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곧 부처!
한울안신문 승인 2014.10.15 15:0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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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세관 교무와 함께하는 의두23 기행(34) / 우세관 교무(강원교구 김화교당)
마음이 곧 부처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오늘은 의두요목 12조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 날입니다. 세 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1. 부처는 밖에 있다?
종교 중에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하는 힌두교는 원래 절대자(브라만)를 밖에서 찾았습니다. 기복적인 것은 다 그렇습니다. 밖에 불상을 만들어 놓고 비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힌두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우파니샤드 시대에 와서입니다. 우파니샤드는 ‘절대자(브라만)와 자아(아트만)의 본질은 같다’고 하면서 ‘절대자가 내 안에 있다’고 합니다. 후에 불교가 이 사상을 받아들이지요.
다시말해 ‘절대자 즉 진리는 내 마음과 본질이 같다’는 것이지요. 진리는 세상 어디나 어느 사물 안에나 다 있는 것인데, 바로 우리 사람 안에 있는 진리를 일컬어 우리는 ‘마음’이라 합니다.
한마디로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의 진원지는 사실상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부처는 안에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당시에 횡행하는 기복성을 보시고 “절대자(진리, 브라만)를 내 안에서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뜻과는 달리 절대자를 계속 밖에서 찾는 경향으로 흘러 갔습니다. 불법승 삼보에 공경을 바치는 것이 그렇고, 사홍서원을 외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게 33조, 즉 중국의 6조인 혜능에 와서 또 일갈을 당합니다. 혜능은 “삼보와 사홍서원도 내 안에서 찾으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선불교의 기치를 확립하지요.
후래 불교학자들은 석가모니의 발언을 ‘1차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하고, 혜능의 발언을‘2차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합니다. 불교 안에서 마음이 부처임을 일깨우는 획기적 전환이라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마음이 부처’라는 말은 ‘절대자가 마음이니 그 경지를 알라’는 말입니다. 이걸 알면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내가 곧 조물주요, 신이요, 여의주를 소유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자, 참 마음을 찾아 떠나 볼까요
#3. 참 마음은 어디에
마조 스님이 출가를 해 스님이 되어 선을 배우고 중국 각지의 불교 성적지를 순례했습니다. 그러다가 후난성(湖南省) 남악(南岳)이라는 곳에 이르자 거기 머물며 좌선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남악에는 회양이라는 유명한 고승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조 스님은 당시까지는 일개 수행승이었지요. 그런데 어찌나 열심히 좌선을 하고 앉아 있던지 도무지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정진을 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큰 법기다’고 수근 거리기 시작했지요.
어느날, 회양 스님이 이 마조 스님이 있는 곳으로 가서 묻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좌선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
그러자 마조 스님이 답을 해요. “불성(佛性)을 얻기 위함입니다.”
불성이 뭡니까? 한마디로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는 말이지요. 중생인 자신과 다른 ‘부처의 성품’을 얻고자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다리를 틀고 열심히 좌선을 한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이나 부처의 성품이 얻어지는 겁니까? 부귀나 명성이나 권력은 다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불성 즉 부처의 성품은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는 겁니다. 본래 안에 있는데 잊어먹고, 안 보고 사니 그것을 다시 기억하는 겁니다. 마조 스님은 그걸 몰랐나보죠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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