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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묵상글 (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 요구하지 않고 요청하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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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17 04:02
- 요구하지 않고 요청하는
“그때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들은 그리 좋은 말들이 아닙니다.
‘논쟁’, ‘시험’, ‘요구 이런 표현들인데 바리사이들이 흔히 하는 짓입니다.
이 대신 그러니까 논쟁 대신 담화 또는 나눔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험하지 않고 믿으면 얼마나 좋고,
믿지 못하더라도 시험 대신 알려고 애쓰고 질문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리사이들을 볼 때 더 안타까운 것은
표징을 요구하지 않고 요청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랬다면 주님도 그들을 버려두고 떠나지 않고 표징을 보여주셨을지도 모르지요.
사실 우리가 겸손하고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주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표징을 요구하지 않는 것도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요청하지 않을 것이고, 감히 요청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하늘에서 표징이 너무도 필요할 때
표징을 주시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은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아주 겸손하게 청을 드릴 수 있는데 그것이 기도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 내친김에 이런 묵상과 성찰도 합니다.
하느님께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에게도 요구하지 않고 요청하면 얼마나 좋을까?
겸손은 사랑을 낳고 사랑을 초대합니다.
겸손한 요청은 사랑의 응답을 부릅니다.
아기의 요청이 언제나 엄마의 사랑스러운 응답을 부르듯
겸손한 사람의 요청은 사람의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응답하게 합니다.
그리고 요구하지 않고 요청하는 사람에게
갈등과 싸움이 없는 것은 덤입니다.
‘구’를 ‘청’으로 하나만 바꾸면 되는데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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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차장에서 일하는 소년이 열심히 차를 닦으며 광을 내고 있었습니다. 차 주인이 나타나자, 소년은 “진짜 좋은 차를 타시네요. 선생님 차가 맞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차 주인은 “내 형이 선물로 내게 주었단다.”라고 대답하자, 소년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좋을까?”
차 주인은 이 아이가 차를 사주는 형이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저도 그런 형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기가 받지 못함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받으려고만 하면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욕심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줄 것에 집중하면 그런 마음은 금세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받으려고만 할 때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지만, 주려고 할 때는 스스로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에 대해 반성해 볼 수 있습니다. 혹시 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받는 것에만 집중하는 욕심의 마음을 통해서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주는 것에 집중할 때 가능합니다. 그때 나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삶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지금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계속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받는 것만을 요구했던 그들이 과연 예수님을 알아봤을까요? 놀라운 표징을 직접 보고, 주님의 놀라운 말씀을 가까이서 들었음에도 믿지 못합니다. 주님을 통해서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만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웃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받을 것만을 요구하다가는 나의 변화 대신에 욕심과 이기심만을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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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너무 오래 걸리니깐, 한 번 만에 잘 되려고 하지 말고. 가치 있는 일은 빨리 되는 게 아니니까 더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황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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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이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그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혀줍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3-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특히 바로 앞 장면에서는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그들이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이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그렇게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눈에는 모두 것이 기적이요, 신비입니다. 본 훼퍼 목사님이 갈파한 대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한대로, 그 무엇도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혹 우리가 그 사랑을 피해가고 거부해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불신으로 왜곡된 제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제 마음을 열어 하소서.
도처에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도처에 흐르는 당신의 사랑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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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 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은총도 그만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눈을 쌍꺼풀 해야 한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주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걸맞은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준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 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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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대에 가면 ‘사수와 부사수’가 있습니다. 사수는 오랜 경험과 능력을 갖춘 군인입니다. 사수는 이제 곧 제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부사수는 이제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배치된 신병입니다. 사수는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돌보듯이 부사수를 돌봐줍니다. 내무반 생활, 행정 업무, 외출과 외박에 대한 것을 알려줍니다. 사수가 있기에 다른 선임병들이 부사수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사수에게 업무를 배우면서 부사수는 가끔 생각합니다. ‘사수가 제대하면 내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사수가 제대하고 나면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당황하게 됩니다. 그렇게 몸으로 배우면서 부사수는 진정한 사수가 됩니다. 저도 사수가 되었을 때, 훈련을 마치고 전입온 부사수에게 업무를 가르쳤습니다. 간혹 사수 중에는 부사수를 괴롭히고, 업무를 잘 가르쳐주지 않는 사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사수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비극적인 형제 이야기,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카인은 아벨을 시기하여 들판에서 그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카인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 질문과 대답은 인간관계의 핵심을 묻습니다.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인가?" 이는 단순히 카인에게만 주어진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착좌 뒤 첫 방문지로 이탈리아 최남단의 람페두사를 찾았습니다. 람페두사는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중간 기착지와 같은 곳입니다. 교황님이 방문하기 전에 람페두사 해변에 한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교황님은 그 소식을 듣고 람페두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아)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이것은 인간 역사의 여명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신 두 가지 질문입니다. 동시에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지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세 번째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 여기 형제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이 (죽음의) 배를 탄 사람들을 위해 누가 울고 있습니까? 어린 것들을 안고 있는 이 젊은 엄마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 남자들을 위해서 누가?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를, 어떻게 연민을 경험해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고통’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우리의 무관심을 슬퍼하고, 세상과 우리 마음의 야만성을 슬퍼하며, 또한 지금과 같은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결정들을 용납하는 익명성의 야만에 슬퍼하는 은총을 주십사 주님께 청합시다. ‘누가 울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이 세상에서 누가 울고 있습니까?”
