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땔감이 된 예루살렘 주민
겔 15:1-8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3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4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5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하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수풀 가운데에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주민도 그같이 할지라
7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8 내가 그 땅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범법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겔 15:1-8 / [쓸모 없는 포도나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2) `너 사람아, 포도나무가 야생하는 덩굴나무들보다 무엇이 더 나으냐? 3) 포도나무를 목재로 써서 무슨 쓸 만한 물건이라도 만들어 낼 수가 있겠느냐? 혹시 나무못이라도 깎아서 벽에 박으면 무슨 물건이라도 걸어 둘 수 있겠느냐? 4) 그러나 내가 말하는 포도나무는 벌써 불속에 던져졌다. 그 나무의 양끝은 이미 타서 숯이 되고 가운데 부분도 그을었다. 이제 그것을 어디다 쓸 수 있겠느냐? 5) 타지 않았을 때에도 쓸모가 없었거늘 이제 그것을 가지고 무슨 일을 시작할 수 있겠느냐? 6)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한다. 예루살렘은 열매 없는 포도나무와 같다. 그러니 숲 속의 덩굴나무보다 무엇이 더 낫다 하랴! 열매 없는 포도나무는 불에 태워 버릴 일밖에 없듯이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도 멸망의 길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죽음에 넘겨준다. 7) 그 양끝을 이루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할 때에 예루살렘은 간신히 멸망의 불속에서 빠져 나왔다만 이제는 그마저도 불에 타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몸소 나서서 그들을 치겠다. 8) 그들이 나를 배신하고 대항만을 일삼았으니 내가 그들의 땅을 허허벌판으로 바꾸어 놓겠다.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선지자는 쓸모없는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1-5)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 예루살렘 주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십니다. 포도나무는 그 모양과 자태가 크게 별 볼일이 없으며 그 꽃도 다른 꽃들에 비해 별로 화려하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풍성한 열매를 통하여 농부에게 유익과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포도나무를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드려야할 이스라엘 민족으로 흔히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요 15:1-7). 시편 80편에 보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옮겨 심은 좋은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할 경우에 그 나무는 재목으로도 쓸모가 없습니다. 숲 속의 다른 나무는 좋은 원목으로 자라나 여러 곳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화목으로 쓰여 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불에 던질 화목’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히 12:29).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이라는 것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북 왕국 이스라엘과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남 왕국 유다 그리고 유다의 지도자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가게 된 예루살렘 성을 상징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지 못하였고,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한 결과입니다.
내가 그 땅을 황폐하게 하리니(6-8) 남아있는 예루살렘 주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적 의미에서 비유란 지혜의 가르침이나 교훈 또는 경고등을 보다 생생하고도 구체적으로 전하여 주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을 예를 들어 표현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킴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된 민족입니다. 그런데 언약의 백성이 계속해서 반역하여 징계를 받았습니다. 열매 없는 포도나무가 불 가운데 던저져 반쯤 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7). 주전 597년 바벨론의 공격에 항복했고 1차 포로로 잡혀가는 가운데에서 피한 남은 사람들이 거만하여 자기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을 향해서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이들의 범법함을 멈추지 않으면 불타버려 반쯤 남은 것도 사르리라 하셨습니다.
적 용: 멸망의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고 찾으시는 당신의 열매는 무엇인가요?
사람은 스스로 어떤 종류의 삶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무가치한 존재로 살수도 있고, 가치 있는 존재로도 살 수 있습니다. 비록 나에게 가진 것이 없다하더라도 내가 가진 작은 것 하나, 작은 희생으로 사람들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고, 필요를 채워주는 나무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설 교 >
기독교인, 모든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송기정 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덴마르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 알며,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내가 무엇을 위해 살며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바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그 귀한 세월을 허송하지 않을 것이며 선용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에스겔 15:1~8은 불에 던질 땔감 같은 예루살렘 주민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가 에스겔에게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겔15:2)라며 거듭 두 번씩이나 물으셨습니다. 포도나무는 숲 속의 여러 나무들 가운데 결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없듯이 유대인들이 모든 민족보다 결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 또한 모든 사람보다 결코 더 나은 것이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모든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모든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 줄 믿습니다.
1.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포도나무와 같은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창12:7) 이스라엘이 가장 작은 민족이지만 그들을 선택하여(신7:6~8) 하나님의 장자로 삼으시고 (출4:22) 그들을 사랑하여(신10:15)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심어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 왕국이 분열되면서부터 그들은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점점 타락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5:2)라며 개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신 것은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함입니다. 사실 나무마다 그 특징과 목적이 다양합니다. 목재로 쓰이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약재로 쓰이는 나무도 있고 관상수나 정원수로 쓰이는 나무도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과실수십니다. 포도나무를 가지고는 무엇을 제조할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는 무슨 그릇을 걸 못도 만들 수 없습니다. 오직 포도나무는 그 풍성한 열매를 맺음으로써만 그 주인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목적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리고 명확합니다. 그것은 곧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독교인, 모든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나무보다, 모든 사람보다 결코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기 존재의 목적에 충실한 사람 곧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람은 결코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없는 쓸모없는 인생이 되지 않고 주님께 쓸모 있는 제자가 될 줄 믿습니다.
