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제가 여기에 글을 쓰다니. 나도 참 미쳤다는-_-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지금 제 기분이 매우 감성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_-; 허접한 글이 될게 뻔하기때문에 죄송하단 말도 우선 드립니다.
초등학교 시절
정말 공부가 좋았습니다. 너무 좋아하면서 정말 특이하게 살았습니다.
취미는 독서였고. 그 책 종류는 백과사전이였습니다.
집에는 제가 몇번이고 다 읽어서 새로 장만하곤 하던 백과사전이 4종류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책값을 아끼시지 않았습니다.
월세방에 사시면서도 그때 돈으로 130만원이나 되는 책을 저에게 사 주시곤 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때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실꺼란걸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 주위 사람에게 늘 성숙하단 소리를 들었습니다.
옳은 소리도 잘하고, 부모님 걱정은 안시키고 스스로 모든일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오빠와 저를 앉혀놓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힘들구나. 얘야 너무 힘들구나. 그냥 같이 죽어버리자.
너희를 두고 나혼자 죽을수 없어서.. 그래서 산다. 그러니 같이 죽자."
저는 그말이 너무 싫어서.
아니 그 말을 하고 계시는 어머니 얼굴이 너무 싫어서
정말 더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중 1때 어머니와 아버진 이혼하셨습니다.
아버진 어머니의 이혼을 막으려고 저희의 양육권을 놓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미뤄온 이혼을
저희가 말했습니다.
"우린 괜찮으니까 제발 이혼해."
더이상 어머니가 고통받는게 싫었습니다.
그리고 더이상 아버지가 미워지는걸 스스로 막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혼한 날.
아버진 저희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엄만 정말 잔인한 사람이야"
속으로 저또한 말했습니다
'그렇게 만든건 아빠야..'
방황도 하고 싶었습니다.
남들처럼 방황하고 그리고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서
다시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럴수 없었습니다.
전.. 성숙한 사람이였기 때문입니다.
철이 들어버린 사람이였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어리고 조금만 더 철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그리고 난.. 이혼이 싫다고 말할수 있는 철부지이길 바랬습니다.
이혼하시고
일주일뒤에 가정부라고 한 여자분이 집에 오셨습니다.
엄마가 저희에게 주고 가신 2칸짜리 월세방에 무슨 가정분지
아버지가 한심했습니다.
그리고 2주뒤 그 가정부는 사업파트너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한달뒤 그 사업파트너는 새엄마가 됐습니다.
그리고 저와 오빠에겐 새엄마가 생겼습니다.
중3때.
하루는 하늘이 노랗게 변하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틀에 한끼씩 먹었던 식사 문제인듯 합니다.
놀라 오신 선생님께서 병원에 데려가 주셨습니다
영양실조라고 합니다.
성장기인 제가 중3때 영양실조가 걸렸습니다..
중3 담임은 절 참 아껴주셨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점심시간이면 몰래 불러 점심값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정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제 성적은 전체 13%정도.
성적은 상향선을 타고 있었습니다.
중2때 새엄마와의 트러블로 인해 시험을 제대로 치지 못한 후에는
3학년때부턴 늘 90점대였습니다.
이윤.. 하나였습니다.
등록금을 주지 않으셨기에 장학금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였죠.
학교를 선택해야 할 무렵
선생님께선 절 설득하셨습니다.
실업계는 안된다고. 사회 인식이 너무 좋지 않다고.
그리고 아주 솔직히 말해서 아깝다고 해주셨습니다.
성적은 상향선을 타고 있고. 장학금도 매번 받지 않았냐고.
나중엔 고등학교때도 장학금을 받으면 되고
안되면 선생님이 내주시겠다는 소리까지 하셨습니다.
하지만 전 잘 알았습니다.
제 주위 특목고를 가려 하는 아이들은
다 과외며 좋은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였고.
전 초등학교때도 국악에 재능을 보였지만 금전적으로 국악중학교를 갈수 없어 포기했고
중학교땐 미술선생님이 적극적으로 미대쪽을 지원하라고 예체능을 하라고
하셨을때도 재능을 살릴 여유가 없어서 포기했습니다.