오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이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표징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 표징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표징입니다. 이미 표징은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여주신 ‘표징’에 감사드리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형제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 신앙 안에서 위로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필수적 삶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 아우는 어디에 있느냐?"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아파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는 제 형제와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형제애와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형제의 지킴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가 형제자매의 고통에 눈을 감지 않게 하소서.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당신의 자비를 전하며, 당신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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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에 대해 탄식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하늘의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무엇으로 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공기도 그렇고 여러 가지 미세한 것들도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생명과 직결되기도 합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많은 생명을 잃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성사’입니다. 성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사는 형식이 아닌 하느님 사랑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만능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동산과 부동산이 우리 삶의 가치 중 그 첫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그렇게 죽는 날까지 노력하다가 죽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허무하다.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위해 평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는 보이는 것보다 더 높습니다. 사랑이 그렇고 희망이 그렇습니다. 믿음이 그렇고 자비가 그렇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그대의 내일은 암흑일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대의 내일은 산 송장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기 전, 하느님을 믿음으로 고백하세요. 손에 쥐는 것을 찾아다니기 전, 이미 가슴에 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에 기뻐하십시오.
우리의 하루가 보이지 않는 것들로 따뜻하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모든 재앙이 나오는 곳은?
많은 현자는 말합니다.
모든 재앙이 나오는 곳은 바로 ‘입’이라고 말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과 가깝게도 하지만
멀어지게도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한꺼번에 큰 것을 잃게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입니다.
우리 입에서….
재앙이 아닌 희망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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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라
“존엄한 품위의 삶; 인내의 믿음과 회개”
지금 지옥은 텅 비어 있다는 언젠가 읽은 컬럼이 생각납니다. 악마들이 다 뛰쳐 나와 세상 곳곳에서 유혹하며 활개를 치고 있다 합니다. 정말 깨어 있어 악마들편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국내외 세상 돌아가는 뉴스를 봐도 실감하는 사실입니다. 극단의 이념이나 편견은 언제나 눈먼 맹목의 광기에 흐를 위험이 다분하기에 중용의 균형잡힌 상식적 삶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요즘 수도원 게시판을 보면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에 속한 외국 수도형제들의 부고 소식이 계속 줄을 잇고 있습니다. 생몰연대를 헤아려 보니 대부분 90세 전후입니다. 90을 넘는 분들이 극히 드뭅니다. 모두가 한생애 충실히 수도승답게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살았던 분들입니다. 새삼 기껏 살아야 15년 정도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충고와 더불어 ‘자비롭고 지혜롭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깨어 삶의 제자리에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옛 현자 다산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학문의 끝에 도달한 사람은 늘 일상에서 자신을 정비한다. ‘나는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며 나를 찾았다.’”
다산이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 듯 저 역시 매일 새벽마다 강론을 쓰며 저를 찾습니다.
“깊기만 하고 고립되고, 넓기만 하면 산만해지니, 어른이라면 겸험의 폭과 높이를 두루 갖춰야 한다.”
깊이와 넓이를 갖춘 전방위적 공부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얼마전 써놨던 소망을 밝히는 “당신은” 이란 시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깊고 넓은 바다예요.”
참으로 늘 거기 그 자리에서 바다처럼 깊고 넓은, 지혜롭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창세기 독서와 마르코 복음에서 우리는 죄에 손상된 무지에 눈먼 사람들을 만납니다. 오늘 창세기 카인과 아벨은 참 풍부한 묵상자료를 제공합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신비스런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해야함을 배웁니다. 악마의 유혹에 떨어져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죄가 만연되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첫째 번 카인에게 주어진 시험 상황이 엄중합니다.
‘세월이 흐르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삶의 신비, 하느님 섭리의 신비입니다. 누구나 카인의 질투와 분노에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감정을 최대한 인내하고 자제하며, “왜?”라는 의문을 접어둔채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지극한 인내의 믿음으로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켰어야 했습니다. 사실 이와 유사한 이해할 수 없는 불공정하다 싶은 ‘하느님의 신비(?)’스런 사건도 참 많이 일어나는 우리 일상의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한없는 인내와 순종의 믿음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하느님의 다음 주님의 충고가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마지막 회개의 기회였는데, 비교하지 말고 하느님의 처분을 묵묵히 믿음으로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충분히 미풍으로 끝낼 수 있었을 상황인데 카인은 악의 유혹에 빠져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급기야 미풍은 태풍이 되었고 수습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질투, 분열, 폭력, 죽임이 뒤따르는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카인의 후예도 됩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너 어디 있느냐?” 아담에 대한 물음을 연상케 합니다. 바로 이때가 회개의 마지막 기회였는데, 부전자전 아담처럼 카인의 반응도, 비겁하게 솔직하지 못하고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거짓말에 적반하장입니다.