‘슈퍼맨 닥터 리’로 불리우는 이승복(1965~)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1973년 여덟 살 때 미국 이민을 간 그는 촉망받는 체조선수로 미국의 올림픽 상비군에 선발되었습니다. 그의 꿈은 오직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가 되어 고생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위상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983년 7월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는 훈련 중 사고로 사지마비 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그에게 남은 것은 절망과 분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재활치료에 전념하면서 사고가 난 지 1년 만에 비로소 가슴 아래 마비와 손가락 신경이 자유롭지 못한 중증장애인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믿어오던 기독교 신앙도 이때부터 독실해져서 처음으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공부에 몰두한 그는 뉴욕대에서 학부를 마치고 콜럼비아대학에서 석사를 마쳤으며 사고가 난 지 10년만인 1993년 마침내 명문 다트머스 의대에 입학, 수석을 졸업하고, 하버드 의대 인턴 과정도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세계 최고의 존스홉킨스대 병원의 재활의학 수석 전문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꽃같은 희망과 한국인의 긍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슈퍼맨 닥터 리’, 그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말하고 싶다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수많은 고통이 있었지만 내 희망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에게 사고 전과 지금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지금의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장애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후 그것을 축복이라고 여기기로 했습니다. 사실 장애인이 되었기 때문에 재활의학 의사가 될 수 있었으며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0:31,33에 “그런즉 너희가 먹는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목적에 충실한 사람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는 줄 믿습니다. 기독교인, 모든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리며, 사람들에게도 겸손하십시다. 그리고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극상품 포도나무와 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그들을 교만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은 선택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일 뿐 만 아니라 사명과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지옥불에 쓸 땔감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교만과 무지가 극치에 이르렀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5:7)라며 당시 이스라엘백성의 타락을 개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을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삼으시고 유다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포도나무로 심으신 것은 그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정의와 공의는커녕 포학한 살상과 정의를 위한 희생자들의 부르짖음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와 바람은 크게 빗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포도나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그 택하신 백성들에게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불이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한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하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라며 준엄한 심판을 예언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한 즉 (punish) 그들이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실 때에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겔15:7). 아하! 하나님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리고 명확합니다. 그것은 곧 땔감으로 소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범법함으로 인해 그들을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하시고, 그 땅을 황폐하게 하십니다(겔15:8). 그러나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불에 던질 땔감과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중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게 될 줄 믿습니다.
■ 방송인 전효실(1972~) 사모의 이야기입니다. 1991년 KBS 제1회 대학개그제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방송에 데뷔한 그녀는 개그우먼을 그만두고 목회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고 미국 이민 교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이민 목회, 너무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TV를 보면 개그맨 동기인 유재석씨, 김용만씨, 박수홍씨 등은 잘 나가는데 비해 자기의 모습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교회는 부흥이 안 되고 생활도 가난했습니다. 우울증과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이 “아빠 아빠가 저를 위해 해 준 게 뭐가 있으세요?”라고 한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죄책감까지 겹쳤습니다. 사실 한때 딸을 신학교에 보내려고 했던 그녀의 아버지는 고향에 내려온 딸에게 “효실아 많이 힘들지? 네가 뭔가를 막 억지로 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스타이기보다 네가 있는 그 자리에서 예전처럼 하나님의 딸로 돌아오면 어떻겠니?”라며 딸의 영적상태를 염려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딸의 말에 뇌출혈로 쓰러져 3년 6개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숨지기 전에 마지막 딸에게 남긴 말은 “괜찮아, 괜찮아, 딸아 괜찮아” 였습니다.
목사 사모가 되긴 했지만 우울증과 절망감과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상담가를 찾아갔습니다. 상담가 제니는 전효실씨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은 후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여덟 명의 아이들을 낳아서 다 잘 키우고 다 대학을 졸업시켰다. 다 미국 사회의 리더로 만들었다. 내가 여덟 명의 아이들을 키울 때 대학 교수이던 남편은 제자와 눈이 맞아 도망갔다. 통장과 카드도 다 가져갔다. 그 때 배신감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덟 명의 아이들을 쳐다보니까 불쌍해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때 내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하나님을 선택할 것이냐, 이 어려운 상황을 선택할 것이냐? 그때 나는 하나님을 택했다. 믿음을 택했다. 하나님이 내 여덟 명의 자녀들을 다 졸업시키고 지도자가 되게 하셨다. 그런데 당신은 남편도 목사고, 애들도 둘밖에 없고, 통장도 있고, 카드도 있지 않냐?”
상담가 제니의 말은 전효실 사모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목사 사모도 아닌 분이 그녀보다 더 어려운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했는데, 믿음 없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되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001년 남편의 권유로 코칭 공부를 시작한 그녀는 전문 코치 자격증을 받고 브라이트스마일코치센터 대표로 국내외 대학과 기업과 방송 등에서 코칭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절망 중에서 믿고 알게 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호세아 6:3,6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힘써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새벽 빛 같이 어김없이 나타나시며, 땅을 적시는 봄비 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인생의 어둠과 가뭄이 사라지는 은혜와 복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기독교인, 모든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리며, 사람들에게도 겸손하십시다. 그리고 힘써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극상품 포도나무과 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스겔 18:23에 하나님께서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회개하고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포도나무,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유대 민족, 모든 민족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도 모든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목사인 저 자신도 모든 사람보다 결코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알며, 하나님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그에 부응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모든 사람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회개함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없는 포도나무와 같은 사람이지만 모든 나무보다 결실이 풍성한 포도나무와(시128:3)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쓸모없는 포도나무의 결국
피영민 목사