초등학교때부터 글짓기며 시며 상을 받아 문학쪽으로 가라고 하던 것을
소위 그냥 소설가니 글쟁이가 되어서는 안정적인 수입이 없을것이기때문에
아픈 어머니를 모실수 없기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알았습니다.
학교를 선택하던 날
선생님도 절 안타까우신지 손을 잡고 우셨고.
저도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S여상은 집에서 멀어 X여상에 진학했습니다.
나름대로 명문여상이라고 이름이 붙은 학교여서 그런지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고1때는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졸업후에 무얼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진학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쩜 그때의 저의 대답은 현실을 잊고 싶었던 대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 다 다니는 컴퓨터 학원을 매달 다닐 순 없었습니다.
학원비를 낼 돈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가끔 연락을 하면서 용돈을 받았습니다
새어머니는 정확히 10원단위까지 계산하며 차비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통금시간은 4시 30분이였습니다.
지금 전 아버지를 원망하진 않습니다.
다만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사랑 방식이 틀렸을 뿐이라고..
어머니께 받는 돈을 모아 학원을 다녔습니다.
남들 2~3달 다니면서 천천히 자격증을 따는걸 저는 2주에서 1달사이에
따려고 노력했습니다. 시간적 여유도 금전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1학년이 지나고 나니 저에겐
부기2.3급워드 1.2.3급 정보처리기능사. 정보기기기능사.
컴퓨터활용능력2.3 전산회계3급 무역영어 4급
이란 자격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학년때부턴 수능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학교 이사가 다행이도 영어를 중심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물론 수준은 다른 학교에 비해 모잘랐겠지만
주 7일에서 6일 수업은 늘 학기마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긴건
수능 공부를 하려고 하니 장학금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공부에 더 신경을 쓰면서 수능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저에겐 어설픈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여상 다니는걸 학교 다닐땐 별로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회사를 다니고 다시 수능을 준비하면서
어디 고등학교에 다니냐는 말에 할말을 잃곤 합니다.
그래서 이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말이죠.
'넌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라고요.
덕분에 3년을 장학금을 받고 다녔습니다.
고2때쯤 새엄마와의 트러블로 어머니집으로 왔습니다.
덕분에 어머니는 저와 오빠를 데리고 사시느라
더 아파하고 더 고생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 저처럼 한으로 남았겠죠.
며칠 전 어머니께 보냈다가 다시 반송되어서 온 편지를 봤습니다.
거기엔 여상을 갈까 그냥 인문계가서 남들만큼 집에서 지원은
못해주겠지만 죽기 살기로 할까 이런 얘기가 있었던듯 합니다.
어머니는 한참을 쳐다보더니
이 편지를 엄마가 받았다면 널 그 학교에 보내지 않았을꺼라고
엄마가 더 고생을 해서라도 널 인문계에 보내고
공부를 시켰을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 압니다.
때론 욕심을 버려야 할때가 있다는걸 말이죠.
가끔은 원망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할때가 너무 많아서 말이죠.
그렇게 저는 3학년을 다 다니고
X 언론사에 취업을 하게 됩니다.
근무시간과 환경도 열악하지만
어머니 얼굴에 먹칠 하지 않을 회사였고. 무엇보다 연봉이 높았거든요.
대학진학의 꿈을 고3때 저의 집안 형편을 다시한번 둘러보고
포기했지만 전부다 포기한건 아니였나 봅니다.
그 회사가 싫었지만 4년 다닐 등록금을 모을 정도로 다녔으니까요
고3 졸업전
전 X시립대를 붙었고 회사 근처에 있는 몇 학교를 붙었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아버진 등록 마지막까지 등록금을 주지 않으셨거든요.
대신 한마디 해주셨죠.
"미안하다.. 정말.."
그날 한참 울었던게 생각 나는군요.
회사 사람들이 다 와서 한번씩 물어봤었죠.
왜 그러냐면서.. 후후..
