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성산읍 신풍리 724번지(현 이사무소)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경찰파견소 터
신풍리 지역에서 선사 시대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이 시대부터 거주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넓은 평지에서 바다를 접하고 있는 반농 반어촌이다. [명칭 유래] 신풍리는 “새롭고 풍요로운 마을을 지향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풍리의 옛 이름은 ‘내깍, 내끼’ 또는 ‘웃내깍, 웃내끼’이다. 내끼는 내[川]의 끄트머리라는 뜻이다. 즉 하천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내깍마을 중에서도 위쪽에 있는 마을을 18세기 중후반에 신풍리(新楓里)라 하였다. 19세기 중반부터 신풍리(新豐里)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신풍리 마을은 600여 년 전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며 점차 형성되었다고 하며, 조선조에 들어와 1416년(태종 16) 정의현이 설치될 때 정의현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1880년(고종 17) 정의현 좌면 신풍리가 되었고, 1915년 5월 1일 도제(島制)가 시행되면서 제주도 정의면 신풍리가 되었다. 1935년 정의면이 성산면으로 개칭되면서 성산면 신풍리가 되었고, 1946년 제주도제가 실시될 때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면 신풍리가 되었다. 1980년 성산면이 성산읍으로 승격되어 성산읍 신풍리가 되었으며,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면서 남제주군이 서귀포시에 통합되어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신풍리가 되었다. 자연마을로 본동과 큰개동이 있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이곳에는 1936년 일본에 있던 오천년(吳千年)씨가 거금을 희사하여 현재의 이사무소 자리로 향사를 옮겼고 그 해에 개량서당인 신풍서당(훈장 오주언)이 들어섰던 곳이다. 신풍서당은 광복 후 정식 교육기관으로 인가를 받지 못해 폐쇄되었다.
신풍리 주민들은 1948년 하반기부터 민보단에 편입되어 마을 경비에 나섰는데 이곳을 민보단 본부로 사용했다. 1948년 음력11월25일(양력12월25일)에 무장대의 습격 이후 성을 쌓았다. 성을 쌓은 후 경찰이 들어와 경찰파견소로 이용했다.
“축성 후엔 이곳에 경찰들이 와서 살면서 3명씩 교대근무를 했어. 신산지서에 경찰 한 20명이 근무했으니까 3명씩 마을마다 교대로 배치된 거야. 그런 다음에 민보단과 합세하여 마을을 방위했지.”(1933년생 강금용 증언)(2020년 『제주4·3유적지Ⅱ-서귀포시편』)
신풍리에는 충남부대가 잠시 주둔했고, 토벌대와 서북청년단이 향사에 주둔하였다. 안심은 되었으나 쌀을 모으고 소를 잡아 그들을 먹였다. 이불 솜으로 실을 뽑아 양말을 짜 바쳤다. 장정들은 매일 점호를 받고 여정(女丁)들도 훈련을 받고 성을 지켰다.(2006, 냇가의 풍년마을)
※충남부대란 충남에서 파견된 경찰 소대이며 소대장은 최융양(崔隆陽)이다. 수산1리에서는 여느 부대와는 달리 민심을 수습해 가면서 청장년들과 힘을 합하여 토벌작전과 방어작전 등에 많은 공을 세웠다. 반면 세화리에서는 1948년 12월 3일 밤 무장대가 습격하여 마을을 점령하다시피 했는데 40가호 정도의 집과 세화초등학교, 향사를 불태운 후 새벽 2시께 물러갔다. 이 날 마을에서는 노약자와 어린이를 포함하여 48명 정도가 희생되었다. 당시 세화지서에는 본서 직원 15명과 응원경찰인 충남부대 20명 등 35명 가량의 경찰이 있었으나, 무장대가 모두 물러갈 때까지 지서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49년 말에 철수했다.
지금은 건물을 신축하여 신풍리민관으로 쓰고 있다.
《작성 220413, 보완 26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