서 론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무에 비유되었습니다. 성경이 이스라엘 백성을 나무에 비유한 경우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 감람나무의 비유입니다. 감람나무로 비유 할 때에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택한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11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참 감람나무이고 이방인은 돌 감람나무인데, 이스라엘이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참 감람나무를 찍어버리고 돌 감람나무를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게 되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감람나무라고 할 때에는 언약관계에 있는 택한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무화과나무에 비유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3절로 14절을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들어가셨을 때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를 드시려고 했는데, 어느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데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는 깜짝 놀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해 저주받은 나라라고 하는 의미일 때에는 무화과나무로 비유가 되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특별히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나쁜 나무라 할 때에는 찔레나무로 비유가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6장 44절에 찔레에서는 포도를 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넷째, 에스겔 15장을 보면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은 교회를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15장, 요한복음 15의 공통점은 15라고 하는 숫자입니다. 15라는 숫자는 포도나무와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장은 교훈도 비슷하고, 그 내용도 상호보완적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나, 교회를 포도나무로 비유한 이유는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잘 맺어야 성공하는 나라요, 교회도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성도 개개인의 영혼도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spiritual relationship)를 잘 맺어야 축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약 관계(covenantal relationship)는 감람나무, 영적관계는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비유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신약의 교회, 성도 개개인의 영혼에 적용 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1. 포도나무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에스겔 15장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질문은 15장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나은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입니다. 먼저 포도나무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왜 하나님이 심으시고, 왜 존재하고, 포도나무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궁전을 지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궁전을 짓고, 성전 지을 때에 사용한 나무는 레바논의 백향목이었습니다. 백향목은 쭉쭉 뻗은 나무이고, 견고합니다. 좋은 나무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건축자재로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꾸불꾸불하기 때문입니다. 또 사마리아의 상수리나무(oak)는 부드럽고, 강도가 있기 때문에 가구를 만드는데 사용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가구를 만들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부드러워서 쉽게 부러지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는 건축자재로도 빵점이고, 가구 만드는데도 빵점입니다. 또 포도나무는 연료로도 사용 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빨리 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포도나무는 무슨 목적이 있는 것입니까? 포도나무는 나무 중에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사사기 9장에 보면 사사 기드온이 자식을 일흔 한명을 낳았습니다. 일흔 명은 처에게서 낳고, 한 명은 첩에게서 낳았습니다. 첩의 자식은 아비멜렉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기드온이 죽자, 아비멜렉은 자기 형제 칠십 인을 한 바위위에 올려놓고 모두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말째 아들 요담만 가까스로 피신했습니다. 요담은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 우화를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을 찾는데, 감람나무 보고 왕이 되라 하니깐 안 된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보고 왕이 되라 하니깐 안 된다고 합니다. 포도나무보고 왕이 되라 하니깐 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시나무가 왕이 되겠다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가시나무 같은 존재인데, 그 가시나무가 왕이 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이 요담의 우화입니다. 사사기 9장 12절로 13절입니다.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라고 하자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어서 포도주를 만드는 게 목적이지 왕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5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시면서 바라시는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포도나무를 심는 목적은 좋은 포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얼마나 복을 받은 나라입니까? 미국의 포도는 맛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안성 거봉은 정말 맛있습니다. 얘기만 해도 침이 넘어갑니다. 또 미국 배도 맛없습니다. 그런데 나주 배는 정말 맛있습니다. 사과도 문경 사과는 정말 살살 녹습니다. 대한민국은 과일이 맛있는 나라입니다.
포도나무는 맛있는 열매를 맺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좋은 포도열매를 맺기를 원했지만 나쁜 들 포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찍으신 것입니다. 이사야 5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평과 의로움을 바라셨는데 도리어 포악과 횡포의 열매를 맺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에게 원하는 열매는 공평의 열매, 의로움의 열매, 정직의 열매, 겸손의 열매, 정의의 열매, 진실의 열매, 평화의 열매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 교만하고, 거짓되고, 불의한 성품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서도 그리스도를 한 번도 말해 보지 않고, 그 편을 들지 않고, 시간과 물질도 드리지 않는 사람이 열매를 맺느냐는 것입니다. 스펄전의 설교에 보면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스펄전이 어느 집에 심방을 했습니다. 부인에게 남편은 교회 나오는데 당신은 왜 나오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 남편은 교회 가서 잘 하는지 몰라도 집에 오면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 남편이 교회 안 나가면 제가 벌써 나갔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의의 열매와 공평의 열매를 맺어야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2.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 뿌리가 없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No Root).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땅에 심는다고 열매가 맺어집니까?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신앙의 뿌리를 든든히 내리지 않은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조금만 틀리면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런 일이 발생하는데 성도 오천 명이 되는 곳에 틀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뿌리를 내리지 않은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에 보면 하나님 말씀은 씨와 같다고 했습니다. 씨를 좋은 땅에 뿌리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서 삼십, 육십,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돌밭에 뿌려진 씨는 싹이 곧 나오는데 햇볕이 쬐면 뿌리가 얇아 타버립니다.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안 드려도 되는데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피 값으로 사신 주인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옥가야 될 우리를 당신의 피 값을 주고 사신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또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뿌리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어지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동정녀에서 탄생한 것을 누가 믿느냐라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다.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양식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뿌리를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지체로서 맡기신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지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답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어느 교회 교인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대답 못하면 안 됩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 성도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적 뿌리가 박혀 있어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2. 끊임없이 돌보지(Care)않으면 스스로 뻗어 나갈 수 없습니다.
항상 돌봄이 필요합니다. 잠언 24장 30절로 31절을 보면 돌보지 않은 포도원이 어떤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포도원이 있어도 항상 돌보지 않으면 가시덤불이 덥히게 되고 잡초가 납니다. 그리고 돌담이 무너져 멧돼지와 여우가 들어오게 됩니다. 교회도 그렇고, 성도의 영혼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돌봐야 합니다. 물을 주고, 영양분을 주고, 잡초가 있으면 뽑아내야 합니다. 교회도 끊임없이 보호해야 합니다. 울타리 세우고, 물주고, 살펴보고 간수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안하는데 누가 돌본단 말입니까? 내가 안 해도 잘 되리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제 아내는 제가 잠을 자고 있으면 새벽 1시에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저를 깨웁니다. 깨워서 이렇게 물어 봅니다. “어느 집사님 어제 나왔어요?” 새벽 3시에 또 깨워 물어봅니다. 어느 누가 교회 안 나오면 저는 단번에 압니다. 성가대 빠지는 사람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끊임없이 돌봐야 하고, 교회도 돌봐야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학생들이 오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쓰면 어떻게 부흥이 되겠습니까? 마태복음 21장 33절에 예수님이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포도원 주인은 울타리도 둘러야 하고, 망대도 쳐야하고, 구유도 파야 합니다. 그런 돌봄이 없이는 포도나무가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버팀목을 해 주지 않으면 올라 갈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교만 할 수 없는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혼자 힘으로 올라 갈 수 없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돌보는 농부의 도움이 필요한 나무입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와 같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잘 맺고 있어야 생존과 열매 맺기가 가능하고, 항상 돌보아야 열매 맺기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3. 가지치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Pruning).