언론사인 회사에 다니면서 많은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회사가 큰 언론사여서 그런지 몰라도
거의다 스카이 출신에 X여상밖에 졸업 못한 저를
기자라는 친분으로 은근히 무시하는걸 느꼈으니까요.
자격지심인지도 모르고
이 어설픈 자존심탓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그때마다 생각했습니다.
'기자들의 저 무시는 내 스스로 만드는거다.
내가 더 발전하고 무시 못할 사람이 되자'
그때부터 더 많은 공부를 하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고3때부터 알면서 사귀던 남자친구가 대학생이 되고
내가 못 알아 듣는 대학생활에 대해 말하면서
전 언론사인 영향으로 사회 생활에 차차 눈을 떠갈때쯤
좋은 부모 밑에서 고생 한번 안하고 큰 그 아이와
대화가 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아이를 많이 좋아했었지만.
저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두분다 공무원이신 부모님 밑에서 너무나 어린 아이처럼
다 주어진 것 조차 자기자신거로 만들지 못하는 그 아이가
솔직히 한심해보였습니다.
아니 어쩜 질투였는지도 모릅니다.
저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이런 힘겨운 사회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됐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이런 질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트러블 속에서 그 아이와 헤어졌습니다.
500일 가까이 만나왔지만
마지막 무렵 우린 서로 너무 지쳤고.
환경 또한 너무 달랐습니다.
저는 이상형이 무어냐는 질문에 한마디로 대답합니다.
"꿈을 가진 사람"
저한테 늘 왔던 수많은 꿈을 저는 그냥 그렇게 보내야 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속에서 가장 빨리 탈출하는건
이상을 현실에 맞추는거란걸 전 너무 빨리 익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쩜 대리 만족인지 모릅니다.
꿈을 가진 사람. 포부가 있는 사람.
계속 발전 하는 사람.
즉 제가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그런 사람.
갈망이였는지도 모릅니다.
내 한계를 스스로 봐 버렸기때문에
내 상대는 그러지 않기를.
현실이 안주하지 않기를.
돈이란것에 타협해 버린 내 자신과 다르기를. 그렇게 바랬는지도 모릅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시간을 내며 공부를 했고.
2002년 수능을 봤습니다.
2등급이 나왔고.
X학교 최초합격 정도의 선의 성적이였던듯 합니다.
아는 사람이 X학교에 저보다 조금 낮은 성적으로
최초합격을 진학했거든요
그 학교를 가고 싶었습니다.
물론 X학교가 좋아서가 아니라.
회사와 가까웠기 때문이죠.
모르겠습니다.
자격지심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끔 다음 카페에서 한심하다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삼수 사수 장수..
다시 수능 봐도 점수 쉽게 오르지 않는다는거 압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잘 아는건 그건 상위권이란것도 압니다.
또 더 잘 아는건 상위권에서 오르는 그들은 그만큼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겁니다
2등급도 못나오는 성적에서
부모님은 그들에게 또한번 기회를 주면서
다시 한번 해보라며 학원을 등록해 주시면서
새 책과 새 학원들..
한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주는 음식도 제대로 못 먹는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수 삼수. 장난처럼 그렇게 무모하게 1년을 아깝게 보내는
그들에게 정말 나같은 사람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아는 친구하나가 강남에서 한과목당 300만원짜리 과외를 한단
소리를 들었습니다.
전 고3때 150만원이 없어서 학교를 포기했는데
그 아인 한달에 8번와서 2시간 봐주는 과외가 300이라더군요.
그 300을 벌려면 기자 밑에서 눈치보면서 부장 국장에게 눈치보면서
2달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돈이였습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00만원짜리 과외를 받고도 대학 문턱도 못가는 그 앤
작년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렇게 어설픈 저의 재수 생활은
원서한번 못 넣어보고 끝났습니다.
그때 아마도 전 진심으로 대학 붙은 친구를 축하해준거 같습니다.
우스게 소리로 내가 넣었으면 넌 예비 1이라는 소리도 하면서..
그때까진 제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그래. 지금 당장 회사를 관둬서는 안돼.
난 4년동안 다닐 등록금을 벌어 놓아야해.