이어 카인에게 주 하느님의 심판이 뒤따르자 정주의 삶은 끝났고 땅에서 축출되어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정처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계속되어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무지의 질투에 눈멀어 저지른 악행의 결과가 참혹합니다. 새롭게 부각되는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에 눈멀기는 마르코 복음의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다 보는 데 바리사이들만 보지 못합니다. 역설적으로 눈뜬 맹인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무지의 악'인 확증 편향, 편견에 눈멀어 있기 때문입니다. 눈만 열리면 예수님의 삶 전체가 하늘의 표징들이요 얼마전의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역시 빛나는 하늘의 표징인데 이를 까맣게 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나는 단호한 반응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말씀하신후 지체없이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집착없이 홀가분하게 자유로이 떠나는 뒷모습이 참 멋집니다. 오늘날도 무지의 인간 현실은 변함없이 반복됩니다. 카인과 바리사이들, 우리의 부정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끝까지 어떤 처지에서든 신비스런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고 지극한 인내의 믿음으로 회개와 더불어 자신의 자리와 몫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키는 삶이 절실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무지의 치유에 결정적 도움이 되어 우리 모두 자비롭고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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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바라기>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님
곁에
계셔도
님
보지
못함은
나
닫은
탓인데
님
보고
싶다고
님
아닌
무엇을
나
님께
청하랴
님
보지
못해도
늘
함께
계시는
님
숨결
느끼니
나
마냥
기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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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표징의 필요성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어떤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까? 그분께서 해를 멈추시거나, 달에 고삐를 채우시거나, 번개를 내리시거나, 풍향을 바꾸시거나, 그 밖의 다른 일을 일으키셔야 했다는 말입니까? …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러한 표징들이 일어났습니다(탈출 3장-15장 참조). 그러나 친구들 가운데 오신 분은 이러한 표징들을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나는 오늘 제 1독서의 짤막한 글을 라틴어로 읽었습니다. 우리말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의 진노를 풀어 드리려고 애원했다 ‘야훼여, … 어찌하여 이 백성에게 이토록 화를 내시옵니까?’”(탈출 32,11), 그러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모세야, 내가 화내는 것을 내버려 두어라. 나에게 이것을 승인하고 허락해 다오. 내가 화를 내어 백성에게 앙갚음하는 것을 허락해 다오." 그리고 모세에게 약속하시며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 , 너에게서 큰 백성을 일으키리라”(탈출 32,10). 하지만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만일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려거든 당신께서 손수 쓰신 기록에서 제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탈출 32,32).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마태 5,13-20
세상의 소금과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예수님과 율법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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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생활묵상 : 단점이 있다면 장점은 그럼 없을까?
강만연 [fisherpeter] 250217. 02:02 ㅣNo.180123
만약 어떤 사람에게 단점 아닌 단점 같은 게 있다면 그에 못지않게 장점 아닌 장점도 또한 있습니다. 저는 고질적인 습관이라는 생활묵상 글에서 언급한 그분에 대해 그 점을 한번 언급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분이 가진 장점이라고 하면 장점인데 이런 건 일반 사람에게서 잘 찾아보기 힘든 그런 장점입니다. 그게 뭔가 하면 계산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다가 보면 남들과 교제를 하고 사교적인 모임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돈이라는 가치가 지출이 되게 됩니다. 이럴 경우 특별한 어떤 일이 있을 경우에는 한 개인이 비용을 다 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더치페이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방식이 보통의 방식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여러 명이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하지만 어떤 경우는 세 명 이내의 모임을 가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어떤 경우는 이와 같은 경우는 더치페이를 하기가 좀 애매한 경우가 분위기상 좀 어색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는 한 사람이 다 지불하고 그렇게 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그 멤버가 또 만나게 되면 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또 한 번 내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게 보통 인간사회에서 하는 불문율과 같은 사회상규입니다. 사회상규라고 했지만 이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남에게 혹여 나쁜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누가 언제 계산을 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이번에 샀으면 다음에는 내가 한번 사야한다든지 하는 것 정도는 숙지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이걸 잘 생각해야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고의가 아니지만 또 사람이다 보면 착오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a,b,c 세 사람이 이 순서대로 식대비를 지출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c 사람이 낼 차례였는데 정작 c는 다른 사람이 낼 차례인 줄 알고 머뭇머뭇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보통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요? a와b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c가 낼 차례인데도 계산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이번에 c가 계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사실 그런 말을 하기가 생각보다는 쉽지 않습니다. 분명 보면 이때 c는 착오를 일으켜 이번에 다른 사람이 계산할 거라는 생각을 했지 자기가 계산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럴 때 a,b 중 한 사람이 그냥 자기가 낼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 a,b 두 사람도 빨리 상황을 잘 판단해야 합니다. 각각 자신을 제외한 두 사람의 눈치를 잘 봐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판단을 하지 않고 그냥 자신이 계산하는 스타일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 스타일이 제가 고질적인 습관이라는 글에서 언급한 그분입니다. 근 10년 이상 이분과 만나면서 제가 본 스타일입니다. 사실 아주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으면 이런 스타일을 가지기 힘듭니다. 