요한복음 15장 2절에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올해 과실을 맺었다고 그대로 놔두면 안 됩니다. 가지치기를 확실히 해 주어야 합니다. 전지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에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왜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바빠서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전지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가지를 쳐야 합니다. 자주 갔던 초등학교 동창회도 3년에 한 번 정도 가면 되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도 필요한 만큼 하면 됩니다.
4. 줄기에 붙어 있지 않은 포도나무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Abiding). 줄기에 떨어진 것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영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워서 힘이 없으십니까? 예수님을 가까이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의 파워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도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서 그 힘을 받지 않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성령의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힘이 더 납니다. 인생이 약해지고, 비관해 진다면 영혼이 약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하고, 예수님께 붙어 있다면 속사람이 강건해 질 것입니다.
3. 좋은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그 결국이 어떻게 되는가?
그 결과는 뻔합니다. 도끼로 찍어 불에 던져집니다. 에스겔 15장 7절로 8절입니다.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내가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이는 그들이 범법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5장 6절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지옥은 불신자가 가고, 사단이 갑니다. 사단은 지옥에 가도 지옥이 좋습니다. 불신자들도 하나님을 싫어했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녔습니다. 또 여러 가지 봉사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인 관계가 없고, 예수를 개인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신앙의 뿌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지옥 불에 던져 졌다고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하겠습니까? 그리고 불신자가 지옥에 있다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오니깐 교회 헛것 다녔다고 비웃습니다. 또 교회 다니며 맺은 열매나 교회 안 나가며 내가 맺은 열매나 동일하다고 비웃을 것입니다. 제가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교회 다니고 예수를 믿지 않아 지옥가면, 지옥 가서도 왕따 당할 것입니다. 같은 지옥의 저주라도 비참하고, 망신스런 저주가 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결 론
우리는 포도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기도는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봐주지 않으면 세상으로, 먼지 가운데로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경건의 열매, 정의의 열매, 전도의 열매, 봉사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진리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잘 살펴야 합니다. 물주고, 울타리를 쳐야 합니다. 악령이 떠나가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외치며 명령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항상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성경과 기도로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서 일대일로 하나님을 향해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않으신 분은 이번 휴가 때 수양관에 올라가서 일대일로 대화하는 시간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쓸모없는 가지를 많이 치셨으면 농부이신 하나님이 칼을 들고 와서 자르기 전에 스스로 자르시고 열매 맺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포도나무 비유
계강현 목사
신 구약 성경에는 포도나무 비유가 많이 나온다. 신약에서 가장 유명한 포도나무 비유는 요 15장이고, 구약에서 포도나무 비유로 유명한 말씀은 오늘 본문인 겔 15장과 더불어 사 5장이다.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기에 중요하다. 성경에서 포도나무란 단어가 제일 먼저 나오는 데가 어딘가? 창 9:20, “노아는 처음으로 밭을 가는 사람이 되어서, 포도나무를 심었다.” 노아는 그 포도열매로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는 취해서 벌거벗고 누웠다가 아들 가나안으로부터 낭패를 겪는 일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노아가 어디선가 포도나무를 구하게 되었고 그것을 심어서 농사를 지었다는 얘기가 된다. 농업 역사를 살펴보니, 가장 오래된 원예업 중 하나인 포도 재배는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는데, 처음 시작된 곳은 카스피 해 연안이라 추정하고 있다. 포도와 포도주 생산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이집트의 제 4·17·18왕조의 상형문자 문서에 나와 있고, 호머로스 시대에는 포도주가 그리스인들에게 일상적인 생필품이었다고 전해진다. 오늘은 포도나무 비유를 살펴보며 그 은혜를 나누자.
1. 우리는 극상품 포도나무이다.
사 5:1-2,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노래를 해 주겠네. 그가 가꾸는 포도원을 노래하겠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있네. 2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곳도 파 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 포도뿐이었다네.” 여기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개역개정에서는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표현했다. 느낌이 확 오지 않나? 시 80:8 -11에서는 노골적으로 표현하길, “주님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를 뽑아 오셔서, 뭇 나라를 몰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 9 땅을 가꾸시고 그 나무의 뿌리를 내리게 하시더니, 그 나무가 온 땅을 채웠습니다. 10 산들이 그 포도나무 그늘에 덮이고”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 한 그루를 뽑아 오셔서 가나안 땅에 뭇 나라를 몰아내고 그것을 심었다고 말씀한다.
농부는 포도원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리며 한 가운데 망대를 세워 여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감시도 하고, 포도주 짜는 틀도 파놓고 하여튼 최선을 다하여 포도농사를 지었다. 열매를 맺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극상품 포도나무에다 좋은 환경에 모든 농사꾼이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했다. 사 5:4,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 요 15:1,5,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신약시대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 극상품 포도나무이다. 우리를 구원하고 축복하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기 까지 하실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귀한 존재이다. 할렐루야!
2. 농부가 포도나무에게서 바라는 것은 열매다.
