁니다. 그냥 풍경이 좋아서! 사진 한 장 기념으로 간직하기 위해서!
이 장소, 이 건물을 짓기 전 잠시 지금 이 위치 보다 위에 자리 한 곳에 앉았었습니다. 거기서 한계령에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2003년 2월 23일 이 자리에서 방송으로 촬영이 된 ‘한계령을 사랑한 남자 정덕수’를 촬영하면서 시 낭송을 하는 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의미도 모르면서 이 자리에 아빠를 따라와서 지금 제 아들이 섰습니다. 아무 의미도 모를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먼 후일 아들은 말 할 것입니다. 자신이 4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이 장소에 섰었다고! 아버지의 마음의 고향이고 아버지의 전부였던 아버지의 고향, 그리고 누나의 고향, 자신의 고향인 이곳엘 자신은 네 살 어린 나이에 아빠를 따라와 서 보았다고 말입니다.
지금 래원이는 아빠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뒤 돌아보니 어떤 아주 예쁜 숙녀께서 래원이가 아빠에게 자신을 촬영 해 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곤 자신이 촬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래원이는 그 숙녀분 미모에 반했나봅니다. 박순백 박사님께서 항상 제게 껄떡쇠라고 하십니다. 제 아들이 절 역시 닮았나 봅니다.
남설악! 작은 골짜기 안에 산이 지닐 수 있는 특징을 고루게 갖춘 드물게 아름다운 명산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태(胎)를 묻었으며 그 태가 썩고 거름이 되어 기른 푸성귀를 먹고 자랐습니다. 제가 그랬고 제 아이들이 그럴 것입니다. 그 아이들의 아이들까지 그래준다면 저로써는 정말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버님은 오색마을이 고향은 아니십니다. 오색과 같은 면소재지인 양양군 서면 갈천리가 고향이시고 오색리는 어머니의 고향입니다. 저는 어머니가 태어나시고, 어머니의 아버님이 태어나신 그 장소에서 전쟁 이후 아버님이 지으신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에 갈천과 오색 두 마을은 저에겐 가장 많은 시심을 자극한 동시에 가장 아린 추억을 많이 만들어 준 곳입니다.
한계령에 대하여 1편을 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한 번 소개 해 드리겠습니다. 아래 사진을 촬영 된 모습, 한계령을 쓰던 날은 이곳은 저 풍경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짐작으로 한달음에 달려 갈 그 곳이 오색리라는 걸 연상하며 쓰여진 글이 한계령에서 Ⅰ입니다.
한계령에서를 쓴 계기와 연작시 모음
내가 “한계령에서”란 제목으로 시를 쓴 것은 이미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아니 첫 시를 쓴 때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옳다. 그리고 10여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그 제목의 시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뀌어 노래로 만들어져 있음을, 산악인들한테는 '대청산장'으로 불리던 대청봉 정상의 대피소 마룻바닥에서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아가씨가 내가 낭송한 시(詩)의 화답으로 부르는 노래를 통하여 알게 되었고, 그 해 인가 이듬핸가, 가을에 고향에 가서 등산을 하고 하산길을 한계령 고갯마루로 잡고 내려와서 제법 현대화 된 휴게소 건물 안에 앉아 산행을 함께 하였던 동행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세월에 변하여 버린 고향에 대한 애증과 내 부모에 대한 생각들에 대하여 쓴 것이 2편인 ‘한계령에서Ⅱ -타인의 노래가 되어 버린’이다. ◀2000년 늦은 여름 한계령 정상에서 최근에서야 난 10년을 주기로 쓰던 한계령에 대한 글들을 연작 형식으로 쓰고 있는데, 계기가 되었던 일은 드림위즈의 부사장님으로 계신 박순백 박사님의 말씀을 듣고 부터다. 2000년 8월 19일 설악산을 다녀와서 쓴 ‘한계령에서Ⅲ -낙엽 떨어지던 저 능선에 진달래 피면은’을 보시고 그전에 지니 쪽지로 드렸던 ‘정동진의 추억’과 ‘정동진에서’란 두 편의 시와 연결하여 정동진과 한계령을 다녀오시고 난 뒤 드림위즈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 “연작시로 써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셨고, 난 이 제안을 받아들여 연작으로 쓰기 시작하여 현재 15 편의 시를 완성한 것이다. 