그 무렵 만난 친구는 설법 지망생이였고.
그무렵 저의 목표도 고경으로 잡혀가고 있었습니다.
고경.
가끔 슬럼프가 생길 땐 고대 경영대 건물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분수대에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년엔 여기에 다니겠다고.
완공되어 가는 경영대 건물을 보면서 속으로 외쳤습니다.
내년엔 나. 여기서 공부하겠노라고..
아마.. 너무 큰 꿈이였던듯 합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1년 8개월쯤 접어들 무렵.
하루에 2시간씩 자면서 새벽 단과 수업을 듣던 저는
이렇게 해선 회사 생활도 수험 생활도 제대로 할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하다간
제가 생각하던 그 한심한 부류에 내 이름도 박힐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점점 그러고 있었던 듯 합니다.
03년 3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고대 경영..
친구 한명이 거기에 다니고 있어서 더 가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앤 아직도 제가 실업계인줄 모릅니다.
너무 형편이 어려워서 대학 진학을 미루고 회사에 입사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귄 친구들에게
지금 남자친구를 제외하고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 남자친구에게도 말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구요..
실업계라고 하면 다들 공부 못하는 애들이라고
정말 많이 놀았구나.-_-; 라고 생각하는 그 선입견때문에
선뜻 말하지 못했습니다.
실업계 졸업했고.
삼수생이라고 하면 당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게
너무 싫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시하는 대다수의 사람이
자기 자신도 제대로 관리 못하면서 자신도 삼류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
부모님의 돈으로 그 위치까지 올라왔으면서
저에게 손가락질 하는게 너무 싫었습니다.
어쩜 이런거겠죠.
저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저들보다 못하다고 말해주는 이 현실이 더 미웠는지도..
한참 체력도 바닥났고.
힘든 회사 생활에 지쳐 갈 무렵..
저희 회사는 4교대로. 퇴근이 일정하지 못합니다.
6시, 9시, 10시, 12시30분.
12시 30분에 끝나면 저희 집에 오면 2시 30분이였는데
전 4시 30분에 일어나서 단과 1타임을 들으러 갔어야 했습니다.
6시에 끝나는 날은 7시 30분부터 독서실에 앉아서
마지막 문닫는 1시 30분까지 공부를 하곤 했는데
아무리 시간을 아껴써도 다 하는건 너무 벅찼습니다.
상과 과목을 많이 배워서
수1은 제대로 해본적도 없었고.
영어도 어려웠고. 사탐도 못 배운 부분이 대다수였습니다.
많은 생각 끝에 5월에 퇴사를 했습니다
1년 8개월간의 회사 생활은 처절하게 모은 2천만원 가량이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공부하고 싶다는 그 꿈 덕분에 4년 등록금은 모으지 못했지만
장학금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이 때가 아니면 난 이 회사에서 탈출 할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를 돈으로 묶어 놓는 유리감옥이라고 생각해 왔으니까요.
퇴사 후.
좀처럼 공부는 잘 되지 않았습니다.
자꾸 슬럼프가 왔고.
여기서 수능을 망치면 회사도 돌아갈 수 없다는 부담감이 컸습니다.
어머니께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고대 경영의 문은 너무 제겐 좁았습니다.
그무렵 제 남자친구에게도 많은 의지를 했고.
9월쯤인가? 그때 처음으로 실업계라는 얘기를 했던거 같습니다.
그땐 뭐가 그리 서러운지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애가 이제 날 무시할까봐 두려웠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이 창피했습니다.
아직도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거 보면
아직도 전 저만의 열등감에 쌓인 세계에서 탈출을 하지 못한듯 합니다.
몇달이 지나고 수능날이 되었습니다.
5월부터
전 본격적으로 수험생이 되었습니다.
수능만 보면서 살지도 않았는데
나이로 보니 어느덧 제가 삼수생이더군요.
그래도 회사원이란 호칭보다 삼수생이 좋았습니다.
후훗.. 그땐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
전 원래 스트레스가 심해서..
위염과 장염을 중학교때부터 앓고 있었습니다.