농부가 포도나무에서 원하는 소득은 잎이나 꽃이 아니라 열매다. 포도나무가 잎이 열리고 꽃이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과일나무가 존재하는 이유는 열매 때문에 존재한다. 사과나무 포도나무는 사과 열매와 포도 열매를 따먹으려고 심는 것이다. 어떤 나무는 모양이 좋아서 심기도 하고 그늘이 좋아서 심기도 하지만, 과일 나무는 열매를 바라고 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존재 목적,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목적이 바로 열매를 맺는 데 있다.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는 덩굴과 같아서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무슨 물건을 만들 목재로도 적합하지 않고, 하다못해 나무못을 만들어서 무슨 물건을 걸어놓을 수도 없는 나무다. 겔 1:1-3,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2 ‘사람아, 포도나무 곧 삼림 가운데 있는 그 덩굴이, 다른 모든 나무에 비해 나은 점이 있느냐? 3 거기에서 무슨 물건을 만들 목재가 나오느냐? 그것으로 나무못을 만들어서 무슨 물건을 거기에다 걸어 둘 수 있느냐?” 더군다나 남 유대 나라가 우상숭배와 폭력으로 죄악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배신했을 때 이미 두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의해 침공을 당했던 때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는 거다. 겔 1:5, “그 포도나무가 온전할 때에도 무슨 물건을 만드는 데 쓰일 수 없었거늘, 하물며 그것이 불에 타고 그을었으니, 무슨 쓸모가 더 있겠느냐?”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신다. v6,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삼림 가운데 있는 포도나무를 내가 불 속에 땔감으로 던져 넣듯이, 예루살렘의 주민을 불 속에 던지겠다.” v7b, “그들이 크게 배신하였기 때문에, 내가 그 땅을 황무지가 되게 하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남 유다의 우상숭배의 배신에 대해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계신 거다. 극상품 포두나무를 심어놓고 농사를 최선으로 지으면서 좋은 열매를 기대했는데, 들 포도를 맺은 남 유대를 향해서 사 5:5-7에서 하나님은 엄중히 책망하신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 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6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 구약만 그런 게 아니라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요 15:2,6,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열매를 맺으라고 심은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가지치기해 버린다.”, “잘라버린다.”, “불에 땔감으로 태워버린다.”, “그 땅을 황무지가 되게 한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신학적으로 논쟁이 될 만한 구절이지만, 중요한 얘기는 열매가 없으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마치 맛을 잃은 소금이 땅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그만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매를 맺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안 맺을 수도 있고 가 아니라, 반드시 열매를 맺으라고 구원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게 강단에서 설교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축복과 격려와 위로 설교는 많이 하지만, 열매 설교는 잘 하지 않는다. 세상 힘들게 사는 교인들 위로해도 힘든 상황인데, 열매 맺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 하며 목사들이 설교를 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신다. 우리가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고 기대하는 것도 바로 열매다.
성경에 보면 열매 그러면 세 가지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전도의 열매이다. 씨 뿌리는 비유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전도할 때 네 가지 밭과 같은 사람들을 만날 터인데, 길가가 돌밭이나 가시덤불밭은 마음은 열매 맺지 못하지만, 옥토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복음의 씨가 뿌려지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된다고 하는 전도의 열매를 말씀하고 있다. 복음을 들은 자들 중에 1/4이 구원받고 열매 맺는 건데 그것도 30배 60배 100배이니까, 꽤 괜찮은 결과다. 전도하는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이다. 또한 롬 16:5, “그리고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도 문안하여 주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첫 열매입니다.” 고전 9:1,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여기서 바울사도가 말하는 열매는 다름 아닌 전도의 열매가 분명하다.
또한 예수님을 닮은 성령의 열매다. 갈 5:22-23a,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것은 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열리는 성품의 열매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을 닮는다.” 그런 말을 하는데, 이게 다 궁극적으로는 같은 얘기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우리 몸 안에 들어오면서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고 성령이 욕구도 주시고 능력도 주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남의 기쁨을 같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고, 남과 평화한 사람이 되고, 인내하는 사람이 되고, 남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고, 선한 사람이 되고, 남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고, 온유한 사람이 되고 절제하는 사람이 된다. 이런 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삶이다. 이런 성령의 열매를 완전히 맺은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예수님 닮아간다고도 표현하는 거다.
왜 인격이 변화한다고 안 하고 열매를 맺는다는 표현을 썼을까? 열매는 어떤 나무의 본질을 뜻한다. 자라기 전에는 모르는데, 열매를 보면 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은 나무만 봐서는 무슨 나무인지 잘 모른다. 그런데 열리는 열매를 보고는 무슨 나무인지 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데, 그 열매가 맺히는 걸 보고 성령이 그 속에 계시다는 걸 알 수 있단 얘기다. 나무는 열매를 봐서 알 듯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성령의 열매이다. 열매라는 것은 사실적이고 구체적이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격한 의미에서는 열매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바울도 열매란 말을 많이 썼다.
뿐만 아니라, 입술의 열매도 있다. 히 13:15,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것은 곧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찬미의 제사는 찬양을 물론 의미하지만, 우리가 말로 하나님을 높이고 간증하며 자랑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사람을 살리고 용기를 주고 세워주는 덕이 되는 말이 또한 입술의 열매다.
3. 열매를 많이 맺는 비결을 배우자.(요 15:1-11)
그런데 왜 우리들은 그렇게 열매 맺는다는 게 힘들게 느껴질까? 내 힘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스도를 닮아라.”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연상하니까 ‘에구! 난 죽었구나! 사업은 망하고 가정은 풍비박산 나야 하는 거 아닌가!’하면서 부담을 느낀다. 이런 게 다 내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힘든 거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준 방법은 다르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는 것 어렵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간단한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그게 뭐냐 하면 “내 안에 머물러라.” 그러신다. 요 15:4-5,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 15:1-16까지 ‘열매’란 단어가 9번(헬라어 성경 καρπον 8번)이 나온다. 그런데 “내 안에 머물러라”(μεινητε)는 단어는 11번 나온다. “내 안에 머물면” “머물지 않으면” 등으로 쓰인다. 열매 맺는 비결은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비행기를 탔는데, 비행기 창문에 똥파리가 한 마리 앉아있다. 쫓아버리려고 했더니 밖에 붙어있어서 꼼짝 안한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똥파리가 비행기 창밖에 붙어 있느냐? 창 안에 붙어있느냐의 차이가 엄청나다. 안에 붙어있으면 저절로 미국도 가고 유럽도 가지만, 창밖에 붙어있으면 비행기가 날아가는 순간 곧 떨어진다. 예수님 밖에서 우리는 그와 똑같다. 그러나 우리가 똥파리 같은 존재라고 할지라도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 거하기만 하면 같이 간다. 그러고 보면 열매 맺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주님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 안에 머무는 건가?