설령 풍족하다고 해도 짠돌이 같은 사람은 아예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하는 평판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분처럼 이런 생각과 마인드가 별것 아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이런 마인드도 깊이 생각해보면 어떤 인간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사람이 완전히 계산적인 사고에서 탈피해서 사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남을 배려해서 그렇게 한다기보다는 원래 그런 계산적인 사고를 하며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설사 내가 좀 더 계산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과 만나 좋은 시간을 가지는데 그런 시간에 그런 물질적인 계산으로 사람을 사귀고 교제를 한다면 그런 교제는 인간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스타일은 돈보다도 사람과의 교제 그 자체를 더 존중하는 사람이라야 그런 마인드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보다는 이런 스타인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제가 언급한 그분은 이점에서만은 정말 좋은 인간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제가 그분이 있는 자리에서는 이분의 이런 스타일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없는 자리에서 어쩌다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제가 이런 데에서는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해 드리면 그 자리에 있는 분들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제가 어떤 근거를 가지고 또 있었던 상황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반박은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상대적으로 젊다보니 상황을 예리하게 볼 수 있고 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분들도 어느 정도는 좀 예리한 분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그분의 그런 스타일을 아는 분도 계시지만 이런 것 자체에 신경을 아예 쓰지 않는 분들이 많아 사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시는 분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면 그분이 경제적으로 아주 풍족해서 그런 행동을 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건 경제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계산적인 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여러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 요소 중에 하나가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그 사람이 돈을 쓰는 방식을 보면 그 사람의 인간 됨됨이를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위 언급한 사례와 같은 게 아니더라도 백프로는 아니지만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떤 경우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단점 아닌 단점만 보게 되면 그 사람은 단점으로만 가득찬 사람으로만 인식할 수 있지만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흔히 가지기 힘든 장점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장점으로 단점을 보완할 수 있기 때문에 또 다시 만나고 또 서로 교제를 할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남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눈에 먼저 보이는 게 일반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경향입니다. 이게 또 심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이게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의 심리라면 우리는 이 사실에 역행을 하는 게 훌륭한 신앙인의 자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인이라고 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게 주일 복음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삶을 사는 신앙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역설입니다. 이게 신앙의 신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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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표징 요구보다 겸손에서 참 믿음을 /
박윤식 [big-llight] 250216. 20:25 ㅣNo.180122
‘자꾸만 읽으라니까.’ 읽는 성경이 되어서는 안 된다지만, 읽다 보면 그저 평범한 게 어느 날 칼날이 되고 따듯함이 될게다. 은총은 그렇게 갑자기 오리라. 그러니 앞서 가는 삶이 되어야만 한다. 물론 뒤에서는 미는 신앙생활이 되자. 신자들은 가끔씩 ‘이러이러한’ 신부님 때문에 성당에 못 다니겠다나. 신부님들도 마찬가지라나. 이러저러한 교우님들 때문에 사제 생활이 쾌나 어렵단다. 돌아보면 모두가 다 조건을 다니까. 믿음의 길 역시, 무거운 짐 지고 먼 길 가는 것과 같을 게다.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다. 소중한 믿음은 열린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만 보인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 예수님과 논쟁하였다. 그분을 시험코자 표징을 요구한 거다. 그분께서는 깊이 탄식하며 이르셨다. “어째서 이 세대가 표징을? 내가 진실로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지? 마음 닫힌 이는 그 무엇도 못 믿는데. 속담에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는다.” 라는 말처럼, 마음 닫힌 그들은 설령 표징을 보여줘도 또 다른 트집으로 거부할 게다. 눈 들면 우리는 늘 기적 같은 세상에 산다. 어김없이 떠오르는 아침 태양, 푸르른 하늘과 구름, 저녁노을, 밤하늘의 별과 달, 만난 사람 등, 일상의 모든 게 기적 아닌 게 없다. 마음열고 보면 모든 게 경이롭다. 이런 눈 없으면 주님께서 우리 삶에 주시는 이 은총도 볼 수 없다. 신앙은 초자연적 현상이나 기적 체험으로 깊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도 기적을 기대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저들 바리사이와 같을 게다.
사실 우리는 지금껏 주님께 충분히 받았다. 이제는 그저 주님보고 따를 때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이가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며 조건을 단다. “돈 벌게 해 주면 성당 다니겠습니다.” “사업이 성공하면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다. 이런 요구는 아니더라도 다들 이와 비슷한 요구다. 이에 주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신다. 신앙은 조건 단다고 바뀌는 게 아니기에. 믿고 맡기면 어느 날 이루어지는 게 믿음인데도. 그러니 늘 청해야 할 건 인내와 절제다. 참지 못하고 객기 부리는 마음을 조절하게 해 주십사는 거다. 여태 투정 부리는 신앙이라면 바꾸자.
이렇게 해 줘야만 믿겠다는 건, 조건 다는 거다. 이건 성숙한 신앙의 자세가 아니다. 답답한 건 우리지 주님이 아니니까. ‘하도 그러니 참석하겠다.’ ‘하도 저렇게 말하니 들어 주겠다.’ 이는 끌려가는 신앙생활이다. 주일 미사 ‘참석해 준다.’라는 자세로 임한다면 어떻게 은총이 함께할지? 강론을 ‘들어 준다.’라는 마음으로 대한다면야 어떻게 깨달음이 올지? 기적에 대한 표징을 요구하니까 예수님께서는 탄식하며 거절하신다. 그분께서 베푸신 기적의 참된 의도는 감탄 자아내는 신비 자체를 드러내는 게 않을게다. 예수님께서는 그 외적 기적에 감춰진 내적 신비를 깨닫기를 진정 바라셨다. 이러니 기적만 바라는 이에게는 참된 기적 같은 기적은 없다.
완고한 이는 어둠에서는 볼 수 있으나, 햇빛 아래에서는 볼 수 없는 야행성 부엉이 같다. 그는 자신만의 만족을 위한 일에서는 꽤 똑똑하지만, 진리의 빛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눈 뜬 장님이다. 소중한 건 열린 마음의 눈으로 봐야만 보인다.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을 때,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바로 볼 게다. 믿음의 힘이 얼마나 크냐? 예수님께서는 이르셨다. 작은 믿음으로도 산이 바다로 옮겨진다고. 그렇다. 믿음이 우리 신앙 선조들로 하여금 박해와 시련을 이겨 내도록 했다. 우리는 현실에서 부딪히는 이 어려움을 어떻게 대처할까? 우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비를 지닌 믿음을, 하느님께 겸손하게 청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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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인류의 첫 가정이 제2세대로 넘어오면서 죄의 모습은 더 복잡해지고 심각해집니다.
창세기의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왜 카인과 아벨을 차별하셨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카인이 “옳게 행동하지 않[았음]”(창세 4,7)을 암시할 뿐입니다.
창세기에서 주어진 첫 질문 “너 어디 있느냐?”(3,9)는 이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4,9)라는 물음으로 발전합니다.
하느님의 물음이 보여 주는 발전 과정은 자신에게서 형제에게로 건너가는 자아의 확장을 암시합니다.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아우를 죽인 것을 부인하고 오히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4,9) 하고 되묻습니다.