신경성이라 치료가 안되더군요.
수능이 다가오면서
준비한게 없다는 부담감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10일전 심하게 감기에 걸렸습니다.
독감을 일주일정도 앓았습니다.
말을 할수 없을 정도의 상태가 되어서 전화도 한동안 못 받았습니다.
그래도 이대로 포기할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7차를 생각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주일동안 누워있으면서 마무리도 못했고.
조금 만들어 놓은 오답노트도 볼수 없었습니다.
슬럼프도 많았는데
왜 또 마지막까지 이런 독감까지 걸리는지
여기가 역시 제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용하게 그냥 돈이나 벌껄.
어머니께 죄송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독서실에 가면 독감을 다른 수험생에게 옮길까봐 가지도 못하고
겨우 누워서 책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병원의사는 공부를 하지 말고 그냥 쉬어야지 수능을 볼수 있겠다는
소리까지 했습니다.
정말 절망적이였습니다.
이러려고 회사를 관둔게 아닌데
제게 주어진건 3년이나 뒤쳐진 제 인생과 그걸 보며 비웃고 있을 2000만원이란 돈이였습니다.
제 인생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솔직히 제 남자친구에게 창피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제 자신에게 창피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의 자존심이 이런 저를 용서할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수능 전날 몸이 괜찮아졌습니다.
다 나은건 아니였지만 시험보러 갈 수 있을 정도는 된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수능 전날.
미리 학교에 가보면서 오는 길에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불행이 있으면 행복도 있다.
여태 난 너무 지독하게 불행했기 때문에
앞으론 행복할꺼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 자기 암시는 이루어 지지 못했습니다.
11월 5일
시험장에 들어서면서
나도 수험생이구나. 이렇게 떨리구나.
재수땐 비록 수능을 잘봐도 등록금이 없어서 못 다닐꺼란걸 알아서 그런지
꽤 편한 마음으로 봤습니다.
수능 보기 전에 원서도 넣지 않겠다고 생각했구요.
현역때 150만원때문에 못간 학교가 꽤 한이 되었나 봅니다.
괜히 합격증 받으면 기분이 나쁠꺼란 생각도 했었으니까요.
언어 시간.
오르비분들처럼 언어를 잘 치지는 못하지만
02수능때도 108점이 나왔기때문에 언어에 은근히 기대를 했습니다.
시험지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115는 무조건 넘겠다'
풀면서도 쉽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가끔 변별력 문제도 보였고.
매력적인 오답 덕분에 함정만 피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 풀고 다니 10분정도 남았습니다.
별표 친 문제를 다시 보면서 마킹을 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6분이 남아서 가채점을 위해 수험표에 답도 썼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남는다며 여유를 부리면서
수험표와 OMR카드를 확인했습니다.
간단히 하려고 4군데 정도만 체크했습니다.
'8번 똑같고.
15 똑같고.
27번....
어.. 이상하다..'
수험표와 OMR답이 맞지 않는걸 보고
갑자기 가슴이 너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신경이 갑자기 예민해져서 그런거 같았습니다.
시험지와 확인해본 결과 제 OMR이 틀렸다는걸 알았습니다.
시계를 보니 4분이 남았습니다.
가슴이 너무 아파 몸을 숙인 상태로 감독관을 불렀습니다.
"답안지좀 바꿔주세요.."
감독관은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시계를 가르켰습니다.
아직 4분이 남았다는걸 보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근데 그 감독관은 5분도 안남았을때는 바꿔주지 않는게 원칙이라며
저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일부러 친구들과 떨어진 학교에 보게 된걸 감사했는데
너무 서러웠습니다.
울고 싶었는데.. 너무 서러워서 눈물도 안나왔습니다.
쉬는 시간이 되고 뛰쳐 나가고 싶었습니다.
근데 자꾸 어머니 얼굴이 떠올라서 그냥 앉아 있기로 했습니다.
그 시간 이후로 계속 거의 누운 상태로 시험을 봤습니다.