1.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다.
주 안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시간을 같이 주님과 보내야 한다. 시간을 내어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어쨌든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한다. 시간을 같이 보내면 부부도 점점 닮아가는 걸 본다. 주님을 닮아가는 방법도 다른 게 없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닮아간다. 일주일에 달랑 한 시간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예수님을 닮아간다고 하긴 어렵다. 기도 10분만 하면서 열매 맺기 어렵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라. 그러면 저절로 열매 맺는다. 저절로 예수님 닮아간다.
2. 주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집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있고 자녀가 있는데, 부모 말에 자녀가 순종해야 하지 않겠나? 부모 말에 순종하기 싫으면 집을 나가서 독립해서 살면 되지. 부모가 주는 밥 먹고 학비 받아 공부하면서 부모에게 거역하려면 왜 그 집에 있나?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러 있으려면 주님과 내가 동등한 관계는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분이 주인이고 나는 그분의 종이다. 그분이 아버지이시고 나는 그의 자녀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그분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v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곧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있는 것, 즉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과 같다는 얘기다.
또 계명대로 사는 것이 머물러 사는 것이다. v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계명 그러면 부담을 느끼는 분이 있지만, 주님의 계명대로 사는 걸 어렵게 느낄 것 없다. ‘주님의 계명’ 대신 ‘주님의 소원’이라고 하면 부담이 덜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나?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분의 소원을 이뤄드리고 싶은데, 그게 계명을 지키는 삶이다. 주님의 소원을 풀어드리려고 사는 게 주님에게 순종하는 삶이다. 우리는 더 이상 돈 벌어서 좋은 집 짓고 은퇴해서 골프나 치면서 살리라 이런 꿈을 꾸지 않는다. 내 가정과 일터에서 하나님의 소원을 어떻게 하면 이뤄드릴 수 있나? 은퇴해서도 주님의 소원이 무엇일까? 그걸 생각하며 사는 것이 주 안에 머무는 삶이다.
우리는 주님의 소원을 풀어드리며 산다는 게 얼마나 큰 특권인지 알아야 한다. 삼성, 현대 같은 대기업 회사에서 일하면 프라이드가 있다. 그렇게 어떤 회사 하나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프라이드가 있는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것을 목표로 산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영혼 구원, 제자 만들어 신약교회 회복하여 주님이 꿈꾸셨던 교회를 만드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목자 목녀를 세울 때 두 번 부탁하지 않는다. 마치 교회 일에 무슨 큰 선심 쓰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무슨 주의 일을 하겠는가? 하나님 나라에 상급과 면류관 받는 사역에 구걸하지 말자. 영광된 특권이다.
3. 끊임없는 대화 가운데 사는 것이다.
하루 종일 주님과 대화하며 사는 것이다. 무슨 대화하나? ‘주님, 제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어요.’, ‘주님 내가 이거 꼭 하고 싶은데, 지금 피곤해서 못하겠습니다.’ 이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며 사는 거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대화는 두 가지다. 그 첫째가 ‘하나님, 지금 뭘 하고 계시나요?’ 묻는 거다. 우리는 아직도 인본주의 사상에 젖어있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을 먼저 하고 나중에 주님 일을 생각한다. 그런데 우주만물은 그분이 주인이시고 그분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있다. 그래서 피조물인 우리는 ‘주님,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이걸 물어봐야 한다. 회사에서 과장 승진에 떨어졌다. ‘주님, 이거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목장에서도 함께 기도했는데….’ 이런 질문을 하기 전에 ‘주님,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능력이 많으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이런 일이 생기게 하셨을까? 지금 무슨 일을 하려고 하시는 걸까?’ 우리는 역경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봐야 한다. 어려운 과정이나 역경이다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시려고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라.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 왜 역경을 허락하실까? 무슨 뜻이 있으실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사는 것이 주 안에 사는 것이다.
그 다음에 던질 질문은 ‘주님, 내가 뭘 하길 원하십니까?’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고 따라할 뿐이다. 예수님이 요 5장에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고 자신도 따라하신다는 거다. 일의 주권을 아버지 하나님이 쥐고 계시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이 하시고 계신 일을 깨달아서 거기에 내 삶을 맞춰서 사는 것이다. 내 뜻과 내 생각과 내 습관과 잘 맞지는 않지만, 교회에서 하는 일에 순종해서 내 삶을 맞춰서 살다 보니까,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우리 교회가 영혼 구원, 제자 만드는 주님이 꿈꾸시는 교회가 되어가는 일에 내가 함께 발을 맞춰 가고 있고, 그런 열매를 맺는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주님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며 사는 성도가 되자.
4. 간격이 없는 삶을 사는 거다.