아우와 ‘상관없음’을 선언하고 형제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서 폭력으로 억울하게 고통받고 존재를 부정당하면서 사라진 수많은 아벨들의 피가 울부짖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은 교회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예표되었고 구약에서 오묘하게 준비되었으며, “‘의인 아벨부터 마지막 뽑힌 사람까지’ 아담 이래의 모든 의인이 보편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 앞에 모이게 될 것”(2항)이라고 말합니다.
카인의 이야기는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시면서도 죄인의 하소연을 들어주시고, 폭력으로 아우를 죽인 그를 또 다른 폭력에서 지키시고자 표를 찍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 끝납니다.
우리는 각자가 형제자매를 ‘지키는 사람’임을 기억하면서 서로 돌보고 책임지는 사랑을 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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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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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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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 12)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표징을 요구하다
사라지는
은총의
순간들입니다.
못난 우리들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은
표징을
먹고 자라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는
일상이라는
현존 속에서
자라납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심장보다
더 큰 표징은
없습니다.
욕심과 무례가
일상이라는
표징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심어린
반성과 감사가
표징을
만들어냅니다.
감사에서
더 깊어지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늘 하루가
새롭게
펼쳐집니다.
삶의 표징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영원하신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표징의 완성은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과 일상을
벗어난 표징은
욕심이며
예수님과의
만남보다
더 큰 표징은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면
함께하시는
일상이라는
표징이 보이고
자아가 무너지면
교만과 집착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으로
마음을 닦는
살아있는
감사의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감사도
진정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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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며 하늘에서 오는 표징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의 원하는 것은 보다 스케일이 큰 표징이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늘 그런 것 같습니다.
더 크고, 더 대단하고, 더 엄청난...예를 들면 이런 기적들이겠지요.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던 모세는 광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어 힘겨워하는 백성들을 위해 매일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이지 기이하고 신기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야는 나라 전체에 3년간의 가뭄이 들게 한 뒤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 대대적이고 엄청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도 만나의 기적이라든지 3년 가뭄 사건 같은 눈에 확 띄는 기적, 좀 더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제대로 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치유와 구마 활동, 죽은 이들에 대한 소생사건, 가난한 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뜨거운 사랑, 한없이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을 통해 그분의 신성,
그분의 메시아성은 충분히,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또다시 ‘이거다’하는 표징, 제대로 된 확실한 표징을 또 요구하는 것일까요?
바리사이들은 애초부터 예수님께 대한 신뢰심, 열정적이고 호의적인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례하게도 예수님께서 진지하게 열성적으로 전개해나가시는 인류구원사업을
흥미 어린 눈으로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예수님을 떠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오만방자하고 한심한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정말 크게 실망하십니다.
깊이 탄식하십니다.
여기서 보여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탄식은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 바리사이들의 가련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탄식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프셨던지 아주 슬픈 어조로 이렇게 외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오늘 우리도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사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통해 크신 하느님 자비와 우리 인간의 비참이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남부러울 것 없는 삶, 탄탄대로가 잘 보장된 삶을 뒤로 하고 세상 사람들 눈에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 봉헌 생활에 헌신하는 젊은이들의 삶,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그들과 함께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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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11-13: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빵의 기적이 있고 난 뒤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절). 예수님의 이 거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회개와 더불어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영적이고 내적인 변화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물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행위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정복하여 자신들이 타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현세적인 지상 왕국을 만들어내는 징표를 보이라는 것이다.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런 표징들이 일어나야 했지만(탈출 3-15장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께 다른 표징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세상의 구원을 향하여 가시고 계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적을 하느님께 청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내적인 회개와 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는지? 즉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의 변화라는 것이다. 내가 변할 때 세상도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분에게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삶이 없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상생활을 통해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며,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언제나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자 되도록, 그렇게 변화되는 기적을 늘 청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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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선거로 드러나는 나의 모습: 바리사이의 선택, 신앙인의 선택!
저도 모르게 또 월요일 묵상을 했네요.
월요일 묵상은 다음 주부턴 꼭 쉴게요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그 세대를 두고 탄식하십니다.
왜 하느님을 믿기 위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그 이유는 이미 표징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당신이 아버지이시고 창조자이심을 보여주는데 이것만큼 큰 표징은 없습니다.
만약 아이가 “아빠, 우리 아빠 맞아? 맞으면 한 번 날아봐!”라고 한다면 황당할 것입니다.
이 말은 아빠가 아빠이기를 믿기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가를 시험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아빠는 필요없고 슈퍼맨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자신 안에 이 세상에서 아빠의 덕을 보며
능력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로보트 기요사키’는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 유명한 사업가입니다.
그는 물론 가난한 아빠도 사랑하겠지만 그보다는 부자 친구의 아빠가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어렸을 때부터 돈 버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키워준 아빠보다 부자 아빠를 따른 것을 더 잘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마음 안에는 아빠의 따듯한 애정도 좋지만, 이 세상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자신을 키워준 아빠도 사랑하겠지만, 책 내용만 보면 그는 아빠를 ‘능력’으로 평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그를 키워준 가난한 공무원이었던 아빠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도 하느님에게 능력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편의 승진을 위해, 아이의 성공을 위해, 집값의 상승을 위해 기도하고 그 기도가 성취되면 하느님을 믿겠다고 한다면 하느님은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버지’가 되시기를 원하는데, 우리는 이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챙겨줄 ‘슈퍼맨’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버지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능력이 없는 것을 볼 때는 가차 없이 버립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능력 있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하며 자신들이 부려먹을 힘 있는 황소와 같은 하느님을 바라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살과 피가 섞인 ‘양식’만큼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을 표징은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타락한 세대인지 아닌지는 ‘선거’ 때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자들은 각자 자신에게 어떠한 능력이 있는지 어필합니다.