답안지를 잘못 쓴걸 안 뒤부터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제대로 허리를 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점심시간에도 어머니가 싸주신 김밥도 하나 못 먹고
물만 한잔 마시고 끝까지 수능을 봤습니다.
시험장을 나오는데
언어 지문처럼 하늘이 노랗더군요.
영양실조로 쓰러진 후 그런 하늘은 처음 본거 같았습니다.
집에서 채점한 가채점 언어 110
성적표에 찍힌 언어 76..
원래 고대 경영 갈 점수도 나오지 않았지만 하늘이 원망 스러웠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게 변했습니다.
7차 책을 알아 봐야했고. 점점 제 몸과 마음도 지쳤고.
한심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점점 제 뇌리에 박혀 버려서
떨쳐 버릴수가 없었습니다..
성적표를 받고.
7차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어 5등급에 아무말도 못하고 멍하니 성적표만 바라봤습니다.
내 자신이 이렇게까지 한심해 보일수가 없었습니다.
7차를 알아 보면서
수능은 단순히 공부를 잘한다고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열심히 안한 벌이기도 하지만
핑계인지 모르지만 감독관이 너무 미웠습니다.
어쨌든 원서를 넣어 보라는 어머니 말에
X대 언론정보
X대 호텔경영
X대 e비즈니스 넣었습니다.
다 제 점수로는 불가능한 학교 였습니다.
S여대가 제일 낮을거 같아서 인문계과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곳을 썼습니다.
떨어지면 교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도 모시고 살아야 하고.
기혼이 되어서도 할수 있는 직업이 필요 했습니다.
언제 다시 암이 찾아올지 모르는 어머니를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돈을 벌수 있는 곳이 필요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거는 기대를 만족 시켜 드리고 싶었고.
교대를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는
CEO가 되고 싶었던 저의 꿈은
나이란 장벽에서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였습니다.
잠시의 사회 생활로 처절하게 깨달은게 여자의 나이였습니다.
여자가 사수해서 연고대 가도 성공할수 없다는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점은 싼 등록금이였습니다.
등록금이 싼 국립대를 고르면 서울대와 교대 시립대 였는데
시립대는 현역때 붙은 학교라는 인식때문에
솔직히 너무 속상해서 다시 사수를 하면서까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교대가 제일 낫다고 생각했고. 7차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건 아니였지만 책도 조금 샀고
조금씩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불안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서 될까..
또 밀려쓰면 끝 아닌가.
1년을 또 허비해야 하나.
여기가 내 한계가 아닌가...'
많은 불안감도 있었고.
점점 저에게 상대적으로 좁아져가는 교대의 컷은
절 더 불안하게 했습니다.
교사도 같은 공무원인데 차라리 1년을 공무원 공부를 할까 생각했습니다.
많은 혼란 속에서
다시 공부하더라도 이 슬럼프를 극복할 자신이 없어서
절 잡아줄 학원에 진학하고 싶었고.
잠시라도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에.
조그만 입시학원 서무로 들어갔습니다.
얼떨결에 X여대 논술도 보고
바쁘게 살다 보니
합격자 발표날이 다가왔습니다.
1월 9일 2시 발표.
떨린 마음에..
서버가 다운될까 싶어서.
미리 들어가 한참 새로고침을 하는데 발표자 합격 조회가 떴습니다.
840105....
"축하합니다. 합격하셨습니다."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여대지면 몇점 상향한거였고.
최초 합격이란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기쁨은 잠시
회사까지 포기하면서 얻은게 이 학굔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학교 삼수생이 졸업해서 뭐할까도 싶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공무원..
공무원이 되려고 합니다.
1학년때는 영어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2학년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무원 공부를 해서 3학년때는 꼭 될겁니다
어머니께 취업 걱정을 하시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게 창피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실업계 특별전형이란게 있었습니다.
물론 그게 저한테도 혜택이 있었단걸 알았다면 그걸로 원서를 넣어서
좀더 좋은 학교를 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자존심일지 몰라도 정문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물론 원서를 다 넣을후에 그 혜택을 2학기까지 다 다니지 않은
저같이 빨리 취업한 학생에게도 돌아가는거 였단걸 안 순간
조금 속이 상하긴 했습니다.
