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서 제일 더운 곳
작년 이맘때쯤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저는 저녁 미사 전, 고해소에 들어갔습니다. 평소보다 더운 날씨 탓에
뜨거운 열기가 조그만 고해소 안에 가득 찼습니다.
미사 시작 전부터 지쳐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그날따라 수단은
왜 이리 무겁고 부담스러운지, 괜히 예수님께 투덜거리고 싶었습니다.
미사가 시작되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영성체 시간 전 성체를 모셔 오기 위해 감실 문을 열었을 때,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감실 안이 ‘찜질방’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계셨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성당 가장 더운 곳에서 우리를 위해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고해소가 덥다고 얼굴을 찌푸린 제가 참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께서 내어주신
생명의 빵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저를 위해 어떠한 불편함도, 어떠한 고통도, 어떠한 시련도
기꺼이 받아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 내어주신 당신 생명의 빵은
‘갈 길이 먼’(1열왕 19,7) 제가 힘을 얻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부족한 제가 당신을 찾고 당신 안에서 기뻐할 수 있도록, 모든 순간
다양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는 그분께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저의 부족함을 뚫고 사랑을 전해주는 분이십니다.
새삼 미사 경문의 한 구절이 가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당신께 합당치 않은 제가 조건 없이 초대받고 용서받고 치유 받았다면,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제2독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
주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고 서로 용서하며 사랑하길
바라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 하시지 않고,
우리를 위해 우리가 서로 사랑하길 바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닮아가길 원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좌절하겠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지쳐 쓰러진 엘리야에게 음식을 주시고,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하신 것처럼,
그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건네시며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은총을 다시금 깊이 되새기며 주님과 함께 사랑으로 살아갑시다.
글 : 金榮福 Richard 神父 – 수원교구
성모님이 찾아오시는 창조적 방법
“어떻게 살지? 미술이 내 인생의 최선이 맞나?”를 고민하며 절도 찾아가고,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가겠다며 스님을 붙들고 떼쓰고 소란을 피우던 시절,
불교에 깊은 영향을 받고 ‘관계’라는 주제로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관계를 맺어 가면서 일단 살아가 보자.’ 이렇게 살아갈 구실을
찾아보기로 하고 그 주제를 표현할 매개로 못을 활용했습니다.
그렇게 못에 빠져있던 시절,
친구가 인생 처음 사게 된 작은 한옥을 방문하게 되었지요.
못을 생필품들 걸개로 삼고, 못에 전선줄들을 걸어 졸대를 대신하는 등,
온갖 기능들을 못으로 대체하여 사방이 못들로 꾸며진 그 집은 내 평생
못으로 씨름하면서도 생각지 못한 발상들이 생활로 숙성된 절실함으로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몇 세대를 거쳤는지 알 길 없을 만큼 사이즈와 두께, 못 머리 등의
디자인들이 사뭇 다르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서로 녹이 슨 수준이 다른 것에
이르기까지 세월의 급이 보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못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떠올랐고, 저는 친구의 양해를
구해 <못 나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마련했습니다.
“회생과 부활의 못. 용서와 속죄의 못. 못 나눌 이야기는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나누는, 서로를 알아보고 엮어가는 자리가 될 듯합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그분의 계획된 앞일들에 대한 설레임을 가득 담아 소식을 전해봅니다.”
라는 인사말로 초대장을 썼습니다. 사람들을 초대하고 한옥 대청마루에
예수님 제자의 숫자만큼 의자 12개만 깔고, 음식은 빵과 와인으로
사람들과 못 나눌 이야기를 나누던 3일간의 전시였습니다.
못으로 시작했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고백했고,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채운 3일째, 느닷없는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한복디자이너 이효재
선생님이셨습니다. “Gemma! 성모님 하나 모셔야겠다. 1미터 20센티 되는 큰
성모상이야. 내 친구 불자가 해외서 불상들을 컨테이너로 실어 왔는데 불상들
사이에 성모님 성상이 끼어 왔대. 지금 그 친구가 그 성모상 보고 놀라서
어디로 보내야 하나 쩔쩔매고 있어. Gemma가 모셔라.” 어머나, 이럴 수가!
3일간의 전시 마지막 날에 성모님께서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만난 성모님은 지금 제 작업실 입구에 함께 계십니다.
‘성모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가시는구나. 배 타고, 컨테이너 안 불상들 틈에
무임승차하셔서 사람을 통해 전화 한 통으로 갈 곳을 이리 찾아가시는구나.’
그 성모님을 향해 오가면서 기도를 안 할 수 없었습니다.
제 작업실에 오는 이들도 이 성모님을 보면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때로는 크기도 제 역할을 한다는 점, 이 기회에 보태어 말하고 싶습니다.
집에서도 성상을 자신 있게 좀 크게 모셔 보세요. 기도 안 하는 게 되게
신경 쓰여요. 눈에 담기면 맘도 따라가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글 : 한젬마(Gemma) – Creative Director, Ar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