이 한계령에서가 '노래 한계령'이 된 사연을 간단히 밝히고 넘어 가겠다. 1980년대엔 음악다방이 전국적으로 아주 많이 있었고, 서울도 어느 지역이나 음악다방이 있었다. 동대문 근방에도 많은 음악다방이 있었는데, 그 중에 동대문 운동장 축구장 건너편에 ‘산장다방’이라는 음악다방이 있었다. 얼마 전에 들려보니 ‘못잊어’란 커피숍과 노래방으로 바뀌었는데 바로 직전에는 ‘못잊어 음악다방’이라는 간판을 걸고 음악다방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80년대 초반, 난 1주일에 한 번씩 산장다방에 들려서 시낭송을 하곤 하였는데, 이런 일은 몇 년을 두고 음악다방에 DJ로 일하던 친구들의 부탁으로 신당동 동화극장에 있던 ‘주희’, 왕십리의 ‘축제’ 등에서 정기적이지는 않으나 계속하였다. 아마도 이 음악다방에서의 시낭송은 89년도까지 하였던 것으로 기억 된다. 83년도인가 84년도인가 하여 늦은 가을 낙엽이 떨어질 무렵에 설악산을 다녀와서 그대로 그 산장다방에 들려 시낭송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한계령에서’란 첫 시를 쓰고 2~3년이 지난 뒤의 일인 것이다. 시낭송을 한 뒤 인사를 하고 뮤직 박스에서 나와 테이블에 앉아 서빙을 하는 아가씨가 들고 온 주스를 마시고 있으려니 3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당시엔 그들은 제법 히트하는 노래를 만들었다고 이야기를 한 것으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들이 인사를 건네더니 자신들의 노래를 들어보았느냐고 하며 내가 낭송을 하였던 시 중에서 노래를 만들면 좋을 가사꺼리가 있다며 보여주기를 청하였다. 그들은 여러 편의 원고 중에서 ‘한계령에서’와 ‘오색령을 넘으며’란 시에 대하여 집착을 보였고 베껴 갔다. 이 오색령이란 바로 한계령의 옛말이다. 그리고 이 시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하여서도 질문을 하였고 난 모두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 시는 내가 유일하게 나중에 수정을 하였기에 원본과는 다른 부분이 있는데, ‘발아래/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눈물 젖은 계곡’으로 현재는 되어있지만 원래는 ‘발아래/슬픈 추억 첩첩산중/눈물 젖은 계곡’으로 썼었다. 나중에 이 부분이 거슬린다는 동인들의 이야기가 우세하여 ‘발아래/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눈물 젖은 계곡’으로 고쳤는데 이 까닭을 알지 못하는 작곡자는 그대로 원본을 베껴 사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시는 내가 즐겨 듣던 외국 팝 ‘마이웨이(My Way)’라는 곡을 들으며 쓰다 보니 자연 그 곡의 곡조를 닮아 있다. 지금도 때때로 낭송을 할 때면 난 그 곡에 붙여서 낭송을 하곤 하는데, 그 당시에도 그랬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우려하였던 것이 현실에서 그대로 되었다는데 있다. 작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데 대하여 불쾌한 감정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 되리라.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노래의 곡도 다른 사람이 절반을 하였고, 그 곡을 얻어가서 완전한 하나의 곡으로 완성하였다는 뒷이야기를 양평, 서종면에 있는 잊혀진 나이 든 어느 가수가 운영하는 ‘함박눈’이라는 카페에서 들었다. 좋게 생각하여 ‘아, 이 사람은 어느 날 한계령을 넘다보니 불현 듯 어떤 연상 작용으로 잊고 있던 한계령에서란 시가 떠올랐고 그런 관계로 자신이 작사/작곡을 하였다고 이야기를 하겠구나.’라고 이해하여 왔는데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소중한 한 부분을 가져가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이는 분명히 도둑질이 된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일들이 많으나 묻히고 있어 일반인들이 모르고 넘어갈 뿐이다. 이젠 이런 일은 다시는 어느 곳에서도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니,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절대로 타인이 나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기억과 추억이 아무리 메모리 된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기억의 조각들조차 가져갈 수 없는 것이다.
