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지금, 흑인영웅 전성시대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잇따라 흥행성공, 할리우드 구할 새로운 기대주로 떠올라
존 싱글턴 감독의 <샤프트>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이 할리우드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흑인영웅을 등장시킨 이 싸구려 액션영화들이 연달아 대박을 터뜨리자,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이 침체에 빠진 할리우드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부풀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1972년 10월4일치 <버라이어티>는 최근 미국의 박스오피스가 회복되는 데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흥행이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1972년 10월23일치 <뉴스위크>는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붐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흑인 액션영화의 붐이 할리우드가 침체를 벗어나는 데 일조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1972년, <샤프트> <스위트 스위트백의 뱃애스 송>의 성공에 이어 <슈퍼플라이>가 잭팟을 터뜨렸다. 흑인 마약상이 등장하는 <슈퍼플라이>는 640만달러의 대여료를 벌어들였다. 사운드트랙 앨범은 무려 2OO만장이 팔려나갔다. 이처럼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이 잇따라 대성공을 거두자 메이저들은 앞다투어 신작 제작에 착수했다.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1972년 말 현재, 개봉했거나 개봉예정인 흑인 액션영화는 줄잡아 50편에 이른다.
1960년대 말, 반문화의 물결을 타고 제작되기 시작한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이 붐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영화는 <샤프트>와 <스위트 스위트백의 뱃애스 송>(1971)이었다. MGM이 120만달러를 들여 제작한 <샤프트>는 대여료로 710만달러를 거둬들이며 그해 MGM 최고의 흥행영화로 기록됐고, 미국영화 전체 대여료 순위에서도 20위에 올랐다. 터프한 흑인 사립탐정이 주인공인 <샤프트>의 인기는 대단했다. 일례로 뉴욕의 한 극장에서는 밀어닥치는 관객을 소화하기 위해 24시간 내내 프린트를 돌려야 했다. 제작비 50만달러가 들어간 <스위트 스위트백…> 또한 410만달러의 대여료를 벌어들였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유행은 흑인운권운동의 신장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흑인들의 평가가 꼭 긍적적인 것만은 아니다. 곧, 흑인운동 지도자들은 이 영화들이 흑인을 범죄자, 마약상 등으로 스테레오타입화하고 흑인사회를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러한 유감 표명이 흑인관객의 열광을 꺾지는 못했다. 흑인관객은 백인들에게 저항하는 흑인영웅에게서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이다.
<대부>, 흥행 신기록
8600만달러의 수입 올려 미국영화 사상 최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가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1972년 2월 개봉한 <대부>는 12월 말까지 8600만달러의 대여료 수입을 거둬들이며 미국 영화사를 다시 썼다.
제작 초기만 해도 제작사인 파라마운트는 <대부>가 이처럼 대성공을 거두리라고 생각도 못했다. 1967년 파라마운트에서 제작한 마틴 리트 감독의 마피아영화 <형제>가 죽을 쑨 뒤라 사내에서는 영화화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더 팽배했다. 감독들도 <대부>를 마뜩찮아했다. 피터 예이츠, 리처드 브룩스, 코스타 가브라스 등이 <대부>의 연출을 거절했다. 하지만 <형제>가 실패하기 전 이미 8만달러를 주고 완성되지 않은 마리오 푸조의 소설을 사놓았던 파라마운트는 신예감독인 코폴라를 기용해 제작에 착수했다.
<대부>에 대한 기대는 소설이 출간되면서 바뀌어갔다. 곧 소설 <대부>는 출간 뒤 67주 동안 <뉴욕타임스>에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영화 <대부> 개봉 전까지 1400만권이 팔려나갔다. 1972년 2월 <대부>는 대대적인 홍보를 거쳐 350개 극장에서 개봉된다. 그리고 개봉 뒤 며칠 만에 제작비를 회수할 만큼 관객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여기에 고무된 파라마운트는 영화가 상영 중이던 6월 코폴라와 <대부2> 제작 계약을 맺었다. <대부2>의 제작비로는 전편의 거의 2배인 1300만달러가 책정되었다.
골든하베스트, 이소룡과 함께 성공
1971년 홍콩, <당산대형>의 흥행 성공과 함께 신생영화사 골든하베스트가 쇼브러더스에 버금가는 무협영화 제작사로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 골든하베스트는, 홍콩 최고의 영화사인 쇼브러더스의 제작책임자였던 레이먼드 초가 1970년에 세운 영화사. 초는 세계시장을 겨냥한 무술영화를 기획, 이소룡을 발탁해 <당산대형>을 제작했다.
봉인된 영화, 수난의 시간
독재 치하, 창작의 자유 억압 당하는 공산국가 감독들
15세기에 활동했던 유명한 성상화가 안드레이 루블로프에 관한 이야기 <안드레이 루블로프>.
피도 눈물도 없는 시간이 왔다. 1964년 소련에서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이후 소련과 동유럽은 점차 동토의 왕국이 되어가고 있다. 민주화의 몸부림은 군홧발에 짓밟혔다. 예술가들에겐 오직 교조적인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원칙만이 허락되었다. 1970년대 초 소련, 체코, 유고슬라비아에서 겪은 세 감독의 이야기는 그러한 정부의 탄압과 예술가들의 미학적 저항이 어떻게 맞부딪쳤는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들이다.