이는 벌써 아버지와 같은 후보가 아닌 슈퍼맨과 같은 능력자를 원하고 있기에 우리 자체가 바리사이처럼 돈을 좋아하는 나라가 되었음을 드러나게 합니다.
지도자의 자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바로 ‘비전 – 통솔력 – 청렴함’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전입니다.
지도자는 마치 배의 선장과 같은데 길을 볼 줄 모르면 큰 사고가 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결단력 없는 선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 있는지 우리는 세월호 사고 때 깊이 체험했습니다.
비전 없는 지도자를 따라가는 것은 지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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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 8,11-13).”
1)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다는 말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보라고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표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믿기 싫어서, 또는 안 믿었기 때문에 요구했음을 나타냅니다(루카 11,16).
<진짜 메시아가 아니니까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작정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더라도 그것을 기적으로(표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 요한복음 9장에 그런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요한 9,16-19)”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정말로 놀라운 기적을
직접 보아도 믿으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것이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또는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모습을 자주 보는데, 그렇게 설명하려고 애를 써도 안 되면, ‘미스터리’ 라고 그냥 덮어버리고, 기적이라는 것을 끝끝내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깊이 탄식하신 것은, 바리사이들의 고집과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믿기를 거부하고, 자꾸만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가기만 하는 고집과 어리석음을......
3)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라는 말씀은, “이들은 왜 믿기를 거부하는가?” 라는 뜻입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기적은 일으키지 않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끝까지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태오복음 16장을 보면,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4).”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나의 부활 외에는 너희에게 보여 줄 표징이 없다.”, 또는 “내가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을 보게 되면, 너희가 나를 믿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했을 때, 그 증언을 믿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사도 2,41).
<부활 자체를 안 믿은 사람들도 많았고......(사도 4,2).>
4) ‘표징’은 원래, 안 믿는 사람을 믿게 만들기 위한 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확증해 주는 일입니다.
<표징보다 믿음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 표징과 믿음이 동시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일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신 ‘표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안 믿고 있다가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표징’을 보고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된 것이 옳은 일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르코복음의 끝부분에, ‘표징’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말이 나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
5) 그런데 예수님을 안 믿었던 사람이 어떤 놀라운 체험을 한 뒤에 믿게 되는 경우가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표징이 먼저 있었고 믿음이 나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 같기는 한데, 사실은 그런 사람은,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더라도, 마음속으로는 믿고 싶어 했고,
믿으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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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8,11-13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찾아가 율법에 대해 논쟁을 벌입니다. 그리고는 그분께서 정말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맞는지 시험해보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달라 요구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수많은 표징들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찾아오는 병자들을 치유해주셨고, 사람들을 붙들고 괴롭히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주셨으며, 적은 양의 음식으로도 수많은 이들을 배불리 먹이는 ‘빵의 기적’도 행하셨지요. 그런데도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이 놀랍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믿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해 기적 안에 숨은 참된 의미가 드러나는 게 표징인데, 애초에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질 않으니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신다한들 그들에게는 신기한 ‘쑈’에 불과했던 겁니다.
주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가 믿을만한 근거를 보여달라 요구하는 것은 참된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 가장 먼저 표징을 요구한 것은 ‘사탄’이었지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하실 때 그분을 찾아가서는, 그분을 시험하여 믿음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표징들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런저런 일들을 해보라는 식입니다. 그런 작은 일 하나 해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유혹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시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거라고, 하느님께서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이런 저런 청들을 들어주셔야 믿겠다는 식으로 그분을 시험하려 들어서는 안된다고...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아무런 표징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자기 종의 병이 나을 거라고 믿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 종의 병을 고쳐주셨고 그 일을 통해 백인대장의 믿음은 더 깊어졌지요. 시리아 페니키아에 살던 여인은 예수님께 아무런 표징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비천하고 죄 많은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지만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부스러기만으로도 자기 딸을 괴롭히는 마귀를 쫓아내기에 충분할 거라 믿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그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은총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렇듯 신앙은 믿을만한 근거가 있어야 믿는 게 아니라 온전한 믿음에서 시작하여 구원의 표징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적, 당신의 능력과 힘을 과시하기 위한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먼저 당신을 믿음으로써 당신께서 하시는 일 안에 숨은 참된 의미를 깨닫고 스스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셨지요. 중요한 건 기적을 많이 체험하는게 아니라 기적을 통해 깨달은 하느님의 뜻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 실천이 나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부터가 이미 기적입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소박한 기적들을 알아보고 감사할 수 있다면, 주님과 함께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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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질투 嫉妬 jealousy, envy’는 독차지하려는 소유욕의 심리적 현상의 한 그늘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늘’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빛을 가리기 때문에 어두움의 자락을 만들지요.
질투 자체는 인간의 본성에 속하겠지만, 이것이 부정적으로 번져나가면 ‘질투에 사로 잡힌다.’라는 수종적인 면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 없이 그 영역으로 빠져들어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질투는 나 자신에서가 아니라 어떤 관계에서 오는 것은 분명하지요.
상대가 무엇이나 또 사람을 소유하면 부러워하는 심리적인 데에서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옳은 설명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상적인 심리는 상대방의 그 상태를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것이나 사람을 나의 소유로 바꾸어 놓으려면 욕심이 점점 자라나고
가지를 쳐서 자신을 그 영향권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보통 ‘질투하다.’라는 또 다른 말은 ‘샘을 낸다.’ ‘시샘한다.’ ‘시기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린애들에게 붙이는 '샘쟁이'이라는 재미있는 말도 있지요.