부부가 싸우고 나면 같은 방에 있는 것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다른 방에 가서 자기도 하고 그러는데, 계속 그러고 있으면 언제 해결되겠나? 빨리빨리 풀어 야지. 우리가 하나님과 간격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죄가 틈탈 때이다. 죄란 놈은 어떤 사이도 갈라놓는다. 죄가 들어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갈라놓고 부부 사이도 갈라놓고 목장식구들 사이도 갈라놓는다.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가 끼면 안 된다. 그러면 기도응답도 잘 안 된다. 그걸 해결하는 방법은 빨리 회개하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여기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이 바로 주 안에서 거하는 삶이다. 이게 가능하냐? 가능하다. 우리가 완전한 삶을 살아서 가능한 게 아니다.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그때마다 보혈의 능력으로 씻어내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 말아야 할 죄를 짓고 그럴지라도 회개하면 씻어주시고 깨끗해지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회개의 기도 시간이 점점 늘어나야 한다. 주의 일 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불순한 동기가 없는가? 내가 죄 가운데 있으면서 양심의 화인을 맞아서 버림받으면 어떻게 하나? 그럴 때 “주님, 때려서라도 깨닫게 해주셔서 회개하며 살게 해주세요.” 기도하며 산다.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라. 예수님 영접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아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는 실수하여 죄를 지을 때마다 죄를 회개하고 보혈로 씻음을 받으라. 주 안에 거할 때 열매를 맺게 된다. 억지로 맺는 게 아니라 저절로 맺게 된다.
4. 이렇게 열매 맺는 삶을 살면 어떤 축복이 임하는가?
구약의 포도나무 비유에서는 열매없는 포도나무에 대한 심판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의 포도나무 비유에서는 물론 열매없는 나무에 대한 심판도 얘기하지만, 오히려 열매를 많이 맺으면 어떤 축복을 받는지를 더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이 달라진 이유는 단 한 가지 성령이 모든 믿는 자 안에 들어오셔서 역사해주시기 때문에 누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맺는 자가 누릴 축복을 강조하고 있다.
1.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기도응답이 임한다.
v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뤄질 것이다! 얼마나 멋진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관계가 이뤄지면, 기도하고 막힌 거 다 풀어버리고 그런 삶을 사는데 기도응답 받는 게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기도응답받기 원하면 주 안에 머물러라.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v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우리가 말을 많이 한다. 하나님이 기분 좋아하는 삶을 살면 영광을 받으신다. 자녀가 공부 잘해서 자녀를 칭찬하면 부모가 영광 받는 거 아닌가?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아무 아무개는 예수 믿어서 그런지 좀 달라.”, “아무 아무개는 예수 믿고 나서 달라졌어.” 이런 말 듣도록 사는 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다. 열매 맺어 예수님 닮아 가면 이렇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
3. 기쁨이다.
v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직도 부담으로 생각하면 포인트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기쁨이기 때문이다. 간증을 들으면서 감격할 때가 많다. ‘참 많이들 변했다.’ 전에는 절대로 먼저 가서 사과하는 사람이 아닌데, 먼저 사과를 한다. 술 담배를 끊을 사람이 아닌데, 끊는 거다. 주님을 닮아가고 열매 맺는 것이 기쁨이다. 과정은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결과는 기쁨이다. 피트니스 하는 사람이 역기도, 아령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그러려면 힘들지만, 얼마 지난 다음에 몸을 이렇게 보면 배가 들어가고 근육이 나온 게 기쁘지 않나?
열매 없는 포도나무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듯이,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살아서 열매 맺고 예수님 닮아가는 성도가 되고, 기도응답의 축복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축복과 기쁨이 넘치는 축복을 누리며 사는 성도가 되자. 아멘.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박봉수 목사
에스겔은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직전에 예언활동을 하던 선지자입니다.
주전 612년 바벨론은 초대 왕 네보폴라살 시절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앗수르를 물리치면서 강자로 부상했습니다.
그리고 2대 왕 느브갓네살이 주전 605년에 또 다른 강대국 애굽을 갈그미스 전투에서 물리침으로써 바벨론은 명실상부하게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변화는 남왕국 유다의 운명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유다의 정치 지도자들은 외교적으로 이런 위기를 극복해 보려고 강대국 눈치만을 보다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려서 더욱 더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볼 때 바로 이런 점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보다도 강대국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실생활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퇴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에스겔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멸망케 될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에스겔이 한 비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박하게 다가온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비유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산에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포도나무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많은 나무들 중에 포도나무를 아낍니다. 그런데 한 포도나무에 포도 열매가 달리지를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열매 없는 그 포도나무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나무는 백향목처럼 건축 재료로 쓸 수가 없습니다. 싯딤 나무처럼 가구를 만드는데 쓸 수도 없습니다. 그릇을 걸 못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불을 피우는데 쓰는 화목 밖에 쓸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나마 열매도 없으면서 여기 저기 불에 그을렸습니다. 멀쩡한 것도 포도나무는 쓸데가 없는데 하물며 불에 그으르고 손상을 입은 포도나무는 더더욱 쓸데가 없습니다.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분명합니다. 한 마디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이 포도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 열매도 맺지 못하고 게다가 여기 저기 그을려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불에 태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가 주는 의미를 보다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보면 산에 여러 가지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나무들 가운데 유독 포도나무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선택되었습니다.
2절에 보면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묻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나무 가운데 포도나무가 선택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답이 무엇입니까? 이 답의 핵심은 사람이 다른 나무와 달리 그 포도나무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가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모든 민족과 나라들과 달리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사 41장 8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내용의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로 가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이스라엘을 지렁이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은 지렁이처럼 다른 민족과 비교해 볼 때 보잘것없고 내세울 것 없고 형편없는 민족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정말 보잘것없는 민족이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니까 거룩한 민족 구별된 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하나님의 선택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비유에 나오는 포도나무처럼 다른 나무와 비교해 볼 때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또 이사야서 말씀처럼 우리는 지렁이처럼 연약하고 드러나 내세울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거룩한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그 가치를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어떻게 지금의 그런 복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노회에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투표를 합니다. 작년에 부노회장을 세우기 위해 노회 총대들이 성노회로 모여 선거를 했습니다. 두 분이 출마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1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었습니다. 뽑힌 분이 떨어진 분보다 불과 한 표 더 많았습니다. 선출된 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 표가 이렇게 소중한 지 미처 몰랐습니다. 그리고 '노회원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마다 저분 때문에 내가 당선 됐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머리가 숙여 지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려면 내가 왜 이 자리에 서 있게 됐는지를 잊으면 안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늘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선택해 주셔서 지금의 거룩한 백성이 됐다는 사실은 간과한 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자기 주장만 자기 권리만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을 무시하고, 이방인을 사람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영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우리말에 개구리가 올챙잇적 생각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과거의 자기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생각지 않은 채 남들을 무시하고 교만할 경우 흔히 하는 말입니다.