혹 정말로 공부를 못해서. 아님 저와 비슷하게
집안형편이 어려워서. 아님 여러 이유로. 대학 진학을 꿈은 꾸지만
인문계와의 경쟁이 두려워 못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한명이라도 더 헤택을 주게 되어서 전 기쁩니다.
비록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연대에 붙었다는 그 친구가 너무 부러워서.
CEO가 되겠다는 그 친구가 너무 부럽고 질투가 나서.
또 한번 수능을 볼까 망설였습니다.
근데 이 글을 쓰며 정리하며
제 자신을 돌아 보면서
전 또 한번 제 논리에 제 삶을 적용 시킬까 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선
이상을 현실에 맞추는게 저의 삶에서는 현명한 판단이였습니다.
열심히 다닐겁니다.
여대라 장학금이 어렵겠지만
공무원시험까지 준비하려면 더 어렵겠지만
더이상 올라갈곳이 없어서 일등은 싫어했지만
더 싫어했던건 꼴등이였습니다.
아무리 방황하던 그 어머니 아버지 이혼 시기에도
늘 10등안은 지켰습니다.
이번에도 그 어설픈 자존심을 챙길까 합니다.
비록 그 여대 아무도 알아 주지 않지만
제 스스로 열심히 다닐까 합니다.
남들이 무시하면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무시 못할 사람이 될껍니다.
공부도 할꺼고. 더 열심히도 살껍니다.
아마 학교 다니면서 여러가지를 해야할거 같습니다.
네임벨류가 되지 못해 과외는 못 구할테고.
아무래도 그냥 파트 타임 아르바이트와 학교 생활을 같이 할듯 합니다.
그래도. 축복이라고 생각하렵니다.
이 고통이. 이 불행이 지나면
정말 제게 정말로.. 행복이 나타날꺼라고 믿을 겁니다.
그리고 1년을 다시 하기엔
어머니가 더 많이 아프십니다.
빨리 취업을 해서 어머니 어깨의 짐들을 덜어 드리고 싶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 자기 자신이 힘들고 초라할때
가장 그 슬럼프를 극복할수 있는 방법은
자기 자신보다 더 초라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을 보며
위안을 얻는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썼습니다.
저같은 사람도 삽니다.
저같이 실업계 나온 사람도 대학도 가고. 잘 살기도 하고 그러더군요.
전 인문계 다닙니다만 이 글을 보면서 많이 부끄러워지네요. 저도 실업계학생들은 거의다 공부못하고 놀기만 좋아하는 학생...이라는 생각을 조금 가지고 있었거든요. 글쓰신분의 앞날이 행복으로 가득하길 빕니다! 그리고 만약 그분이 이글보신다면 저에게 연락주세요~ 밥사드리고싶어서요^^ㅋ
첫댓글 ㅎㅎ.꼭 축복이 함께 하실꺼라 생각합니다.
이 글 보면서 느낀건데 각자 자신들의 위치를 어떻게 보느냐는 그 사람의 생각에 달려있다고 봅니다^-^좀 열등감이 있으셨던것 같은데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긍정적으로~^ㅡ^이제 공부해야지^-^;;저 님 꼭 잘 사시길 바래요^-^행복하게~^ㅡ^
부디 행복하세요^^
음 감동감동~
그 감독과.너무 한데요..1분차이로....안바꿔주다니..보통 웬만해서는..바꿔주는데... 왕싸가지네요...
전 인문계 다닙니다만 이 글을 보면서 많이 부끄러워지네요. 저도 실업계학생들은 거의다 공부못하고 놀기만 좋아하는 학생...이라는 생각을 조금 가지고 있었거든요. 글쓰신분의 앞날이 행복으로 가득하길 빕니다! 그리고 만약 그분이 이글보신다면 저에게 연락주세요~ 밥사드리고싶어서요^^ㅋ
참 제 자신을 한없이 부끄럽고 반성하게 만드는 글이였습니다.~힘내세요~그리고 꼭 꿈을 이루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