희랍 신화에서 기인하는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심리학 용어
‘외디푸스 콤플렉스 (독일어: 'Ödipuskomplex' 영어: Oedipus complex)’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무의식에서 이미 유아기(幼兒期)에부터 본능적으로 질투가
시작된다고 설명합니다.
신화의 얘기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빼앗긴다는 본능에서 아버지를 살해하는 끔찍한 이야기에서
동생이 태어나면서 형은 어머니의 사랑에서 동생을 질투하거나 제거하고 싶어 하는 질투의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프로이드는 인간은 타고나면서 질투를 단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프로이드의 하나의 가설이고 또 심리학계의 학자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인간의 모든 것을 무의식의 성(性)으로 몰고 가려는 것은 그 학설의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소유욕도 타고 난 것이지요.
이것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기중심으로 성장하다보면 이기적인 성향으로 나아가고
물건 뿐 아니라 사람도 ‘사랑’이라는 말 아래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족쇄가 되는 ‘의처증,’ ‘의부증’이 생기고 그 틀에 갇힌 사람은 평생 의심의
고통에서 허덕이며 가족들에게도 끝없는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어디 이뿐이겠어요? 매스컴에 자주 나타나는 질투에 의해서 결국 ‘치정(痴情)’에 얽힌
살인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질투’는 악으로 나가게 하는 길목이 되는 셈이지요.
그래서 유교의 잘못된 전통이기는 하지만 아내를 내쫒을 수 있는
‘칠거지악 [七去之惡]’중에 ‘질투(嫉妬)’ 넣고 있을까요?
인간의 본성에서 정상적인 심리는 ‘부러움’ ‘선망’이 되지만 이것이 욕심이라는
부정적 면에서 보면 본인도 다스리기 힘든 ‘질투’로 기울게 됩니다.
오늘 창세기 저자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이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 카인은 농부이고 둘째 아들은 유목민이었습니다.
카인은 하느님께 땅의 소출을 바쳤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카인의 것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것은 굽어보시지요.
카인은 동생에게 질투를 느끼며 화를 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겼다는 질투가 생긴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타이르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6-7)
그렇지만 그는 질투에 못이겨 결국 동생을 죽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악의 모습을 안 보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카인에게
그 벌을 내리시는 말씀을 하시지요.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11-12절)
더 흥미로운 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벌을 내리셔서 엄한 모습일 것 같지만 금방 너그러운 모습이시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그 형벌이 너무 크고 추방을 당해야 하는 고통을 감당하기가 힘들다고 하느님께
하소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두시어 세상에 나가더라도 사람들에게서
그의 생명을 보호해주십니다. 사람 같으면 벌을 받아 죽든지 말든지 내버려 줄 것이지요.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그 의도가 숨어 있으면 시체를 비단으로 싼 것이나 다름없지요.
겉은 번지르르하게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해보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들 말이야 예수님을 추겨 세웠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한 심보를 보시며 탄식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것은 무엇이겠어요?
자유로운 사람이지요. 카인처럼 질투에 억매이거나 바리사이들처럼 율법에
억매이며 살면 그의 소중한 삶을 불행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 중에 하나가
소유욕에서 벗어나는 사람, 초연한 마음으로 내 것이 없이 가난하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이겠지요.
사람이 욕심을 비우는데 거기에 질투가 어디에 자리를 틀며 내것이 없는데
‘네 것 내 것.’ 다툼이 어디 있겠어요?
사실 질투는 국에도 끓어 먹을 수 없는데도 사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목을 매네요.
오늘 사순절을 준비하며 가난하고 순박한 마음으로 주님의 복음을 묵상하며
멋진 날을 만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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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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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마르 8,12) 계속되는 그들의 억지 요구에 예수님은 마음이 지치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는 일을 보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논리에 딱 들어맞는 표징만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와 있는데도 형식에 맞는지, 규정에 맞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이미 하느님이며 진리인 분이 세상 우리 가운데 오셔서 구원의 지평이 열리고 있는데, 바리사이들은 줄곧 전달 방식이나 매개체에 불과한 표징만을 보고 싶다고 생떼를 쓰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깊은 탄식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표징은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것이지 보여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을 조정하려는 나쁜 생각인 거죠.
어쩌면 예수님을 직접 접하고 구원을 체험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죄인인 이들은 더 이상 표징을 찾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소위 배웠다는 이들, 한자리 하는 이들, 구원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 행세하는 이들, 율법 제도가 합당하다고 인정해 주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구미에 맞는 매개체가 필요한가 봅니다. 제도와 규율의 보호 속에 아직 구원이 절실하지 않을 수도 있고, 자기들이 규정한 잣대를 고수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급기야 그들을 두고 떠나십니다. "그들을 버려두신 채 ... 가셨다."(마르 8,13) 진심은 커녕 말도 통하지 않으니 떠나실 수밖에요. 떠나실 때 예수님 마음이 어떠셨을지 머물러 봅니다. 아마 우리같이 속 좁은 인간이라면 실망이나 무시, 분노, 앙심, 저주를 품을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구원에서 제외시키지 않기 위해, 그들도 하느님 나라를 위한 새 계약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완전한 희생제사를 준비하십니다.(마르 8,31 참조)
독서에서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 그것도 친족 살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슬픈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놀랍게 다가온 사실은, 죄를 범해 하느님에게서 내쳐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여전히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출산 후 "하느님의 도우심"(창세 4,1)을 칭송하고, 자녀들은 노동의 열매를 주님께 제물로 바칩니다.