시 103:2를 보면 시인이 이렇게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나 됨이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묻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많은 나무들 중에 왜 포도나무를 선택했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그 답은 간단합니다. 포도 열매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포도나무를 찾는 이유는 다름 아니고 포도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 비유가 말씀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유가 바로 열매를 얻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주목해 보면 포도나무에서는 포도 열매만을 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와서 건축재를 찾는다면 난센스입니다. 포도나무에 와서 가구 재료를 찾아도 난센스입니다. 포도나무에서는 포도 열매만을 찾습니다.
그렇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치는 그 열매에 있습니다. 아무리 포도나무가 잎이 무성하고, 키가 크고, 줄기가 튼튼해 보여도 열매가 시원치 않으면 그 포도나무의 가치는 크지 않습니다.
비록 키도 작고 잎도 별로 없어도 포도 열매가 당도도 높고 크기도 크고 탐스럽게 열리면 그 포도나무의 가치는 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찾으시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맺어야 할 열매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이름을 날리고, 돈도 많이 벌고, 큰 역사를 일으킨다고 해도 그에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일에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반면에 비록 이 세상에서 성공도 못하고, 이름도 날리지 못하고, 돈도 없고, 변변한 업적 하나 이루지 못했어도 그가 진실된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정말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2절에 "삼림 중에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포도나무는 밭에 있어야 합니다. 삼림 속에 있는 포도나무는 야생포도나무입니다. 우리말로는 머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요즘 품종 개량이 된 거봉 포도와 같은 포도는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한 송이를 다 먹지 못할 정도로 큽니다. 그리고 당도도 보통 포도보다 훨씬 높아서 무척이나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나는 머루는 그 크기가 얼마나 작은지 그래서 한 알을 먹어보면 씨 빼고 껍질 뱉어내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루는 정말 십니다. 그래서 많이 먹기가 어렵습니다.
에스겔이 바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열매가 저 머루처럼 형편이 없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지적으로도 많은 발전이 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과거와 다른 큰 변화가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는 과거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이 없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포도나무 크기가 옛날보다 훨씬 더 커졌습니다. 줄기도 훨씬 굵어졌습니다. 잎도 크고 화려하고 훌륭합니다. 그러나 열매는 포도가 아니라 산 머루 정도로 작아지고 볼품이 없어졌습니다.
포도를 품종 개량할 때 주목적은 열매입니다. 그런데 열매는 생각하지 않고 나무 자체만을 위해 품종을 개량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까? 지금 이스라엘이 그 꼴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믿음의 열매가 풍성합니까? 엉뚱한 것들만 풍성하고 정작 믿음의 열매는 빈약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됐습니까? 목표가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학생은 공부하는 일에 목표를 세우고 몰두해야 합니다. 학생이 공부하는 일을 뒷전으로 미루고 다른 일에 몰두한다면 그 학생은 칭찬 받는 학생이 될 수 없습니다. 운동 선수는 운동하는 일에 목표를 세우고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운동하는 일을 뒷전으로 미루고 돈 버는 일이나 즐기는 일에 힘을 쏟는다면 그 사람은 운동으로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목표를 세우고 힘을 쏟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은 뒷전으로 미루고 돈버는 일, 명예를 얻는 일, 출세하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에스겔이 볼 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보다는 다른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 24:14-6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금 다짐을 받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이 땅에 사는 동안 오직 여호와만 섬기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든지 여호와만을 섬기든지 택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여호수아에게 다짐했습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만을 잘 섬기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한눈을 팔면서 점점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삼손을 들 수 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서원하고 하나님께 사사로 세움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의 미모에 홀려서 한눈 팔다가 믿음이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삼상 6장을 보면 블레셋에서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블레셋 땅에 법궤가 있자 블레셋에 재앙이 끊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에게 물어보니 아무래도 이 법궤 때문이니 이것을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법궤를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새 수레를 만들고 아직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젖나는 암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궤를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보물 상자도 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벧세메스로 향해 수레를 보냈습니다. 물론 사람이 타지 않았습니다. 두 마리 암소가 끌고 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6:12절에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새끼를 두고 갈 수 없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곧장 벧세메스로 법궤를 싣고 갔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때로는 울 일도 있습니다. 죽을 일도 쌓여있습니다. 이것저것 좌우에서 유혹하는 것들도 넘쳐납니다. 그러나 법궤를 메고 가는 저 두 마리 암소처럼 우는 한이 있어도 목표지점 저 벧세메스로 나아가야 합니다.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경마장에 가보면 경주 말들은 모두 옆 눈가리개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직 앞만 볼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한 눈 팔아서 옆을 보다가는 질주하던 코스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사고로 넘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랍니다.
우리 믿음의 경주가 그래야 합니다. 목표를 정했으면 그 목표를 향해 질주해야 합니다. 그래야 포도 열매가 탐스럽게 맺힙니다. 야생포도처럼 머루처럼 보잘것없는 열매가 달리지 않게 됩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이스라엘은 열매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것으로도 쓸데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불에 넣어 태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혹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시지 않으실까요? 아니면 그 열매의 풍성함을 보고 기뻐하실까요?
제가 오래 전에 읽었던 영시 가운데 J. F. 알펠트라는 분이 쓴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어느 누구도 포도나무에게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너는 포도나무인가? 탐스럽게 익은 채 매달려 있는 포도송이들이 온 몸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탐스런 열매로 여러분이 주님께 정말 필요한 존재임을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행여라도 열매가 없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책망 듣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