○ 1971년 11월, 소련 정부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로프>에 대한 상영금지 처분을 철회했다. 영화가 만들어진 지 5년 만의 일이다. 러시아 중세의 이콘 화가 안드레이 루블로프의 삶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1969년 칸영화제에서 호평받음으로써 그나마 소련 정부로부터 상영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사실 타르코프스키는 해외에선 주목받는 예술영화 감독이지만 소련 정부가 보기엔 그저 문제만 일으키는 ‘반동분자’에 불과하다. 데뷔작 <이반의 어린 시절>부터 타르코프스키를 곱게 보지 않았던 소련 정부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는 당의 문예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른 <안드레이 루블로프>를 상영 금지시켰다. 이 영화를 옹호하기 위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나섰지만 오히려 더 큰 비난을 불러모았을 뿐이다.
○ 1971년 유고슬라비아. 급진적인 성이론가 빌헤름 라이히의 삶을 소재로 성과 혁명의 관계를 논한 〈WR: 유기체의 신비>의 상영이 금지됐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공산주의의 권위에 도전했던 두상 마카베예프 감독은 국외로 추방됐다. 정권이 바뀐 탓이었다. 1960년대 중반 유고엔 소비에트식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1968년 시위는 진압됐고 티토 정부는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다. 그런 분위기에서 성과 정치를 이슈로 삼았던 새로운 영화들은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이유로 ‘검은 영화’로 낙인찍혔다. 과격했던 〈WR: 유기체의 신비> 또한 그 낙인을 피할 수 없었다.
○ 1971년,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감독 밀로스 포먼이 할리우드 데뷔작 <테이킹 오프>와 더불어 미국에 안착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밀로스 포먼은 1968년 8월 고국을 등졌다. 소련군이 침공해 막 피어오르던 ‘프라하의 봄’을 말살한 해였다. 새 정부는 프라하의 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이었던 포먼의 <소방수의 무도회>(1967)를 상영 금지시켰다. 그러자 당시 서방세계에 머물고 있었던 포먼은 체코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설사 체코로 돌아갔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추방됐을 것이다. 그가 망명할 무렵, 얀 네메치 등 체코에 남아 있던 그의 동료감독들은 정부로부터 강제추방을 당했던 것이다.
Power to the Rock !
우드스탁의 열기를 이제 스크린으로! ‘평화와 음악, 그리고 사랑의 3일’을 기치로 내걸고 1969년 8월15일 막을 올린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담은 184분 분량의 록 다큐멘터리 <우드스탁>이 1970년 8월 개봉했다. <우드스탁>은 애초 개봉이 불투명했으나, <이지 라이더>의 흥행성공을 계기로 청년문화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면서 극장에 걸릴 수 있었다.
<시계태엽장치 오렌지>, 영국 상영 중단
1972년, 영국에서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의 상영이 중단됐다. 감독인 스탠리 큐브릭은 <시계태엽장치…>의 폭력성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자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영국인들은 이 영화를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엄포와 함께 영화를 극장에서 철수시켰다. <시계태엽장치…>는 주인공 알렉스가 <사랑은 비를 타고> 주제가를 부르며 성폭행을 하는 장면을 비롯해 성과 폭력 묘사의 수위가 높아 애초 미국에서도 X등급을 받았다. 그 때문에 배급과 홍보가 제한되자 큐브릭은 문제가 되는 섹스장면 30초를 잘라내고 재심의를 신청해 R등급을 받아냈다.
“일마즈 귀니를 석방하라”
1972년 6월, 전세계에 걸친 200여명의 영화예술인들이 파리에 모여 터키 감독 일마즈 귀니의 구속에 항의하는 탄원문을 발표했다. 귀니는 증거도 없이 도시 게릴라들을 도와준 혐의를 쓰고 구속 수감됐다. 귀니의 구속은 이번이 두 번째. 그는 1960년에도 반정부 활동으로 구속된 바 있다.
반전운동의 최선전에 선 제인 폰다 굿모닝, 베트남!
고다르가 찍은 프랑스 잡지 <렉스프레스>에 실렸던 베트남에서 찍은 폰다의 사진으로 구성한 영화 <제인에게 보내는 편지>.
“제인 폰다입니다. 2주간의 베트남공화국 방문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한 농부는 가장 좋은 그의 개인 반공호를 제게 내주었습니다…. 나는 닉슨이 이 사람들의 정신을 파괴할 수 없으리란 걸 알게되었습니다. 그는 결코 베트남을 전복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폭탄과 닉슨이 저지르는 범죄에도 불구하고 이땅의 민중은 그들의 땅을 지키고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4천년 동안 베트남 민중은 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협상하지 않았습니다. 닉슨은 그런 베트남의 역사를, 그들의 시를, 무엇보다 호치민이 쓴 시를 읽어야 했습니다.”
1972년 8월22일 오후 1시, 베트남 하노이 방송을 타고 제인 폰다의 목소리가 전쟁 중인 미군들에게 전달됐다. 미군은 당장 베트남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강력한 반전의 의지가 담긴 연설이었다. 폰다는 심지어 닉슨을 “진짜 살인자”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 방송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리란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인디어 문제, 흑인인권 운동,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했던 제인 폰다는 반전운동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1969년에는 반전시위에 참여해 경찰에 체포됐고, 1970년 4월에는 노천에서 자면서 36시간 연속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72년에는 <베트남 여행>이라는 반전 다큐멘터리를 지원했다.
폰다의 반전운동은 그가 직접 베트남을 방문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베트남에서 폰다의 행보는 장 뤽 고다르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곧, 고다르는 프랑스 잡지 <렉스프레스>에 실렸던 베트남에서 찍은 폰다의 사진으로 구성된 영화 <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만들었다. 1970년 4월6일치 <데일리 미러>는 ‘제인: 혁명을 전도하는 전투적 미인’이라는 제목 아래 폰다를 다루면서, 그의 행동을 “위험한 정치적 돌진”이라고 평가했다. 이 말이 예언이 됐을까? 제인 폰다는 점점 더 과격하게 정치의 한복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글 편집인 이유란
씨네21