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노트
<사라방드>는 베리만이 부인 잉그리드 폰 로젠의 죽음 뒤 그리움의 고통에 빠져 지내다 연출한 작품으로서, 감독에 의해 마지막 작품으로 선언된 영화는 로젠에게 바쳐졌다. 베리만의 가족드라마와 실내극 스타일의 완결편인 <사라방드>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그 사이의 10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야외신 하나를 제외하면) 완벽하게 통제된 세트 속에서 한편의 연극처럼 진행된다. 이혼 뒤 30여년 동안 보지 못한 요한(엘란드 요셉슨)을 마리안(리브 울만)이 방문한다. 숙모의 유산을 받은 요한은 한적한 시골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고, 그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과 손녀딸이 근처에 살고 있다. 프롤로그를 제외한 각 장에서 두 배우의 듀엣 연기가 펼쳐지는 영화는 넷의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영화의 정점은 감정적 문맹자로 남아 있던 두 노인이 옷을 벗어던지고 나체로 마주 선 10장에서 벌어진다. 그들의 마음속으로 카메라 뒤에 선 베리만이 ‘가족의 짐과 무게를 덜어내고 느껴지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 평안이 찾아오리라’라고 말하는 게 전해지고, 이어 에필로그에서 마리안이 오랫동안 버려둔 딸의 얼굴에 손을 대는 순간 그녀는 자신을 수십년 동안 괴롭힌 문제를 돌고 돌아 풀게 된다.
리뷰:
잉마르 베리만/ 스웨덴/ 2003년/ 107분
잉마르 베리만의 1973년작 <결혼에 관한 몇가지 장면>의 후일담. 요한과 마리안은 한때 행복한 부부였다. 요한에게 다른 여자가 생기면서 결혼은 파탄에 이르고, 십여년 뒤 재회했을 때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지만, 재결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더 흘렀다. 마리안이 사진 속의 추억을 더듬다가 요한을 찾아나서는 것에서부터 <사라방드>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늙고 약해진 요한을 바라보며, 마리안은 원망도 미움도 녹아내리는 걸 느낀다. 요한이 화면에서 사라진 사이, 마리안은 정면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읊조린다. "아무래도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아요."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마리안은 요한을 보살피느라 한동안 그 곁을 지키고, 그러면서 요한의 말썽 많은 가정사에 개입하게 된다. 요한은 아들 헨릭과 사이가 나쁘고, 헨릭은 자기 딸 카렌에게 집착한다. 마리안은 헨릭의 아내 안나의 죽음으로 이들 가족 관계가 더욱 깊은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4명의 인물, 10개의 장으로 이뤄진 <사라방드>는 베리만의 표현대로 "4명의 솔로이스트와 함께 하는 오케스트라"다. 네 명의 등장인물들은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서정적인 영상 속에서 복잡미묘한 관계의 실체와 감정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인다. 아버지들은 베리만의 여느 영화에서처럼 자식들과 반목하고 불화한다. 이들은 아내와 연인과 딸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해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지만, 홀로 남은 새벽이면 엄습하는 슬픔과 고독 앞에 아이처럼 무너지고 마는 가련한 남자들이다. 아비와 아들의 대립, 인간 본원의 고독, 삶과 죽음의 테마가 노대가의 깊은 눈과 여문 손끝을 통해, 담담하고 서글프고 우아하게 펼쳐진다. 올해 여든 여섯살인 베리만은 <사라방드>를 “마지막 영화”로 기획하면서 최신 기술이랄 수 있는 HD를 특별히 끌어안았다.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야속해 할 수 없을 만큼 처연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글 박은영 2005-05-03
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