에덴에서의 추방이 관계의 단절을 낳지 않고 여전히 주님과 끈끈히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당신이 만드시고 숨을 불어넣어 주신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지순한 사랑, 변치 않는 자애를 봅니다.
하느님과 카인과의 대화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마음은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깊은 탄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취조나 추궁, 단죄가 아니라 고통이 배어나는 신음에 가까운 슬픔의 물음이고 안쓰러움 가득한 위로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처럼 아우를 죽인 피로 더럽혀진 땅에서도 쫓겨나야 하는 신세가 되지만, 여전히 가죽옷, 카인의 표, 그리고 셋의 탄생은 아무리 죄인일지라도 연민과 자애로 돌보시는 하느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완고한 바리사이들을 잠시 내버려두고 떠나실망정, 결코 그들의 구원에서 관심을 거두지 않으실 겁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그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위한 봉헌이 될 것이니까요.
요즈음도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신이 어디 있어? 종교는 다 가짜야!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이용해서 신을 팔아먹는 장사꾼에 불과해! 정말 신이 있다면 표징을 보여줘 봐! 그라믄 한번 믿어볼까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 온통 하느님의 표징들인데... 뭘 보여달라구?" 내가 살아 숨쉬는 것조차 기적이요, 내가 사랑하며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만나 여기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닌가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제가 벗들과 이곳에서 만나 같이 살게 될 줄 꿈엔들 알았겠어요?
일상에 깔려있는 이런 수많은 기적들과 표징들을 못 본다면 그 어떤 거창한 표징이 내려도 절대 믿지 못할 테니까 그런 사람은 어떤 표징도 못 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오늘 또 어떤 구원의 표징을 보게 될까요? 또 어떤 하느님의 선물들을 보고 감사드리게 될까요? 오늘 하루를 살면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의 미소를 만나시길 축원합니다.
과연 기적이란 뭘까요? 기적은 이상한 현상이나 표징이 아니지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기인열전 같은 게 아니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특별하고도 별난 표징(Sign)을 좇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 숨쉬고 살아가는 생로병사의 인생자체가 기적임을 깨달아야만 참신앙에 근접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은 기적덩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과 보살핌이 늘 나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아시나요? 그걸 알아야 내 인생이 소중해집니다.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임을, <성령의 궁전>임을 깨닫게 될 테니까요. 기적덩어리인 벗님의 인생을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멀리서 특별한 이적이나 표징을 찾으려 하지말고, 여러분 가까이에서 이미 그분께서 마련해 두신 그 고귀한 표징들을 찾아 보십시오. 그때 벗님은 하느님이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알게 될 것이고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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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사명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삶
<2025.2.17> 아침을 여는 묵상 (눅 4:14~30절)
❝사명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삶❞
❚ 사명의 길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삶이어야 합니다.
✔ 사명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삶입니다(14~21절).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광야에서 금식을 하시고, 또한 마귀의 시험으로부터 이기신 예수님은 비로소 본격적인 사역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15절).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령을 읽으시기 위해 섰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성령의 기름 부음을 선언하셨습니다(18절). 그리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절).
주님의 강력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내게 충만하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볼 수 있음을,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능력 있는 사역(18절)을 잘 감당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잘 되어서 철저하게 남 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영적 유익을 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은혜 충만함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영적 기쁨을 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물질적으로도 풍성해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은혜를 입은 자다운 말과 행동으로 세상 속에 기쁨과 행복을 전하는 메신저로 살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므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는 삶입니다(22~24절).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닌 단순히 ‘요셉의 아들’(22절)로만 생각을 했을 뿐, 그 이상의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신앙은 지식적으로 앎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믿음 그리고 신뢰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하는 속담을 인용하십니다. 이는 의사의 능력을 믿지 못할 때 내뱉는 비난의 말입니다. 즉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24절) 안타까워하십니다.
은혜는 내 안에 있는 편견을 버리고 간절히 믿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해 위대한 복음의 메시지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 지식이 많이 쌓여 있다고 말하면서 말씀의 능력에 주의하지도 않고, 말씀을 들어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선입견과 편견이 나의 삶을 변화시킬 위대한 메시지를 놓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순수한 마음과 믿음으로 주님만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신 메시아임을 인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복음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므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현실의 문제를 뛰어넘는 삶입니다(25~30절).
단순히 요셉의 아들로서만 이해하는 고향 사람들의 반응에 대하여 예수님은 사렙다의 한 과부의 이야기와 나아만 장군이 고침을 받은 예화까지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오히려 더 화를 냅니다. 급기야는 예수님의 생명까지 위협을 합니다.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29절).. 이에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습니다(30절)..
온갖 조롱과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십자가를 향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조롱하고 위협하는 그들을 향해 열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하여 한방에 물리치실 수도 있었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잠잠히 당신에게 예비 된 그 길을 가셨습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겪더라도 주께서 허락하신 이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걷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온갖 것으로 오염이 되어 있는 내 영혼에는 어떤 말씀도 들어 올 수 없습니다. 아니 내 스스로가 그 말씀들을 거부하게 됩니다. 빛을 가리는 커튼이 너무 두꺼워서 생명의 빛을 받지도 못합니다. 입술로는 은혜에 대한 목마름을 이야기 하지만 정작 나의 내면의 것들은 바꾸려고 하지 않는 이중적인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현실의 벽이 높다 할지라도 그 벽 앞에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편견과 오만 그리고 강팍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견디기 힘든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사명을 주시고 또한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4:14~3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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