1997년 5월 24일
이건 사실 제 개인 홈페이지에 정말 오랬동안 감추어져 있던 글입니다. 잠시 산장 ‘한계령에서’를 오색 마을에서 운영 할 때 그 산장의 홈페이지에 한계령에서 연작시를 소개하며 옮겨놓기는 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글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젠 이 곳에서 많은 분들이 보시게 되었지만 이 내용을 밝혀도 양희은 선생은 원래부터 노래를 만든 일과는 연관이 없는 분이시고, 하덕규 선생과도 원만한 해결을 보았기에 문제가 될 이유는 없습니다. 오랜시간 말 없이 기다려주어서 고맙노라는 말씀을 작년에 하시더군요. 올 가을에 미국에서 귀국을 하시면 함께 이 한계령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저를 빼 놓은 제 가족입니다. 그리 넉넉하지는 않지만 두 녀석이 이렇게 밝게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행복합니다.
미움과 애증, 그런 걸 가질 대상은 이미 모두 이 세상에 안 계십니다. 오로지 제 가족과 더불어 고향에서 이 아름다운 고향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갈 일만 남아 있습니다.
다시 한계령에서 3 -집어등은 고기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고독한 나를 부르고 있다
산에 오르고 싶은 날이면 바다를 보는 버릇이 생기고 한계령 마루에 서면 동해가 그렇게 보이겠거니 갈망하는 그 무엇 때문에
습관처럼 랩톱에 전원을 넣고 흐려 바다가 보이지 않는 날 바람이 - 머리카락 헤치는 줄 모르는 소녀처럼 키워드를 입력하고 모니터가 열리길 바라며 마우스를 흔들어 댄다 내게 이런 이상한 비밀 하나 생기고부터 한계령휴게소 자판기에서 뽑아 든 커피인 양 언제나 · · · · · ·
그렇게 그곳을 찾아가는 발품을 팔지 않고부터 손톱끝 피가 맺히게 두드려댄 자판에서 해풍이 불고 비린내가 풍기면 적당히 만족하는 두 눈
모니터에 쓰인 ‘한계령’ 세 글자 뿌옇게 안개처럼 눈앞이 흐려지는데 그때 알았다 집어등은 고기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고독한 나를 물푸레나무 빛 고향을 미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왜 한계령 고갯마루에 서면 동해 바다가 거짓말처럼 열리고 집어등 밝은 고깃배 줄 지어 떠 있는지를.
미역국을 끓이며
주머니를 터니 돈 5만 원
정육점에 들러 우족 하나만 들고 나왔다
눈길 걸어 돌아온 집 보일러는 고장이 난 지 오래 어쩔까를 몰라 그저 한참을 울었다
아마 내일 아내가 처음 집으로 돌아와 먹을 미역국 내 눈물 맛일 게다.
그렇게 어려운 중에 제게 온 딸이 6살이 되었습니다. 제법 글을 깨우쳐 아빠에게 가끔 편지를 씁니다. 동생도 보아 제법 누나다운 모양을 냅니다.
산에 서서히 봄이 찾아 듭니다. 자리를 잡아갑니다. 사는 게 다 그런 듯 합니다. 어려워도 그 순간을 견디고 나면 웃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항상 기다리고 있다가 슬그머니 손을 내밉니다.
이 포스트에 오류가 있어서 수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분께서 문의를 해 오셨는데 그런 분이 얼마든지 계실 것 같습니다. 이곳에 아예 밝혀드리겠습니다. 저는 분명히 작년 초여름 한국음악저작권협회(http://www.komca.or.kr/)에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회원번호는 W07344번입니다. 등록 된 부분은 대중부분 작사며 등록 된 이름은 본명을 그대로 사용해서 ‘정덕수’입니다. 참고가 되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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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사의 문화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寒士정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